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11월 4일, 스캔들 기사가 신문 <르 주르날 Le Journal>을 장식했다. 스캔들의 주인공은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와 동료 물리학자 폴 랑주뱅Paul Langevin, 1872-1946. 11월 23일 또다른 신문에 난 “소르본 스캔들”이라는 제하의 기사에는 랑주뱅의 이혼을 종용하는 마리 퀴리의 연서까지 등장했다. 노벨물리학상에 빛나는 여성과학자와 유부남 남성과학자의 스캔들은 프랑스 과학계를 넘어 프랑스 사회 전반을 흔들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마리 퀴리는 1911년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12월 시상식을 앞두고 있던 상황이었다. 1901년 노벨상이 생긴 이래 최초의 2회 수상자가 나오려는 영광스러운 순간이 스캔들로 얼룩지려 하고 있었다.

마리 퀴리의 첫 노벨상은 1903년 노벨물리학상이었다. 이때는 방사능 현상을 발견한 앙리 베크렐Henri Becquerel, 1852-1908이 1/2을, 방사능 특성을 연구한 피에르 퀴리Pierre Curie, 1859-1906와 마리 퀴리가 각각 1/4을 수상했다. 마리 퀴리의 방사능 연구는 우라늄에 한정되어 있던 앙리 베크렐의 방사능 연구를 확장하는 성격의 것이었다. 그는 여러 종류의 광물로 범위를 확장하여 우라늄 이외에 방사능을 방출하는 광물이 있는지를 탐색했고, 그 결과 방사능이 우라늄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닌 자연의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방사선이 전기적 성질과 물질 투과도 등에서 차이가 나는 α, β, γ의 광선이라는 것을 밝혀낸 것도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의 공이었다.

 

마리 퀴리는 정성적 성격이 강했던 방사능 연구의 정량화를 이끄는 데 공헌했다. 초기 방사능 연구자들은 방사선이 주변 공기를 대전시키는 성질이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주변 공기가 대전되는 정도를 측정하여 방사능의 세기를 결정했다. 앙리 베크렐은 금박검전기로 이를 측정했는데, 정밀도와 정확도가 현저히 낮았다. 이에 비해 마리 퀴리는 수정압전검전기를 사용했다. 수정에 압력을 가하면 수정의 결정 구조가 변하면서 전기가 흐르는 압전현상이 나타나는데, 이 현상을 발견한 피에르 퀴리와 형 자크 퀴리Jacques Curie, 1855-1941는 이를 이용하여 미세한 전류도 검출할 수 있는 수정압전검전기를 발명했다. 마리 퀴리는 방사능 물질이 주변 공기를 대전시켜 발생한 전류와 수정압전검전기에서 발생하는 전류를 서로 상쇄시키는 방법을 이용하여 방사능 물질이 발생시키는 미세한 전류를 측정할 수 있었다.

라듐 원소의 분리 및 그 특성 연구에 주어진 1911년 노벨화학상도 수정압전검전기와 관련이 있었다. 마리 퀴리는 라듐이 포함된 광석을 화학용매에 녹여 분리한 후에 방사능 물질이 더 많이 포함되어 있는 부분을 찾는 데 수정압전검전기를 이용했다. 이렇게 해서 방사능이 강한 부분을 골라낸 후에 분별결정으로 농축하고 다시 방사능이 강한 부분을 찾아내는 과정을 반복하여 라듐을 분리할 수 있었다. 정밀한 수정압전검전기를 가지고 마리 퀴리는 화학원소 분리에 방사능이라는 물리적 특성을 도입할 수 있었던 것이고, 물리와 화학이 결합된 방사화학이라는 새 분야를 창시했던 것이다.

방사화학 분야의 탄생을 축하하는 노벨화학상 시상식이 열리기 직전에 터진 소르본 스캔들의 후폭풍은 대단했다. 프랑스의 우파 언론들은 이 스캔들을 애국의 프레임으로 재단했다. 프랑스에 노벨물리학상을 안겨준 자랑스러운 프랑스인 마리 퀴리는 지워지고 그 자리에 폴란드인 마리아 스콰도프스카Maria Sklodowska를 불러왔다. 우파 언론들은 이 외국인 여성에게 불륜의 부도덕함보다 프랑스 여성의 출산을 막으려고 했다는 책임을 더 무겁게 물었다.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에 패했던 프랑스에서는 출산율 감소를 국방력 약화와 연결시켰다. 부인과의 사이에서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말라는 마리 퀴리의 조언은 프랑스 국방력을 허무는 외국인 여성의 간교한 꼬임으로 비난받았다. 마리 퀴리의 집 앞은 기자들로 북적여 가족들은 다른 곳으로 피신해야 했고, 마리 퀴리의 두 딸은 친구들로부터 간첩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랑주뱅과 마리 퀴리 모두 초청받았던 솔베이회의는 밀월여행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뒤늦게 스캔들을 전해 들은 노벨위원회는 마리 퀴리에게 노벨상 수상을 알아서 사양해 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노벨상은 연구 업적에 주는 상이고 연구와 사생활은 별개의 문제라는 마리 퀴리의 대답이 돌아왔다. 같은 해 열린 노벨상 시상식에 마리 퀴리는 평소와는 다른 화려한 모습으로 참석했지만, 그 후로도 한동안 심신의 고통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우울증과 신장 질환으로 한동안 연구는 중단되었다. 회복한 후에도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하기보다는 라듐연구소를 설립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1차 세계대전은 소르본 스캔들로 인한 타격을 만회할 기회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 기회가 방사능 연구에서 오지는 않았다.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 정부는 라듐연구소에 보관하고 있던 마리 퀴리 소유의 라듐을 국가 자산으로 설정하고 안전을 위해 보르도 지방으로 옮겨놓도록 했기에 방사능 연구는 지속되기 어려웠다. 대신 마리 퀴리는 프랑스의 승리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소르본 스캔들에서 제기됐던 비애국적 외국인의 혐의를 벗을 수 있는 길을 찾았다. 마침 친한 방사선 의사로부터 전장에는 X선 장비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듣자, 마리 퀴리는 프랑스의 승리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결정했다.

마리 퀴리는 특유의 실행력을 발휘하여 의료용 X선 설비를 마련하는 일에 나섰다. 특히 전선에서 부상병들에게 즉시 사용할 수 있도록 X선 진단기를 실은 이동용 차량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진공관을 마련하고 X선 사진을 찍을 건판을 준비하는 일과 함께 X선 설비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차량 모터에서 전기를 공급할 방법을 찾아냈다. 적십자사와 여러 단체를 찾아 도움을 구하고 재원을 마련하는 일도 마리 퀴리의 업무 목록을 채웠다. 이렇게 해서 18대의 X선 진단 이동 차량을 마련했다.

하지만 일이 순조롭게만 진행되지는 않았다. X선 진단 없이 수술을 해왔던 의료진들에게 X선 진단의 필요성을 설득하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X선 진단 차량을 전선 깊숙이 보내기 위해 군에 그 중요성을 설득해야 했지만 의료진의 지지가 없는 상황 속에서 이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겨우 차량 한 대를 전선으로 들여보낼 수 있다는 허가를 받았을 때조차도 여성의 전선 출입을 막는다는 규정에 의해 마리 퀴리는 이동 X선 장비와 함께할 수 없었다.

 

 

마리 퀴리의 노력은 결국 인정을 받았다. 이동 X선 차량은 “작은 퀴리”라는 애칭을 얻고 프랑스인의 사랑을 받았다. 군에서는 마리 퀴리에게 X선 진단 인력의 교육을 의뢰했다. 군 자원자를 대상으로 하던 X선 테크니션 양성은 여성 간호사로 그 대상이 바뀌어 지속되었고 마리 퀴리는 자신이 배출해 낸 여성 X선 전문 인력들에 자부심을 가졌다. 그가 자부심을 표했던 여성 중에는 딸인 이렌느 퀴리Irene Curie, 1897-1956도 포함되어 있었다. 17, 18살에 불과했던 이렌느 퀴리는 X선 인력 교육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여담이지만, 마리 퀴리가 이렇게 X선을 비롯한 방사능의 의학적 효과를 목격한 만큼, 그는 방사능이 인체에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산업계에서 라듐을 처리하던 여공들이 피폭으로 인해 고통받으면서 방사능의 피폭 효과가 보고되었지만, 마리 퀴리는 끝까지 이를 부정했다.

소르본 스캔들로 중단되었던 마리 퀴리의 연구는 1차 세계대전 속에서 방사능의 의학적 이용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다. 그 덕분에 소르본 스캔들에서 마리 퀴리를 향해 쏟아졌던 외국인 혐오증은 사라지고 마리 퀴리는 다시 연구자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1995년 마리 퀴리는 피에르 퀴리와 함께 프랑스 위인들이 묻혀 있는 팡테옹에 안장되었다.

 

참고문헌

  1. Susan Quinn, 1995, Marie Curie: A Life , Simon & Schuster 
  2. 박민아, 2008,  『퀴리&마이트너: 마녀들의 연금술 이야기』, 김영사
박민아
한양대학교 창의융합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