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의 재발견

인류 문명의 발전 단계는 도구의 발전에 따라 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로 분류되곤 한다. 이런 구분은 도구를 만들 때 사용하는 물질의 분류법과도 일치한다. 철기 시대를 지배한 물질이 철이었다면 청동기 시대를 지배한 물질은 구리였다. 구리는 기원전 9,500년에 출토된 원소로 구약성서에 ‘놋’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기원전 5,000년 무렵 고대 이집트에서도 구리를 사용했는데, 구리는 도구뿐만 아니라 화폐로도 사용되었다. 권력의 상징이자 통치의 수단이기도 했던 구리는 인류에게 문명의 창을 열어준 원소였다고 할 수 있다. 고대의 구리는 종鐘, bell이나 거울을 만드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박물관의 청동 유물이 대체로 녹색을 띄는 이유는 공기가 습할 때 수분과 이산화탄소의 작용으로 구리 표면에 염기성 탄산 구리가 생기기 때문인데, 흔히 이를 녹청이라고 부른다.

근대에 들어와서 구리의 주가가 높았던 때를 꼽으라면 에디슨과 테슬라의 ‘전류 전쟁’ 시절을 들 수 있다. 1878년 에디슨이 설립한 전등회사는 3,000여 개의 백열전구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110볼트의 직류 전기를 사용하였는데, 이렇게 낮은 전압으로 흘리는 전류는 도선에서 발생하는 에너지 손실이 커서 몇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으로 전력을 전달하는 데 문제가 있다. 좀 더 높은 전압으로 변환한 전류를 사용하면 이런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지만, 그 당시는 좋은 변압기(전류의 전압을 바꿔주는 기계)가 발명되기 전이었다. 에디슨은 대안으로 군데군데 발전소를 건설해서 인근 지역으로 전력을 공급하는 방식을 택해야 했다. 하필 그 당시 프랑스의 구리 판매 기업들이 연합하여 구리 가격을 3배 이상 인상하는 바람에 굵은 구리선을 통해 전류를 보내는 직류 방식을 선택했던 에디슨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구리는 전기가 잘 통한다. 물리학적으로 말하면 구리는 전기 전도율electrical conductivity이 높다. 비금속 물질과 금속의 차이점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전기를 잘 흘린다, 혹은 흘리지 않는다”이다. 전기 전도도가 큰 금속은 대체로 열도 잘 통한다. 또한 금속은 다른 고체에 비해 변형이 잘 되고 가공을 잘 하면 반짝반짝한 거울면을 얻을 수도 있다. 이런 금속의 보편적 특성 뒤엔 금속 내부를 자유롭게 움직이는 ‘자유 전자’가 있다.

비유를 들자면 금속은 일종의 마을이고, 마을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전자다. 코로나가 발생해서 모든 사람이 자기 집에만 틀어박혀 아무도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는 경우 경제도 잘 돌아가지 않는데, 이런 불경기는 고체에 흐르는 전류와 같다. 따뜻한 봄이 오고 황사도 없어 마을 사람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상황에선 경제도 활발해진다. 금속에서 전류가 잘 통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전기 전도도가 큰 물질은 전자가 다니는 길에 오르막이 없는 평평한 제주도 올레길 같은 곳이다.

에디슨 시절만 해도 구리의 전성기였지만, 기술의 발전과 함께 첨단 소재가 쏟아져 나오면서 구리는 그저 전류만 잘 흘리는 재미없는 도체로 전락했었다. 그런데 구리가 최근에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이유는 구리의 단결정single crystal 만들기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흔히 결정crystal이라고 하면 루비, 사파이어,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을 생각하기 쉽다. 보석도 아니고, 투명하지도 않은 구리나 은 같은 금속이 결정 상태를 이룬다고 하면 좀 생소하게 들릴 수 있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금속은 다결정polycrystalline 상태에 있다. 다결정과 단결정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트럭에 가득 실은 벽돌을 땅바닥에 쏟아놓은 모습을 그려보자. 벽돌은 아래 [그림1-1]처럼 무질서하게 어질러져 있다. 이게 다결정의 모습이다. 반면 [그림1-2]처럼 벽돌 하나하나를 정성 들여 쌓아 올리면 ‘단결정’ 상태로 바뀐다. 마을의 비유로 되돌아가보면 마을 사람들이 다니는 평지길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연결되어 있는 마을이 단결정 마을이다.

다결정 마을은 평지길이 잠깐 나오는가 싶다가 뚝 끊어지거나 길 한가운데 엄청난 둔덕이 있어 그 옆의 평평한 샛길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둔덕이 그리 높지 않으면 큰 힘을 안 들이고 둔덕을 넘어갈 수 있지만, 대부분의 다결정 마을에는 이런 둔덕이나 푹 패인 길이 너무 많다. 단결정을 만든다는 것은 전자가 오르막이나 내리막에서 고생하지 않고 쏜살같이 길을 달릴 수 있도록 무한히 긴 평지길을 포장하는 일과 같다. 벽돌은 우리 눈에 보이기 때문에 미장이의 솜씨로 차곡차곡 쌓을 수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초소형 벽돌이라고 할 수 있는 구리 원자를 어떻게 차곡차곡 쌓아 단결정 구리를 만들 수 있을까? 이런 마법을 부릴 줄 아는 사람들을 재료과학자라고 한다.


구리의 단결정화 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한 배경에는 뜻밖에도 첨단 소재에 대한 열망이 자리 잡고 있다. 날로 반도체 소자가 초소형화되는 추세에 맞춰 사람들은 기존의 대표적인 반도체인 실리콘Si이나 갈륨비소GaAs 반도체와는 다른 구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탄소 원자가 벌집 모양으로 얽힌 2차원 물질인 그래핀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래핀으로 소자를 만들 수 있다면 탄소 원자층 하나만으로도 반도체의 특성을 구현할 수 있다. 그래핀은 2차원 구조라는 상징성뿐만 아니라 매우 높은 전기 전도도와 열 전도도, 광 투과율과 역학적 강도 등으로 인해 차세대 신소재로 각광을 받는 꿈의 물질이다.

하지만 이런 2차원 물질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허공에서 신물질을 만들 수는 없으니 일단 어떤 평평한 판을 만들고 그 위에 그래핀 같은 2차원 물질을 키워야 한다. 탄소 원자 한 층짜리 그래핀을 잘 만드는 데는 구리 기판이 적임자라는 사실이 알려진 뒤 전 세계적으로 누가 구리를 얼마나 크게 단결정으로 잘 키울 수 있는지 경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마치 왕년의 주연급 배우가 오랜만에 다시 드라마에 조연으로 출연했다가 그만 주연의 인기를 앞지르는 ‘역주행’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자연산” 구리와 “양식” 구리

생선회의 세계에서는 흔히 자연산을 양식어에 비해 높게 평가한다. 다이아몬드도 공장에서 만든 인조 다이아몬드보다 자연에서 캐내는 다이아몬드가 훨씬 비싸다. 그러나 실험실에서 ‘양식된’ 단결정이 ‘자연산’ 다결정보다 품질면에서는 훨씬 뛰어나다. 완벽한 단결정은 판매대에 가로세로로 가지런히 진열된 사과와 같다. 만약 진열대에 사과가 하나 비어 있거나 사과 자리에 배가 대신 들어와 있으면 금방 눈에 띈다. 재료 과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결함defect이라고 부른다.([그림2]) 결함 중에 좀 더 심각한 상황은 사과 전시대의 한 줄이 모두 사과 대신 귤로 바뀌어 있거나 아예 한 줄이 통째로 비어 있는 경우다. 이제 사과 대신 구리 원자를 대치해서 상상해보자. 대부분의 금속을 원자 수준의 크기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결함투성이다.


한때 케이블에 사용한 금속선이 ‘고급’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99.999999%(8N1)의 고순도 도체를 사용한다고 홍보하는 회사가 있었다. 구리선을 예로 들자면 1,000개의 구리 원자 중 다른 원자 한 개가 섞여 들어갔을 때 순도가 99.9%다. 8N의 순도를 자랑하는 구리선은 1억 개의 구리 원자 중 겨우 하나의 이물질 원자가 섞여 들어간 것이니까 얼핏 생각하기엔 어마어마한 성과인 것 같다. 하지만 상온에서 구리선의 저항을 측정해보면 순도 99.9%(3N)를 넘어가는 순간부터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구리선의 성능을 좌우하는 것은 불순물의 정도보다는 진열 순서의 오류다. 사과가게 주인은 [그림2]처럼 박보검 점원이 사과 자리에 실수로 배 하나를 갖다 놓은 것쯤은 참을 수 있지만, 송중기 점원이 [그림3]처럼 사과를 흩트려 진열하는 것은 참지 못한다. 구리 원자가 이렇게 엉망으로 진열된 구리선은 전기를 잘 통하지 못한다. [그림3]의 사과를 구리 원자라고 하면 전자는 사과 사이를 날아다니는 파리쯤으로 볼 수 있다. 파리는 진열된 사과의 ‘결’을 따라 비행하는 습관이 있다. [그림2]와 같이 진열된 가판대는 여전히 사과의 결이 잘 살아있기 때문에 파리가 어렵지 않게 비행할 수 있지만, [그림3]과 같은 배열의 경우는 파리가 수시로 비행 방향을 이리저리 틀어야 한다.

대체로 비슷한 결을 유지하는 영역을 미세영역grain이라고 부르고, 결이 다른 구역이 서로 맞닿는 경계를 미세영역경계grain boundary라고 부른다. 다결정 구리에 존재하는 미세영역의 크기는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0.1~1μm 정도이다. 바꿔 말하면 1cm3의 작은 구리 덩어리 속에 무려 1012개 정도의 미세영역이 있다. 이렇게 많은 미세 영역을 곡예 비행하듯 통과해야만 전류를 흘릴 수 있다면 금속의 저항이 상당할 수밖에 없다. 반면 단결정 물질 속에는 미세영역이 없고 모든 원자가 한 방향으로 정렬되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금속의 속성은 사실 이런 다결정 물질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구리의 색이 무엇인지 질문해보자. 영어에서 구리copper색을 공식적인 색상명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594년이라고 한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구리색의 공식 RGB값2은 184, 115, 51이다.([그림4] 왼쪽) 우리에게 익숙한 불그스름한 밤색reddish brown, 즉 갈색에 가깝다. 그러나 완벽에 가까운 단결정으로 키워진 구리 표면은 [그림4]의 오른쪽처럼 좀 더 밝고 매우 우아하며 거울처럼 맑다. 머리카락은 물론 솜털 하나하나가 다 비칠 정도여서 거울로 사용해도 손색이 없다. 구리색을 아름다운 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단결정 구리 표면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결정 성장기

필자가 구리 단결정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2000년쯤이었다. 재료 과학자들은 단결정을 ‘키운다’는 말을 종종 쓴다. 마치 고급 난초를 온갖 정성을 다해 키우듯, 가장 평평하고 완벽에 가까운 단결정을 키우겠다는 장인정신의 표현이다. 공동 연구를 하는 다른 연구원에게 몇 개의 구리 단결정을 만들어 보내고는 나머지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계속 지켜보았다. 결정 키우는 일을 오랫동안 전공으로 삼아 온 필자가 보기에도 불투명한 금속이 이렇게 단결정 상태로 잘 자란다는 게 특이하게 느껴졌고, 표면의 색도 일반 구리와 달라 신기했다. 더욱 신기한 점은 무려 1년이 지나도록 구리 단결정에 산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표면을 손으로 만지면 산화 반응한 흔적이 나타났지만, 만지지 않은 곳은 몇 년을 놔두어도 변하지 않고 반짝였다.

이 금속 결정을 쳐다보면서 어디에 사용할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문득 전선을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음악 듣기를 좋아했는데 이런저런 공부를 하다 보니 오디오 케이블이 매우 비싸게 팔리는 이유가 바로 케이블 선을 구리 단결정으로 만들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게다가 알고 보니 엄밀한 의미의 단결정도 아닌 것을 단결정이라고 이름 붙여 파는 상술이었다. 진짜 단결정으로 구리선을 만드는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다가 2006년에는 아예 단결정 케이블 만드는 회사를 차리고 몇 년간 수출까지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구리의 재발견’은 구리 케이블 같은 덩어리 단결정보다는 오히려 박막 형태의 단결정 구리에서 나타났다. 박막thin film은 말 그대로 아주 얇은 물질을 의미한다. 필자가 구리 박막 제조에 입문하게 된 과정도 재미있다. 필자의 연구실 학생들은 대부분 첨단 분야인 스핀 소자spintronics를 하고 싶어했고 구리에 대한 연구는 꺼리는 분위기였다. 마침 구리 단결정을 아주 얇게 만들어야 할 필요가 생겼는데, 그 당시 잘 알려진 방전 가공법으로 구리 결정을 잘라낸 0.3mm 두께가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가장 얇은 박막이었다.

더 얇은 구리가 필요한 경우에는 ‘자르는’ 방법 대신 구리를 ‘기르는’ 방법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대학원생에게 시켰더니 할 일이 많다면서 박막 성장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다른 대학원생이 원래 하던 연구가 잘 안 풀리니 대신 구리 박막을 키워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길래 필자는 원래 하던 연구 주제나 열심히 하라고 꾸지람을 했다. 그런데 두 달 뒤 그 학생이 구리 박막을 성공적으로 키웠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 이후로 본격적인 구리 박막 연구를 시작했고 성장 장비도 여러 차례 개조하고 성장 기술도 꾸준히 개선해서 마침내 완벽에 가까운 오늘의 수준에 이르렀다. 

똑같은 구리 단결정을 키웠다 하더라도 표면의 거칠기에 따라 물성이 많이 달라진다. 사포로 거친 표면을 다듬듯 실험실에서 기계적 방법으로 가공해서 만든 표면의 울퉁불퉁함은 약 100nm 정도이다. 즉 원자 400층 정도의 높이 차이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보다 훨씬 편평한 표면을 얻기 위해서는 구리가 스스로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박막을 키울 때 작동하는 가장 기본적인 법칙은 에너지 최소화다. 물론 완벽하게 편평한 표면이 가장 낮은 에너지 상태이긴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현실에서는 이런 에너지 최소화 상태에 제대로 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구리가 스스로 에너지 최소화 과정을 거쳐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필자의 연구실에서 성장하는 박막의 표면 거칠기는 0.2nm 수준, 즉 표면의 들쑥날쑥한 정도가 원자 한층 정도다. 그렇게 매끄러운 표면을 유지한 박막을 눈에 잘 보이는 크기로 만들 수 있다. 전 세계 유일의 기술을 갖고 있다고 자랑할 만하다.

잘 키운 단결정 구리 박막은 무려 3년이 지나도 산화가 되지 않는다. 일부러 단결정 박막을 손으로 만지거나 다른 물건으로 긁지 않는 한 산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완벽하게 편평하거나 원자 한 층 정도의 울퉁불퉁함을 가진 구리 표면은 산화가 되지 않는다는 이론적 연구도 있다. 강제로 단결정 표면을 산화시킬 수도 있다. 이때 재미있는 일이 일어난다. 흔히 우리가 보는 다결정 구리 표면이 얼룩덜룩하고 지저분한 이유는 산화가 된 표면과 안 된 표면이 불규칙하게 나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결정을 산화시키면 산소 분자가 똑같은 두께로 구리 층을 파고든다. 사과(구리)가 가지런히 배열된 층 위에 배(산소)를 가지런히 얹을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리고 구리 표면에 쌓인 산소층의 두께도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그림5]에 보이는 아름다운 색깔의 네모 조각들은 모두 구리다. 정확히 말하면 제각각 다른 두께의 산화층이 쌓여 있는 산화 단결정 구리 박막이다. 산화층의 두께는 수nm에서 수십nm 정도인데 이 두께를 잘 조절하면 1,000가지 이상의 다양한 색을 만들 수 있다. 산화층 표면에서 반사된 빛과 그 아래 깔린 구리층 표면에서 반사된 빛이 서로 간섭하여 다양한 색깔의 빛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구리의 색은 더이상 동색이 아니다.

[그림6]은 필자의 실험실에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구리 박막의 표면이다. 최근의 현미경 기술은 양자역학의 도움으로 이미지를 수십만 배 이상 확대가 가능하기 때문에 아주 미세한 표면 구조도 바로 눈으로 보듯 관측이 가능하다. 인간의 기술로 얼마나 완벽하게 원자들을 배열할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우선 주사전자현미경Scanning Electron Microscope, SEM과 원자력간현미경Atomic Force Microscope, AFM 이미지에서 미세영역경계가 전혀 관측되지 않는다. 주사전자현미경SEM이미지는 배율이 십만 배 정도여서 이미지 안의 표시 눈금자 영역만큼이 100nm 크기에 해당한다. 그 아래 원자력간현미경AFM이미지는 실제로 그 표면이 너무 편평하여 아무것도 관측이 안된 것처럼 보인다. 표면의 거칠기를 나타내는 값이 0.3nm 정도로 나타나는데 이 값은 원자 단 한 층에 해당하는 값이다. 전자후방산란회절법EBSD으로 얻은 이미지는 전 영역이 완벽하게 파란색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구리 시료가 완벽하게 한 방향으로 정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완벽한 금속 박막을 얻어내는 기술의 핵심은 사과 장수가 가판대에 사과를 하나하나 놓는 과정과 비슷하게 원자를 하나하나 쌓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마음 급한 송중기 점원이 사과를 포대에 담아 와서 가판대에 쏟아 놓으면 쏟아진 사과들은 뒤죽박죽으로 놓이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다결정이 만들어져버린다. 또한 사과를 놓는 가판대를 흔들면 안 된다. 우리 생활 주변에는 많은 진동이 있지만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러나 원자들 입장에서는 약간의 진동에도 지진이 일어난 것 같은 영향을 받는다.

 

 

왜 단결정인가

단결정 구리 박막은 성장이 끝난 후에도 웬만해서는 박막 성장에 사용했던 기판에서 떼어낼 수가 없다. 흡착력이 매우 좋기 때문이다. 같은 물질 간의 결합력은 응집력cohesive force이라고 하고 다른 물질과의 결합력은 흡착력adhesive force이라고 부르는데, 단결정 구리는 응집력도 좋고 흡착력도 좋다. 뿐만 아니라 우수한 표면을 가진 단결정 박막은 높은 반사도를 보인다. 은Ag을 단결정으로 만들면 99.7%에 가까운 반사도를 가진다. 은 표면에 비춘 빛 중 0.3%만이 은에 흡수되고 나머지는 모조리 반사된다는 의미다. 품질 좋은 거울의 반사도도 겨우 97~98%에 불과하다.

상업적으로 반도체 공정에서는 4nm, 5nm 등의 초미세 공정에 대한 경쟁이 치열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광원이 13.5nm인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광 장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회로도선에 사용되는 물질이 극가공에 견딜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일반 금속들은 100nm 선폭의 가공을 견디지 못하지만, 단결정 구리 박막은 4~5nm 두께로 만들어지고 다시 수십에서 수nm 수준의 선폭으로 가공이 가능하며, 더 많은 전류를 흘릴 수 있는 동시에 산화에 강한 특성을 보인다. 또한 도체 내 미세영역경계가 없어서 신호의 왜곡이 없다. 그래서 나노 크기의 소자에서 기기의 오작동을 줄일 수 있다.

단결정 박막의 성장을 통해 새로운 금속의 성질을 발견할 수 있는 물질은 구리뿐만이 아니다. 은, 알루미늄, 그리고 니켈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관측됐다. 그래서 “금속의 재발견”이다. 많은 사람이 거쳐 간 분야가 아니다 보니 연구 결과를 독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필자의 연구실을 방문하는 다른 연구자들에게 은으로 만든 덩어리 결정을 보여주면 왜 금 단결정은 키우지 않느냐고 질문하는 경우가 있다. 금을 단결정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먼저 3차원 덩어리 단결정을 성장해야만 하는데 그러려면 무려 7억 원 정도의 재료비가 필요하다. 필자도 단결정 금의 물리적 성질이 무척 궁금하다. 후학들의 건투를 빈다.

정세영
부산대학교 나노과학기술대학 광메카트로닉스 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