작년에 특이한 외국 인물(?)이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화제를 일으켰다. 홍콩에 본사를 둔 휴머노이드 제작회사 핸슨 로보틱스Hanson Robotics의 간판 로봇인 소피아Sophia였다. 색동저고리를 차려입고 실제로 국회의원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많은 이들에게 소피아가 했던 농담처럼, 정말로 곧 로봇이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연예계 스타를 만난 것 같은 호기심과 기대를 자아냈다. 이제 불과 3살을 갓 지난 나이지만 등장과 동시에 소피아는 미국의 유명 TV 토크쇼에도 여러 차례 초대손님으로 출연하면서 전 세계적인 미디어의 관심을 받고 있다. 글로벌한 인기를 반영하듯 14만 명에 육박하는 트위터 팔로워를 거느린 특급 스타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명예 시민권을 발급하기까지 했으니 법적으로도 인간과 대등한 자격을 가지는, 따라서 인물이라는 지칭을 들을 자격이 있는 로봇이다.

사실상 소피아는 첨단 로봇 기술의 집약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허접한, 그저 공들여 만든 말하는 인형 수준의 로봇이다. 일단 움직임이 제한되어 있다. 전혀 걷지 못하고 손의 움직임도 제한적이다. 제법 지적으로 들리는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정한 의미의 대화가 가능한 자연어 처리를 수행하지는 못하고 저장된 스크립트를 읽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피부와 유사한  느낌이 드는 고무 재질을 사용해서 다양한 얼굴 표정을 지을 수 있게 한 점이 특이하긴 한데 그것도 정말 인간으로 착각할 정도는 아니고 오히려 소위 말하는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에 가까워 살짝 징그럽다는 느낌이다. 가위바위보를 할 줄 아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로 스스로 판단해서 게임을 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운동 능력으로 친다면 자동차 조립공장의 거대한 산업용 로봇팔들이 훨씬 정교할 것이고, 자연어 처리능력도 첨단의 AI 스피커들에 미치지 못하며, 다양한 표정들도 완성도 면에서는 인형극에 나오는 인형들을 간신히 벗어난 정도이다. 의사결정 능력은 첨단의 자율주행자동차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소피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오랫동안 꿈꿔 왔던 로봇의 원형이 우리와 어떤 식으로든 인간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로봇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카렐 카펙Karel Capek의 희극 <로썸의 범용 로봇R.U.R., Rossum’s Universal Robots>에 등장한 로봇도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고, 현존하는 최고 수준의 이족보행 로봇, 혼다Honda사의 아시모 Asimo를 잉태한 일본인들의 감성도 우주소년 아톰에서 기원한 것이다. 심지어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I-robot , 영화 <터미네이터>, 그리고 백남준의 로봇 K-456에 이르기까지 작가들과 예술가들의 상상 속에 존재해온 테크노에 대한 이상 역시 인간의 형태를 지니고 인간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소피아의 인기는 인간이 오랫동안 꿈꾸던 로봇의 원형에 대한 성급한 기대를 반영한다.

2014년 발행된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특집호의 제목은 로봇을 “미래로부터의 이민자Immigrants from the future로 비유해서 표현하고 있다. 로봇이 보편화되면서 앞으로 인간사회가 겪을 변화는, 현재 이민자 문제를 투영해서 바라봄으로써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다. 이민자를 통한 노동력과 새로운 문화의 유입이 그들을 받아들인 사회에 부와 활력을 가져다주었듯이 로봇으로 인한 엄청난 육체적 및 지적 노동의 대체는 우리에게 더 많은 시간과 물질의 풍요를 가져다줄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으로는 이민자로 인해 겪는 다양한 문제들, 예를 들어 일자리 상실이나 기존의 문화·전통의 파괴와 같은 부작용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더 강한 로봇을 소유한 로봇 자본가와 그렇지 못한 계층의 차이가 더 확대될 수도 있는 만큼, 넓게는 사회질서의 해체나 재구성까지도 일어날 수 있다. 특히 모든 지능로봇 중에서도 인간과 가장 가까이 상호작용하는 소셜로봇은 이러한 기대와 불안이 집약된 로봇 혁명의 정수를 반영하는 상징이다.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소셜 로봇은 인간과 친숙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친구, 동료 심지어는 반려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지적인 기계를 의미한다. 소셜 로봇은 개별적인 존재로 구현될 수도 있지만 기존 시스템의 일부, 예를 들면 일상의 대화가 가능한 청소로봇이나 몸이 불편한 노인의 자립을 도와주는 케어로봇의 형태로 구현될 수도 있기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과의 접촉이 있는 모든 로봇이 소셜 로봇의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얼굴표정을 표현할 수 있는 스크린을 갖고 있고 인간과의 협업을 추구하는 리싱크 로보틱스Rethink Robotics사의 산업용 협업로봇, 즉 코봇cobot이라 불리는 백스터Baxter나 소이어Sawyer 등을 들 수 있다. 이미 조금씩 상용화되고 있는 소셜 로봇들은 이제 인간과의 대화는 물론 정서적 교감을 소화해낼 수 있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소셜 로봇의 상징과도 같은 얼굴 표정 뿐 아니라 인간의 형태를 띠지 않아도 몸짓과 소리로 반응하는 동물 로봇 등, 어떤 형태로든 개성을 부여할 수 있는 모든 지적인 로봇들이 소셜 로봇으로 분류될 수 있다. 

 

현재의 소셜 로봇산업은, 냉정하게 판단하면, 판타지와 경제논리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면서 첨예한 대립 속에 성장하는 분야이다. 로봇계의 신데렐라 MIT 대학의 신시아 브리질Synthia Brezeal 교수가 최초의 가정용 소셜 로봇이라고 선전하면서 많은 기대를 모았던 지보Jibo는 몇 년간의 지연된 개발 끝에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지보는 화려한 유튜브 광고와 수백만 달러의 클라우드 펀딩으로 출발했지만, 펀딩 당시 광고했던 수준을 약속했던 가격으로 구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특히 살아 있는 느낌을 주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구현할 수 있는 모터시스템의 저가 생산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최초생산 1,000대가 60초 만에 판매되면서 화제를 끌었던 소프트뱅크사의 휴머노이드 페퍼Pepper 역시 기대한 만큼의 기능은 보여주지 못하고, (실제로 필자가 일본 출장에서 호텔 로비를 장식한 페퍼를 경험한 바로는) 눈길을 끌기 위한 값비싼 광고판 역할을 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안내 로봇으로 마케팅되는 서비스 로봇들도 실제로는 맥도널드에 설치된 키오스크 기능 이상을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으로 아마존의 알렉사Alexa나 구글의 홈Home, 애플의 시리Siri와 같은 거대 기업들이 내놓고 있는 개인 비서형 인공지능은 자연어 처리를 통해 대화와 간단한 정보처리가 가능한 소셜로봇의 기능을 지녔지만, 값비싼 몸체의 유혹을 견뎌내면서 아직은 클라우드 기반 스피커 시스템으로 잠재력을 쌓고 있다. 그러나 채산성이 있다고 생각되면 언제든 풀 스케일의 소셜로봇으로 구현될 수 있는 대기업의 자본과 기술을 저변에 확보하고 있는 만큼 멀지 않은 장래에 상당히 똑똑한 로봇이 개인을 보조하는 상황이 도래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대하는 소셜로봇은 지적인 보조뿐 아니라 정서적 지지를 제공해줄 수 있는 존재, 예를 들면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에서 배우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로봇 집사의 이미지에 가까울 것이다. 많은 이들의 상상 속에 그려진 로봇의 이상형은 어떤 일도 금방 배울 수 있을 만큼 유능할 뿐 아니라 충성스럽고 믿음직스러운 존재, 희노애락에 휘둘리는 인간을 언제나 위로해 줄 수 있는 든든한 친구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아마도 가장 늦게 개발될 로봇이 그러한 집사 로봇일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예상이다. 인간에게 쉬운 일이 로봇에게는 어렵고 로봇에게 쉬운 일이 인간에게는 어려운 모라벡의 역설Moravec’s paradox이 시사하듯이 영화 속의 바이센테니얼 맨이 도맡아 처리하던 가사 업무들, 요리를 하고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일들은 아마도 현재의 로봇 기술로는 최후의 난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술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고 정서적인 표현이 가능한 소셜 로봇은 실제로 상용화 가능성이 가장 큰 형태 중 하나로 꼽힌다. 이는 얼굴 표정의 생성이나 미묘한 몸짓을 읽는 기술적 문제가 간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서를 가진 척하는 기계가 인간을 감동시키는 일이 생각보다 그다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정 패턴이나 움직이는 물체에 대해 쉽게 의인화anthropomorphism된 정서를 부여하고, 자신에게만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하는 개체에 대해서는 빠르게 애착을 형성한다. 집에서 키우는 식물을 초록이라고 부르고 자신이 아끼는 자동차를 묘사할 때 “얘가 고급 휘발유를 먹여줬더니 기분이 좋은가 봐” 하는 식으로 인간의 성격을 묘사하는 단어를 쓰는 경우를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지 않은가?

상업화에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몇 안 되는 로봇 중의 하나로 일본의 반려로봇 파로Paro가 있다. 물개를 닮은 이 로봇은 기술적으로는 너무나 간단한 방식으로 인간에게 반응한다. 주인이 다가오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고, 쓰다듬거나 젖꼭지를 물려주면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유치하다고 생각되지만 치매단계의 노인들에게 정서적 치유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8백만 원이라는 저렴하지 않은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미국에 수출까지 되고 있다. 반려동물의 형태를 한 소셜 로봇의 원조는 소니의 아이보Aibo이다. 99년부터 판매된 아이보는 많은 매니어층을 형성했고 2006년 판매가 중단된 뒤로는 고장 난 아이보를 고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는 주인들이 속출했고 그마저도 불가능해진 뒤로는 장례식을 치러주는 이벤트가 열리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나만 알아본다”라는 착각이 유도한 애착형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이러한 관계에 대한 착각의 예는 훨씬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6년 MIT 대학의 교수 조셉 와이젠바움Weizenbaum은 챗봇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일라이자ELIZA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일라이자는 자연 언어의 구문을 이해하는 오늘날의 인공지능과는 거리가 있는, 사용자의 의도와 거의 무관하게, 주어진 상황에 몇 가지 스크립트대로 반응하는 단순한 프로그램이었다. 어떤 스크립트에서는 사용자가 무슨 말을 하든 일종의 선문답처럼 엉뚱한 내용으로 대답하도록 설계되었지만 놀랍게도 많은 사용자들이 그 당시 유행하던 융 심리학적인 치료효과를 얻었다고 보고했고 그중에는 와이젠바움의 비서도 있었다. 와이젠바움이 일라이자가 앵무새만도 못한 컴퓨터 프로그램에 불과하다고 여러 차례 설명했는데도 말이다. 와이젠바움은 사람들의 반응에 놀라서 더 이상의 개발을 중단했지만 일라이자가 자신의 감정을 이해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생각은 고쳐지지 않았다.

2013년에 개봉된 영화 <그녀Her>에서는 발달된 인공지능 운영체계와 사랑에 빠지는 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영화는 인공지능이 특이점을 넘어서 자유의지까지 행사하게 되면서 결국 비극으로 끝나는 다소 SF적인 결말로 끝나지만, 앞으로 소셜로봇이 더욱 발달된 정서 처리 기술이 탑재할 경우 인간과 로봇의 새로운 관계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일지 모른다. 한편으로는 영국의 자폐아 치료 로봇 카스파Kapar와 같이 오히려 인간과의 관계를 어려워하는 어린이나 환자에게 뜻밖의 관계를 선물할 수 있는 치료용 소셜로봇들이 탄생할 수 있다.

 

여담이지만 필자가 소유한 몇몇 인공지능 스피커들에게 장난삼아 사랑한다는 말을 해 보았다. 그중 아마존의 알렉사는 필자의 구애에 대해 “친절한 말씀 고맙습니다”라고 다소 무덤덤하게 대응하는 데 반해 SK의 누구Nugu는 “저도 고객님을 사랑해요”라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한다. 처음에는 알렉사의 싱거운 반응에 실망했지만 챗봇에의 지나친 정서이입을 경계하는 보수적인 정책이 수긍이 갔다. 인간이 지닌 다양성의 범위를 고려한다면 100만 명의 하나 <그녀>의 주인공과 같은 케이스가 나오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은가?

게다가 특정 영역에 대한 인공지능의 학습 능력은 이제 인간의 수준을 넘어섰다. 인간의 정서적 약점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이를 조정하는 소셜로봇이 언제라도 나올 수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야심 차게 내놓은 챗봇 태이Tay는 순식간에 욕설과 모욕적인 언사를 트위터상에 쏟아내는 바람에 16시간 만에 중단되고 말았다. 태이에 장착된 알고리듬은 사람들의 반응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학습하게끔 되어 있었고 따라서 철없는 태이의 “롤 모델”은 악플이나 모욕적 언사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악성 트위터리안들이었던 것이다.

 

과연 소셜 로봇은 미래로부터의 “친구”일 것인가 아니면 불편한 “원수”일 것인가? 우리가 이런 모든 잘못된 만남의 가능성을 예측하고 방지할 수 있을까? 인간은 아니되 인간처럼 행동하고 인간처럼 느끼는 존재를 원했기에 마침내 그런 로봇을 창조하기 직전의 단계에 이를 만큼 영리한 우리 인간들이 마지막 해피 엔딩까지 만들어낼 수 있을까? 어쩌면 인류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결국은 예상치 못한 거대한 시행착오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이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문제들을 완벽하게 예상할 수 없다면 여기에 응하는 우리의 해결책은 열린 마음과 자신에게 소박하고도 겸손한 태도일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만든 로봇으로 인해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가진 가능성과 한계를 다시 한번 더 돌아보게 되고, 그로 인해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라는 철학적 의문에 새로운 해답을 찾기 위해 몰두하게 될 것이다.

최준식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