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토러스>, 북서울시립미술관 전시
2018, 스테인리스 스틸+ 폴리 카보네이트, 57x60x31m
관람객이 작품 안을 거닐며 새로운 공간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김주현

 

10년 전 우연히 ‘고등학생을 위한 위상수학’1이라는 짧은 강의를 들으면서 그 동안 알고 있던 가로 세로 높이라는 축이 한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한평생 살아오면서 주변 환경과 시간을 이해하며 구축해온 기준인데, 갑자기 이제 그 성질 자체가 변해 세상을 처음부터 다시 바라봐야만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빈손으로 허공에 버려진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서 뇌가 다 빠져나가고 뭔가 새로운 물질이 들어온 것처럼 위상 수학은 나에게 곤혹스러운 충격이자 새로 태어난 듯한 흥분으로 다가왔다.

 

절대 불변의 전제로 알고 있던 삼차원의 축을 마음대로 휘고 늘이는 수학의 도전적인 자유로움이란. 무엇보다도 눈을 뗄 수 없게 한 것은 수학자가 이 재미있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칠판에 그리는 그림들이었다. 몇 개의 선으로 그려내는 도형에서 느껴지는 다채로운 공간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마지막으로 정말이지 기를 죽이는 것은, 잔뜩 그려진 복잡한 도형들이 한순간 간단한 수식으로 변환되더니 c와 c’로 모든 것이 설명되더라는 것이다. 함께 놀아주던 친구가 갑자기 날개를 펴고 하늘 높이 날아가듯, 더 이상 따라갈 수 없는 궤도에 진입하는 지성을 나는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집에 오자마자 강의를 들으며 떠올렸던 그림을 그렸다. 그동안 그리고 있던 경첩 드로잉에서는 컴퍼스를 써서 일정한 선의 길이를 고수했었는데, 이제 위상 수학의 원리에 따라 선의 길이를 조금씩 달리하면 화면 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경첩 또는 쌓기 작업에서 정해진 직선 길이의 단위에 익숙했던 나는 직선의 자유로운 축소와 연장, 휘어짐이라는 생소한 조형 요소와 친해지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생각나는 대로 모형을 만들었다.

또 하나의 시도는 위상수학의 기초 도형인 토러스를 나선 격자를 이용하여 그리는 것이다. 나선은 기존 기하학에서 공간을 표현하는 90도 격자가 단조롭게 여겨져서 고안한 선이다. 토러스 위에 서로 연결되어 실처럼 감긴 나선을 그리면 순환의 원리를 표현할 수 있고, 이를 전선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기술적인 이점도 있다.

게다가 나선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때로는 지나치게.

나선으로 하나의 토러스를 만들고 나면 다음 수순인 증식의 세계로 접어든다. 여러 개의 토러스를 연결하거나 뫼비우스의 띠를 증식시켜 매듭 원리까지 적용하면 복잡하고 안팎이 꼬인 결합체가 완성된다. 그것이 수학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하면 매우 아름다운 조형물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조각가로서 직감하였다.

나선으로 엮은 격자의 가장 큰 매력은 전체가 순환한다는 것이다. 상호 연관성은 내 모든 작업의 주제이고, 어쩌면 작업을 통해 강조하고 싶은 유일한 내용이기에 나는 나선을 자연스럽게 하나로 묶어줄 도형 토러스를 만났을 때 그처럼 광분했던 게 아닐까 한다. 그 위에 어설프게 전선을 연결하여 가까스로 플러스와 마이너스 회로가 만나 불을 밝히는 데에 성공했을 때 내가 뛸 듯이 기뻤던 이유는, 사람들을 쉽게 현혹하는 불빛을 얻거나 아름다운 형태의 조형물을 완성해서가 아니라, 관계가 이루어졌음을 증명했다는 것, 우리가 철저히 하나라는 이야기를 크게 질러댔기 때문이다.

 

 

예술의 심오함과 장점은 무한한 다양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예술이 그래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어떤 작품은 그 구조와 원리를 이해했을 때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흔히들 자연은 신이 만든 예술 작품이라고 하는데,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면 그 모습이 더 오묘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러니 만들어진 결과물의 형태가 아니라 구조를 이루는 원리에 더 몰두하는 작가라면 과학적 사고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왜냐하면 넓은 의미에서의 과학이란 현상 세계의 저변을 관통하는 원리를 이해하려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접한 과학적 지식이 지극히 초보적이고 단편적이며 때로는 자의적인 해석이 섞인 오해일 수 있다고 해도, 그로 인하여 처음 가는 길에 불을 밝히고 새로운 세계에 진입할 기회를 얻는다면 학식의 높고 낮음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다만 과학적 지식이 내게 준 혜택으로 완성한 작품을 전시하면서 궁금한 것은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위상 수학을 만나던 날 느낀 감흥을 나도 그렇게 전달할 수 있을지, 내가 그렇게 한 것처럼 관람객 중 누구는 집에 가서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펼쳐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위 글은 2015년 <나선 연구> 개인전 도록에 실린 글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김주현
조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