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눈에 보이는 풍경landscape 만이 아니라 소리풍경soundscape안에서도 살고 있다. 잠시 멈춰, 귀 기울여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지를. 눈에 보이는 풍경이 지역마다 다르듯, 소리풍경도 지역마다 다르다. 바닷가에서는 파도소리가, 산골 마을에서는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 소리가, 그리고 도시에서는 하루 종일 사라지지 않는 자동차 소리가 소리풍경의 기조음을 구성한다. 물론 소리풍경은 시대에 따라서도 변해간다. 찹쌀떡 팔던 구성진 목소리, 두부 팔던 종소리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런가 하면 반세기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했을 소리들이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다. 백화점, 카페, 음식점, 엘리베이터에서 끊임없이 음악이, 소리가 흘러나오고, 집 안에서도 세탁기, 정수기, 에어컨, 식기세척기, 밥솥이 끊임없이 소리로 메시지를 전한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우리의 소리풍경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전화기, 축음기의 발명은 소리풍경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을 뿐이다. 카 오디오와 일본의 소니사에서 나온 ‘워크맨walkman’과 같은 휴대용 소리·음악 재생 기기, 그리고 오늘날 누구나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에 이르면, 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소리풍경을 경험하게 된다. 고정되어 있는 시각적 풍경과는 달리 소리풍경은 움직이는 것,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후 인간이 만들어 내거나 인간과 관계된 소리anthrophony가 인간이 있는 모든 곳에서 울리기 시작했고, 소리를 만들어낸 주체가 눈 앞에 보이지 않는 희한한 소리들이 우리 삶 속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소리의 원천이 보이지 않는acousmatic, 어디에나 존재하는ubiquitous 소리가 우리가 살고 있는 소리풍경의 특징이다.

최근에는 소리에 대한 관심이 부쩍 더 늘어난 듯한 느낌이다. 운전할 때 소리로 길을 안내해 주는 내비게이션 서비스에 신기해하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이제는 일방적으로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빅스비, 시리, 알렉사 같은 음성인식 인터페이스Voice User Interface, VUI와 대화를 나눈다. 스마트폰에서 화면을 볼 수 있는 시대이니 금방 사라져 버릴 것만 같던 팟캐스트는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고, TTStext to speech기능이 없는 E-book리더 기기는 외면을 받는다. 심지어 최근에는 눈으로 보는 텍스트 대신 목소리를 사용하는 SNS인 ‘클럽하우스’까지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기능적 소리’들에 대한 관심이 늘어가고 있다. 잠이 오게 하는 소리, 집중하게 하는 소리, 명상을 도와주는 소리 따위가 그렇다. 난데없이 백색 소음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는가 하면, 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의 대유행이 일어나기도 했다. 코로나 이후 재택 근무가 늘어나면서 여럿이 함께 일하는 공간의 소음을 녹음해 놓은 유튜브가 인기를 끌기도 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소리의 시대다.

이러한 사정이니 소리를 연구해야 한다는 입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세상을 바라보려고만 했다. 사실 세상은 들어야 하는 것인데” 라는 아탈리Jacque Attali의 말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물론 소리에 대한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리에 대한 연구는 매우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피타고라스로부터 시작되어 헬름홀츠 등을 통해 정량화되고 가시화된 소리의 물리적 속성에 대한 연구, 소리의 전송이나 저장과 관련된 다양한 기술에 대한 탐구, 음악회장을 비롯한 건축물 내에서의 음향을 개선하려는 노력, 목소리의 특성을 분석하고 합성하는 연구 등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다. 음악사에서는 음과 음 사이의 거리(음정)를 정확하게 분할하는 음률법temperament에 대한 연구, 악기의 음향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 소리 연구에 바탕을 둔 새로운 악기의 고안과 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특히 소리의 물리적 속성을 이해하여 새로운 소리를 합성하는 기술을 적용한 새로운 작곡 방식은 20세기 이후 음악에 새로운 장을 열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 즈음부터 새롭게 관심을 받게 된 ‘소리연구sound studies’는 그동안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소리의 측면, 즉 사회와 문화 안에서 소리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소리에 관한 인문, 사회과학적 연구가 새롭게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소리연구가 언제, 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간단히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각기 다른 여러 학문 분야에서 소리와 소리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연구들이 있었고, 그런 것들이 축적되면서 점차 하나의 학문 분야로 모여들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많은 소리연구자들은 1977년을 새로운 소리연구에서 중요한 해로 여기는 것에 동의한다. 이 해에 소리연구에 매우 중요한 두 권의 저서가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셰이퍼R. Murray Schafer,1933~현재의 저서, 『The Tuning of the World』이다. 이 책은 1994년에 『The Soundscape, Our Sonic Environment and the Tuning of the World』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판되었다. 캐나다 출신의 작곡가이자 저술가이며 음악교육자인 셰이퍼는 책을 통해 소리풍경soundscape이라는 개념을 널리 알리고 환경으로서 소리풍경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이 저서는 소리가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역설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의 원래 제목, 그리고 1994년 판의 부제가 「세계의 조율the tuning of the world」이라는 점이다. 이 제목은 중세, 르네상스 시대부터 우주와 세계를 하나의 음악으로 이해하던 사변적 전통을 잇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소리가 조율이 필요할 만큼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셰이퍼의 저서가 출판된 이후로 소리, 소리풍경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었을 뿐 아니라 소리와 관련된 생태학적 관심, 소리풍경, 소리환경을 개선하려는 실천적 노력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은 소리에 둘러싸여 있는 인간의 조건과 그러한 조건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상호관계, 그것이 만들어내는 가치와 의미에 대한 질문들로 발전해 나갔다.

 

 

1977년에 출판된 또 하나의 중요한 저서는 아탈리Jaque Attali, 1943~현재의 『소음Bruit』다. 이 책에서 말하는 소음이란 실은 특정한 소리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제도화된 질서에 반하는 모든 폭력적 성향을 일컫는 은유적 표현이다. 아탈리는 제어되지 않는 소음들을 통제하고 제어하여 음악을 만드는 과정을 희생제의에 비유하며 이것이 음악의 기원 혹은 음악의 첫 번째 기능이었다고 주장한다. 그 후에 등장하는 기보된 음악의 시대, 상업화된 음악의 시대를 각각 소리의 ‘재현’과 ‘반복’의 시대로 규정하면서 어떻게 특정시대의 소리 현상과 음악의 존재방식이 앞으로 다가올 시대의 사회적 제도들을 선취하고 있는지 설명한다.

아탈리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소리-음악 현상을 ‘컴포지션’이라는 말로 표현하면서 우리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소리, 음악, 작곡, 청취의 가능성이 마찬가지로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정치, 경제 제도를 암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을 통해서 아탈리가 보여주려고 하는 중요한 주장, 즉, 소리와 음악이 사회, 경제, 문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반영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앞으로 다가올 사회, 경제 체제를 ‘예언’한다는 주장은 소리에 대한 인문, 사회과학적 연구를 더욱 활성화 시켰다.

이 저서의 영역본인 『Noise』는 소리연구가 얼마나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 공통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분야인지를 잘 보여준다. 저자인 아탈리는 정치경제학자인 반면, 역자인 마수미Brian Massumi, 1956~현재는 현재 감응이론affect theory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미디어 철학자다. 이 번역본에는 권두언foreword과 후기afterword가 실려있는데, 권두언은 저명한 문학이론가 제임슨Fredric Jamson, 1934~현재이, 후기는 음악학자인 맥클러리Susan McClary, 1946~현재가 썼다. 소리연구의 간학문적 성격은 이렇게 초기 저작의 번역물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실제로 소리연구는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가진 학자들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 음악학을 비롯하여 철학, 인류학, 지리학, 역사학, 미디어학, 과학-기술학, 문학, 영화이론, 문화학, 생태학 등이 주요 관련 학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다양한 학문 배경을 가진 학자들이 함께 연구할 수 있는 인문, 사회과학적 소리연구의 기본 전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소리의 의미가 고정되어 있거나 정의define되는 것이 아니라 맥락과 환경 안에서 구성construct된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청취 역시 특정한 상황과 선이해, 맥락 안에서 만들어진다고 한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소음이란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 대해 소리연구자들은 소음의 의미가 사회와 문화의 맥락 안에서 구성된다고 말한다. 물론 소리에 대한 몇 가지 영향력 있는 ‘정의’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동어반복이라고 생각되는 ‘듣기 싫고 시끄러운 소리’라는 정의가 그것이다. 사전에 등장하는 가장 흔한 정의이지만 이 정의는 매우 상대적이다. 누구에게, 언제, 어떤 상황에서라는 질문에 따라 늘 답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너무 큰’ 소리라는 막강한 정의도 마찬가지다. 이 정의가 막강한 이유는 ‘너무 큰’ 소리의 양적 특질을 법으로 규정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는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 층간소음의 범위와 기준에 관한 규칙(환경부령 제599호, 국토교통부령 제97호, 2014년06.03개정)이 있다. 제3조에서는 직접 충격음의 경우 1분간 등가소음도가 주간 43데시벨, 야간 38데시벨, 그리고 최고소음도는 주간 57데시벨, 야간 52데시벨을 넘으면 소음으로 규정한다. 이처럼 ‘큰’ 소리는 법으로 규정되는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음의 정의로 적절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큰’ 소리가 늘 같은 방식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같은 크기의 소리라고 하더라도 각기 다른 상황, 다른 장소, 다른 기분 하에서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이다.

소음을 객관적으로 정의하려고 했던 또 다른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은 디지털 신호처리Digital Signal Processing, DSP 공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신호처리 회로에서 주신호를 방해하는 것, 원치 않게 끼어든 소리를 소음이라고 정의했다. 물론 이러한 정의가 디지털 신호를 처리하는 상황에서는 불편없이 사용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러한 정의를 우리의 실생활과 경험에 적용하기는 여전히 힘들다. 일상 생활의 아주 간단한 커뮤니케이션 중에서도 주신호가 무엇인지 절대적으로 정의하기 어렵다. 소음으로 여겨지던 신호가 주신호가 되기도 하고, 주신호라고 생각했던 것이 내 주의를 돌리면 소음이 되기도 한다. 기타 연주에서 넥 위를 오가는 왼손에서 나는 마찰음은 과연 소음일까? 친구와 이야기 하던 중 우연히 들린 옆 테이블 이야기 소리가 흥미로워진다면 옆 테이블 이야기 소리가 소음일까, 눈치 없이 계속 말하고 있는 내 친구의 목소리가 소음일까? 요컨대, 소음은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상황과 문맥 안에서 구성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소리의 의미가 사회, 문화적 맥락 안에서 구성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 삶을 둘러싸고 있는 소리풍경을 이러한 맥락 안에서 재청취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우리의 소리풍경은 사회와 문화를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어쩌면 적극적으로 그 의미와 가치를 수행해 나가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 간단한 예를 들자면, 젠더화된 소리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소리연구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로 표현하자면 ‘소리적 상상력sonic imagination’을 발휘하여 우리 주변의 소리를 ‘두껍게deep’ 들어보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소리 속에서 우리 사회의 젠더화된 면모들이 들린다.

비행기를 탔는데 환영인사와 비행여정을 소개하는 목소리가 여성의 목소리라거나 혹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안내 목소리가 남성의 목소리인 경우를 상상해 보자. 이런 경우 조금이라도 당황했다면, 아마도 이미 소리에 부여된 우리 사회의 젠더 관습에 익숙해 있다는 뜻일 것이다. 내비게이션의 초기 설정 목소리가, 전기밥솥, 정수기 같은 가전제품에서 나오는 안내 목소리가 모두 표준어를 사용하는-젊은-여성의 목소리인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면, 그 역시 소리가 이미 우리 사회, 문화 안에서 젠더화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소리연구는 소리 안에서 사회, 문화의 관습과 편견을 듣는다.

당연히 다양한 사회, 문화의 ‘문제’들이 소리를 통해 드러난다. 때로는 계층의 문제가, 그리고 때로는 세대나 지역의 차이가 소리로 드러난다. 그 소리는 우리 소리풍경 속에서 실제로 들리기도 하고 문학작품이나 영화, 심지어 게임을 통해서도 들린다. 소리로 다양한 문화와 하위문화의 정체성이 드러나기도 하고, 혹은 드러나지 않기도 한다. 어떤 소리는 어떤 시대와 맥락 안에서 소음으로 여겨지지만 또 다른 맥락 안에서 바로 그 소리는 매력적 소리로 여겨지기도 한다. 소리와 그 맥락과 인간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바로 소리연구의 관심이다.

그러나 이 짧은 지면에서, 필자의 관심에 따라 설명한 소리연구가 모든 소리연구자들이 생각하는 동의하는 소리연구의 정의, 목표, 범위를 모두 포함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 역사가 짧고 소리연구의 성과물을 게재하는 전문학술지도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대학과 대학원에 소리연구 전공이 이제 막 설치되기 시작되는 시점에, 소리연구에 대한 합의된 분명한 정의를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무리일 수도 있다. 더구나 원래 성격이 간학문적이다 보니, 연구자들 각자가 기반으로 삼고 있는 학문 분야의 방법론, 지향점 등을 이 새로운 영역에 나름대로 적용하려고 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다 보니, 어떤 소리연구자들은 소리연구의 궁극적 목표는 소리환경을 개선하는 실천과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또 다른 이들은 과학 기술과 이에 따른 청취 기술의 변화야말로 소리연구가 관심 가져야 할 주요 분야라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사회, 문화의 다양한 문제들을 재청취하고 재서술하는 하는 것이 소리연구의 목표라고 하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소리연구는 궁극적으로 소리의 의미를 고도의 방식으로 조직한 예술작품을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소리연구는 아직도 자기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는 신생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각각의 분야에서 따로 이야기하던 주제를 이제 모여서 같이 이야기해보자 하고 만나기 시작된 영역이니 서로 개념도 다르고 지향도 다르고 방법도 달라 여전히 각기 다른 ‘목소리’들을 ‘조율’하고 있는 중인 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러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이 학문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기는커녕 매해 늘어가고, 연구 성과물들도 싸여 가고 있다. 어쩌면 세상을 ‘바라보고’ ‘읽어’ 내던 근대적 학문의 기본 전제를 다시 검토하고 반성하는 거대한 ‘소리적 전회’가 일어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정경영
한양대학교 작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