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제 소개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고등과학원 초학제 연구단 프로젝트 <인공지능: 과학, 역사, 철학>에서 1년 1개월간(2017.11~2018.12) 위촉연구원으로 근무했습니다. 이 글은 연구단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초학제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에세이 형식으로 쓴 것입니다.

제가 ‘변화’라고 언급한 데서 짐작하실 수도 있겠지만 자백하자면 저는 그 단어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융합, 통섭, 학제적, 초학제적 등의 비슷비슷하면서도 무슨 차이인지 알 수 없는 단어들은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 뿐이고, 무엇을 하려는지 목적도 불분명한데 너도나도 융합을 외치는 상황이 의아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성실함을 인생의 모토로 삼는 사람이므로 최대한 초학제 연구단의 업무에 성실히 임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1년의 시간 동안 제법 많은 일을 했습니다. 이 글을 쓰며 계산해보니 연구단은 그동안 총 9회의 강연을 진행했고 국내학회 1회, 토론회 1회, 국제학회 1회를 개최했습니다. 행사에는 철학, 윤리 등을 연구하는 인문학자뿐만 아니라 자율주행자동차, 의료인공지능 등 인공지능의 개발 현장에서 일하는 과학기술자를 고루 모셨습니다. 여기서 연구단은 다른 배경을 가진 연구자들이 반강제적(?)으로 교류하도록 하는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예를 들어, 월례 강연회에서는 발표 뒤에 반드시 두 명의 토론자를 섭외하고 한 분은 인문학자, 한분은 과학기술학자가 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발표자든 다른 분야 연구자와 토론을 해야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연구단 행사에서 발표나 토론을 경험한 국내외 연구자는 50명이 넘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활동에서 무엇을 얻었을까요? 그로 인해 당장 기존에 풀지 못하던 문제의 해답을 찾아냈다거나 혁신적인 무언가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무언가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명시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몇 장면을 묘사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해보겠습니다.

 

#장면 1

2018년 6월 15일, 광주과학기술원GIST에서 오신 하대청 교수는 인공지능의 발전과 함께 부상한 새로운 형태의 노동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아마존 메커니컬 터크Amazon Mechanical Turk라는 기업으로 대표되는 이 새로운 사업 모델은 인터넷을 통해 업무를 의뢰하는 사람과 그 업무를 수행해서 돈을 벌려는 사람을 연결해주는 일종의 인력 중계 사업입니다. 여기서 의뢰되는 작업은 사진이나 동영상 식별, 중복 데이터 제거 같은 단순하지만 인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들입니다. 이런 작업이 중요한 이유는 인공지능의 성능을 높이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데이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구글은 고양이 이미지를 인공지능에게 학습시키기 위해 수십만장의 ‘고양이’ 라벨label이 달린 이미지를 사용했습니다. 그런 데이터를 얻으려면 인간이 사진을 보고 일일이 라벨을 달아줘야 합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의 성패를 좌우하는 이들 노동자, 소위 ‘터커Tucker’들의 보수는 아주 적습니다. 아마존은 최저 보수 기준을 정하지 않았고 시간당 2달러 미만을 받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일하는 사람은 누굴까요? 당연하게도 가난한 국가에 사는 사람이나 선진국에 거주하더라도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좋게 말하면 아웃소싱이고 나쁘게 말하면 양극화라고 말할 수 있는 이와 같은 현상이 인공지능의 붐boom 뒤에 있는 것입니다. 인공지능 산업이 성장할수록 터커 또한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저와 이야기를 나눈 한 개발자는 이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본인은 데이터 셋을 가져와서 사용할 뿐 그 데이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꿈에도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저 또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교수님 말씀대로 구글, 네이버 등의 기업들은 마치 인공지능이 알고리즘에 의해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이면에 있는 인간의 노동과 물질성은 드러내지 않습니다. 얼마 전 KT 아현지사 화재사고가 통신 기술의 물리적 측면을 보여준다는 전치형 교수님의 칼럼처럼 우리가 ‘자동화’, ‘로봇’, ‘인공지능’ 같은 기술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들 ‘최첨단 기술’의 외양만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이 없는지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장면 2

2018년 8월 24일, 일본 도쿄대학교 아리사 에마Arisa Ema 교수의 강연. 이 강연은 흥미로운 사진 한장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사진 속에는 일본식 만화체로 아름다운 여성이 그려져 있고 방 청소를 하려는 것처럼 빗자루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등에 꽂혀있는 케이블은 그녀가 인간이 아닌 로봇임으로 보여주고 있었지요. 문제는 이 그림이 일본의 저명 학술지 <人工知能Journal of the Japanese Society for Artificial Intelligence>의 표지라는데 있습니다. 처음에 저는 만화의 왕국, 일본답게 학술지의 표지도 만화를 쓰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학술지는 대중을 상대로도 판매되는데, 발매되자 마자 트위터에서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의 여성에게 특징적으로 묘사된 멍한 눈동자, 긴 머리, 집안일 등의 요소가 일본의 공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일본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stereotype을 보여준다는 비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미래를 이끌 과학자들조차 젠더 감수성gender sensitivity이 부족하며 여성에 대한 고정된 관점을 미래의 기술에 투사하고 있다는 점을 우려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 또한 이런 문제를 한 번도 생각도 해본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한 참석자로부터 국내 출시된 인공지능 스피커들 또한 대부분 ‘여성’의 목소리로 서비스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크게 이슈가 된 적이 없습니다. 물론 영미권에서는 논쟁이 되어 예컨대 구글은 자사의 인공지능 비서 서비스 구글 어시스턴트Google Assistant에 남성의 목소리를 추가한 바 있습니다. 이 사실이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제가 일본보다 한국이 젠더 이슈에 있어서 더 진보적인 국가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저의 편견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건 이후 학술지는 사과를 했으며, 이를 계기로 해서 일본의 학계는 인공지능과 관련한 윤리 가이드라인을 제정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새로운 기술에 이미 사회의 숨겨진 편향과 고정관념이 반영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공지능 기술은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장면 3

2018년 5월 3일,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자율주행연구실 임경일 책임연구원. 이 강연은 임연구원이 속한 자율주행연구실이 개발하는 <판교 제로셔틀> 연구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로 꾸며졌습니다. 처음 시운전할 당시, 깜빡이를 아무리 켜도 다른 차량이 비켜주지 않아 자율주행 버스가 한동안 돌아오지 못했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기억에 남는 부분은 초라한 연구단의 규모와 예산이었습니다. 자율주행자동차는 거대한 연구 프로젝트입니다. 연구팀은 인공지능 개발에 차대 설계부터 조립, 주행 테스트, 상용화까지 담당하고 있었는데 프로젝트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단순히 단순히 프로그램을 짜서 운전시켜보는 것뿐만 아니라 안전 문제와 교통 법규, 시설, 인프라의 문제까지 모두 고려해야만 합니다. 외국이었다면 각각 개별 연구팀이 담당했을 업무이지만 판교 제로셔틀의 연구진은 개개인이 슈퍼맨처럼 일당백으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예산도 부족해서 2개가 필요한 비싼 부품을 1개 달고 어떻게든 돌아가게 설계를 변경하는 등 고난의 행군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누군가가 이렇게 힘든데 왜 그 일을 하느냐고 임경일 연구원에게 물었습니다. 임연구원은 이 일이 좋고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므로 힘들지만 연구를 한다는 취지로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공학자가 있다면 미리 사과드리겠습니다. 고백하건대, 저는 이 기술이 얼마나 효율이 뛰어나고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지 하는 식의 답을 기대했습니다. 모두 저의 선입견이었습니다. 저는 초학제 연구단을 통해 다양한 과학기술자와 만남의 기회를 가졌는데, 그분들에게 들은 연구에 대한 이야기들은 세간의 막연한 이미지와 많이 달랐습니다. 모두 열악한 환경과 싸우면서 격무를 이겨내고 계셨습니다. 꿋꿋이 하루하루를 버티며 한 걸음씩 내딛는 분들이셨습니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까지 못했을 거라는 게 과학기술자들의 한결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위 에피소드들을 보는 시각은 모두 다를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제 경험을 이야기하고 제가 얻은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제가 위의 경험을 통해서 느낀 것은 ‘연대감’입니다. 이 경험 덕분에 저는 오랫동안 궁금해했던 한 문제에 대해 하나의 답을 얻었습니다.

피터 갤리슨Peter Galison은 20세기를 대표하는 과학사학자 중 한명으로 그는 다양한 과학적 혁신 사례를 다뤘습니다. 갤리슨은 MIT rad labRadiation Laboratory의 사례를 즐겨 드는데, 그는 이 연구소가 레이더rader를 성공적으로 개발해서 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끈 비결이 물리학자와 기술자 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한 교역지대trading zone에 있다고 말합니다. 분과를 가리지 않는 배치, 이동 가능한 벽 등이 교역지대의 물리적인 조건을 제공하고 여기에 더해 새로운 언어의 생성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갤리슨은 피진어pigin language에 관한 인류학 연구를 원용하는데, 피진어란 서로 다른 언어 사용자들이 상호작용할 때 기존 언어와 유사하면서도 다른 혼성적인 언어가 생겨나는 것을 말합니다. 갤리슨은 rad lab의 물리학자와 기술자 사이에도 이런 혼성언어가 나타나고 그것이 소통의 공통 기반이 되었다고 분석합니다.

그러나 비슷한 경험이 있는 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을 붙여 놓으면 오히려 사이가 더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게다가 언어 같은 복잡한 체계를 조직화coordinate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므로 언어의 개발과 유지에는 큰 노력이 요구됩니다. 따라서 갤리슨의 설명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물리적 환경, 제도, 언어 등의 장치 이전에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묶고 소통의 노력을 하도록 하는 다른 무언가가 먼저 존재해야 위의 장치들이 올바르게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이론에 여전히 질문들이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 요소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연대감solidarity일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가 초학제 연구단 활동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서로 생각이 다르더라도 사람 간의 어울림이 서로의 삶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한다는 점입니다. 서로의 삶을 들여다보면 과학기술학자가 인류를 위협할 터미네이터를 만드는 매드 사이언티스가 아니며 철학자도 이해할 수 없는 단어로 반대를 위한 반대만 늘어놓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게 됩니다. 우리 모두 별로 얻는 것도 없이 매일 힘들게 전쟁을 치우듯 연구를 하는 전우이고 결국 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어려운 현실을 가하는 동지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동질감이야말로 소통과 협력을 개시하게 하는 동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책이나 논문을 통해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경우 인공지능에 대해 학제간 간격이 크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래서 인공지능에 대한 사회적 담론 역시 양극화되어 있습니다. 과학기술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는 4차 산업혁명에 대해 찬성의견이 90%에 가깝다는 걸 보여줍니다. 반면 인문학자들은 그것이 결국 인간성을 황폐화할 거라고 반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과학기술자는 과학기술자끼리, 인문학자는 인문학자끼리, 전문 분과별로 소통해온 역사가 의견의 양극화를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삶이 교차하는 자리로써 초학제 연구단은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동안 연구단에 참여해주신 연구자들과 청중들이 모두 동일한 경험을 한 것은 아닐 테지만, 많은 연구자와 청중들이 소통의 경험을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저희는 동아시아를 아우르는 국제적인 연구자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학회에 가서 우연히 뵙고 인사 나눌 수 있는 분들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습니다.

작년 한 해는 <인공지능:과학, 역사, 철학> 연구단이 위와 같은 활동을 펼쳤고 2019년에도 새로운 주제로 새로운 초학제 연구단이 출범해서 새로운 교역지대를 만드는 활동을 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초학제 연구단이 한국에서 절실한 다학제 연구자 간의 소중한 소통 공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저는 이제 연구단을 떠나지만, 어느 곳에 있더라도 계속 초학제 연구단을 응원하겠습니다.

전진권
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