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rizon의 과학자 인터뷰 시리즈를 열면서, 해당 과학자의 연구 분야나 연배에 대한 편견없이 인터뷰이를 선정한다는 대전제는 있었으나, 막상 첫 번째 글이다 보니 첫걸음을 어디로 떼야 할지를 놓고 현실적인 좌고우면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연구에 열정적이고 성품 또한 좋기로 잘 알려진 서울대학교 노태원 교수를 떠올리게 되었고, 연락을 드렸더니 다행스럽게도 흔쾌히 시간을 내실 수 있다고 하셔서 첫 인터뷰가 성사될 수 있었다. 노태원 교수는 현재 기초과학연구원의 물리학 분야의 외부연구단의 하나인 ‘강상관계 물질 연구단’을 이끌고 있다.

2011년 11월에 설립되어 현재 대전시 KT 대덕2연구센터에 임시 거처를 두고 있는 기초과학연구원(Institute for Basic Science)은 기초과학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연구원을 자처하고 있다. 그간 국가의 지원을 받는 대형 기초과학분야 연구사업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세계적 수준의 연구를 보다 실질적으로 장기·대형·집단 연구의 방식으로 수행한다는 특징을 갖는다는 점에서 기존의 연구사업들과 차별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Q 연구단 행정실이 웬만한 대학 학과의 행정실보다도 규모가 큰 것 같습니다. 연구단의 조직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행정실은, 논문집과 도서가 꽂힌 허리 높이의 서가와 커피 머신, 그리고 뭔가를 읽거나 커피를 마시면서 동료들과 얘기도 나눌 수 있을 테이블 등이 행정요원들의 공간과 뚜렷한 구분없이 널찍한 방에 편안하게 어울려져 있었다. 행정실 한 켠의 단출한 출입문을 통해 노태원 단장의 다소 비좁은 연구실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인터뷰는 그 곳에서 진행되었다.)

처음에 시작했던 본원연구단과 캠퍼스연구단은 모든 행정과 운영을 IBS 본부에서 직접 하고 있습니다. 외부연구단은 처음에 여러 논의가 있었으나 결국 연구비만 지급하는 형태로 결정되었습니다. 즉, 본부로부터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으로 연구비가 지급이 되고, 산학협력단의 규정에 따라서 일반연구비를 집행하는 것과 동일하게 하고 있습니다. 연구단의 규모가 크다 보니까 서울대학교에서는 산하 연구소와 비등한 규정을 해놓았어요. 그래서 기기 구매에 따른 절차나 결제도 저희 연구단에서 직접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운영을 해보니 행정의 부담이 문제가 되긴 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 개인적인 철학이 있지요. 우리나라에서, 특히 대학의 연구자들은 연구와 관련이 없는 행정적인 일을 많이 하고 있거든요. 여기 연구단에도 박사후 연구원과 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연구소보다 행정요원을 좀더 늘리더라도, 그들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을 최소화한다는 철학으로 연구단 구성을 했습니다.

 

Q 제가 학생일 때 미국의 국립연구소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한 연구원이 연구소에 행정직원의 수가 점점 늘어서 연구자보다 행정직원이 우선하는 정도가 되었다는 푸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A 물론 지나치게 행정편의주의적이 되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죠. 저희 연구단이 현재 학생이 50여 명, 박사후 연구원이 20명 정도, 그리고 박제근, 김창영 부단장을 포함해서 관련 교수가 7-8 분이 됩니다. 외부에서 방문하시는 10여 분들을 제외하더라도 소속 연구원이 80명 정도 되는데, 행정요원이 7 명이고 테크니션이 7 명입니다. 전체를 100 명으로 할 때 행정기술 지원요원이 15% 정도되는거니 그리 과도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연구단의 이름이 ‘강상관계 물질 연구단’입니다. ‘강상관계’라던가 ‘발현현상’같은 용어는 일반인들에게 생소할 것 같은데요. 현재 연구단에서 수행하는 주된 연구는 무엇인가요?

강상관계 물질이 영어로는 ‘strongly correlated electron system’인데 일반인들은 굉장히 어려워 합니다. 물리학과 학부생에게도 어려운 개념일 수 있죠. 물리학에서는 오래된 개념이지만 ‘강상관계’라는 우리말 표현은 생겨난지 2-30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강상관계가 고체에서 중요하다는 것은 1930-40년에 이미 잘 알려져 있었지요. 고체물리학에서 배우듯이, 고체를 기술하기 위해 우선 Born-Oppenheimer 근사를 해서 핵과 전자의 운동을 분리하죠. 그래도 고체 안에는 아보가드로수 규모의 전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여전히 쉽지않은 문제이죠. 그런데 고체는 결정구조의 대칭성을 갖기 때문에 모든 전자가 아니라 하나의 단위셀 안의 전자를 보는 문제로 단순화시킬 수가 있지요. 한 단위셀에서도 전자 하나가 나머지 모든 전자들과 핵이 만드는 유효 퍼텐셜에서 움직인다는 단일전자근사(one-electron-approximation)를 사용해서 좀더 단순화시키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가장 근사한 퍼텐셜을 만드느냐를 놓고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주도적인 이론이 바로 띠이론(band theory)입니다. 이 근사 이론이 반도체를 비롯한 여러 소자들의 물리학을 이해하는데 근간이 되었고, 고체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띠이론에 따르면, 밴드가 반이 차있으면 금속이 되어야 하는데, 절연체가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니켈옥사이드나 3d 전이금속 화합물들이 그런 예들인데, 이런 문제들이 1930-40년대에 이미 지적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Mott이 1940년대에 말한 것은, 전자가 다른 상태로 전이할 때 다른 전자가 이미 같은 상태에 있으면 스핀이 달라야 하고, 그렇게 되면 강한 쿨롱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는 것이죠. 즉, 전자가 이동할 때 상태가 비어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주변 전자들의 오비탈과 스핀 상태에 따라 제한을 받는다는 것이죠. 이것은 전자들의 상호작용을 무시할 수 없다는 의미이고, 단일전자근사가 실제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생겨난 것이 강상관계 물질 물리 분야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후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해왔고, 그 흐름이 Anderson이나 Mott을 통해 이어져 왔고 많은 발견들이 이루어져 왔지요. 그런데 실질적인 물리계들을 다룰 수 있는 일반적인 플랫폼은 여전히 없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응집물질물리학에서 띠이론으로 풀릴 수 없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강상관계와 관련이 있고, 그래서 강상관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이 분야 연구자들의 일인 것이죠.

그래서 강상관계의 예가 많은 것이겠지요?

A 예들도 많고 현상들도 다양하지요. 띠이론으론 설명할 수 없는 금속-비금속 상전이, superconductivity, high Tc superconductivity, 자성과 관련된 많은 문제들도 있고, multiferroic 등 엄청나게 많은 현상들이 상관관계에 의해서 나타나는 ‘발현현상’들이거든요. 그러나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현재는 이런 문제들을 포괄할 수 있는 이론은 거의 없는 상태입니다. 물론 각 경우에 체계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들이 없진 않지만 각각 한계를 가지고 있지요.

강상관계 연구 관련해서 세계적 추세는 어떠한가요? 또 연구단의 차별화된 전략도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A 말씀드렸듯이 분야 자체가 광범위해서 다양한 문제와 이슈들이 연구되고 있습니다. 저희 연구단의 연구와 관련해서는, 독일 MPI의 Keimer 교수 그룹, 일본 동경대와 RIKEN의 Tokura 교수 그룹, 그리고 캐나다 UBC의 그룹이 세계적인 선도 그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마침 저희 연구단 평가가 있었습니다. 평가에서, 저희 연구단도 다른 데만큼 해야 되지 않겠느냐, 물론 그들의 연구 역사와 규모가 비견하기 어려우니 당장은 어렵겠지만, 언젠가 탑클래스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전략적인 집중 연구를 해야 하지 않는가 등의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가능하다면 강상관계 물질과 위상 물질의 물리학을 접목한 연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런 연구를 하는 그룹이 세계적으로 아직 없을 정도로 굉장히 어려운 과제라고 예상은 하지만, 이렇게 두 가지의 물리가 경합하는 시스템에 모험적으로 도전해보고자 합니다. 관련 연구를 해오신 연구단의 양범정 교수와 화학생명공학과의 정인 교수가 합류하여 두 가지의 발현이 간섭하는 것을 관측할 수 있는 새로운 시료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석박사과정 학생들도 50여 명 참여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학생들에게 연구단의 존재가 얼마나 유익하다고 보십니까?

우선 학생들은 연구단에 매우 필요한 존재이며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연구단과 학생 모두에게 서로 더없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제 철학이라고 말씀드렸지만, 통상적으로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행정업무 부담은 연구단의 행정요원들이 대부분 처리를 하고 있습니다. 대신 교수와 소통하는 시간을 최대한 늘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연구배경을 가진 연구원들이 모여있고요. 외국의 연구소와 비교할 때 장비의 질 또한 뒤지지 않습니다. 또한 기회가 있을 때 가능하면 많은 학생들을 외국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여시켜 길게는 일년 동안도 외국의 연구소를 방문할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에게도 연구단은 매우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연구단 정도의 환경이라면 굳이 학생들이 외국에 가서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연구단에 참여하던 학생이 유학을 가기도 합니까?

저도 동의합니다. 예전과 달리 국내의 연구 환경이 좋아졌고, 실제로 석사로 들어왔다 유학을 간 학생은 한 명 있었을 정도입니다. 요즘은 많은 학생들이 박사과정을 국내에서 하고 있지요. 얼마 전에 중앙일보에 난 기사였는데, 국내박사가 해외박사보다 연구성과면에서 더 우수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통계조사도 있었습니다. 예전처럼 무조건 해외로 가야 좋다는 시대는 지난 것 같고, 한국에서 공부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IBS를 중심으로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을 더 늘려 나가면 연구환경은 더욱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연구 환경과 관련해서 노 교수께서 서울대학교에 부임한 즈음은 어떠했습니까?

A 전 1989년 여름에 부임했습니다. 당시는 연구실도 없고 실험 공간도 없어서 안식년을 가신 교수님 책상을 빌려 썼습니다. 제가 부임하기 직전에 이미 학생들이 실험실로 배정된 상황이라 일년 동안 학생도 없었지요. 실험을 하려면 기자재를 구입해야 하는데, 당시엔 시드머니라는 것도 없었고. 어느 날 한 교수님께서 미국에서 하던 연구를 계속 하려면 얼마가 필요하냐고 물으셔서, 대강 4-50 만불이 필요하다고 답했더니, ‘노교수 은퇴할 때쯤 되면 갖출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시며 웃으셨지요.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 어떻게 실험실을 꾸릴 수 있었습니까? 어떤 전환점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A 그래서 연구 분야를 바꿔서 강유전체 박막 연구를 하게 된 겁니다. 원래 미국에서는 통계물리학과 가까운 도체-절연체 복합재료 연구와 고온초전도체의 고체분광학 연구를 했어요. 한국에 왔더니 도저히 계속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어서 어떤 분야를 해야 할지를 놓고 고민했습니다. 결국 초기 지원금이 작더라도 지속적으로 결과를 낼 수 있는 분야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미국에서 분광학을 할 때 레이저를 쓰는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고온초전도체에 레이저를 쏴서 박막을 만드는 것을 어깨너머로 본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서울대 다른 교수연구실을 둘러보니, 당시 차관사업으로 들어온 것이었는데 비슷한 레이저를 쓰고 있는 분이 계셨어요. 그래서 그것을 빌리면 되겠다 생각을 하고, 그렇다면 진공챔버만 만들면 되겠다 싶었지요. 그런데 당시의 제 연구비는 4백만원이었는데 업체에 문의해보니 2천만원을 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청계천으로 갔지요. 보통 진공 장비가 비싼 이유가 용접을 안쪽으로 해야 하기 때문인데, 저는 바깥쪽으로 해서 4백만원만 들였죠. 대신 진공의 질이 좋지 않기 때문에 전기적 성질 대신 구조 분석 위주로 하자고 생각했지요. 많은 사람들이 고온초전도체를 할 때였는데, 그 분야는 경쟁이 어렵겠다고 생각해서 강유전체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강유전체를 박막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세계적으로 거의 없을 때였습니다. 다행히 운이 좋아서 강유전체 박막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활성화되었고, 4백만원짜리 기자재로 Applied Physics Letters(고체물리분야 권위 학술지)에 논문을 열 편쯤 게재할 수 있었지요. 초반에 제 학생들은, 실험실에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아침에 모이면 각기 다른 실험실로 흩어졌다가 저녁에 다시 모여 그 날의 실험을 얘기하곤 했습니다. 덕분에 저녁 식사를 자주 같이 했죠. 실험실에 모든 장비가 다 갖춰진 요즘 학생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죠. 그만큼 요즘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이 늘었다는 얘기죠.

얼마전에도 노벨상 수상자 발표가 있었는데,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우리나라는 언제나 노벨상을 받느냐는 얘기가 자주 나오잖아요? 이런 질문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A 저는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기는 당분간 쉽지 않을 것이라고 봐요.  우리나라는 지난 5-60년 동안 한강의 기적을 이루기 위해 공학과 응용과학 분야 위주로 투자를 해왔고, IBS나 KIAS를 제외한 모든 정부출연연구소가 대부분 그렇듯이 단기 성과와 응용성 위주로 ‘정량적’인 평가가 주가 되었기 때문에, 기초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어려움이 많았지요. 이제 한국의 과학 수준이 많이 올라갔고, 기초과학 분야에서도 누가 될지 모르지만 노벨상 수상자의 기회가 커지고 있는데, 지금쯤은 정부의 R&D 투자방식을 좀더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모든 영역에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산업기술과 직접적인 응용과 관련된 연구 부분은 산업체에서 주관하는 것이 좋겠지요. 정부출연연구소처럼 국가의 지원을 받는 연구소는 공해 문제, 에너지 문제 등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공기술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도록 해야지요. 이 경우 단기적인 평가보다는 장기적인 평가가 적합할 것입니다.

한편, 기초과학은 전혀 다르게 보아 주셨으면 합니다. 한 연구자가 연구를 잘 수행하고 있고 세계적으로 그 분야의 선도자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면, 정부에서 그 연구자를 계속 지원하고 성과를 믿고 기다려줄 수 있는 그런 투자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견이 새로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현재 그렇게 하고 있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A 제도와 인센티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단일 잣대로 획일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는 top-down 형태로 이루어지는 응용 및 산업기술을 평가하는 데에 적절합니다. 그러나 기초과학조차도 같은 잣대를 사용하면 기초과학이 성숙할 만한 사회적 구조나 문화적 환경을 갖추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만일 성과 위주의 단기적인 평가를 하게 되면, 많은 연구자들이 양적인 결과를 많이 낼 수 있는 유행만을 쫓게 되지요.

한국에는 크게 세가지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는 bottom-up 과제가 많아야 합니다. 문재인 정부가 지원 과제를 늘린다고 하니까 기대가 큰데, 선진국 수준으로 좋은 bottom-up 과제들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번째는 block funding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초과학 연구를 지원할 때, 창의연구사업, 중견연구사업 등과 같이 사업을 단위로 예산을 배정하고 연구과제를 선정합니다. 따라서 물리학 분야의 연구제안서가 화학, 생물학등과 같이 다른 분야의 연구제안서와 서로 경쟁하는 불합리한 모습들이 자주 연출되곤 합니다. 전혀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이 경쟁하는 경우, 공정한 평가를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보다 효율적인 funding 방식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연구비지원기관의 예산을 줄 때, 연구 분야별로 block funding을 한다고 합니다. 즉 정부는 물리는 물리 분야, 수학은 수학 분야 등의 큰 학문 영역에 대한 투자 규모를 결정해 줍니다. 주여진 예산 내에서 구체적인 연구비의 배분 및 실질적인 과제의 선정은 project manager들이 중심이 된 전문가 집단이 결정을 합니다. 과제가 수행된 후에는, 정부는 한 분야의 업적 전체를 관련 분야의 업적들과 비교 평가하게 됩니다. 이러한 연구비 지원 방식은 매우 합리적이며, 국가적인 투자에 대한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block funding 제도가 정착이 된다면, 기초연구분야의 중요한 연구들이 장기간 지속되도록 기다려줄 수 있는 문화가 성숙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초과학분야에서는 신진연구자를 위한 스타팅 펀드도 매우 중요합니다. 젊은 연구자들이 저처럼 처음부터 고생하지 않고 연구비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지원을 하되 응모과제화 하기 보다는 간접비를 사용하는 방식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연구비를 수혜하는 기관들이 의지만 있다면, 연구비의 간접비로 스타팅 편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간접비의 30%는 무조건 신진연구자 또는 신진교수를 지원하라는 식으로 제도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연구지원 과제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게 단기적 성과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기초과학분야에서 과학에 대한 진정한 호기심을 갖고 빅퀘스천을 깊이 생각하고 붙들고 있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닙니다. 노벨상 수상 업적들도 이러한 빅퀘스천을 도출하고 이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결국 우리가 원하는 형태의 성과는 장기적으로 연구되고 평가 받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현재의 연구환경에서는 이러한 문화를 성취하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그런 문화가 형성된 다음에 그 연구 성과를 만나기까지는 오랜 기간을 참고 기다려줘야 하는데, 기다려 주지는 않고 성과만 보채는 느낌을 받습니다. IBS는 그런 면에서 잘하고 있습니다. 연구원들에게 조금 더 빅퀘스천에 집중하기를 주문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장기적인 연구를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런 IBS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연구원들이 잘해서 우리나라의 연구소 모형을 새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초과학이나 물리학을 공부하려는 학생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얼마전 지인들과 앞으로 4차 산업혁명이 온다고 하는데 어떤 전공을 택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사회학자를 포함한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결론은 컴퓨터로 대체할 수 없는 직업을 갖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자동화나 AI로 대체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직업은 앞으로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죠. 컴퓨터가 대체할 수 없는 일이란 결국 독창성을 요하는 일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물리학과 기초과학 분야의 전망은 좋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1차 산업혁명 때에 물리학의 열역학을 이해하는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2차 산업혁명은 전기의 발명이 없었으면 불가능했고, 3차 산업혁명에서도 트랜지스터, 월드와이드웹(www) 등 물리학 분야의 기여가 컸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4차 산업혁명도 기초과학 분야에서 새로운 발견이 있어야 잘 진행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학생들에게 물리학을 공부하는 것이 괜찮지 않겠는가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갈무리 한마디

포항에서의 지진으로 일주일 연기된 수능시험일 저녁이었다. 노태원 교수와의 인터뷰는 1시간 반 정도 진행되었다. 바쁜 분을 겨우 붙잡아 만든 기회였지만 노 교수께서 다른 일정이 있어서 더 길어질 수도 없는 사정이었다. 본 기사는 그 모든 것을 옮길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과 달리 상당한 분량이 되었다. 편집된 부분이 아쉽기도 하다. 인터뷰어가 잘 준비되지 않았는데 오히려 인터뷰이께서 스스로 필요한 내용을 채워 주셨다. 인터뷰 당시에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정리를 하면서 뒤늦게 이해되기도 했다. 내용에 혹시 부정확한 부분이 발견된다면 잘못 옮긴 인터뷰어를 탓할 일이다.

 

국형태
HORIZON 편집위원장, 가천대학교 나노물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