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 물리학의 매력
필자는 1980년대 끝자락에 물리학과 학부 시절을 보내면서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형식적 차이점에 매료되었다.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질량, 위치, 속도 등의 개념을 변수로 놓고 운동방정식이나 좀 더 세련된 느낌을 주는 라그랑지안 등을 풀어서 물체의 미래 상태를 예측하는 고전역학과는 달리 양자역학은 좀 더 복잡한 방식으로 경험적 예측을 얻어낸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슈뢰딩거 방정식을 풀어 상태함수를 얻어낼 때까지는 고전역학과 비슷했지만, 이것으로부터 경험적 예측을 얻어내려면 ‘측정’을 통해 일반적으로 여러 상태에 걸쳐 있는(즉, 중첩되어 있는) 상태함수를 특정 상태로 ‘바꾸는’, ‘환원reduction’이라는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과정을 통해 얻는 예측치는 고전역학과 달리 일반적으로 물제가 그 상태에 있을 ‘확률’ 이상을 줄 수 없었다.
고전역학에서도 당연히 물리량의 값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측정을 해야 하지만 이는 이미 객관적 실재 세계에 존재하는 양을 ‘읽어내는’ 과정에 불과했는데, 양자역학에서는 왠지 측정 행위 자체가 최종적인 값을 만들어내는 데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끼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이 상태함수의 확률적 ‘환원’이라는 것이 단지 우리가 물리세계에 대해 완전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인식적 과정인지, 즉 실제로는 물리계의 상태는 결정되어 있지만 우리의 지식이 부족해서 확률을 사용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존재론적으로 물리적 상태가 측정을 통해 ‘변화하는’ 것인지는 학부 양자역학 교과서에는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았다.
좀 더 유명한 사례를 들어 이 차이를 설명하자면, 살아있음과 죽어있음의 중첩 상태에 있는 슈뢰딩거 고양이에 대해 이야기해 볼 수 있다. 상자를 열어 측정하기 전까지는 그 두 상태 중 어느 상태에도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물리학자는 오직 측정 시 확률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코펜하겐 해석의 표준적 지침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격언을 떠올리게 하는 알쏭달쏭한 규칙이었다. 양자역학 수업 시간에 관련된 질문을 했을 때 교수님으로부터 그다지 호의적인 반응이 나오지 않았고 그건 물리학이 아니라 철학의 영역이라는 답을 듣고서, 철학과 수업을 들었지만 거기서도 별로 시원스러운 답을 얻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철학과 수업에서는 고전 물리학과 양자 물리학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차이 자체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벨부등식의 실험적 검증의 존재론적 의미
결국 양자 물리학의 철학이라는 분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학부 때 지도교수님이셨던 장회익 교수님의 지도를 받아 벨 부등식의 실험적 검증에 대한 내용으로 학부 졸업 논문을 작성하였다. 그때도 만족스러운 답을 얻은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명확한 이해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당시는 마침 벨 부등식에 대한 실험적 검증 분야에서 70년대 클라우저-시모니의 고전적 실험 결과를 좀 더 정교하게 가다듬은 아스텍의 실험이 발표된지 얼마되지 않아서였다. 벨 부등식은 아인슈타인이 생각한 방식으로 양자물리학이 불완전할 수는 없다는 점을 실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부등식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아인슈타인은 양자 물리학의 확률적 예측이 평균적으로는 맞지만 개별 측정의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는 것은 양자 물리학이 불완전해서라고 생각했다. 즉, 우리가 현재는 모르고 있지만 나중에 발견하게 될, 좀 더 완전한 물리학 이론에서 ‘숨은 변수’를 활용하면 양자 물리학의 평균적 예측에 더해 개별 대상의 정확한 상태 변화까지 예측하는 것이 적어도 원리적으로 가능하리라는 생각이었다. 벨 부등식은 만약 이런 아인슈타인의 생각이 맞다면 그런 미래의 완전한 이론이 반드시 만족해야 할 (그 숨은 변수가 인과 작용의 직관적인 조건인 국소성을 만족한다는 전제하에) 부등식이다. 학부 시절 벨 부등식은 내게 경의로움 그 자체였다. 왜냐하면 미래에 나올 이론이 무엇이 될지 미리 알 방법이 없는데도 그 부등식이 존재론적으로 매우 자연스러운 국소성 조건만 만족하면 모든 미래 이론이 반드시 만족해야 할 부등식을 유도해 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론 물리학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성취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1980년의 아스펙의 실험은 양자 물리학의 운명과 직결되는 이런 존재론적 부등식이 실험적으로 위배됨을 보인 것이다!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추상적인 형이상학적 주장을 경험적으로 검증하는 매우 드문 상황이였다. 결국 적어도 아인슈타인이 생각해던 방식으로는 양자 물리학이 더 이상 완전해질 수는 없는, 이미 그 자체로 완결적인, 세계에 대한 독특한 이론이라는 점이 탄탄한 경험적 근거를 갖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양자 물리학의 기초론이라는 분야는 물리학의 철학적 기초에 관심을 갖는 과학철학자들과 몇몇 물리학자들만이 연구하는, 별로 인기없는 연구 분야였다. 하지만 실험기술의 발전으로 중첩이나 얽힘처럼 양자 물리학의 특별한 현상을 활용할 수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점점 더 많은 물리학자들이 이 분야의 이론적 작업과 실험적 탐구에 뛰어들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양자 계산물리학quantum computational physics이나 양자 정보물리학quantum information physic과 같은 분야도 성장하게 되었다. 이 분야의 거장인 안톤 차일링거는 앞서 언급한 클아우저, 아스펙과 함께 2022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여받으면서 양자 물리학 기초론 연구의 학술적 의의가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았다. 개인적으로 학부 시절 필자를 매료시켰던 분야가 물리학의 주류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사실이 감개무량하다. 다만 한편으로는 물리학계의 이런 역사적 태도 변화를 볼 정도로 필자가 나이를 먹었다는 의미이기도 해서 약간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과학이론이란?
학부시절 필자를 매료시켰던 양자 물리학의 특별함을 이해하기 위해 과학이론이란 무엇인가를 간단하게 생각해 보자. 과학이론은 우리가 우리 주변의 자연 현상, 사회 현상 등을 이해하거나 설명하거나 예측하기 위해 고안해 낸 생각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시장에서 특정 물품의 가격이 변동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수요, 공급, 가격탄력성 등과 같은 개념을 고안해 내고 이를 체계적으로 동원하여 시장의 미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다.
과학이론의 역할이나 기능에 대해서는 이처럼 철학자들 사이에서 대체적으로 합의가 있지만 그 내용의 참/거짓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과학이론이 현상을 잘 설명하고 예측도 잘 하는 것이 핵심이고 그 이론이 말하는 바가 글자그대로 참인지 여부는 확신하기 어렵다는 구성론적 입장과 과학이론이 설명만 잘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도 외부의 객관적 실재에 대해 온전하게 참이라는 실재론적 입장이 대립하는 것이다. 이 대립은 참 혹은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철학자들 사이의 오래된 논쟁, 즉 진리란 내부적 정합성을 갖고 경험적 현상과 잘 들어맞는 것이라는 정합론coherence theory과 그에 더해 외부의 객관적 실재에 정확히 대응해야 진리라는 대응론correspondence theory의 대립과 연결된다. 과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실재론과 대응론을 받아 들인다. 많은 경우 이는 엄밀한 철학적 근거에 입각해서라기 보다는 직관적 호소력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호소력이 있다는 것과 철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과학이론이 쳬계적이고 모순이 없으며 우리의 관측 결과 및 실험 결과와 잘 들어맞는다는 것을 넘어서 외부적 실재와의 ‘대응’을 존재론적으로 인식론적으로 입증해 내기란 쉽지 않다. 일단 그 ‘대응’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를 깔끔하게 설명하는 일 자체가 어렵다. 일반적으로 정합론과 구성론에 비해 대응론과 실재론은 직관적으로 더 매력적이지만 철학적으로는 증명 부담이 더 큰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자들조차 ‘모든’ 과학이론에 대해 실재론적 입장을 견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 모두 중학교 시절에 배웠을 뉴턴 역학을 떠올려 보자. 뉴턴역학은 질량, 힘, 속도, 가속도 등의 개념 체계로 물체의 운동을 설명하고 예측한다. 마찰력이 없는 이상적 상황에서 물체의 질량과 그에 가해진 힘이 주어지면 속도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예측하거나 역으로 속도의 변화와 물체의 질량을 통해 얼마만큼의 힘이 가해졌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물체가 ‘진정으로’ 이 질량을 늘 갖고 있었고 ‘힘’을 정말로 받았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과학이론은 이런 실재론적 생각이 자연스럽게 적용될 수 있다. 하지만 아주 복잡한 현상의 핵심만을 파악해서 어림으로 예측을 하거나 전체 동향을 이해하기 위해 활용하는 단순한 과학 모형의 경우에는 이런 실재론적 생각을 적용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통계역학에서 분자들의 움직임을 ‘마치’ 유체인 것처럼 모델링해서 설명할 때, 분자들이 정말 유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형적인 유체인 물이 ‘사실은’ 주로 물 분자에 소량의 다른 분자가 섞인 혼합물인 것을 기억해 보면 과학이론에서 사용되는 모든 개념이나 속성이 객관적 실재에 정확히 동일한 대응을 갖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과학자들 스스로도 이렇게 모형 만들기의 차원에서 허구를 활용하는 과학이론을 ‘현상론적 모형’ 혹은 ‘장남감 모형’이라 부르면서 너무도 복잡해서 완전한 모사를 하기 어려운 실재를 탐색하는 이론적 도구로 활용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가 현대 과학의 ‘근본’ 이론이라고 간주하는 이론은 실재론적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근본적인 수준에서 세계를 서술하는 이론에 실재에 대응하지 않은 요소가 있다면 그 이론을 근본 이론이라고 부르기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리학 이론 중에 두드러진 예외가 있는데 그게 바로 양자 물리학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럴까?
측정 혹은 중첩된 고양이의 문제
양자 물리학이 대상을 설명하거나 예측하기 위해서는 대상의 ‘상태’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 뉴턴역학에서 대상의 상태는 물체의 본질적 속성에 해당되는 질량, 위치, 속도 등으로 규정된다. 이에 비해 양자물리학에서는 ‘상태함수’라고 하는 특별한 수학적 성질을 갖는 함수로 표현되는데, 이 상태함수가 갖는 특별한 성질이 ‘중첩superposition’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중첩이란 서로 배제하는 두 상태에 ‘걸쳐 있는’ 상태인데, 이 걸쳐 있다는 게 무엇인지를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매우 어렵다.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사례로 들어보자. 실제로 고양이처럼 살아있는 거시적 대상에 대해 중첩을 관찰한 사례는 아직까지 없지만 양자물리학의 개념적 특별함을 보여주는 데 적합해서 자주 거론된다. 고양이가 특별하게 고안된 상자 안에 들어 있다고 가정하자. 그 상자는 고양이에게 치명적인 독성 물질이 50%의 ‘양자적 확률’로 퍼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 경우 고양이의 ‘상태 함수’는 ‘살아 있는 상태’와 ‘죽어 있는 상태’에 ‘걸쳐 있는’ 중첩 상태로 주어진다. 핵심은 표준적인 양자물리학에 대한 해석을 따를 때 고양이의 상태는 우리가 상자를 열어 보기 전까지는 죽어 있거나 살아 있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니라 중첩 상태로 표시된다는 점이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이상하다. 우리가 확인하지 전까지는 고양이 상태를 모르는 것이야 당연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예 실재 자체가 두 상태에 걸쳐 있다는 건 마치 내가 어제 산 복권이 당첨되었는지 여부가 이미 복권 당첨번호가 발표되었지만 나는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내 복권이 여러 번호에 ‘걸쳐 있다’는 말처럼 이상하게 들리는 것이다.
이처럼 양자적 확률은 우리가 대상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몰라서 생기는 통상적인 확률, 즉 ‘무지의 확률probability of ignorance’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확률적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런데 고양의의 죽은 상태와 살아 있는 상태의 걸쳐있음이 잘 이해가 되지 않듯이 우리가 대상계에 부여하는 속성이 확률적이라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오늘 입은 스웨터 색깔이 30% 확률로 오렌지 색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런데 중요한 점은 이렇게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워도 양자물리학의 예측 능력은 매우 뛰어나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인슈타인과 파인만 사이의 의견 대립에 직면하게 된다. 양자물리학이 예측은 잘 되지만 이해가 되지 않으니 좀 더 좋은 이론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아인슈타인의 생각과 양자물리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래도 실험 결과를 잘 설명하고 예측 능력도 높으니 과학이론으로서 문제될 것이 없다는 파인만의 입장이 그것이다. 이 두 입장 중에서 독자분들은 어떤 입장에 더 끌리실까?
비국소성 혹은 믿기 힘든 얽힘의 문제
양자물리학의 특별함은 이 ‘중첩’된 상태가 원칙적으로는 (실제로는 달성하기 매우 어렵지만) 매우 먼거리에서도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에도 기인한다. 이를 어려운 말로 비국소성non-locality이라고 한다. 앞서 슈뢰딩거 고양이 사례에서도 설명했듯이 양자물리학의 중첩 상태는 측정을 하면 더 이상 성립하지 않고 두 상태 중 하나의 상태로 확정된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의 상태로 확정되게 만드는 ‘원인’은 무엇일까? 슈뢰딩거 고양이의 경우에는 내가 상자를 열어 보는 행위 혹은 일부 해석에 따르면 내 ‘마음’이 고양이의 상태를 인식하여 고양이 상태에 대한 정보를 확득하는 사건이 원인으로 작용하여 측정 결과가 확정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어떨까? 다시 상자 안에 있는 고양이를 생각해 보자. 대신 이번에는 A와 B 두 마리 고양이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좀 이상한 설정이지만 두 마리 고양이의 상태는 기묘한 방식으로 얽혀 있어서 둘 중 한 마리가 죽어 있으면 다른 한 마리는 살아 있는 상태라고 해보자. 이를 ‘얽힘entanglement’이라고 한다. 이 경우 가능한 상태는 두 가지다. 즉, A가 살아 있고 B가 죽어 있고, 반대로 A가 죽어 있고 B가 살아 있는 상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고양이의 상태를 이 두 가능한 상태의 ‘중첩’으로 표현할 수 있다. 물론 고양이를 대상으로 이런 상태를 만들어 내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전자의 ‘스핀’이라는 일종의 각운동량을 사용해서 이런 상태와 동등한 상태를 만드는 건 현재도 가능하다. 최근에는 원자의 뭉치처럼 상당한 규모의 대상에 대해서도 이런 복잡하게 얿히고 중첩된 상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실험적으로 가능해졌다.
여기까지는 앞 사례를 약간 복잡하게 한 것에 불과해 보이는데 여기서 좀 더 나가보자. 고양이 A는 지구에 두고 고양이 B를 은하계 너머 안드로메다 은하로 보냈다고 해보자. 물론 중첩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말이다. 그런 다음 지구 상에서 고양이 A만 관측해 봤더니 살아 있는 상태라고 해보자. 그럼 그 순간(!) 우리는 저 멀리 안드로메타 은하의 고양이 B가 죽어 있는 상태라는 사실을 관측도 안해보고 바로 알 수 있다. 얽힘이라는 전제 덕분이다.
이게 뭐가 신기하냐 생각하실 수 있겠다. 서로 반대 상태가 되도록 설정되어 있으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중첩 상태는 측정 이전까지는 유지된다는 설정이다. 그러니까 안드로메다의 고양이 B는 지구에서 이루어진 측정 이전까지는 살아 있는 상태와 죽어 있는 상태에 ‘걸쳐 있다’가 갑자기 측정 직후에 죽어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도대체 안드로메다에 가 있는 고양이는 지구 상에서 측정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채릴 수 있을까? 얼핏 보면 특수상대성 이론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상한 상황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 상황에서도 특수상대성 이론이 금지하는 빛보다 빠른 정보 전달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안드로메다의 고양이는 지구의 고양이가 어떤 종류의 측정을 언제 ‘당하게’ 될지 미리 알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양자물리학의 이런 범우주적 연결을 활용해서 인과적으로 영향을 미치거나 유의미한 정보를 전달할 방법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이 이상한 것 분명하다. 이것이 아인슈타인 말한 ‘유령같은 작용spooky action’이다. 아인슈타인은 1935년 포돌스키, 로젠과 함께 쓴 유명한 EPR 논문에서 이 지점을 부각시켰다. 지구에서 이루어진 행위가 ‘즉각적으로’ 멀리 안드로메다에 영향을 주는 것을 물리학적으로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양자 물리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보어는 이 논문에 대한 대답에서 앞서 지적한 내용, 즉 이 ‘영향’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시공간을 통해 전파되는 인과적 영향이 아니기에 문제 없다고 답하기는 했다.
그런데 이런 얼핏 보면 초자연적으로 보이는 ‘얽힘’ 현상이 실제 실험에서 확인되고 있다. (고양이를 사용한 실험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얽힘’ 현상 자체는 우리 우주에 실재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어떻게 가능한 지에 대해 우리가 납득할만한 설명을 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여기서 다시 아인슈타인과 파인만의 태도 차이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얽힘이 분명 실재하는 현상임을 알지만 직관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은 아직까지 아무도 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얽힘 현상을 적용하여 매우 유용한 기술들이 만들어지고 있어서 활용하는데는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여기서 파인만이 제안하듯, 양자물리학이 보여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기술개발이나 해야 할까? 아니면 아인슈타인이 제안하듯 이 문제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더 노력해서 더 좋은 이론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할까?
과학이론의 지평을 확장하는 과학정신
과학자들은 대부분의 경우 현상을 수치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하는 이론을 찾는 일조차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어렵게 성취한다. 여기에 더해 적절한 실험 조건에서 혹은 더 나아가 복잡한 인과 관계가 혼재된 실험실 외부의 세계에서 벌어질 일을 예측하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 그렇기에 이 두 과제 즉 설명과 예측 중 어느 하나라도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수행하는 과학이론에 도달할 때 과학자들은 자연스럽게 이 이론이 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알부 과학자들은 원칙적으로 이 두 어려운 일을 수행하고서도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는다. 그 이론이 우리가 이해할 있는 것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과학의 역사에서 조금씩 다르게 정의되었지만 근대 과학 이후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인과적 과정, 즉 원인과 결과의 시공간적 연결을 통해 과학이론이 이해될 수 있을 때 우리가 진정으로 만족스러운 이론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아인슈타인이 대표적으로 이 과학자 집단에 속하지만 그가 유일한 예는 아니다. 양자전기역학의 시초를 연 폴 디랙이나 양자역학의 기본적인 해석 방식을 제시한 슈뢰딩거 등 많은 20세기 초 양자물리학의 개척자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런 이해할 수 있는 이론을 제시해 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물리학의 주도권이 미국으로 넘어가면서 양자물리학에 대한 파인만식의 대응, 즉 양자물리학을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자타가 공인하는 천재인 자신을 포함해 아무도 없지만 그것이 문제될 것은 전혀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수학적으로 깔끔하게 서술될 수 있고, 예측 결과를 정확하게 맞춘다면 과학이론으로서 모든 장점을 다 갖추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생각이 좀 더 나아가면 경험적 판단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영역에서는 수학적 아름다움이 과학이론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다.
아인슈타인도 디랙도 젊은 시절에는 기존 물리학에 저항하던 반항아였다. 하지만 둘 모두 다음 세대 과학자인 다이슨이 보기에는 별 의미없는 철학적 탐론에 갇혀 새로운 물리학의 흐름에 적응 못하는 한물 간 과학자에 불과했다. 이처럼 이상적인 과학이론에 대한 생각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늘 조금씩 변화한다. 당연히 어떤 시점에서 어떤 과학자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주장은 하기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양자정보물리학과 같은 최근 연구 결과들은 양자역학에 대한 표준적 해석에 대해 아인슈타인이 제기했던 여러 논점들이 보다 실험적이고 현실적인 방식으로 재조명되었기에 등장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특정 과학자가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상적인 과학이론의 형식에 집착하는 것이 문제라는 판단은, 아인슈타인이나 디랙에 대한 다이슨의 판단만큼이나 파인만, 다이슨, 와인버그 등 그들을 비판한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과학정신은 끊임없이 기존 이론의 대안을 찾아 더 좋은 이론을 만드려는 비판정신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과학정신은 명쾌한 설명과 더 이상의 설명 없이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론적 근본 가정 사이의 경계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노력에 있지 않을까?
더 읽을거리
Baggott, Jim 2011, Quantum Story: A History in 40 Moment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번역서: 퀀텀 스토리, 짐 배것 지음, 박병철 옮김, 반니]
Galison, Peter 2003, Einstein’s Clocks, Poincare’s Maps, New York: W.W. Norton & Sons. [번역서: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앙카레의 지도, 피터 갤리슨 지음, 김재영, 이희은 옮김, 동아시아]
Gilder, Louisa 2008, The Age of Entanglement: When Quantum Physics Was Reborn, New York: Vintage. [번역서: 얽힘의 시대: 대화로 재구성한 20세기 양자물리학의 역사, 루이자 길더 지음, 노태복 옮김, 부키]
Isaacson, Walter 2007, Einstein: His Life and Universe, New York: Simon & Schuster. [번역서: 아인슈타인 삶과 우주, 월터 아이작슨 지음, 이덕환 옮김, 까치]
Kaiser, David 2011, How the Hippies Saved Physics: Science, Counterculture, and the Quantum Revival, New York: W.W. Norton 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