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평생 자라온 환경은 그대로 그의 몸을 이룬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 방향을 주는 것은 언제나 짧고 강렬한 어떤 경험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전투기 무선 조종사로 참전했던 요셉 보이스 역시 그랬다. 요셉 보이스나 생택줴페리와 같은 비행기 조종사 출신의 예술가들에게 나는 묘한 동경을 가지고 있다. 하늘을 나는 것이 주는 자유와 추락의 운명 때문일까?

 

사랑하는 나의 오빠, 언제 우리는 뗏목을 만들어
하늘을 따라 내려갈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나의 오빠, 곧 우리의 짐이 너무 커져서
우리는 침몰하고 말 거예요.
사랑하는 나의 오빠, 우리 종이 위에다
수많은 나라와 수많은 철로를 그려요.
조심하세요, 여기 검은 선들 앞에서
연필심과 함께 훌쩍 날아가지 않게요.
사랑하는 나의 오빠, 만약 그러면 나는
말뚝에 묶인 채 마구 소리를 지를 거예요.
하지만 오빠는 어느새 말에 올라 죽음의 계곡을 빠져나와,
우리 둘은 함께 도망치고 있군요.
집시들의 숙영지에서, 황야의 천막에서 깨어 있어야 해요,
우리의 머리카락에서 모래가 흘러내리는군요.
오빠와 나의 나이 그리고 세계의 나이는
해로 헤아릴 수 있는 게 아니랍니다.
교활한 까마귀나 끈끈한 거미의 손
그리고 덤불 속의 깃털에 속아 넘어가지 마세요.
또 게으름뱅이의 나라에서는 먹고 마시지 마세요,
그곳의 냄비와 항아리에선 거짓 거품이 일거든요.
홍옥요정을 위한 황금다리에 이르러
그 말을 알고 있던 자만이 승리를 거두었지요.
오빠에게 말해야겠어요, 그 말은 지난번 눈과 함께
정원에서 녹아서 사라져버렸다고 말이에요.
많고 많은 돌들 때문에 우리 발에 이렇게 상처가 났어요.
발 하나가 나으면, 우리는 그 발로 펄쩍 뛸 거예요,
아이들의 왕은 그의 왕국에 이르는 열쇠를 입에 물고
우리를 마중하고, 우리는 이런 노래를 부를 거예요:
지금은 대추야자 씨가 싹트는 아름다운 시절!
추락하는 이들마다 날개가 달렸네요
가난한 이들의 수의에 장식 단을 달아준 것은 빨간 골무,
그리고 오빠의 떡잎이 나의 봉인 위로 떨어지네요.
우리는 자러 가야 해요, 사랑하는 이여, 놀이는 끝났어요.
발꿈치를 들고. 하얀 잠옷들이 부풀어 오르네요.
아버지 어머니가 그러는데요, 우리가 숨결을 나누면,
이 집안에서는 유령이 나온대요.

― 잉게보르크 바흐만,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1943년 크리미아 상공에서 러시아군에 의해 격추 당한 요셉 보이스는 타타르족에 의해 구출된다. 얼어붙은 보이스의 몸을 펠트와 지방으로 싸서 돌본 이들 덕분에 보이스는 다시 생명을 찾고 한동안 그들과 생활한 보이스는 몽골인의 풍습에 젖어 들었고, 거기서 강한 영향을 받게 된다. 그것은 나중에 그의 작업에서 유라시아의 대지와 제의적 성격으로 나타난다.1 제의에 가까운 그의 행위예술은 “예술 작품은 일상의 사물과는 그 존재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작품의 질과 가치 개념은 개별 예술 안에서만 가능하며, 나아가 예술 작품의 평가는 현실의 시간 속(현존성presence)에서가 아니라 비시간적인, 영원하고도 총체적인 현시성presentness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프리드의 모더니즘 이론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것이었다. 유라시아라는 대지의 에너지와 샤머니즘적인 힘이 실제로 그의 작품에 얼마나 녹아 있는지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타타르인들과의 경험을 통해 현대예술의 한 측면을 돌파해 나간 것은 틀림없다.

요셉 보이스의 〈무제-태양의 나라〉는 그가 대중 강연에서 사용했던 칠판을 그대로 뚝 떼어내 작품으로 만든 것이다. 그는 이러한 행위를 통해 미술의 문제가 양식이 아닌, 신화나 역사, 사회적 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또한, 그러한 강연 행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모든 소통의 과정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바뀌거나 변형되므로 이것을 ‘에너지 플랜’이라고 명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에너지 플랜’을 통해 사람들은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으며, 그런 행위 자체가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사회적 조각’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이것을 ‘흔적의 사유’라고 부르는데, 강의 내용이 칠판에 하나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렇게 해서 남겨진 흔적이 그 이후로는 스스로 말을 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칠판에 무엇인가 적어나간 사람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메시지다. 우리는 요셉 보이스의 칠판을 보면서 실제 그의 강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읽는다. 그것은 흔적 자체가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처음 고등과학원의 복도에서 본 풍경이다. 복도에는 벽면 가득 칠판이 붙어 있었고, 그 앞에서 뭔가를 분필로 적어나가는 한 사람과 팔짱을 낀 상태에서 턱을 만지며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는 또 한 사람. 그리고 이어서 팔짱을 끼고 있던 사람이 뭔가를 적고, 앞서 적어나가던 사람은 이제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된다. 그런 행위를 여러 차례 거듭하다가 그 두 사람은 마치 1막을 마친 연극배우들처럼 서로 인사도 나누지 않고 각자 헤어져 자기 길을 갔다. 그동안에 만들어진 소리는 칠판을 두드리는 분필의 소리가 유일했다. 톡, 톡, 톡, 톡, ……톡, 톡! … 톡톡, 톡, 톡, …톡! 그런가 하면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럴 땐 칠판은 이상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그 둘의 대화는 둘 사이에 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칠판을 통해서 번역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말하자면 한 사람이 뭔가를 말하면 칠판이 그것을 번역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고, 그 번역을 받은 사람은 다시 칠판을 통해 얘기를 전달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칠판에 적혀 있는 내용은 대부분 수식이었고, 간단한 도형이 그려진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대화가 끝나면 대부분은 칠판을 지우지도 않고 떠났기 때문에 나는 그 칠판 앞에 잠시 서 있어 보기도 했다. 그들이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알고 싶어서 거기 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거기에 뭔가가 적혀 있긴 했지만 그건 내가 알 수 없는 문자였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나는 거기에 서서 칠판이 그들에게는 하지 않았던, 오직 나에게만 건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뿐이다. 요셉 보이스 식으로 말하자면 ‘에너지 플랜’이 거기에 있었고(왜냐하면 내가 그 앞에 섰으므로), 내 식대로라면 ‘흔적의 사유’가 풀려나오고 있었다. 그게 무엇을 해결하기 위한 설명이었는지는 이미 그것을 적었던 사람들의 것으로 끝나있었고, 그 이후의 칠판은 그 앞에 서 있는 새로운 사람들에게 각자의 생각으로 변이되어 있었다. 칠판은 나에게 무슨 말을 건네고 있었던가?

 

그가 당신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말해볼까요?
당신을 황홀케 했던 그날 그가 했던 말을
어떤 말 어떤 눈빛으로 당신을 설레게 했는지
나는 말할 수 있는데
그가 내게도 똑같은 말을 했기 때문이라오
그가 나도 똑같이 황홀케 했다오

그가 당신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말해볼까요?
저 산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진리의 城에 들어가면
세상의 어떤 꽃보다 더 아름다운 꽃을 만날 수 있고
세상의 어떤 저녁노을보다 더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고
세상의 어떤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그림을 찾을 수 있다고
그 성의 문지기가 당신에게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죠

당신만이 그 아름다움을 독차지할 수 있고
당신에게만 그 문을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말한
그의 그 말이 얼마나 허황됐는지
그의 그 말로 당신이 얼마나 가슴 아파하는지
나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보다 내가 아마 더 가슴 아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문지기가 결국 몇 번 내게 아까운 듯 문을 열어줬었다오
거기서 나는 꽤 아름다운 꽃과 저녁노을과 그림을 찾아냈지요
더 아름다운 것을 줍지 못한 아쉬움은 이제 접어두고
진한 기억 가슴 깊이 담아두고 오늘도 나는
깊은 산속 그 높은 성을 그려보고 있는데
거기서 본 아름다움을 내내 떠올리며 살아가고 있는데

긴 세월 그의 문 앞에서 기다리다 지친 당신에게
그 문지기가 서산에 노을이 질 때쯤 해줄 말을 들려드릴까요?
그 말은 그의 문 밖 도처에도 예쁜 꽃이 피어 있고
걷다 보면 어디서나 붉게 물든 노을을 볼 수 있고
당신도 붓을 들면 괜찮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 안과 성 밖에는 오늘도 해 뜨고 달이 지며 아름다운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 최재경, 「꽃과 노을과 그림」

 

우리가 과연 ‘더 아름다운 것을 줍지 못한 아쉬움’을 진심으로 접을 수 있을까? 우리가 그것을 접을 수 없을 때, 우리는 끝없이 문을 두드리는 나그네이지만 그것을 접었을 때, 아마도 우리는 문지기가 될 것이다.

연결합 도시는 우리가 생활하는 실제적인 도시이기도 하지만 문지기가 지키고 있는 성 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성 안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상상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너무나도 미약하고 손쉬운 일같이 보이지만 상상한다는 것은 가장 위대한 일 일수 있다. 아마도 상상하지 않았다면 모든 생물종의 진화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상상했기 때문에 변했고, 생존할 수 있었다. 상상想像한다는 것은 코끼리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코끼리를 그려보는 일이다. 우리는 상상을 통해서 그 자체가 아닌, 상상의 과정을 통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다른 무엇과 조우하게 된다. 이것이 상상의 위대함을 낳는다. 조우遭遇는 우연히 맞닥뜨리는 것이다. 뜻하지 않게 만남으로써 우리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그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한 편의 글이나 창작의 과정에서도 그렇고, 수학이나 물리학의 난제들을 풀어가는 입장에서도 동일하다. 우리가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우리를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이끌어가는 경험. 예측할 수 없고, 갑작스러운 만남에서 촉발되는 또 다른 상상들. 연결합 도시는 이러한 생활을 담는 도시이면서 상상하는 행위 자체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예측할 수 없고, 전혀 떠올리지 않았던 그림과 조우를 기대한다고 해도 그런 만남이 아무렇게나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 또한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적어도 방향이 옳았을 때 기대할 수 있는 만남이다. 상상은 바람직한 기반 위에서 그 자유도를 더한다. 그래서 연결합 도시는 그 기반으로 차원의 논리를 수학에서 가져왔다. 수학적 모델을 바탕으로 물리적 토대를 마련하고 거기에 예술을 통해 관리와 효율이 아닌, 행위 중심의 도시를 상상하고자 했다. ‘행위 중심의 도시’라는 말은 근대 이후 전 세계인의 삶을 지배하는 ‘효율적으로 계획된 도시’가 가지는 도구적 사고에 대한 저항을 의미하고, 그러한 도시로 인해 파편화된 인간의 삶을 재생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도시를 재생한다는 생각 이전에 근본적으로 삶을 재생해야 한다. 삶이 재생되지 않는 도시는 폐허와 같기 때문이다. 인간의 길이 사라지고 자동차의 길이 확장되면서, 도시와 도시의 이동이 중요시되고 속도가 숭배되면서, 건축과 땅이 관계를 상실하고 부동산 가치가 삶의 가치가 되면서, 인간의 행위는 거대한 산업화의 부품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사랑하고, 미워하고, 배우고, 싸우고, 돕고, 만들고, 공감하는 인간의 행위는 사라지지 않았고, 사라질 수도 없다. 이러한 인간의 행위를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도시는 행위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도시가 행위 그 자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접근보다는 가장 개념적인 접근이 오히려 가장 구체적일 수 있다는 가정을 했다. 물론 그 가정은 2013년부터 1년 동안 고등과학원에서 열린 과학과 예술의 상호작용 및 근접 가능성을 모색한 인디트랜스 세미나가 바탕이 되었다. 우리는 그 1년 동안의 세미나를 통해 과학과 예술이 자연과 인간을 이해하는 데 있어 서로 대립할 수 없는, 서로 이어지는 파도와 같은 것이라는 것을 공통으로 인식했고, (그 인식을 바탕으로) 행위 중심의 도시를 위해 먼저, 과학과 예술이 만나는 하나의 공간을 가정했다. 그리고 그 가정을 위해 다음과 같은 조건을 세웠다.

 

  1. 행위란 인간 행위를 포함한 자연과 생태, 문화, 역사를 포함한다.
  2. 개념적인 접근을 위해 수학적 모델을 바탕으로 한다.
  3. 수학적 모델을 바탕으로 물리적, 예술적 행위를 표현한다.
  4. 시각, 청각, 촉감, 미각, 후각 등, 느낌이 표현되는 도시를 표현한다.
  5. 행위는 느낌에서 나온다.
  6. 행위를 통해 물리적 토대가 바뀌고, 수학적 모델이 변형될 수도 있다.
  7. 이 조건들은 허약해야 한다.
  8.  
 

그리고 곧 최재경 교수로부터 하이퍼큐브의 모델이 제시되었다. 이 세계 안에서 우리가 볼 수 없는, 숨겨진 차원을 표현한 이 모델은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고, 우리는 그 숨겨진 차원의 확장된 점들을 수학적이고 물리학적인 이해를 넘어서 인간의 마음 작용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만약 수학적으로 그런 차원이 존재하고 물리학적으로 그런 공간들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분명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다른 무엇이 아닌 우리 안에 있어야 했다. 즉, 역시 인간에 대한 탐구였던 것이다.

 

연결합 도시를 위한 수학적 모델은 근대와 근대 이전의 인간 인식의 변화, 그에 따른 문학작품의 예들로 확장되었다. 그 결과 초기에 제시되었던 하이퍼큐브는 3차원 입방체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3차원 입방체의 내부에서 작용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말하자면 클라인 씨의 병과 닮은 큐브 같은 것으로, 그림자놀이로 치자면 빛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게 된다. n차원의 (편의상) 내부에서 켜져 있는 빛.

 

불가에서 말하는 오온五蘊, pañca-skandha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섯 가지 덩어리’로 설명한다. 그 다섯가지는 색色, rūpa, 육체작용, 수受, vedanā, 감각작용, 상想, samjñā, 표상작용, 행行, samskāra, 의지작용, 식識, vijñāna, 판단작용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느끼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 불가에서는 이 다섯 가지 덩어리 외에 고정불변하는 자아ātman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인간은 변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인간이 변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고정불변하는 자아가 없어야 된다. 그러면 이제 편의상 켜놓았던 빛을 꺼놓아도 이 세계에 존재하는 숨어 있는 차원들은 하나하나의 작용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와 같이 연결합 도시에서 숨어 있는 차원은 마음의 작용으로 드러난다. 다행히 고타마 싯다르타Gautama Siddhārtha, B.C.563?~483?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인간은 끝없이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왔고, 문학은 언제나 인간에 대한 질문을 해왔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주목했던 것은 <모비딕 Moby-Dick>의 작가로 유명한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필경사 바틀비 Bartleby, the Scrivener: A Story of Wall-street>였다. 이 소설은 미국 뉴욕의 월가에 있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필경사로 일했던 바틀비라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의 화자인 변호사는 일이 많아지자 필경사 한 명을 더 고용한다. 그가 바틀비다. 처음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바틀비를 변호사는 미더워한다. 그런데 어느 날 바틀비가 변호사의 작업 지시를 거부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일을 같이 하자는 변호사의 말에 바틀비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는 이상한 문장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거부한다. 처음에는 원본과 필사본을 상호 대조하는 작업을 거부하는 것을 시작으로 바틀비는 나중에는 모든 작업을 거부한다. “I would prefer not to”라는 문장으로. 거기서 더 나아가 바틀비는 사무실을 아예 자신의 숙식처로 삼아버리기까지 한다. 급기야 변호사는 바틀비를 쫓아내지도 못하고 사무실을 옮겨버린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바틀비는 사무실이 옮겨간 뒤에도 여전히 그곳에 상주한다. 바틀비 문제를 해결하라는 요청을 받은 변호사는 바틀비에게 일자리를 알아봐주겠다거나 심지어는 자신의 집에 들어와 살라고 제안하지만 바틀비는 그 모든 제안을 거부한다. 예의 “I would prefer not to”라는 문장으로. 결국 바틀비는 부랑자 수용소로 보내지고 거기서 죽게 된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 변호사는 바틀비의 과거를 찾아 나선다. 워싱턴 D.C.에서 수취 불능 우편물dead letter을 처리하는 일을 했던 것이 변호사가 알아낸 바틀비의 과거의 전부였다.

우리는 이 “I would prefer not to”라는 문장에 관심을 쏟았다. 일상적인 문장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I would not prefer to“로 부정문일 것인데, 바틀비의 말은 긍정문도 아니고 부정문도 아닌 새로운 결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운덕에 따르면 이 문장의 독일어 번역은 “Ich moechte lieber nicht차라리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로, 일본어 역은 “しないほつがいいのてすが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0”로 옮긴다(이 묘한 언어의 결은 한국어의 아이 말에서 가끔 표현된다. “나 안하고 싶어”와 같은 것이 그 예다). 아감벤은 ‘무위inoperosità’라는 개념으로 바틀비를 해석한다. 그의 ‘무위의 불량배voyau desœuvré’는 순수하게 잠재적인 존재로서, 비-존재, 비-행위할 수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변호사는 바틀비에게 “…이거나 …이거나either/or”의 선택을 요구하지만 바틀비는 “나는 당신을 안 떠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 아감벤은 이것을 바틀비가 새로운 선호의 논리를 발명한 것으로 본다. 즉 ‘…할 잠재성과 …하지 않을 잠재성의 비구분지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바틀비는 구분 자체를 구분하면서 그 경계 위에 있게 된다. 현실에서는 언제나 이것 아니면 저것이지만, 잠재성 속에서 그 둘은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그렇다면 아감벤의 말대로 바틀비는 과연 새로운 선호의 논리를 발명한 것일까? 그렇다기보다는 새로운 언어의 결을 만졌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논리는 상황에 따라 번복될 수 있지만 이 결을 한번 만진 사람은 다시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바틀비는 죽어가면서까지 모든 도움의 손길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아감벤이 노자老子를 참고했는지는 모르지만 미묘한 언어의 결은 이미 노자의 무위無爲의 개념에서도 뚜렷하게 활용된 예가 있고, 천장지구天長地久와 같이 결을 꼬고 비틀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개념들을 시공간의 틈에서 동시에 제시하기도 한다. 天長地久는 원래 문법대로라면 天久地長으로 ‘하늘(시간)은 오래되었고, 땅(공간)은 넓다’로 쓰여야 한다. 그러나 노자는 이것을 착종시킴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하나로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꼬인 언어의 결을 따라 노자의 세계관을 따라간다. 아마도 “I would prefer not to”라는 바틀비의 말을 들은 변호사는 에드윈 애벗의 플랫랜드에 나오는 3차원 인간의 목소리를 들은 2차원 인간과 같은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예술가는 항상 숨겨진 차원에 어이없이 끌리고 있는 변호사와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거부할 수는 없는 어떤 매혹.

“I would prefer not to”처럼 부정어의 위치에 의해 만들어지는 새로운 의미의 결과 天長地久와 같이 형용사가 꼬이면서 이루어지는 착종의 결은 이것/곳과 저것/곳에 동시에 존재하며 연결된다. ‘연결합 도시’는 이러한 동시적 사건을 통해 현대도시가 조장하는 파편화된 삶을 인간 의식의 저변에서 통합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따라서 ‘연결합 도시’의 설계도는 도면을 통해서 구현될 수가 없었다. 도면이나 이미지가 갖는 그림자로서의 3차원적 한계는 우리가 구현하려고 한 연결의 상을 제대로 나타낼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설계도로 채택했다. 그 결과 소설에 나타난 상들을 연결하여 전체적으로는 매듭과 같은 모델을 제시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 모델이 무한한 매듭이 되길 바란다. 무한한 매듭의 교차점에서 만나게 될 또 다른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던질 질문이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이 글은 고등과학원 초학제연구총서 7권 <연결합 도시>(이학사, 2017)에 수록된 글입니다.

함성호
건축디자인 실험집단 EON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