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이라는 단어는 흔히 새로운 사실을 처음 알아내는 순간적인 깨달음이나 포착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발견의 우선성이 특히나 중요해지는 과학 분야에서는 그래서 때때로 ‘동시발견’의 문제가 발생하는데, 서로 다른 연구자들이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성과에 도달하면서 누가 먼저 발견했는가가 논란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에서의 발견은 한 개인의 순간적 성취라기보다는, 어떤 관찰과 해석이 언제 어떻게 알려지고 표준적인 지식으로 자리 잡게 되는지, 또 어떤 연구가 시대적, 사회적 조건 속에서 주목받거나 잊히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도 하다.
한스 아스퍼거Hans Asperger, 1906-1980의 자폐증 연구는 다양한 갈래의 논란이 있었던 동시발견의 대표적 사례이다. 오늘날 자폐증의 개념을 이야기할 때 흔히 레오 캐너Leo Kanner, 1894~1981를 ‘자폐증의 발견자’이자 소아정신의학의 선구자로 기억하지만, 아스퍼거 역시 거의 같은 시기에 캐너의 자폐증과 유사하면서도 독자적인 자폐증 개념을 제시하였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아스퍼거의 논의는 시대적 상황과 언어의 장벽 등으로 인해 오랫동안 국제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사후에 재조명되면서 자폐증 개념이 수정되는 데 중요하게 기여했다. 아스퍼거의 논의가 ‘뒤늦게’ 확산되고 그 함의가 거듭 재평가되는 과정은, 자폐증에 관한 현대적 개념이 형성되는 데에 어떤 탐구들과 지향들이 더해졌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과학적 발견은 연구자의 통찰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학계의 조류와 사회의 요청이 맞물리는 가운데 우연한 사건들의 연쇄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동시대의 자폐 연구, 두 궤적으로 갈라지다
1940년대 초 두 연구자가 자폐 연구를 거의 동시에 발표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아동의 발달과 행동을 새로운 의학적 관심사로 삼기 시작한 사회 전반의 변화가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대다수의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은 서로 비교되고 관찰될 수 있는 집단이 되었으며, 이로써 아동의 발달이 학술적, 대중적 관심사로 부상하게 되었다. 당대 미국과 유럽에서 아동기를 독자적인 발달 단계로 다루며 아동 특유의 심리와 행동을 연구하는 흐름이 생겨나고,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및 복지 제도와 관련 전문가 집단이 형성되었다. 이전에는 개인의 성격이나 특성으로 여겨졌던 아동의 독특한 행동이 의학적 관심사로 부상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속속 관찰되는 아동의 일탈적 행동들은 성인기 정신질환과 연관되어 개념화되고 해석되었다. 특히 아동기에 나타나는 심각한 정신질환의 증상들은 조현병이 조기에 발현된 것이라고 간주되면서, 1940년대에 들어서는 지금은 아동기에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고 간주되는 조현병의 증상들을 나타내는 아동에 대한 보고가 점점 늘어났다. 이때 ‘자폐적autistic‘이라는 용어도 이미 사용되고 있었는데, 이는 심각한 조현병의 사례에서 나타나는 환각이나 무의식적 상상의 세계에 빠져드는 증상을 묘사하는 표현이었다. 요컨대, 아동기의 일탈적 모습이 가시화되면서 기존의 정신질환에 대한 설명을 끌어와 해석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 가운데, 캐너와 아스퍼거는 각각 다른 현장에서 자폐증을 독립적인 질환으로 새롭게 개념화한 것이다. 다만 두 사람의 경로가 갈리는 데에는 그들의 무대가 달랐다는 점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캐너 오스트리아 출신이지만 미국으로 건너 가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활동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아동 발달을 다루는 분야들이 형성되고 있었는데, 아동교육자, 아동심리학자, 사회복지사 등 다양한 전문가 집단이 등장하면서 아동의 행동과 정서 발달이 중요한 사회적, 의학적 관심사가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캐너는 소아정신의학 분야의 교과서를 편찬하여 명성을 얻었고, 캐너의 아동 발달 클리닉에는 가장 까다로운 정신적 문제를 보이는 자녀를 돌보는 보호자들이 집중적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캐너의 핵심 목표는 그가 만난 아이들이 보이는 특성이 기존 정신질환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질환임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 자신이 만난 11명의 아동에게서 나타나는 공동적 특성들을 상세히 서술하면서, “지금까지 보고된 어떤 것과도 현저히 다르고 독특한 질환”을 포착했다고 주장한다. 캐너는 클리닉을 방문한 보호자들이 자신의 자녀들이 생애 초기부터 극단적인 고립과 정서적 반응의 부재를 보였다고 호소한 점에 주목했다. 조현병의 증상으로서 나타나는 자폐적 성향이 이미 맺어진 인간 관계를 철회하는 것이라면, 이들 아동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은 태어날 때부터 타인과의 정서적 관계에 근본적인 어려움을 보이는 선천적 상태라는 것이다. 즉, 아동에게서 나타나는 자폐적 성향은 조현병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질환이자, 선천적이고 체질적인 무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캐너는 아동들의 신체 발달이나 사물을 다루는 능력 등에 문제가 없다고 보고, 자신이 발견한 질환이 지적, 신체적 결함과 무관한 정서적 차원의 무능력임을 강조했다. 자폐증 개념의 시초로 꼽히는 1943년의 논문에서 캐너는 이 새로운 증후군을 “정서적 접촉에의 선천적인 자폐적 장애inborn autistic disturbances of affective contact”라는 다소 긴 어구로 표현했고, 이듬해 논문에서는 이를 보다 간결하게 “조기 유아 자폐증early infantile autism”이라고 명명하였다.
한편, 거의 같은 시기 비엔나를 무대로 활동하던 아스퍼거 역시 유사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아스퍼거는 비엔나 근교에서 자라다가 의학을 공부한 뒤 비엔나 대학병원에서 일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1930년대 초부터 정신 및 인격장애를 치료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였으며, 여기서 독특한 특징을 보이는 아이들을 만나며 고심하고 있었다. 그는 1930년대 후반의 강연에서부터 ‘자폐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정신적으로 비정상적인 아동Das psychisch abnormale kind[The psychically abnormal child]”의 사례들에 대해 발표하고 있었고, 1944년 논문을 통해 “자폐성 정신병autistic psychopathy”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그의 사례에는 네 명의 대표적인 소년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아스퍼거가 이들 아이들의 공통 특성으로 꼽은 것은 공감 능력의 부족, 제한된 사회적 관계 형성, 일방적인 대화 양상, 특정한 관심사에 대한 강한 몰입, 그리고 어색한 운동 행동 등이었다. 아스퍼거 역시 캐너와 마찬가지로, 그가 발견한 질환이 조현병과는 구분되는 독립된 질환이자, 선천적이고 체질적인 특성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두 연구의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캐너의 연구와 아스퍼거의 연구는 시차를 두고 서로 다른 궤적을 그린다. 캐너의 연구는 영어권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었지만, 아스퍼거의 연구는 상당히 오랫동안 확산이 제한된다. 일차적으로는 아스퍼거의 연구가 독일어로 발표되었기 때문인데, 이후 1980년대를 거치며 영어권에 소개되면서 활발히 논의될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조건은 연구 성과의 국제적 교류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아스퍼거의 연구는 나치 치하에서 수행된 과학 연구라는 이유로 오랜 기간 동안 국제 학계에서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다. 나치의 이념이 스며있는 과학 연구들, 특히 신체장애와 정신질환에 관한 연구들에 대해서는 거부감과 불신이 있었으며, 아스퍼거의 연구도 예외일 수 없었다. 이와 함께, 전후 세계에서 정신의학의 중심이 미국으로 이동하면서 캐너의 논의에 기반한 자폐증 개념이 표준이 되었고, 여기에 훗날 아스퍼거의 논의가 더해지게 된다.
아스퍼거의 유산에 대한 엇갈린 평가들
아스퍼거의 논문이 본격적으로 재조명된 것은 그의 사후의 일이었다. 1944년 발표된 그의 논문은 1980년대 초 영국의 정신과 의사 로나 윙Lorna Wing에 의해서 영어권 학계에 소개된다. 윙은 당시 동료들과 함께 수집한 엄청난 양의 사례들을 분석하면서, 캐너의 협소한 자폐증 개념에 포함되지 않지만 여전히 사회적 지원이 필요한 문제를 지닌 사람들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윙의 남편이 독일어로 쓰여진 아스퍼거의 논문을 번역해주었고, 자신이 치료하던 아이들이 아스퍼거가 제시한 ‘자폐성 정신병’ 개념에 잘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되었다. 윙은 1981년 발표한 논문에서 1944년 오스트리아의 사례들과 자신이 관찰한 영국의 사례들을 연결하면서, 자폐성 정신병이라는 용어보다는 중립적인 ‘아스퍼거 증후군Asperger’s syndrome’이라는 명칭을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영미권 정신의학계에 아스퍼거의 연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윙이 아스퍼거의 논문을 발굴해서 알린 가장 큰 이유는 자폐증의 개념을 확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캐너와 아스퍼거는 모두 ‘자폐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선천적인 것으로 보이는 정서적 장애를 지닌 아이들의 사례를 기술했지만, 이들이 묘사한 자폐증의 양상에는 차이점도 있었다. 캐너가 주로 극단적인 사회적 고립과 정서적 접촉의 부재를 보이는 아이들에 주목했다면, 아스퍼거는 언어 능력과 지적 기능이 상대적으로 잘 유지되면서도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데에 독특한 어려움을 보이는 아이들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아스퍼거의 아이들은 까다로운 성격과 장황한 말투, 편협한 관심사, 어설픈 신체 움직임을 보이면서도, 특정한 분야에서 높은 성취를 보인다는 점에서 ‘작은 교수들’이라고 불렸다. 후대 연구자들은 아스퍼거의 아이들이 소위 ‘고기능’ 자폐인에 해당하는 사례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윙은 이처럼 언어와 지능에 문제가 없더라도 사회적 상호작용과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이들 또한 자폐증 인구로 포섭하여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게 아스퍼거의 연구가 1980년대에 이르러 새롭게 주목받은 것은 단순히 잊혀진 논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 윙을 비롯한 연구자들이 ‘스펙트럼장애’로서의 자폐증 개념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스퍼거의 논문은 이들 연구자들의 손에서 캐너의 자폐증 개념 밖에 있던 사람들을 자폐스펙트럼 안으로 포괄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원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그의 이름을 딴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용어가 널리 확신되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자폐스펙트럼 개념으로 사회성 발달의 어려움을 지닌 사람들을 통합적으로 분류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주창한 윙의 의도와 달리, 아스퍼거 증후군은 한동안 독립적인 진단명으로 활발히 회자된다. 윙은 스펙트럼장애로서의 자폐증 개념을 제안하면서 수많은 진단명으로 쪼개는 것이 결코 실제 자폐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윙이 활동했던 영국을 비롯한 유럽 사회에서 아스퍼거 증후군은 1990년대를 거치며 활발히 진단되고 또 연구되었다. 이는 어떤 아이들의 보호자들에게는 자녀가 자폐증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아스퍼거 증후군이라고 말하기가 훨씬 쉬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떻게 불리든 간에, 아스퍼거의 논의가 널리 알려진 것은 자폐증 개념을 확장해서 이해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아스퍼거의 논의가 캐너의 논의보다 뒤늦게 알려진 것에 대해 한동안 많은 학자들이 애석해했다. 아스퍼거의 논의가 스펙트럼장애로서의 자폐증이라는 현대적인 개념에 중요한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몇몇 연구자들은 그가 자폐증의 체질적, 선천적 기반을 캐너보다 더욱 분명하게 강조했다는 점에서 시대를 앞선 연구자였다고 추켜세우기도 한다. 캐너와 아스퍼거 모두 자신이 만난 보호자들에게서 그들의 자녀들과 유사한 성격 특성을 발견했지만 해석하는 방식에 차이를 보였다. 캐너는 부모의 정서적 냉담함이 아이의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적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 반면, 아스퍼거는 바로 이러한 부모의 성격 특성으로부터 보호자와 자녀 사이에 공유되는 근본적으로 기질적이고 유전 가능한 성격 장애personality disorder를 읽어냈다. 이후 자폐의 생물학적, 유전적 기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아스퍼거의 이러한 관점은 더욱 선구적인 것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스퍼거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할 때 아슬아슬한 것이었다. 1990년대를 거치며 아스퍼거가 점점 유명해지는 동안,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아스퍼거가 파시즘에 어떤 태도를 갖고 있었는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치는 신체장애와 정신질환 등 모든 장애를 박멸하는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었고, 여기에는 교정되거나 치료될 수 없는 장애를 지닌 유아와 어린이도 가차없이 포함되었다. 아스퍼거가 나치당원이었다는 증거는 없지만, 당시 그가 몸담고 있었던 비엔나의 의료계는 나치의 이념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상황에서 의사들이 어린 아이들의 장애가 교정될 수 있는지 판단하도록 강요받았을 것이라는 점은 이미 쉽게 추정할 수 있었다. 특히 아스퍼거의 스승 프란츠 함부르거는 나치당원으로 알려져 있었고, 아스퍼거가 당대 비엔나 의료계에서 별탈 없이 활발히 활동했다는 점은 그가 암묵적으로 나치의 기획에 동조했을 가능성을 시사했던 것이다.
이러한 의구심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1990년대 초반이었다. 정신의학 분야의 바이블인 DSM의 개정을 앞두고 전반적 발달장애를 다루는 분과의 전문가들이 그의 이름을 딴 진단명이 등재되는 것이 적절한지를 두고 아스퍼거의 개인사 또한 고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일대학교 어린이연구센터의 프레드 볼크마Fred Volkmar와 동료들은 당시 비엔나를 지배하던 나치 정권이 벌인 의학적 범죄에 아스퍼거가 연루되었을 가능성을 우려했다. 당시 아스퍼거에 대해 알려진 바는 그가 나치당원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또한 그가 가톨릭 신자이자 개척지연맹이라는 가톨릭 청년단체 소속이었다는 점은 나치의 이념과는 다른 가치를 추구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아스퍼거를 직접 만나본 윙이나 아스퍼거의 딸은 아스퍼거가 나치의 인종결정론에 찬성했을리 없다고 증언했으며, 부고에서는 그가 평생 어린이 진료에 헌신적이었던 자애로운 의사였다고 칭송했다. 이러한 점들을 근거로 안심한 볼크마와 동료들은 ‘아스퍼거 증후군’을 DSM에 등재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아스퍼거는 자신에게 맡겨진 어린이들을 강제수용소에 보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인도주의적인 영웅으로 찬양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아스퍼거에 대한 평가는 극적으로 뒤집힌다. 점점 더 많은 연구자들이 아스퍼거가 남긴 기록들을 면밀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역사학자 헤르비히 크체히Herwig Czech는 아스퍼거가 당시 의사로 활동하면서 일부 장애 아동을 안락사 프로그램으로 보내는 과정에 명백히 관여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는 아스퍼거가 비엔나 대학병원의 한 소녀를 슈피겔그룬트로 보냈다는 증거를 찾았다. 슈피겔그룬트는 당시 장애를 지닌 아동들에게 독극물을 주사하는 것으로 악명높았던 병원이었다. 그 외에도 아스퍼거는 정신병원에 입원해있는 어린이들의 건강상태를 검토하면서 교육과 치료가 가능한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을 분류하면서, 나치의 기획을 완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에 더해, 일부 연구자들은 아스퍼거의 강연이나 논문에 친나치적인 태도나 표현이 나타난다는 점도 지적했다. 결국 전반적으로 아스퍼거는 나치의 안락사 정책에 저항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가치’가 있는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을 구분하고 후자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나치의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아스퍼거에 대한 역사적 평가만큼이나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명칭 역시 시대적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받으며 부침을 겪었다. 한때 아스퍼거 증후군은 자폐인의 다양성을 보여주며 스펙트럼장애로서의 자폐증 개념을 지지하는 진단명이었다. 일부 당사자들은 자신을 ‘아스피aspie‘라고 부르며 독특한 인지 방식과 창의성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정체성의 언어로 삼았으며, 이는 자폐증을 결함이 아닌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의 한 형태로 이해하려는 흐름으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아스퍼거에 대한 영웅 신화가 얼룩지고 나치 체제와의 연루가 밝혀지면서 그의 이름을 진단명으로 계속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둘러싼 논쟁이 제기되었다. 더 중요하게는, 자폐증을 기능 수준에 따라 구분하기보다 하나의 연속적인 스펙트럼으로 이해하려는 관점이 확산되면서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독립적인 진단명 자체에 대한 비판도 커졌다. 그 결과 오늘날에는 아스퍼거 증후군은 공식적으로는 쓰이지 않으며 자폐스펙트럼 장애ASD라는 포괄적인 개념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질환의 명칭 또한 역사에 대한 기억과 해석을 거치며 그 의미와 쓰임이 달라지는 것이다.
발견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아스퍼거의 이야기는 과학적 발견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어떤 관찰이 과학적 성취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학문 공동체와 사회적 요청이 존재해야 하며, 그 의미와 가치 또한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자폐증의 개념 역시 캐너와 아스퍼거의 발견만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이후 수십 년 동안 이어진 해석과 논쟁, 역학 연구와 진단 기준의 변화, 그리고 역사적 재평가를 거치며 오늘날의 개념으로 만들어졌다. 어떤 연구는 발표되자마자 중심에서 논의되는가 하면, 어떤 연구는 수십 년 뒤에야 발굴된다. 한때 선구적인 발견으로 찬양받던 연구도 새로운 역사적 증거나 사회적 요청 앞에서 혹독한 재평가를 겪는다. 결국 과학적 발견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시대마다 그 가치를 묻는 질문들 가운데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이야기인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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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돈반, 캐런 저커 지음, 강병철 옮김(2021),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꿈꿀자유.
- 스티브 실버만 지음, 강병철 옮김(2018), <뉴로트라이브>, 알마.
- 로이 리처드 그린커 지음, 노지양 옮김(2008), <낯설지 않은 아이들>, 애플트리태일즈.
- Eyal, G. (2010), The Autism Matrix: The Social Origins of the Autism Epidemic, Polity.
- Silverman, C. (2012), Understanding Autism: Parents, Doctors, and the History of a Disorder, Princeton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