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약학전문학교 교수 도봉섭(都逢涉, 1904-?)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과학계의 총아였다. 식민지 조선의 신문과 잡지는 그의 도쿄제국대학 졸업, 경성약전 교수 취임, 여류화가 정찬영(鄭燦英, 1906-1988)과의 결혼을 알렸다. 도봉섭 자신도 《동아일보》 등을 통해 식물학을 소개하며 대중과의 소통을 마다하지 않았다 [1] . 그는 약용 식물만이 아닌 조선 식물의 전체상을 밝히는데 마음을 둔 식물학자였고, “조선 식물분류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정태현(鄭台鉉, 1883-1971)과 함께 식민지 조선인의 식물 연구를 이끌었다.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학장을 맡았다. 최근 그의 식물도감이나 정찬영의 그림을 다루는 전시 등으로 도봉섭이란 이름이 회자되었지만, 당대를 풍미했던 그의 성취는 오래 묻혀있었다 [2] .

도봉섭이 한국전쟁 와중에 납북되며 그의 성과가 “미완”이 된 탓이 클 것이다. 그가 오래 공들여 작업했던 《한국식물도감》 초본편은 부인이 간직했던 원고가 뒤늦게 정태현의 손을 거쳐 출판되었다. 우리는 때로 미완인 것에 아련함을 느끼지만, 아련함과 향수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과학에서 미완의 성과는 주목받지 못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 뜻하지 않았을 미완 외에 좀 눈여겨볼 만한 의도된 미완이 있었다. 이 글은 식민지 시기 그가 자신의 저작에 공들여 남겨둔 미완의 궤적을 통해서 미완이 갖는 과학적 의미를 새겨보고자 한다.

도봉섭은 1930년 도쿄제대 약학과를 졸업했다. 김근배의 소상한 연구가 밝혔듯, 식민지 시기를 통틀어 의학을 제외한 과학기술 분야에서 학사학위 이상의 학위를 받은 사람은 400여 명에 불과했다. 2023년의 상근 연구인력 수는 488,774명, 연구에 종사하지 않지만 학위를 가진 인력은 601,530명이다 [3] . 현재 우리 인구는 식민지 인구의 두 배 정도인데, 과학기술 인력의 수는 1,500배 정도이다. 당시 과학기술자가 얼마나 극소수였는지 알 수 있다. 물론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 자체가 적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식민지 지식인은 대부분 문학, 철학, 역사, 언어, 정치, 사회, 법 등을 공부했다.

사람들의 전공 선택을 결정짓는 요소는 무수히 많다. 하지만 식민지의 이런 상황은 조선총독부의 규제와 상당한 관계를 갖는다. 식민지 유일의 대학인 경성제국대학에는 의학 외에 이공계 학부가 없었고(1939년 전시 상황에 도입), 과학기술을 공부하러 해외 대학에 유학을 가자면 까다로운 절차와 허가가 필요했다.

조선총독부는 이렇게 조선인의 과학기술 분야 진출을 제한하는 근거를 제시했다. 두루뭉술하게 “민도”가 낮다고도 했지만 “조선인은 인류라기보다는 직립보행하는 동물”이라거나 동시대를 사는 현세인이 아닌 선사시대인과 마찬가지라는 식민정책 전문가들의 진단도 있었다 [4] . 과학기술과 같은 현대적 고등 학문을 조선인이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총독부는 조선인들이 유학을 떠나 과학기술을 배울 가능성을 나름 진지하게 고려해서 엄격한 허가 절차를 마련했다. 뭔가 자신들의 진단을 확신하지 못하는 태도였다.

조선인이 실제로는 동시대 인류라는 점이 문제였을까? 도봉섭이 택한 약학 분야에서는 특히 약제사 시험에서 조선인들이 수석, 부수석을 독차지하곤 했다. 조선인 정원 제한으로 실제 약학전문학교의 조선인 학생 비율이 10% 내외였던 점을 고려하면 더 이상한 결과였다. 식민지 차별 정책은 이런 이상한 조선인들을 “이등” 민족으로 관리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수십 만이던 일본인 거주민과 제국 본토의 일본인을 “일등” 국민으로 지켜야 했다. 일본 제국의 교육은 그래서 식민지 조선인, 식민지 일본인, 제국 본토 일본인 교육이 단계적 격차를 갖는 제도였다.

도봉섭은 개인적 환경이 시대 변화와 잘 맞아떨어져서 그런 제도적 차별을 극복한 사례였다. 그는 1904년 함경남도 함흥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부모는 자식들이 택한 장래에 대한 전폭적 지원을 약속했다. 도봉섭은 과학기술이라는 조선인에게 매우 좁은 길을 택했다. 3 · 1운동으로 강한 민족적 저항을 경험한 총독부가 이른바 “문화통치”로 전환함으로써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통제를 완화하고 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만 도봉섭의 경로는 이런 새로운 조건 속에서도 식민지 조선인이 과학 교육을 받는 길이 얼마나 비싸고 험난했는지 잘 보여준다.

도봉섭은 고향 함흥의 고등보통학교 졸업 이후 많은 곳을 전전하며 유학에 유학을 거듭했다. 우선은 식민지 거주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경성제일고보에 ‘진학’해서 보습과 2년을 더 다녔다. 하지만 제국대학에서 과학기술을 전공하기에는 이것으로 충분치 않았다. “본토” 고등학교의 이과 수업을 더 들어야 했다. 도봉섭은 이를 위해 일본 야마구치로 가서 고등학교 과정도 유학했다. 조선인에게 제국대학 입학시험 응시가 허용된 것은 그가 입학한 한 해 전이었는데, 이러한 유난한 과정을 거친 후에 ‘주어지는’ 자격이었다. 대부분의 조선인 제국대학생들이 일종의 외국인 편입 제도를 이용해 선과(選科)를 다닌 데는 이 길고 힘든 여정이 버티고 있었다. 그는 1930년 도쿄제대를 졸업한 다섯 명의 조선인 중 한 명이었다.

그의 행운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 자격을 손에 넣는 데 그치지 않았다. 융성하던 약업 자본의 지원을 받고 있던 약학 분야를 택한 점도 그가 순탄한 연구 경력을 이끌어 나갈 수 있게 도왔다. 그가 제국대학을 졸업했던 1930년은 대공황의 여파가 지속되던 경기침체기였다. 제국대학 졸업자조차 취업이 힘들었다. 같은 해 물리학과를 졸업했던 도상록은 5년 뒤에야 송도고보 교사 자리를 얻었다. 한약의 화학적 성분 분석으로 유명한 아사히나 야스히코(朝比奈泰彦, 1881-1975) 교실에서 생약학을 전공했던 도봉섭은 다행히 한 일본인 거상이 백지수표를 기부하여 막 전문학교로 승격된 경성약전에 생약학 담당으로 자리를 잡았다. 1930년 4월 촉탁 강사로 발령받았고, 6월에 정식 교수가 되었다.

얼핏 도봉섭의 ‘이등’ 시민권을 따지지 않는 듯한 일본인들의 열린 태도로 보이지만 따로 염두에 둔 것이 있었다. 서구 제국주의 확장에서도 커피, 차, 코코아, 육두구, 후추, 정향 등 강한 약성을 가진 식물이 핵심적 역할을 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아사히나도 “인삼”과 같은 약재 개발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식민지 조선의 약용 식물은 제2의 인삼을 꿈꾸는 제국과 식민지의 여러 기관이 관심을 보이던 분야였다. 경성제대 의대에도 한약을 다루는 약리학교실이 별도로 세워졌다.

식민지 조선이 서구 제국의 식민지와 다소 달랐던 점은 이 분야에 조선인의 활약이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조선 시대부터 무역으로 성장해온 한약상들이 탁월한 적응력을 자랑하며 시장을 개척해 일본기업과 경쟁한 덕분이다. 이들은 말라리아 치료약인 금계랍을 비롯한 한방 처방의 약품을 발판으로 성장하며 일본 회사 못지않은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공짜로 비행기를 태워주는 홍보 행사를 할 정도였다. 도봉섭을 지원한 큰손에는 이들 조선인 기업과 단체도 있었다.

도쿄에서 돌아온 그를 먼저 맞이한 것은 임업시험장에서 정태현과 함께 일하다 경성제대 약리학교실로 옮겨서 한약재를 연구하던 이시도야 쓰토무(石戸谷勉, 1891-1958)였다. 그는 창경궁 식물채집을 제안하며 그를 환영했다. 이시도야와 도봉섭의 채집은 경성약전 식물동호회로 진화했는데, 이 약전 식물동호회는 1935년 아라이약방(新井藥房)이라는 일본 약업자의 후원을 받아 더욱 안정적인 연구단체가 되었다. 하지만 도봉섭은 이미 교외에 개인 연구소와 공동 연구인력을 갖고 있었다. 1933년 순 조선인 연구자로 조직된 조선박물연구회가 그와 정태현을 초빙했고, 같은 해 조선인 기업인 천일약품이 계농생약연구소라는 연구소를 설립해 그와 그의 조선인 제자들을 영입했다.

안정된 일자리에, 연구를 위한 각종 후원을 받고 있던 도봉섭은 이 모든 후원자를 만족시킬 활발한 행보를 보였다. 약전 식물동호회는 1933년 2월에 “조선 최초로 제1회 약용 진기식물 전시회”를 개최해서 약용식물 110점, 진기식물 250점을 전시했다 (그림 1). 총독부 위생과 및 산업과의 약초 재배 장려 분위기 덕분에 “일반사회의 격려와 원조”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 호응에 힘입어 그해 11월에는 제2회 전시회를 열었는데, 경무국장을 비롯해 2천 명이 훨씬 넘는 입장객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5].

 

도봉섭의 연구 역량이 더 분명히 드러난 것은 그가 쓴 다양한 논저였다. 그는 《일본약보(日本藥報)》, 《조선약학회잡지(朝鮮藥學會雜誌)》등에 지속적으로 조선 식물과 그 약성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고, 약전 동호회의 연구 결과는 1936년 《조선 식물목록 I: 중부식물편》이라는 단행본으로도 출판되었다.

도봉섭의 논저는 몇 가지 강조점과 특징을 갖는다. 우선 도봉섭은 현장 채집 경험을 매우 강조했다. 이는 이시도야와 같은 식민지 파견 관료, 연구자들도 강조해온 것이다. 오랜 경험을 통해 식민 현지의 풍토와 자연에 익숙하다는 점은 식민 현지 연구자가 제국 중심부의 연구자에 대해 내세울 수 있는 점이다.

도쿄제대에는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 1882-1952)이라는 국제적인 조선 식물 권위자가 있었다. 그는 1909년 조선 땅을 밟은 적 없이 라틴어 학위논문 Flora Koreana를 발표했다. 이 논문은 외국과 접촉이 적었던 조선의 특수성 덕분에 바로 조선 식물에 대한 독보적 성과로 인정받았다. 3년이 되지 않는 시간 동안 2,000종 가까운 조선 식물 표본을 검토해서 분류한 놀라운 생산성 덕분이었다. 나카이는 이 성과를 바탕으로 1913년 조선총독부 촉탁 식물학자, 1926년에는 국제식물학의회International Botanical Congress의 명명법 위원회에도 초대받았다. 최초의 비서구인 위원이었다. 그는 조선총독부 촉탁이 된 다음에도 여름방학 동안의 짧은 채집 여행을 제외하면 대부분 도쿄의 연구실에서 조선과 만주, 중국의 식물까지 연구하며 동아시아 식물 전문가를 자임했다. 임업시험장의 이시도야, 정태현이 일 년 내내 채집해 보내는 조선 식물의 석엽표본(腊葉標本, 위 전시회 사진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것), 즉 말린 식물 표본이 그의 연구를 뒷받침했다.

칼 린네를 포함한 대부분의 유럽 식물학자도 나카이처럼 “안락의자 식물학자”였고 석엽표본은 식물분류의 오래된 기준이다. 하지만, 이런 연구 방식에 대한 비판도 늘 있었다. 이시도야는 특히 나카이가 표본상의 특징에 골몰할 뿐 식물이 자라는 토양과 환경, 식물의 역동적 생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을 강하게 비판했다. 같은 식물이라도 계절마다 다르고 어린 식물과 성장한 식물이 다르다. 또 토양과 기후가 달라지면 모양과 특성이 달라진다. 나카이가 표본의 미세한 차이로 이런저런 구분을 만들고, 새로운 학명scientific name을 붙이는 것은 식물의 생태적 복잡성은 무시한 채 성과만 부풀리는 일이라는 비판이었다.

도봉섭이 1934년 《일본약보》에 실은 조선의 야생식물과 특산식물에 대한 보고문은 이런 “안락의자” 학자와 차별화되는 현지 연구자로서의 전문성을 더 정교하게 드러냈다. 그는 재조선 일본인을 포함한 아마추어 채집자들의 실수를 바로잡으며 자신의 전문성을 잘 드러냈는데 강원도에 매독 약재로 쓰이는 유창목(癒瘡木)이 있어 연산액이 기천원에 달한다거나 향나무와 수수꽃다리를 비싼 약재 식물로 오인한 보고가 드물지 않았다. 이렇게 단편적 지식과 한두 번의 목격담으로 이뤄진 보고와 자신의 보고는 달랐다. 우선은 축적된 채집 경험이다. 그는 자신이 “거의 매주 토·일요일”에 조선의 산과 들을 누벼왔음을 강조했다. 그는 거듭된 답사로 식물을 다양한 환경에서 살핀 후에도 꼼꼼하게 관련 문헌을 살폈고, 경성제대의 이시도야나 도쿄제대의 아사히나 등과 검증한 후에 보고했다. 현장 경험에 문헌을 통한 신중한 확인 절차, 전문가를 통한 상호 검증을 더한 것이다 [6] . 신뢰할 만한 정보 제공자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도봉섭의 논저에는 현장 관찰과 엄밀한 검증에 대한 강조를 끝까지 밀고 간 한 가지 특이점이 더 있었다. 바로 미완이다. 나카이를 포함한 “외국인”의 연구성과를 자신의 연구보고서에 활용하지 않은 덕분에 생겨난 “미완”이었다. 도봉섭이 이 “외국인”들의 연구를 공부하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조선 식물 연구 현황을 알리는 대중적 글에서 그는 이런 성과들을 폭넓게 인용해 조선 식물의 독특한 아름다움과 가치 등을 풍부하게 소개해왔다. 하지만 자신의 연구 성과를 보고하는 논저에서 그는 이런 선행 연구 결과를 제외한 미완의 목록을 제시했다.

도봉섭은 이 ‘미완’이 자신의 선택임을 분명히 드러냈다. 분량 제한이나 시간 부족 등의 현실적 이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1934년 《일본약보》에 세 차례에 걸쳐 실은 중부 조선의 식물 목록은 조선 특산 29종과 일본에 없는 것 126종을 포함한 총 226종의 식물만을 담고 있었다. 알려진 종의 1/5도 되지 않을 이 빈약한 목록은 “우리가 채집할 수 있었던 식물”에 국한된 목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나머지는 자신이 “채집하게 되었을 때 보고할 작정”이라는 계획도 밝혔다. 함경남도 산악지대 식물에 대한 보고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내가 직접 채집한 식물목록을 게재하고 후일 채집에 그 완성을 기한다”는 약속이었다 [7] . 오랜 채집 성과를 담은 단행본 《조선식물목록 I: 중부조선편》도 미완의 목록이었다. 지역 식물지의 일반적 목적이자 의의일 수 있는 지역 식물의 전체상을 제시하는 대신 자신이 “실제 채집한 식물”만으로 한정시킨 목록임을 밝히고 자신이 채집한 열두 지역에 대한 채집도를 붙였다. 그는 이 채집도에 자신이 답사한 경로를 표시했다 (그림 2). 그 지역에 대해서도 전체를 다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궤적을 그려둔 답사의 경로만이 자신이 완성한 것임을 밝히려는 듯한 태도였다.

그의 논저 중 미완이 아닌 흥미로운 예외가 하나 있는데, 울릉도 약용 식물 목록이다. 그는 이 완성된 목록에 자신이 직접 채집하지 않은 식물이 뚜렷이 드러나게 하는 독특한 표기법을 썼다. 이 글은 당시까지 보고된 울릉도 식물 전체를 표로 만들어서 제시했는데, 그는 이 표에 식물의 학명과 일본명 외에 다섯 개의 열을 추가했다.


자신을 포함해서 울릉도 식물을 연구했던 다섯 팀(1. 이시도야; 2. 나카이; 3. 모리 타메조; 4. 우에키 호미키; 5. 도봉섭 약전팀)의 채집 이력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자신이 직접 채집하지 않은 식물의 경우 그 사실이 분명히 드러날 수 있는 보기 드문 작성 방법이었고, 많이 비어있는 다섯 번째 열에서 보듯 그가 한 번의 여행으로 채집했던 것은 전체의 아주 일부임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렇게 자신의 부족함을 역력히 드러내며 미완의 저작을 만드는 도봉섭의 태도는 얼핏 과학과 무관한 개인 혹은 민족적 자부심처럼만 보인다. 물론 도봉섭이 겪은 차별과 모순을 생각할 때 개인적, 민족적 자부심을 견지한다는 것이 사소한 일은 아니다. 행운이 넘쳐 보이는 그의 경력도 “이등 민족”의 처지를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역할은 아사히나와 이시도야 등을 도와 조선의 약용 식물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거의 국한되었다. 일본에 남아 일본인 동료와 경쟁하며 성장할 기회나 혹은 그들처럼 유럽과 미국에서 더 공부할 기회는 없었다. 이시도야도 만주와 중국을 누볐지만, 그는 한반도에 머물렀다. 이런 특별 대우에 더해지는 것은 그가 일본인에 버금가는 성과를 낼 때 보여지는 묘한 반응이었다. 도봉섭이 “만주에서 나는 제비꽃 중 가장 큰 종”을 강원도에서 찾은 것에 대한 이시도야의 상찬이 보여주는 태도이다.

이것은 진품(珍品) 중 진품이다. 웹스터씨가 압록강변에서 채집한 것을 헴슬리씨가 신종으로 하여 학명을 주었던 것인데 표본은 영국박물관에 있다. 또 1897년 코마로프씨가 만주에서 채집했다고 보고한 적은 있지만 일본에서는 아마 처음으로 채집된 듯하다 [8].

그 성과를 몹시 치켜세우고 있지만 이시도야는 도봉섭이 강원도에서 찾은 것을 “일본” 최초로 기념하고 있다. 조선인 도봉섭이 이룬 발견에 대한 민족적 자부심을 차단하는 태도이다. 또 동시에 도봉섭이 지금까지 조선인이라서 받은 모든 차별을 부인하듯 느닷없이 그를 일본인으로 만드는 태도였다. 도봉섭은 이렇게 일본인들 입맛대로 주어지는 “일본인”으로서의 성공 가능성 대신 “조선인”이라는 차별적 각인을 끌어안을 결심을 보여주었다. 《동아일보》를 통해 나카이를 비롯한 모든 일본인의 연구성과를 조선인의 과제와 구분하며 조선 식물 연구를 조선인들이 완수함으로써 “일국(一國)”의 과학을 만들자는 주장을 한 것이다. 강원도와 한반도가 일본제국의 한 지방이 아닌, “일국”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도봉섭의 의도된 미완에서 이 글이 더 주목해 보고 싶은 것은 과학이 어떠해야 과학다운지에 대한 과학적 자부심이다. 알다시피 “근대과학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신연구법Novum Organum, 1620》이란 책을 통해 경험과학의 방법론인 “귀납법inductive method”을 제시했다. 베이컨에 따르면 귀납법은 체계적으로 수집된 사실을 통해 새로운 진리를 발견함으로써 학문을 계속 진보시킬 방법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연구법Organum》에서 제시한 연역적 삼단논법과 다르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사람은 모두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삼단논법은 확실한 진리에서 출발해 틀릴 수 없는 결론을 끌어내지만 “소크라테스가 죽는다”는 것은 새로운 진리가 아니다. 오랫동안 학문이 정체된 이유였다. 하지만 베이컨은 사실의 무분별한 축적이 학문의 진보를 가져온다고 보지 않았다.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추종해온 이들만 미혹하지 않으며, 우리의 채집 능력, 감각에는 한계가 있어서 사실의 체계적 수집과 분석에는 여러 어려움이 따른다.

개나리의 학명은 Forsythia koreana Nakai이다. 나카이가 지었다. 이른 봄의 개나리를 본 적 없는 나카이가 표본을 보고 조선의 특산종으로 지정했다. 나카이는 압록강변의 한 버드나무 이름은 여러 번 바꾸었다. 처음에는 알려진 버드나무와 같다고 보아서 Salix rorida Laksch(분버들)라는 이름을 그냥 썼다가, 이른 봄에 피는 이 버드나무의 꽃을 채집해 보내준 조선의 채집자들 덕분에 Salix splendida Nakai라는 새 이름을 주었고, 2년 후에는 이 꽃에 향기가 난다는 이들의 추가 정보에 따라 다시 Chosenia splendida Nakai(새양버들)라는 상위의 분류명을 주었다.

나카이는 이 명명 직후 제국학사원상을 받았다. 빈약한 정보로 서둘러 잘못된 이름을 남발했던 실수보다는 채집자들을 여럿 활용해가며 쉼 없이 ‘성과’를 쌓아올린 능력을 평가한 상이었다. 도봉섭은 봄의 개나리를 본 적도 새양버들 꽃의 향기도 맡아본 적 없이 그 마른 가지를 들여다보고 생산된 지식을 그냥 베껴서 자신의 성과를 완성할 생각은 없었다. 도쿄제대 교수이자 국제식물학계의 권위자라는 나카이의 성과를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그는 최소한 극장의 우상에 빠진 것일 것이다.

도봉섭은 일본 최고의 과학 교육을 받고자 했지만, 일본 과학이 생산한 지식을 허겁지겁 베끼고 추종함으로써 과학을 배울 수는 없음을 잘 알았다. 뿌리뽑힌 식물에 의존한 그 지식의 취약함이 더욱 일깨워준 것일 것이다. 한두 번의 관찰이나 한두 가지 특징에 의존해 새로운 성과를 만든다면 노다지를 쫓는 일본 채집자와 같은 아마추어가 될 수 있다. 그는 나카이의 성과를 베껴 자신의 목록을 완성하는 대신 식물이 뿌리를 내린 조선의 산과 들을 열심히 찾았다. 그 속에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낙엽을 떨구는 식물을 살피고, 그 식물이 다른 토양, 기후, 동식물과 맺는 역동적으로 변하는 관계를 몇 년을 두고 거듭 관찰했다. 귀납법은 그렇게 현장에서 수많은 경험치가 쌓인 후에 빛을 발한다.

모두 과학을 말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과학다운 과학에 대해 도봉섭처럼 고민하는지 모르겠다. 도봉섭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의 성과를 응원하던 식민지 언론의 관심이 그를 조급하게 만들었을 법도 하지만, 그는 미완의 궤적을 남기며 천천히 나아갔다. 수많은 표본을 독차지한 채 엄청난 속도로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나카이식의 성공, 일본식 근대가 인정한 그 성공은 도봉섭의 과학적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과학은 자연에 대한 얄팍한 정보로 섣불리 답을 내는 학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과학은 어떠해야 할까? 그가 식민지배의 제약을 이겨내며 힘써 개척한 우리 과학의 넓어진 길에 미완의 궤적으로 남겨둔 그의 질문이 오롯이 살아 숨쉬면 좋겠다.







[참고문헌] 

  1. “금년춘(今年春)에 졸업한 동경조선유학생,” <조선일보> 1930.02.27.; “정찬영 여사, 동양화에 여자론 처음 미전에 특선, 신혼의 깃븜을 옴긴「麗光」,” <동아일보> 1931.05.31. 도봉섭은 식민지 시기 연구 성과를 제대로 정리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조선전쟁 중 납북되어 관련 연구가 많지 않았다. 둘째 딸인 도정애가 펴낸 탄생 100주년 기념자료집 도정애, 《都逢涉: 誕生百週年記念資料集》, 자연문화사, 2003외에 문만용, 〈도봉섭〉, 《과학기술인명사전》, 조선연구재단, 2012, 121-127이 있었고, 졸저인 박사논문 “식민지 조선의 식물연구, 1910-1945”와 그에 바탕한 “식물 연구는 민족적 과제? – 일제강점기 조선인 식물학자 도봉섭의 조선 식물 연구,” 《역사와 문화》, 25, 89-123가 있다. 그 글의 오류를 바로잡아주신 도봉섭 가족께 감사한다.
  2. <절필시대:정찬영, 백윤문, 정종여,임군홍,이규상,정규> 2019.5.30-2019.9.15,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이소요, <조선식물도설 유독식물편, 주석 읽기> 2021.11.24 – 2021.12.1,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3. 김근배, <한국 근대 과학기술인력의 출현> 문학과 지성사, 2005;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2023년 과학기술통계 백서>.
    정연태, <식민지 차별의 일상사> 푸른역사, 2021, 237.
  4. 1930년대 한약연구 붐에 대해서는 신창건, “경성제국대학에 있어서 한약연구의 성립”, 사회와 역사 76 (2007), 105–139. 경무국장이 개입된 약초 재배 장려운동의 목표와 전개에 대해서는 이정, “관료들의 천국: 일제강점기 약초재배운동의 조화로운 동상이몽,” <역사학보> 238, (2018): 299-342.
  5. 都逢涉, 〈中部朝鮮の野生植物及び朝鮮特産植物に就て(一)〉, 《日本藥報》 9 (1934): 4-6, 4.
  6. 都逢涉, 〈咸鏡南道山岳地帶に於ける高山植物及び藥用植物〉, 《朝鮮藥學會雜誌》 15(3) (1935):212-25.
  7. 都逢涉, 〈中部朝鮮の野生植物及び朝鮮特産植物に就て(二)〉, 《日本藥報》 9 (1934): 5-7, 6.
이정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