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여름 서울 홍릉의 고등과학원KIAS을 매주 찾았다. 고등과학원의 한 수학자가 진행하는 ‘특별한 수업’ 참석이 목적이었다. 그는 고등과학원의 자기 방에서 6명 안팎의 일반인을 대상으로 수학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일하는데, 여름 방학을 이용해 한국에 와 있었다. 강의는 한 출판사가 기획했고, 강의 내용은 나중에 책으로 낸다고 했다. 옥스퍼드대학에 대한 환상이랄까 하는 것도 있고, 수학자 강의를 직접 듣는다는 건 어떤 것일까 궁금해서 매주 빠지지 않고 나갔다.

강의에 가보니 참석자가 다양했다. 중고교 수학 선생님, 과학고 2학년생, 중학생, 게임 업체에 다니는 40대 남성, 30대 여성, 20대 여성이 참석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는 강의 시작 직전에 ‘수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물어보는 질문을 이메일로 보내왔다. 그리고 ‘특별한 강의’ 첫 시간에 고등과학원에 있는 그의 연구실에서 열린 첫 수업에서 참가자 한 명 한 명에게 왜 수학 공부에 관심이 있는지를 물었다. 내가 당시 그의 이메일에 보낸 답장을 찾아보니 남아 있다. 그대로 옮겨 본다.

“‘수학이란 무엇인가’를 물으셨습니다. 네, 질문을 받고 생각했습니다. 수학이란 무엇일까? 제가 왜 ‘수학’에 관심이 있는가를 말씀드리면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수학 공부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고교 시절 문과 출신으로 수학을 공부한 게, 수학과는 마지막 접점이었습니다. 대학에 간 이후 그리고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까지 ‘수학이 필요한 순간’을 딱히 느껴본 건 없었습니다. 그러는 도중, 때때로 학교 다닐 때 미적분을 뭣 때문에 그리 힘들여 공부했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수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순간이 왔습니다. 약 7, 8년 전부터 과학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재밌더군요. 새로운 세계였습니다. 특히 물리학책을 읽으면서, 수학이 궁금해졌습니다. 물리학자는 ‘신은 수학자인가’라고 묻고, ‘수학은 자연을 이해하기 위한 언어’라고 말하더군요. 그게 무슨 뜻인지를 알 듯합니다. 그래서 수학에 대한 관심이 생겼습니다. 저는 수학이 자연을 알기 위해 필요한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이 궁금합니다. 그래서 수학이란 언어를 공부하고자 합니다. 고맙습니다.“

‘특별한 수업’의 다른 참석자는 어떻게 그 자리에 오게 됐는지 모른다. 물론 출판사 사이트를 통해 참석 신청을 받기는 했다. 나에게는 해당 출판사가 먼저 접촉을 해왔다. 그건 내가 ‘수학지옥’이라는 공부 모임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3년 전부터 지인들과 ‘수학지옥‘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교양 수학책들을 읽고 있다. 놀라운 분들이다, 수학 독서모임이라니.

내가 수학책을 읽는다니, 이과 출신인가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아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나는 고교 문과 출신이고 전형적인 문과형 먹물이다. 수학, 좀 더 정확히 하면 미적분 지식은 고교를 졸업하고 세상살이하는 데 쓸 일이 없었다. 나는 1980년대 중반 신문사에 들어가 신문기자로 오래 일했다. 사회부에서 시작해 편집부, 생활부, 문화부, 국제부, 정치부기자로 일했다. 신문은 세상만사의 유의미한 정보를 수집, 전달하는데, 과학 분야에는 무관심했다. 과학부라는 이름을 가진 조직이 한때 있었다. 헌데 불과 몇년 존재했을 뿐이다. 과학부는 이후 ‘경제과학부’라는 이름으로 용해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편집국 내 부서 이름에서 아예 사라졌다. 신문은 그 사회의 일정한 부분을 반영하고, 일간지의 과학 무관심은 한국사회의 흐름을 비추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다닌 신문사 편집국에는 기자가 350명 정도 됐는데, 거의 대부분이 문과 출신이기도 했다. 이과 출신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지 않을까 싶다. 지금 주필이 이례적으로 공대 출신일 뿐이다. 나 역시 그런 편집국 분위기 속에서 과학자가 무엇을 하는지 몰라도 내 삶은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과학전문기자는 있었으나, 신문이라는 상품을 빛내는 존재는 아니었고, 구색 맞추기에 그쳤다. 나는 시사 관련 책과 역사 책을 읽었다.

내 책장이 뒤집힌 건 8년 전쯤부터다. 철학책들이 뽑혀 나갔고, 과학책 812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50대 초반에, 신문사가 발행하는 주간지 편집책임 일을 맡았다가 나는 ‘과학’을 발견했다. 나이로 봐서도 그렇고 근무 환경이 달라지면서, 내 삶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오래됐으나 진부하지 않은 주제를 붙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남들이 그러하는 대로 ‘철학’ 책에서 내 삶의 지도를 발견하고자 했다. 한 2년 그렇게 살았다. 회사 일에 쫓겨 멀리했던, 밀린 철학책을 허겁지겁 읽기 시작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어느 해 여름철 휴가 때 집에서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이때가 아니면 언제 읽겠는가‘ 하는 각오로 공부한 게 기억난다. 누구나 이름을 알지만 누구도 읽지 않은 책이 고전의 또 다른 정의다. 그 책을 붙잡고 살았다. 플라톤의 『국가』, 스피노자의 『윤리학』, 니체의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가 그때 읽은 책들이다.

해설서보다 원전을 찾아 읽은 건 기자 생활의 경험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기자는 뉴스원을 직접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고 훈련받았기 때문이다. 철학자가 뭐라고 썼는지 직접 그들의 문장을 읽고 싶었다. 서양철학을 어느 정도 섭렵했다고 생각했을 때, 동양철학으로 넘어왔다. 공자 맹자부터 읽기 시작해, 주희의 『근사록주해』, 왕양명의 『전습록』까지 읽었고, 불교 고전에서는 『아함경』, 『금강경』, 『화엄경』 그리고 『벽암록』을 읽었다. 좋은 말들이 가득했고, 그걸 보면 뭔가 뿌듯한 느낌을 받았다.

현대 철학자의 어젠다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들도 공부했다.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천개의 고원』을 폈다. 그런데 내게는 이들이 맞지 않았다. 일부 철학자의 글에는 이를 빠득빠득 갈지 않을 수 없었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번역한 책에 등장하는 문장은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다. 영어판을 구해 비교해 가며 읽으니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조금 이해가 되긴 했다. 번역자를 탓하고 ‘철학자’에게 화를 내고 싶어졌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왜 그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하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평생 글을 쓰는 직업에 종사해왔기에 글은 메시지가 명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랬기에 일부 철학자의 모호한 글이 더욱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 20세기 후반을 풍미했으나, 그들이 알아낸 건 무엇인지 의문스러웠다. 접속-배치-생성-재배치와 같은 언어들이 말장난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때쯤 과학책을 손에 잡았다. ‘서울대 필독도서 100권‘ 목록에 나와 있는, 그리고 내가 읽지 않은 책들이 뭐가 있는지를 살피다가 과학 분야 책에 시선이 간 게 계기였다. 『이기적 유전자』, 『종의 기원』을 사서 읽었다. 『순수이성비판』을 읽은 사람이 『종의 기원』을 못 읽어내겠는가? 그런데 이들 책을 읽고 깜짝 놀랐다. 지축이 흔들리는 충격을 받았다. 물리학자, 생물학자가 나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게 나의 ‘과학 시대’ 시작이다. 그리고 과학의 세계로 급회전한 뒤에는 계속 안으로 안으로 달리고 있다.

『이기적 유전자』는 영국 행동동물학자 리처드 도킨스 책. 그 책을 보니 나는 누구인가, 나는 이런 행동을 왜 하는가를 새로운 시선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도킨스의 이 책은 ‘유전자 선택론’이라는 생각이 핵심이다. 자연선택의 단위는 유전자이고, 유전자가 자신들의 불멸의 신화를 위해 만든 게 생명체의 몸이라는 생각이다. 도킨스의 유명한 문장은 내가 보기에 이것이다. “우리는 유전자라고 알려진 이기적인 분자를 보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로봇 차량vehicle이다”. 나의 성행동, 가족 간의 사랑과 유대가 왜 형성되어 있는지를 도킨스의 책은 설명하고 있었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개미연구자 에드워드 윌슨의 책 『인간 본성에 대하여』도 인간의 종교 본능, 부족주의와 인종주의의 기원 등등을 너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영국 철학자 존 로크의 『인간오성론』도 훌륭한 책이지만, 생물학자가 해주는 이야기는 참으로 명료하게 들려왔다. 다윈의 『종의 기원』을 보면서는 다윈이 이토록 미문가였나 하는 걸 많이 느꼈다. 『비글호 여행기』, 『종의 기원』,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이라는 다윈 삼부작은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그는 문장이 뛰어난 문필가이기도 했다.

과학책을 읽다 보니, 과학의 세계를 구경하기 위한 지도가 필요했다. 그러다가 찾은 게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PCTP의 추천도서 50권 리스트다.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이 모여서 자연과학의 분야별로 좋은 책들을 소개해 놨기에, 내게는 도움이 되었다. 50권을 모두 읽겠다는 각오로 시작했다. 한 권 읽을 때마다 50권 리스트에서 책 이름에 빨간 줄을 쳤고, 그 책들을 결국 모두 읽어냈다. 그리고 독후감을 매번 썼다. 그걸 블로그에 올렸다. 이 50권에 포함된 책이 연세대 천문학자 이석영 교수의 대중과학서 『모든 사람을 위한 빅뱅우주론』이다. 나는 이 책 앞쪽에 나오는 문장을 읽고 당황하고, 놀랐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현대인 대부분은 오늘날이 과학사와 지성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시대인지 모른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을 발견해 지동설의 문을 열게 된 날, 뉴턴이 중력의 존재를 알게 된 날, 아인슈타인이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이라는 걸 알게 된 날 일어났던 그런 지식 혁명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 바로 이 순간, 인류 최대의 질문인 우주의 기원과 운명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50년쯤 지나면 과학 교과서가 말할 것이다. 2010년경에 드디어 인류가 우주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알게 되었다고.”

밤낮으로 과학책을 읽으며, 어떻게 이런 걸 모르고 살았지 하는 말을 반복하고 반복했다. 그리고 옆 지기에게는 과학책에서 발견한 놀라운 문장을 얘기해주곤 했다. 그런 문장 중의 하나가 이것이다. “수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면 인간으로 변한다”. 우주의 탄생에서 생명의 탄생, 인간의 진화까지를 한 줄로 압축한 문장이다. 영국 천문학자 에드워드 해리슨1919-2007이라는 사람이 남긴 말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의 하나이다. 해리슨이라는 학자가 뭘 연구했는지는 모르나, 그가 과학자로서 오랜 사색을 통해 남긴 이 문장, 좋다.

나에게 등불이 된 과학책들이 있다. 사이언스북스의 ‘사이언스 클래식’ 시리즈(현재까지 35권 나왔다), 뿌리와이파리 출판사의 ‘오파비니아’ 시리즈(지금까지 18권)이 특히 그렇다. 그리고 『우주의 구조』 등 승산출판사의 물리학과 수학 책들, 『시간의 역사』 등 까치글방의 물리학, 생명과학, 수학책들. 『블랙홀과 시간 여행』 등 반니 출판사의 과학책들은 귀하다. 그리고 바다출판사, 요즘 대중과학서 시장에서 약진 중인 동아시아 출판사 책이 있다.

과학책에서 읽은 걸 다른 이와 나누고 싶었다. 많은 사람이 이런 걸 모르고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을 썼다. 『나는 과학책으로 세상을 다시 배웠다』를 지난해 10월에 냈다. 내가 블로그에 쓰고 페이스북을 통해 홍보하고 하는 걸 본 바다출판사의 김인호 사장이 책으로 내자고 제안해서 세상에 나오게 됐다. 책은 나오자마자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오늘의 책’으로 추천됐고, 서울 선릉역 인근의 ‘최인아 책방’의 11월 북클럽 추천도서가 되기도 했다. 인기를 모아 한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판매순위에서 앞서기도 했다.

20세기 과학지식을 흡수하면서 나는 어두움에서 많이 벗어났다. ‘나는 어디서 왔나,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나‘ 하는 ’빅 퀘스천‘에 대해 과학자가 알아낸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재 조건을 더 이해하게 되었다.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이나, 인간의 존재 조건을 찾아보니 딱히 의미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자연과학은 삶에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생명은 왜, 어떻게 출현했는지 모르는 물질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현상일뿐 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유전자라는 복잡한 분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인간은 유전자의 불멸을 위해, 니체식의 표현을 빌면 세대를 잇는 다리와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나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 데서 다시 출발해야 했다. 내 삶은 무의미의 황무지에서 내 손으로 일으켜 세워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또한 공연히 거대한 존재를 상정하며 두려워할 것이 없고, 사후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피렌체의 작가 단테 알리기리에는 중세의 우주관과 종교관을 가지고 『신곡』을 썼고, 그 안에 지옥과 천국, 연옥을 만들어놓았다. 그런데 지옥과 천국, 염라대왕의 심판, 그런 건 없었다. 다만 상징으로 받아들이면 될 일이었다. 눈앞을 가렸던 안개가 한눈에 걷히는 것 같았다.

과학책을 읽으면서 나는 노년기를 위한 마음의 근력을 키우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입자물리학, 우주론, 천문학, 진화심리학, 진화생물학, 유전학, 신경과학, 진화인류학, 수학, 영장류학, 과학사 책이 얼마나 재밌는지. 50대 초반에 이 과학책을 읽지 않았으면, 이번 생은 망할 뻔했다고도 생각한다. 과학책으로 난 길을 우연히 발견했기에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중고교 때 배운 과학지식으로 살아갈 뻔했다. 생각만 해도 억울한 일이고, 그렇지 않았기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내 삶은 조금 더 단단해졌다고 생각한다.

이전에 정치부 기자 시절 혹은 국제부 기자 시절 나를 만난 사람은 나의 변신에 의아해 하는듯하다. ‘과학작가‘를 표방하는 나의 변신은 나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으니, 이해한다. 이 글을 읽는 일반 독자도 과학과 수학을 만나길 권한다. 책, 어렵지 않느냐고? 천만의 말씀. 얼마나 재밌는데. 수식이 없는 책들이다. 자연을 이해하면 내가 왜 여기 있는지와 관한 기초적인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고, 그게 우리 삶의 기본 지도가 된다고 생각한다.

매주 과학자를 만나 그들에 관한 기사를 내가 다니는 주간지에 쓴다. 그의 연구 주제와 한 과학자의 탄생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잡지 지면 기준 4쪽 분량이니 결코 적은 양이 아니다. 물리학자와 천문학자를 만났고, 요즘은 화학자를 만나고 있다. 덕분에 고등과학원을 처음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물리학자 두 사람을 만났다. 이론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화학자를 만난 뒤에는 수학자를 만나보고 싶다. 수학자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지 몰라, 아직은 주저하고 있다. 한 번 만나서는 그들의 연구를 이해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나름 자신이 생기면 고등과학원의 수학자를 만나러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때 마다하지 말고 수학 이야기를 들려주시길 기대한다. 물론, 컴퓨터계산 분야도 궁금하다.

최준석
과학 작가/주간조선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