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1951년 유엔교육문화기구UNESCO, 이하 유네스코는 세계 각국의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한 인종에 관한 공동 성명을 제시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배경을 “인종의 불평등이라는 교의”가 확산된 데서 찾고, 오늘날의 “평화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인류의 지적, 도덕적 연대”가 필요하다고 명시한 유네스코 헌장(1945)을 고려하면, 유네스코 인종 선언문은 인종 간 생물학적 우열이 존재한다는 과학적 인종주의가 과학적으로 틀렸음을 인류 전체에게 널리 알리려는 시도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다만 실제로 당시 성명 작성에 관여한 과학자들이나 국제 과학자 공동체가 이런 유네스코의 도덕적 이상이 담긴 인종 선언문을 “과학적”으로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당시 선언문 초안을 작성, 배포, 수정, 확정하는 과정에서 과학자들은 인종주의를 퇴치하는 것처럼 사회적으로 좋은 과학이 과연 과학적인 관점에서 옳은 과학일 수 있는지를 두고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다. 그리고 이런 논쟁 가운데 등장한 과학의 본성에 관한 여러 질문들은 오늘날에도 인간 과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이 글은 이런 유네스코 인종 선언문 논쟁을 소개하고 그 현재적 함의를 간단히 고찰해보려고 한다.
본론에 앞서 독자의 혼란을 막기 위해 전제해둘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인종 개념, 즉 특정 인종의 성격, 기질, 지능, 문화적 수준 등을 묶어서 하나의 단일한 유형처럼 보는 소위 유형론적 인종 개념은 지난 세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반복해서 논박되었다는 사실이다. 인류는 유전적 다양성이 다른 종들에 비해 현저히 낮을 뿐만 아니라, 인간 집단 내 유전적 변이다형성, polymorphism가 집단 간다형종, polytypy보다 더 크다. 그리고 인간의 생물학적 변이는 연속적이어서 부족, 문중, 국민, 인종 등과 같이 한 집단을 다른 집단과 분명하게 구별하는 분류가 문화적으로는 유의미할지 몰라도 생물학적으로는 작동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연속변이적clinal 성격 때문에 지리적으로 가까운 집단 사이에서 더 큰 외형적, 유전적 유사성이, 먼 집단 간에 차이가 두드러진다.
연구 목적상 생물학적 실재로 간주되는 것을 굳이 찾자면 인류 유전학자들의 탐구 대상인 집단population을 들 수 있다. 집단은 생식의 차원에서 다른 집단들로부터 비교적 격리된 상태로 지역적인 환경에 대한 유전적 적응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그 규모가 매우 국소적이므로 대륙별 수준에서 차이를 가정하는 인종 개념과 적절하게 들어맞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집단을 무리 짓는 방식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관련 전문가들 모두가 동의할만한 분류 방식이 없기 때문에 연구자의 실제 의도가 어떻든 간에 다소 자의적으로 집단 분류가 이루어지게 된다. 많은 인간 집단에 대한 유전학 연구들은 연구 피험자 모집과 관련된 실용적인 혹은 기타의 이유로 세속적인 인종 분류에 부합하는 형태로 집단을 나누게 되는데, 이런 과정을 잘 모르는 외부인들은 마치 최근 과학 연구들이 인종의 과학적 실재성을 확증했다고 오해하기 쉽다. 이 글에서 주로 다루는 시기인 1950년대 초반은 과학자들이 유형론적 인종 개념이 문제가 있다는 데에는 동의했지만, 여전히 많은 연구자들이 집단 개념을 통해 본인들이 전통적으로 수행해 오던 “인종간 차이”에 대한 연구들을 지속할 수 있다고 믿던 시기였다.
당시 유네스코가 굳이 과학자들의 인종에 대한 공동 성명을 만들어내려고 애썼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사회적 문맥을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 세계대전 이후 유엔United Nations은 전쟁을 야기한 국가들 간의 갈등 요인들을 찾아내고 이를 국제 협력을 통해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유네스코 자연과학국은 비과학적인 무지와 편견을 참화의 주요 배경으로 진단하고,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과학적 사고를 일반 대중에 보급하면 파시즘과 같은 비합리적이고 반민주적인 사고들을 막아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특히 과학적 사고뿐만 아니라 현대 과학의 사회적 함의를 올바르게 전달하여 비합리적인 믿음들을 퇴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유네스코 구성원들에게 널리 공유되었다.
이 가운데 1947년 유네스코 총회에서 자연과학국 산하에 과학 대중화 부서를 창설하는 일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유전학의 “사회적 함의”를 토의할 협의체 구성이 제안되었다. 당시 유네스코 소속 과학자들은 “인류 유전학”이라는 과학 분야가 “실용적 가치를 지닐만큼 진보한 상황”으로 “인류의 평등equality을 확고한 과학적 기반 위에 놓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보기에 “유전학은 이미 과학 전선에서 인종주의자들과 투쟁하고 이들을 일소시키는 데” 기여해 왔으므로, 인종에 관한 과학 논의들을 정리하여 대중들에게 전파시키면 인종주의는 자연스레 타파될 것이었다.
유네스코의 상위 기관인 유엔에게 유네스코의 구상은 시의적절해 보였다. 유엔은 구 제국주의 국가들과 전후 신생국들을 모두 아우르는 능력주의적 민주주의에 기초한 세계 정치 질서를 수립하는 데 진력했다. 이런 정치 질서 구상에서 인류의 단일성과 인종 평등이 중요한 가치로 부상했다. 이 같은 이유로 1948년 유엔사회경제위원회는 유네스코에게 “인종 편견을 소멸시키기 위해 과학 지식들을 확산시킬 프로그램 채택”하기를 제안했고, 이듬해 유네스코는 “인종 질문에 관한 과학적 사실의 연구와 확산”이란 제목의 사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인종 편견의 대응책으로 유전학의 사회적 함의를 대중화하기를 제안한 것은 자연과학국 소속의 과학자들이었지만, 인종 편견이 사회적 문제로 여겨지면서 해당 사업을 주도권을 유네스코 사회과학국이 쥐게 되었다. “인종 질문에 관한 과학적 자료들의 연구 및 수집”, “수집한 과학 정보의 대중적 확산”, 그리고 “수집한 정보에 기초한 대중 교육 캠페인 마련”으로 이루어진 이 사업의 세부 프로그램들 가운데 핵심 기획은 인종에 관한 선언문 작성을 위한 전문가 국제회의였다. 회의는 1949년 12월 12-14일에 파리의 유네스코 하우스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구조주의 인류학으로 유명한 프랑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를 포함한 여덟 명의 인류학 및 사회학 전공자들이었는데, 이런 사회과학 중심의 전문가 구성은 해당 사업이 사회과학국에 의해 주도된 결과였다.
애슐리 몬터규Ashley Montagu는 이들 가운데 독특한 이력과 유달리 목소리가 큰 영국계 미국인 인류학자였다. 그는 미국 문화 인류학의 시초로 언급되는 프란츠 보아스Franz Boas를 스승으로 두었으며, 그를 좇아 체질(생물학적) 인류학 연구를 통해 인종 차이에 대한 생물학적 결정론을 비판하고 문화적 영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일찍이 1942년부터 인종 개념을 비판해 온 몬터규는 그의 경력 전체를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데 쏟아부었으며, 생물학을 이런 비판의 핵심적인 수단으로 보았다. 인종 전문가 회의에서 그는 최근의 체질 인류학과 유전학 분야의 과학적 발전이 인종 개념을 재구성하고 중이라며, 인종 개념의 정의나 문제를 사회적 요인들과 연관 지어 보려는 다른 사회과학자들에 대항해 인류의 평등성을 과학적 기반에서 찾기를 강하게 주장했다.
몬터규에 따르면 인종 간 정신적 수준의 차이, 혼혈생식의 우생학적 위험 등은 이미 모두 과학적으로 논박되었다. 철저한 반인종주의자였던 몬터규는 나아가 집단 간 생물학적 차이를 함축하는 “인종” 개념 대신 인간 집단 간 문화적 차이를 강조하는 “종족ethnic groups”이라는 범주를 사용하는 내용 또한 성명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회의에 참여한 사회학자들은 몬터규의 과학주의에 회의를 표했다. 그들이 보기에 인종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불가능하고, 인종적 차이는 생물학적 기반이 없더라도 사회문화적, 정치적 영향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결국 몬터규의 의견대로 인종 개념을 “체질 인류학과 생물학”에 기초해 정의하고 제안하는 안이 채택되었다. 이처럼 성명 작업이 자연과학을 토대로 삼을 것으로 결정되자, 회의 참여자 가운데 과학적 논의에 밝은 몬터규가 자연스레 성명서 초안 작성을 주도하게 되었다.
몬터규가 전문가 회의를 통해 작성한 초안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첫째, 인간 집단 간 생물학적 차이는 진화적 힘의 결과이며, 신다윈주의적 의미에서 인류는 “집단들”로 이루어져 있다. 둘째, “인종”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변화하는 유전 물질 혹은 물리적 형질들의 총합으로 규정될 수 있는 집단이다. 셋째, 인간 집단들은 지능과 행동을 포함한 그들의 정신적 능력에서 어떠한 차이도 갖지 않는다. 넷째, 혼혈생식은 “퇴락”과 혼동될 수 없는 생물학적으로 건전한 현상이다. 다섯째, 현대 생물학은 인간이 내적으로 “보편적 형제애”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경향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유네스코 사회과학국은 해당 초안의 과학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자연과학국의 동료 과학자들과 저명한 유전학, 생물학 전공자들을 초청해 외부 전문가 평가를 실시했다. 외부 평가자들은 초안이 전반적인 방향성은 옳지만 “과학적 증거”가 없는 단언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유네스코의 초대 사무총장이자 진화생물학자인 줄리언 헉슬리Julian Huxley, 유전학자 레슬리 던Leslie C. Dunn,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Teodosius Dobzhansky와 같은 유전학자들과 심리학자 오토 클라인버그Otto Kleinberg에게 “집단 간의 생물학적 차이가 서로 다른 행동 패턴이나 정신적 형질 차이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거나 인종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아무 의미가 없음을 시사하는 현 초안은 과학적 결론이라기보다는 “교조주의적 단언”처럼 보였다.
이런 유네스코 안팎의 자연과학자 동료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몬터규는 일부 내용만 부분적으로 수정한 채 원안을 고수했다. 몬터규는 유네스코 초대 사무총장이자 당시 가장 저명한 진화생물학자였던 헉슬리가 외부 자문단에 자신의 이름을 넣지 않을 것이라고 위협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결국 전반적인 내용은 몬터규가 처음 작성한 초안과 유사한 형태로 유지되었다.
1950년 7월 18일, 위와 같은 유네스코 내부의 논쟁을 뒤로 한 채 인종에 관한 과학자들의 최초의 공동 성명인 “인종 질문The Race Question”이 출판되었다. 이 선언문은 이듬해의 수정본과 1964년, 1967년, 1978년에 걸쳐서 개정되어 제출된 유네스코 인종 성명의 시발점이었다. 1950년 유네스코 성명의 요약인 [표1]에서 드러나듯이, 자문 결과를 반영해 일부 추가된 내용들이 있기는 하지만 몬터규의 주장, 즉 인종은 통계적 집단 개념에 비해 부차적이고, 적용하기도 어려우며, 생물학적으로 별 의미가 없고, 정신적 형질과는 거의 무관하다는 내용이 여전히 중심적으로 남아 있었다. 몬터규는 이 성명이 나치 대학살로 상징되는 인종주의적 비합리성에 대항하는,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과학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믿었다.
성명이 출판된 직후 세계 언론이 보인 반응은 유네스코 사회과학국 당국자들을 들뜨게 했다. 예를 들어 1950년대 초에 사회과학국은 인종 성명을 보도한 기사가 200편이 넘고, 이들 모두 유네스코의 과학을 이용한 인종 편견 퇴치를 호의적으로 평가했다고 파악했다. 유네스코의 기관지 『쿠리에Courier』는 이 성명을 “세계의 과학자들로부터 보편적으로 인준된” 것으로 홍보했다. 특히 1954년 미국의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에서 연방 대법원이 백인과 유색인종을 같은 공립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하는 인종 분리주의 법이 위헌이라고 판결하는 데 중요한 “과학적 근거”로 1950년 인종 성명을 채택하면서 유네스코의 기획이 구현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세계의 과학자들”의 “보편적 인준”이라는 표현이 무색하게 유네스코 성명은 출간 후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아 각국의 과학자 집단들로부터 공격받기 시작했다. 포문을 연 것은 영국왕립인류학연구소의 임원이자 연구소의 학술잡지 『인간Man』의 편집장 윌리엄 팩William Fagg이었다. 1951년 1월에 팩은 자신의 저널에 유네스코 성명에 관한 세계 각국의 체질 인류학자들의 의견을 담은 서신 특집호를 실었다. 이 특집호는 성명에 관해 수많은 비판들로 채워져 있었다. 여러 저자들의 공통된 비판은 다음의 세 가지였다. 첫째, 선언문은 인종에 관한 사회적 개념과 생물학적 개념을 분별없이 뒤섞을 뿐만 아니라 후자가 부적절한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인종의 생물학적 우열의 부정을 넘어서 생물학적 인종 개념을 거부하는 것은 당시 대다수의 체질 인류학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다. 둘째, 인종적 차이가 정신적 형질에 미치는 영향이 없다는 주장 역시 당시까지 과학적으로 전혀 입증되지 않았다. 셋째, 생물학 연구가 인간이 보편적 형제애를 추구하는 성향이 있다는 단언은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다. 특집호의 체질 인류학자들은 마지막 문제, 인간이 보편적 형제애를 추구한다는 논의를 가장 문제 삼았다. 그들이 보기에 유네스코 성명은 “과학적 정리라기보다는 철학적, 이데올로기적 독트린에 더 가까운”, 또 “과학적 사실에 기초”하기보다는 반인종주의를 목표로 한 프란츠 보아스의 문화인류학이라는 “특정한 인류학파의 소망”을 토대로 한 “단언들”이었다.
팩은 보편적 형제애 논의가 유네스코 성명이 아마추어 “평등주의자들”의 작품임을 잘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팩이 보기에 그 아마추어들 가운데 체질 인류학자라고는 몬터규뿐인데, 그는 몬터규마저도 “결단코 [과학의 관점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주장만 되풀이한다고 비판했다. 이후 유사한 종류의 비판이 남아프리카 공화국 및 네덜란드 체질 인류학자들의 항의 성명, 유럽 각국의 인류학자들의 서신, 미국체질인류학회의 성명 등에서 반복되었다. 이들에게 유네스코 성명은 평등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위해 인종 개념을 과학의 영역에서 부당하게 일소하려하는 시도였다.
유네스코 사회과학국은 체질 인류학계의 비판에 굴복하고 성명을 수정하기로 결론지었다. 사회과학국은 1950년 성명의 “원죄”를 “저명한 생물학자들과 체질 인류학자들”을 포함시키지 않은 데서 찾았다. 그 결과 유네스코 성명의 외부 평가를 맡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가장 저명한 유전학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레슬리 던의 주도로 2차 국제 전문가 회의가 조직되었다. 던 역시 “인종에 관한 생물학적 문제에 해당하는 영역에 전문성을 가진 집단, 즉 체질 인류학자들과 유전학자들의 권위를 확보하지 못”해 비판 받았다고 생각했다.
1951년 6월 4-8일 유네스코 하우스에서 이루어진 2차 국제 전문가 회의는 과학적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철저히 체질 인류학과 유전학 전문가들로만 구성되었다. 여기에 참여한 열세 명의 전문가로 『인간』에 1950년 성명을 비판하는 글을 게재한 체질 인류학자 앙리 빅토르 발루아Henri Victor Vallois와 당시 국제 생물학계를 이끌던 도브잔스키, 헉슬리, J.B.S. 할데인J.B.S. Haldane 등이 이름을 올렸다. 비록 환영받지는 못했지만 1차 성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몬터규 역시 참여했다. 그에게는 다만 옵서버 자격만이 주어졌다.
같은 해 9월 전문가 회의의 결과물로 “인종의 본성과 인종적 차이에 관한 성명”이 출간되었다. 이 1951년 성명에 관해 외부 의견들을 수렴하고 반영한 최종 성명은 1952년 5월 26일에 “인종 개념: 질의에 관한 결과들The Race Concept: Results of an Inquiry”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로 출판되었다. 2차 성명은 1950년 성명의 내용 가운데 평등주의적, 윤리적 단언으로 지적된 부분들을 삭제하고, 생물학적인 내용에 관한 사실만 전달하는 논조로 서술되었다. 2차 성명 작성에 참여한 체질 인류학자 해리 샤피로Harry Shaprio에 따르면, 이는 전반적으로 “문화결정론적” 입장과 이에 기초한 평등주의의 이상을 강조하는 내용들을 없앤 동시에 “최선의 과학적 의견을 대변”하고 과학계의 “일반적 합의의 총체”만을 서술한 결과였다. 수정 성명은 인종주의에 대해서는 1950년 성명과 동일하게 거부하는 입장을 취했지만 “인종”이라는 개념 자체는 생물학의 분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이와 함께 “인종적” 분류의 정치적, 사회적 함의를 제거하여 인종 개념을 과학적 연구에 이용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내용을 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수정 성명은 국적과 인종을 혼동하는 것은 오류이며 유전학적으로 “집단”에 해당하는 것에 한해서 인종 범주를 활용해야 한다고 적시했다. 마지막으로 인종적 차이가 정신적 형질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현재로서는 알 수 없고 더 연구가 필요하다며 여지를 남겨두었다.
수정 성명은 유네스코 바깥의 과학자들을 만족시켰을까? 많은 유전학자들과 체질 인류학자들은 과학자 동료들이 작성한 수정 성명도 여전히 문제가 많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영국의 유전학자 달링턴C. D. Darlington은 행동 영역에서의 인간 집단 간의 차이의 존재는 흑인이 운동이나 음악 영역에서의 탁월성을 보이는 것처럼 일상에서 흔히 확인할 수 있으며 이런 인종 간 차이를 인정하는 일은 “각 인종의 다른 재능, 능력, 역량들이 모든 인종들에 이득이 되도록 사용할 수” 있는 기회이므로 유네스코 성명처럼 굳이 부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체질 인류학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미국의 인류학자 쿤Carleton S. Coon은 나아가 특정 인종이 정신적, 형질적으로 더 우월하든 그렇지 않든 이는 평등의 문제와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인간이므로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몬터규가 상정한 것과 달리 평등에 대한 도덕적 질문이 반드시 생물학적 기반을 갖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의 대다수의 유전학자들과 체질 인류학자들이 보기에 인종 간 생물학적 차이의 존재를 인정하는 일이 반드시 사회적 “불평등”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었다. 유네스코의 기획은 평등주의와 같은 사회적 가치에 관한 문제를 과학의 영역으로 부당하게 끌고 들어와 올바른 과학 활동을 저해하고 있었다.
이후로도 유사한 종류의 비판이 인종 성명 수정안이 제출될 때마다 이어졌다. 1960년대 초반은 아프리카 지역의 탈식민화와 그에 따른 신생국들의 유엔 가입, 비동맹운동, 미국 내 소수자 민권 운동 등의 맥락 속에서 반인종주의 정치 지형이 심화되던 시기였다. 이런 정치적 기류 가운데 1962년에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는 인종 편견을 퇴치하고 인간 다양성을 기념할 방안으로 유네스코 인종 성명을 개정하기로 결의했다. 그 결과 과거와 비슷한 절차를 거쳐 수정된 인종 성명이 1964년에 최종적으로 제출되었다. 1964년 성명은 이전 성명들보다 생물학적 평등론과 문화 결정론이 매우 강화된 내용을 담았다. 예를 들어 해당 성명은 지능을 포함해 어떤 문제에 있어서도 “인종의 일반적 우수성이나 열등성을 생물학적으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분명하게 못 박고 “다른 집단 간 성취의 차이는 그들의 문화적 배경에 기인한 것으로만 보아야 한다”고 서술했다.
새로운 성명에 대해 시카고대학교의 생리학자 잉글Dwight Ingle은 십여 년 전의 달링턴이나 쿤과 유사한 방식으로 비판했다. 그는 과학적 진리가 당시 민권 운동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압력에 의해 왜곡되고 있다고 비판하며 1964년 성명을 “평등주의”의 오류를 지닌 것으로 규정했다. 드와이트는 과거 나치가 인종주의를 이용해 올바른 과학 활동을 훼손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는 평등주의라는 반대 극의 사회적 가치가 인종과 지능에 관한 과학적 문제들을 탐구하지 못하게 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50년과 달리 더 많은 과학자들이 지능 같은 정신적 형질에 인종적 차이를 찾는 것이 과학적으로 부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과거와 달리 커다란 논쟁 없이 몬터규와 동료들의 “상식적인” 반대 논평 하나로 종결되었다.
결국 논쟁의 쟁점은 인간 차이에 관한 과학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였다고 할 수 있다. 유네스코 성명 초안을 입안했던 몬터규나 이를 수정하는 데 참여한 전문가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어찌 되었든 인종 편견을 일소하고 평등이라는 가치에 확실한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 좋은 과학이며, 인간 과학은 이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시각에서 이루어진 가장 극단적인 결론은 1950년대 대부분의 유전학자들과 체질 인류학자들이 동의할 수 없는 몬터규의 입장, 바로 “인종”을 생물학적으로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유네스코의 과학자들이 사회적으로 좋은 과학을 인간 과학의 지향점으로 인식했다면, 성명에 비판적인 과학자들은 성명 입안자들이 전쟁 이전의 인종주의자들만큼이나 평등주의, 혹은 반인종주의적 신념에서 올바른 과학 활동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과학의 권위를 자신들의 사회적 신념을 정당화하는 데 부당하게 끌어다 쓴다고 생각했다. 이들에게 과학이란 사회적 가치의 투영이 없는, 과학 내부 규범에 의해 작동하는 독자적인 활동이어야만 했다. 이들은 사회적 선에 과학의 규범을 양보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인간 과학에서 ‘과학적 올바름’과 사회적 좋음을 둘러싼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2018년 봄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의 사설에서 하버드대학교의 유전학자 데이비드 라이크David Reich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걱정 때문에 인간 집단들 사이의 유전적 변이를 연구하거나 논의하기를 꺼린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최근의 인간 집단의 유전 다양성 연구들은 이런 정치적 올바름 때문에 더 이상 “‘인종들’ 간의 평균적인 유전적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시사했다.
과거와 오늘날 논쟁의 차이점은 적어도 라이크를 제외한 논쟁의 참여자들이 문제를 사회적으로 좋은 과학 대 과학적으로 옳은 과학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이해하지 않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많은 인문사회 연구자들과 자연 과학자들은 집단을 선정하고 분류하는 활동이 완전한 정치적, 사회적 진공 속에서 이루어질 수 없으며, 특히 과학 분야에서 인종 개념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으로 중요한 쟁점이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 결과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67명이 곧장 라이크의 주장이 문제적이라는 비판 성명을 냈다. 라이크의 주장과 달리 수많은 과학 연구들이 인간 종 내에 지리적 차이에 따른 유전적 변이가 존재한다는 점을 연구하고 드러내 왔지만, 동시에 이런 유전 변이의 패턴은 인종에 관한 생물학적 정의와도, 반대로 사회적, 문화적으로 매우 유동적인 인종 집단의 분류와도 들어맞지 않는다는 점 또한 보여주었다. 이 비판 성명은 사회적으로 좋으면서도 과학적으로도 올바른 인간 다양성 연구의 방향에 대해서도 제안했다. 사회과학자들 및 인문학자들과 더 많은 간학제적 협력을 통해 집단 분류에 사용하는 역사적 증거와 인종을 포함한 다양한 분류 체계들의 역사성과 사회적 성격들을 이해하고, 보다 사려 깊은 인간 다양성 연구를 수행하자고 말이다. 라이크와 다른 유전학자들이 이를 받아들이고 좋은 과학과 옳은 과학을 둘러싼 긴 논쟁을 끝낼지, 아니면 인간 과학 본성에 대한 새로운 논쟁을 일으킬지는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