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호

액체란 무엇일까? 너무나 당연한 이 질문에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답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액체를 매우 친숙하게 접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도 어쩌면 한 잔의 차나 커피와 함께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렇듯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친숙하게 접하는 액체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점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흐른다는 것이다. 액체는 (적어도 상온에서는) 흐르지 않는 고체 물질과 매우 낮은 점성을 갖는 기체의 중간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액체는 용기의 모양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어서 매우 큰 부피의 용기 안에 존재할 수도 있고 반대로 매우 작은 방울과 같은 형태를 가지기도 한다. 물과 같이 투명한 액체도 있지만 빛을 산란시켜서 뿌옇게 보이는 액체도 있다. 액체는 온도와 압력에 따라서 그 성질이 달라지기도 한다. 상온에서 투명한 액체이더라도 임계점이라는 특정 온도와 압력에서는 탁하게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듯 액체는 온도가 올라가거나 내려감에 따라서 기체로 증발할 수도 또는 고체로 응고될 수도 있다.

한편 액체는 생명 현상의 탄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 알려진 지구상의 생명체의 탄생은 액체상에서 출발했을 것이라고 말해지며, 외계 공간에서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을 탐색할 때도 액체(특히 물)의 존재 여부가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을 판단하는 데 중요한 단서로 간주된다. 액체는 경우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극성을 나타내고 다양한 화합물을 녹일 수 있다. 특히 최근 활발히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이온성 액체의 경우 다양한 양이온과 음이온의 조합을 통해 특정한 목적에 맞는 용매나 전해질로 활용된다. 이처럼 액체 물질은 산업적으로도 여러 분야에서 유용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액체의 구조 및 성질은 오랫동안 많은 물리학자 및 물리화학자들의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어왔다. 액체는 미시적인 구조 및 물성에 있어서 고체나 기체와는 매우 다른 특성을 갖는다.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액체 상태는 고체 상태와 밀도 면에서 통상적으로 10%정도밖에 차이가 없지만, 고체와는 달리 점성을 보이면서 흐름이 가능하다. 또한 미시적으로 분자들 간의 구조를 살펴보면 액체 상태는 고체 상태가 가지고 있는 긴 거리 질서는 갖고 있지 않지만, 기체 상태에는 없는 짧은 거리 질서가 존재한다. 이러한 액체의 특성과 액체 상이 존재하는 이유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열역학적으로 액체 상태는 분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인력으로 인해 규칙적인 고체 상을 형성하고자 하는 에너지 효과와 이와는 반대로 분자들의 자유로운 운동에 기인하여 불규칙한 상태를 선호하는 엔트로피 사이의 경쟁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에너지와 엔트로피 간의 미묘한 균형이 액체계의 존재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액체계의 연구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경계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관측 대상으로서 액체는 에너지와 엔트로피의 경쟁(또는 균형)에 근거하여 고체와 기체 사이에 놓여 있다. 한편 연구자들의 학문적인 배경에 있어서는 전통적으로 액체계 연구는 물리학자들과 화학자들 간의 상호 협력(또는 경쟁)에 의해서 진행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연구 방법론에서도 매우 흥미로운 “경계성”을 찾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 자연과학의 방법론은 크게 나누어서 실험적 연구와 이론적 연구로 대별된다고 할 수 있다. 액체 상태의 연구는 이론 및 실험적인 측면에서 매우 길고 다양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최근 들어 그 경계에 해당하는 전산모사 연구가 매우 큰 각광을 받고 있다. 우선 액체계에 대한 실험적 연구의 시초를 살펴보면 아마도 브라운 운동에서 그 근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827년 스코틀랜드의 식물학자 브라운Robert Brown은 꽃가루 입자가 물 위를 끊임없이 움직이는 “브라운 운동”을 연구하였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브라운 운동을 통계역학적인 방법론을 이용하여 해석함으로써 “분자”의 존재와 그들의 운동에 대해 설득력 있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브라운 운동은 (브라운의 원래 의도는 아닐지 모르겠으나) 최초의 액체 분자 운동에 대한 연구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세기 이후 시작된 현대 물리학 및 화학 연구에서 액체의 구조 및 동역학적 성질에 대한 정량적 이해와 이에 기반한 일반적인 이론 체계의 확립은 오랜 기간 동안 어려운 문제로 간주되어 왔다. 이러한 상황은 란다우L. D. Landau와 립쉬츠E. M. Lifshitz가 1950년대에 저술한 통계 물리 교과서에 나오는 아래의 단락에 잘 드러나 있다.

“고체계나 기체계와 달리 액체계에서는 열역학적 성질이나 온도 의존성에 대한 일반적인 계산이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액체 상태의 분자들 사이에는 강한 상호 작용이 존재하며 동시에 고체계에서와는 달리 액체 상태의 분자들의 움직임은 작은 진동 운동으로 기술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교과서가 쓰였던 시대만 하더라도 위의 기술은 당시의 액체 상태에 대한 이해 정도를 보여주는 매우 합리적인 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란다우-립쉬츠의 서술 이후 액체계는 많은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어왔고, 액체계에 대한 이해는 조용하지만 꾸준히 진전되어 왔다. 사실 액체계의 구조에 대한 정량적인 이해의 실마리는 20세기 초 네덜란드의 과학자였던 판데르발스J. D. van der Waals의 아이디어로 거슬러 올라간다. 판데르발스는 분자 간의 상호작용 에너지를 척력에 해당하는 부분과 인력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음을 깨달았으며 액체의 구조를 좌우하는 것은 매우 짧은 거리에서 작용하는 척력이며 긴 거리에서 작용하는 인력은 부수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정량적으로 도입한 액체 구조 이론들이 1970-80년대에 걸쳐 큰 진전을 거두었다. 특히 3인의 물리화학자, 윅스J. D. Weeks, 챈들러D. Chandler, 앤더슨H. C. Andersen이 개발한 윅스-챈들러-앤더슨Weeks-Chandler-Andersen, WCA이론은 현대적인 액체 구조 이론에 대한 일종의 표준모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론과 실험의 경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는 전산모사 방법은 액체계의 연구에 큰 진전을 가져왔다. 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액체계 연구의 경계성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분자 수준에서의 액체계에 대한 모형 연구는 193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이 당시 과학자들은 다양한 물리적 재료들을 활용하여 액체 모형을 연구해왔다. 특히 초기 연구에선 매우 많은 수의 젤라틴 재질의 구슬모델을 이용해 액체계 구조를 간접적으로 모델링하였고, 이후 금속 구슬들을 활용하여 액체 구조에 대한 지식을 간접적으로나마 축적해왔다. 이러한 계들은 사실 현대적인 입장에서는 매우 원시적인 액체계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이러한 단순한 모형계는 액체계의 거동을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최근에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나노 스케일에서의 콜로이드 물질의 구조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초창기 연구에 근간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에 기술한 초창기 모델링 연구를 거치며 과학자들은 액체계 연구에 있어 보다 정량적이고 정확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 왔다. 구슬 등과 같은 기계적인 모형 대신 수학적 방정식으로 표현되는 액체계의 모형을 만들고 이를 컴퓨터를 활용하여 분석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연구들을 통하여 위에서 란다우와 립쉬츠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컴퓨터를 활용한 최초의 액체계 전산모사 연구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1953년 미국의 로스 알라모스 국립 연구소에서 당시로써는 세계 최고 수준의 컴퓨터라고 할 수 있는 매니악MANIAC을 통해 이루어졌다.

 

최초의 액체계 전산모사 연구는 몬테 카를로Monte Carlo 방법에 기반하였다. 몬테 카를로 방법은 확률론에 기반한 전산모사 연구 방법론으로, 모나코에 있는 도박으로 유명한 도시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상온에 있는 20mL의 물은 약 6×1023 의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많은 분자의 거동을 하나씩 컴퓨터로 계산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므로 몬테 카를로 방법에서는 통계적인 표본추출을 통하여 분자계의 성질을 예측한다. 이는 마치 선거에서 출구조사를 통해 선거 결과를 예측하는 방법과 유사하다. 특히 메트로폴리스Nicholas Metropolis라는 과학자의 이름을 딴 “메트로폴리스 몬테 카를로”는 현대 몬테 카를로 전사모사법의 시초이다.

한편 보다 직접적으로 액체계를 이루는 분자 각각의 움직임에 대하여 뉴턴의 운동 방정식을 시간에 따라 수치적으로 풀어나감으로써 액체계의 열역학적 성질뿐 아니라 동역학적 성질까지도 계산해낼 수 있는 연구방법론이 개발되었다. 흔히 “분자 동역학” 전산모사 방법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계산 방법은 알더Berni Alder와 웨인라이트Thomas Wainwright에 의해 단단한 구형의 원자들로 이루어진 강체구 액체계에 처음으로 적용되었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판데르발스의 아이디어, 즉 액체 구조를 결정하는 요인인 먼 거리에서 작용하는 인력보다는 짧은 거리에서 작용하는 척력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타당한 시도라 할 수 있다.

초기 분자 동역학 연구는 레너드-존스Lennard-Jones 함수와 같이 단순한 에너지 함수로 기술되는 원자 액체계에 대해 주로 수행되어 왔다.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분자 내 또는 분자 간 작용하는 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컴퓨터 성능의 발전과 다양한 분자 동역학 알고리즘이 개발됨에 따라 분자 동역학 방법은 다양한 분자계로 확대되는 새로운 전기를 맞기 시작한다. 특히 전형적인 용매로서 물의 전산모사는 분자 동역학 전산모사 방법의 개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물은 일상생활과 매우 친숙한 액체임과 동시에 전형적인 액체계와는 매우 다른 특성들(예를 들면 응고에 따른 부피 팽창, 매우 큰 쌍극자 모멘트 값, 밀도의 최대값 존재 등)을 보이는 특이한 액체라고 할 수 있다. 물의 특이한 성질들은 많은 경우 물에 존재하는 수소 결합에 기인하는데, 이러한 특성들을 정확히 모델링하기 위해서 수십 종류의 물에 대한 모형이 개발되어 왔고 현재도 개발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전통적인 액체계뿐 아니라 무른 물질soft matter로 통칭되는 복잡한 분자계에 대한 분자 동역학 전산모사 연구가 활발히 수행되고 있다. 단백질, 지질, 핵산, 탄수화물 등 생명체를 구성하는 거대 분자들에 대한 분자 동역학 연구를 통해 기존에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분자계에 대한 정량적인 연구가 가능해지고 있다.

본 글에서는 경계성의 학문이라 불리는 액체계 연구에 대하여 이론 및 전산모사 방법의 관점에서 그 역사와 현황을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보다 정교화된 분자 모형의 개발, 효율적인 전산모사 알고리즘의 구현, 컴퓨터 하드웨어의 성능 향상, 기계학습 방법론의 개발 등이 서로 상승효과를 불러일으키면서 가까운 미래에 전산모사 연구와 액체계 연구가 새로운 전성기를 맞기를 기대해본다.

정연준
서울대학교 화학부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