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고등과학원은 창립 30주년을 맞는다. 고등과학원은 짧은 기간 동안 장족의 발전을 이뤘다. 개원 이래 고등과학원은 한국에서 호기심의 최전선으로 앞장서왔고, 창조성의 발상지로서 자리매김하도록 노력해왔고, 상상력의 무대로서 모두를 위한 토론의 장을 펼쳐왔다. 서른 살의 인간은 완전한 성인이다. 성숙한 고등과학원은 앞으로 30년간 제2의 도약을 통해서 새로운 차원의 발전을 이룩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 원래의 초심을 되돌이켜 보자. 이를 위하여 롤모델이었던 두 연구소, IAS와 IHES의 초기 역사를 뒤돌아 보는 것은 고등과학원의 초창기 30년의 발자취를 평가하고, 앞으로 30년의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갈등이 만연하고 온갖 불합리가 넘치는 인생에서 아름다움을 가꾸고, 지식을 확장하며, 미지의 영역을 탐구하는 데 전념한다는 것은 기이하면서도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은 언제나 혼란스러운 곳이었지만, 시인과 예술가, 과학자들은 만약 그것에 신경을 썼다면 자신들을 마비시켰을 물질적·세속적 제약들을 무시하며 묵묵히 길을 걸어왔다. 실용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지적이고 영적인 삶은 표면적으로 아무런 쓸모가 없는 형태의 활동처럼 보이지만, 인류의 가장 위대한 도약은 언제나 이 ‘쓸모없는 만족’을 추구하는 순수한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다. 지식의 역사에서 증명되듯, 당장 눈앞에 보이는 유용성이나 예정된 목표에 얽매이지 않는 주체적인 ‘이론적 연구’야말로 미래에 상상하지 못한 엄청난 유용성을 낳는 가장 비옥한 지반이 된다. 이러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미국 프린스턴에 세계 최초로 학자들만의 순수한 낙원을 개척한 인물이 바로 Abraham Flexner이다.
1930년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에 Institute for Advanced Study고등연구소, 이하 IAS가 설립된 배경에는 초대 소장인 Abraham Flexner의 독특한 성장 배경과 평생에 걸친 교육 개혁가로서의 여정이 깊이 자리하고 있다. 1866년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독일계 유대인 이민자의 자녀로 태어난 그는 9남매 중 여섯째라는 대가족의 환경에서 자랐다. 모자 상인이었던 아버지는 높은 교육열을 가졌으나 1873년 금융 공황으로 파산하며 아들들을 대학에 보내려던 희망이 꺾였다. 그러나 약국을 운영하던 큰형 Jacob의 헌신적인 지원 덕분에 Abraham Flexner는 Johns Hopkins University에 진학하여 고전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당시 미국에서 매우 드물게 대학원 연구 교육을 강조하던 학풍은 그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정식 교육과정이나 시험, 성적이 없으면서도 명문대 진학률이 높은 실험적인 학교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며 교육 개혁가로서의 자질을 다졌다. 아내가 브로드웨이 극작가로서 대성공을 거두자 그는 학교 문을 닫고 하버드 대학에서 심리학 석사를 마친 뒤 독일의 베를린 대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수학하며 유럽 고등 교육의 정수를 체험했다.
독일 시스템에서 학문의 자유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의학 교육 시스템의 대대적인 개혁에 앞장섰다. 1910년 발간한 《Medical Education in the United States and Canada》플렉스너 보고서는 미국 내 기준 미달 의과대학들의 폐쇄를 권고하며 현대적 과학 의학의 기틀을 확립했다. 이후 Rockefeller Foundation의 General Education Board에서 핵심 행정가로 활동하며 수억 달러의 기금을 집행했으나 내부 권력 투쟁으로 공직에서 축출되는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옥스퍼드 강연을 바탕으로 저서를 준비하던 도중, 그의 인생과 세계 학문사의 정점이 될 결정적인 만남이 찾아왔다.
1929년 말, 대형 백화점을 매각하여 거액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자 했던 자선가 Louis Bamberger와 그의 여동생 Caroline Bamberger Fuld 남매의 대리인들이 그를 방문했다. 남매는 유대인 차별에 대응하기 위해 뉴어크에 의과대학을 설립하려 했으나, Flexner는 일류 의과대학 설립의 한계를 지적하며 오히려 차별에 대응하는 올바른 방법은 또 다른 우대 기관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설득했다. 대신 그는 대리인들에게 “지금껏 단 한 번이라도 원대한 꿈을 꾸어본 적이 있습니까?”라는 역사적인 질문을 던지며, 자신이 평생 동안 마음속에 품어왔던 이상적인 연구 기관의 비전을 제시했다. 그것은 학부생을 가르치거나 기존의 알려진 지식을 전수하는 일반적인 대학원 수준을 넘어, 교수와 연구원 모두가 인류가 이룩한 기존 지식을 당연한 전제로 받아들이고 오직 각자의 자유로운 방식으로 지식의 최전선을 확장하는 데만 전념하는, 순수한 학자들만의 낙원을 미국 땅에 건설하는 것이었다.
Louis Bamberger와 Caroline Bamberger Fuld 남매는 Flexner가 제시한 카리스마 넘치는 교육적 유토피아의 비전에 순식간에 매료되었고, 자신들의 초기 설립 기금 500만 달러를 전액 이 새로운 비전에 투자하기로 결단했다. 마침내 1930년 5월 20일 뉴저지주 법인으로 “Institute for Advanced Study—Louis Bamberger and Mrs. Felix Fuld Foundation”이 공식 등록되었고, Flexner가 초대 소장으로 취임하며 IAS가 그 위대한 출범을 알렸다.
그가 확립한 IAS의 핵심 철학은 두 가지였다. 첫째, 스태프와 교수진을 임명할 때 인종, 종교, 성별을 결코 고려하지 않는다는 완전한 평등주의였다. 둘째, 당장 눈앞에 보이는 유용성이나 예정된 목표 없이 순수한 호기심에 이끌려 지식을 추구하도록 완벽한 자유를 보장한다는 자율주의였다. 이 철학은 그가 발표한 에세이 《쓸모없는 지식의 유용성》에서 명확히 논증된다. Flexner는 지적하길, Marconi가 무선 통신을 상업적으로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Maxwell과 Hertz라는 두 과학자의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 덕분이었으며, 그리고 상대성 이론 역시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라는 추상 수학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했음을 지적했다. 이에 따라 IAS는 학자들이 목전의 급박한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고 완전한 지적 자유를 누리며 행정적 책임이나 강의 의무에서 해방된 안식처로 설계되었다.
이러한 환경은 설립 초기부터 전 세계 최고의 천재들을 끌어들였다. 1932년 수학부School of Mathematics의 신설과 함께 최초의 교수진으로 Veblen과 Einstein이 임명되었다. 특히 1930년대 파시즘의 대두라는 역사적 배경 속에서 IAS는 유럽 학자들의 안전한 미국 이주를 돕는 생명선 역할을 했다. 1933년에는 Göttingen 대학의 석좌 교수였던 Weyl과 천재 수학자 von Neumann이 합류했고, 이어서 Dirac, Pauli가 가세했다. 또한 타 대학원들이 배제하던 여성 학자 Emmy Noether와 Anna Stafford를 선구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인종과 성별을 초월한다는 설립 당시의 정의로운 원칙을 몸소 증명해 보였다.
Flexner의 비전과 열정으로 구축된 IAS의 학문적 유산과 문화는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기초과학 연구소들의 모범적인 롤모델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 연구소는 수학부 외에도 경제·정치학부, 인문학부를 확립하며 자연이라는 우주에 대한 탐구뿐만 아니라 문화라는 우주에 대한 탐구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지적 영토를 완성했다. 지금까지 연구소를 거쳐 간 전현직 교수진과 방문 연구원Member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노벨상 수상자 37명, 필즈상 수상자 64명 중 46명, 아벨상 수상자 29명 중 25명에 달하며 수많은 Wolf상 수상자들이 이곳에서 인류 지성의 경계를 넓혔다. Einstein, Gödel, Oppenheimer, Panofsky, Goldman, Thompson, Kennan, Geertz 등 이름만으로도 학문적 경외심을 자아내는 거장들이 이 학문적 마을의 벽돌을 쌓아 올렸다. IAS는 비록 물리적인 벽돌과 건물의 화려함에 연연하지 않는 정신적 공동체로 출발했으나, 전 세계에서 이 빛과 학문의 중심지로 모여드는 학자들 간의 격식 없는 소통과 비공식적인 접촉을 장려하며 진정한 ‘학자들의 마을’을 유지해 왔다. 오직 순수한 지적 호기심에 이끌려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상태로 학문을 추구하는 행위가 인간 정신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도약이자 인류에게 예상치 못한 중대한 미래를 가져다주는 원천이라는 이 위대한 철학은, 오늘날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한국 고등과학원KIAS의 미래 여정에도 변함없이 빛나는 가장 눈부신 이정표가 되어 줄 것이다.
이러한 IAS의 대성공은 약 30년 후 대서양 건너 프랑스에서 또 하나의 위대한 지적 낙원을 탄생시키는 모태가 되었다. 프랑스의 실업가이자 수학자였던 Léon Motchane은 190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스위스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러시아 혁명 이후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이주한 그는 러시아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했고, 로잔에서 물리학 조교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은행 및 보험업계에 뛰어들어야 했다. 1924년 프랑스에 정착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산업계에서 계속 활동했으나 학문적 열정을 버리지 않고 몇 편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프랑스 수학자들의 격려에 힘입어 Motchane은 마침내 54세의 나이에 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Motchane은 1950년대 중반 프랑스 대학 시스템의 경직성과 관료주의로 인해 뛰어난 인재들이 미국으로 유출되는 현상을 깊이 우려하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에도 학자들이 오직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는 독자적인 고등 연구 기관이 필요하다고 절감했다. 결국 그는 1949년 뉴저지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던 형을 통해 당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IAS의 소장이었던 물리학자 Oppenheimer를 만나게 되었다. 이 만남을 계기로 Motchane은 프랑스에도 미국의 IAS와 유사한 독립 연구 기관을 설립하겠다는 멋진 구상을 하였다. Oppenheimer는 1967년 사망할 때까지 IHES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Motchane의 중요한 자문역을 맡아주었다.
Motchane의 원래 계획은 수학, 이론물리학, 그리고 인문학 방법론이라는 세 가지 기초 연구 분야에 전념하는 연구소를 세우는 것이었다. 이 중 인문학 분야는 결국 연구소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연구소는 프랑스 기업들의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완전한 민간 기업 형태로 출발하였으며, 연구원들에게는 자신들이 원하는 어떤 연구 방향이든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완벽한 자유가 보장되었다. 정부가 경제, 고등 교육, 과학 연구 지원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당시 프랑스의 환경에서 Motchane의 이러한 비전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마침내 1958년 파리 남쪽의 Bures-sur-Yvette에 Institut des Hautes Études Scientifiques고등과학연구소, 이하 IHES가 설립되었다.
초기 IHES는 매우 미약하고 열악한 시설에서 출발했으나, Motchane의 확고한 철학과 당대 최고의 천재 수학자 Dieudonné, 그리고 20세기 수학의 지형을 바꾼 전무후무한 천재 Grothendieck의 영입으로 단숨에 세계 수학의 메카로 떠올랐다. Grothendieck는 대수기하학의 혁명을 일으키며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IHES를 전 세계 수학자들이 동경하는 성지로 만들었다. 미약한 시설에도 불구하고 IHES는 Atiyah, Chern, Hirzebruch, Weil 등 당대 최고의 수학자들을 방문 연구원으로 끌어들였다. 1960년 IHES는 오늘날 전 세계 수학계에 널리 알려진 파란색 표지의 학술지 Les Publications de l’IHES일명 청색 학술지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근본적인 성격을 띤 장문의 논문들을 주로 실었던 이 학술지는 연구소에서 탄생한 가장 중요한 성과들을 세상에 알리는 통로가 되었다. 초기 편집장은 Dieudonné가 맡았으며, 1979년부터는 Tits가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1970년 Motchane은 소장직에서 은퇴하였다. 그는 은퇴 이후에도 IHES에 여전히 헌신적이었으며, 후임 소장인 네덜란드 수학자 Nicolaas Kuiper가 취임한 후에도 행정 및 재정 업무에 계속 관여했다. Motchane은 1990년에 사망했다.
IHES의 창립은 Bourbaki 학파가 특히 프랑스 수학계에 깊은 영향을 미치던 시기에 이루어졌다. Dieudonné는 Bourbaki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었고, Grothendieck 역시 핵심 멤버였다. Chevalley, Serre, Borel 등 수많은 Bourbaki 회원들이 IHES에서 열린 Grothendieck의 세미나에 참석했다. 1971년에는 또 다른 Bourbaki 회원인 Cartier가 방문 연구원으로서 IHES와 오랜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Cartier의 말대로, 첫 10년은 IHES를 Bourbaki 연구소라고 부를 수는 없을지라도 ‘Bourbaki 정신’이 그 자리에 늘 함께했다고 볼 수 있던 시기였다.
이러한 Bourbaki 정신은 청색 학술지에 발표된 가장 유명한 대작이자, Grothendieck가 Dieudonné와 협력하여 집필한 대수기하학의 기념비적 저작인 Élements de Géométrie AlgébriqueEGA, 총 6권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Grothendieck는 청색 학술지에만 150페이지가 넘는 논문을 포함해 총 30여 권에 달하는 저작을 단독 또는 공동으로 발표했다. 또한 그는 대수기하학 세미나 총서인 Séminaire de Géométrie AlgébriqueSGA, 총 12권를 집필했으며, 이 중 10권은 Springer-Verlag를 통해 발간되었다. EGA와 SGA를 합치면 약 10,000페이지에 달하며, 그 외 다른 저작들까지 합하면 수천 페이지가 더 추가된다. 그가 IHES에서 남긴 강의와 저작들은 수학계 전반의 지형을 뒤흔드는 일종의 혁명이었다. 도서관 시설이 빈약하다고 불평하는 방문객에게 그가 “우리는 책을 읽지 않습니다, 우리는 책을 씁니다”라고 답한 것은 단순한 허풍이 아니었다. 그의 엄청난 학문적 생산은 1970년 그가 돌연 IHES를 사임하면서 중단되었다.
초기의 황금기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각자가 유일한 연사로 참여하던 Grothendieck나 Thom 스타일의 세미나는 사라졌지만, IHES의 명성과 수학 상임 교수진의 수준은 여전히 세계 최고를 유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연구소를 거쳐 간 13명의 수학 교수 중 8명인 Grothendieck, Thom, Bourgain, Connes, Deligne, Kontsevich, Lafforgue, Duminil-Copin이 필즈상Fields Medal을 수상했다.
연구소의 학술적 삶이 교수진의 개성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 역시 계속 유지되고 있다. Gromov는 “연구소의 운영 방식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크게 좌우되며, 연구진의 개성이 공간을 크게 형성한다”고 언급했다. 특히 텍사스 출신의 활기찬 Sullivan은 방문객들의 활동과 관심을 조율하는 데 탁월했으며, 젊은 연구원들에게 매우 효과적이었다.
IHES의 2022년 예산은 1020만 유로178억원이었다. 해외에서도 fund raising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데 그 성과는 매우 인상적이다. 대표적으로 Simons Foundation에서 2021년까지 2500만 유로의 지원을 받았다. 2021년부터는 10년간 총 2500만 유로의 정기적인 지원을 서약 받았다.
IHES는 미국 대학들에 비해 급여가 높은 편이 아니다. 연구소의 모든 상임 교수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물가상승률 외에는 인상되지 않는 동일한 수준의 급여를 받으며, 이는 프랑스 대학교수의 최고 호봉 수준에 불과하다. 또한 이들은 최소 6개월 이상 연구소에 상주해야 한다. 이 때문에 Sullivan을 시작으로 많은 교수들이 미국의 주요 대학들과 파트타임 계약을 맺고 활동하기도 했다. Gromov는 뉴욕대 쿠란트 연구소에서 봄 학기를 보내고 있으며, Kontsevich 역시 럿거스 대학교와 유사한 계약을 맺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이 연구소를 떠나지 않는 이유에 대해 Kontsevich는 “이곳은 최대한의 자유가 보장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강의 의무가 없고, 자유롭게 방문객을 초청할 수 있으며, 관료주의가 존재하지 않고, 승진이나 연봉 협상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환경이야말로 최고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연구소에 이렇게 규제가 없고 격식이 없는 점은 방문 연구원들이 가장 사랑하는 요소이다. 비록 너무 형식이 없다 보니 가끔 방문객들이 도서관 대출 방법이나 티타임 시간을 몰라 헤매기도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전통이 바로 ‘공동 점심 식사Communal Lunch‘이다. 박사후연구원과 세계적인 석학, 방문 연구원과 상임 교수들이 격식 없이 한 테이블에 앉아 음식과 대화를 나눈다. 수학자들이 점심을 먹고 나면 테이블 위의 천 냅킨과 종이 위에는 언제나 수학 기호와 기하학적 그림들이 가득 채워진다. 와인을 곁들인 점심 식사 자리에서는 수학 이야 기뿐만 아니라 정치, 문화 등 다양한 대화가 오가며, 이는 IHES를 다녀간 전 세계 모든 수학자들에게 가장 아름답고 생산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Kuiper는 다른 국가의 과학 학회들이 IHES에 기금을 기부하도록 설득했고,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기부금은 연구소 예산의 작지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Motchane만큼 프랑스 행정 시스템을 통해 지원을 이끌어내는 복잡한 과정을 깊이 이해하지는 못했다. 대신 Kuiper는 학술적인 면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특히 그동안 수학 교수진의 명성이 너무나 압도적이었던 탓에 상대적으로 빛을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정비한 물리학 교수진의 수준 역시 매우 뛰어났다. 초기에 Motchane은 젊은 물리학자 Gell-Mann에게 영입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고, 전후 독일 이론물리학의 부흥에 기여한 Lehmann이 1960년대 초반 몇 년간 머물다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1962년 소립자 물리학자 Louis Michel이 첫 물리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1964년 David Ruelle이 두 번째로 합류했다. 현재는 David Ruelle과 Thibault Damour, Slava Rychkov 등이 교수로 있으며 이론물리학 분야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프린스턴의 IAS와 프랑스의 IHES가 보여준 초기 역사는 인류의 위대한 지적 성취가 어떤 토양 위에서 피어나는지 명확히 증명한다. 단기적인 성과나 실용성의 압박에서 벗어나, 오직 학자들의 순수한 호기심과 완전한 지적 자유를 믿고 이를 무조건적으로 옹호해 준 완벽한 안식처가 있었기에 현대 수학과 물리학의 거대한 도약의 상당부분이 가능했다. 서른 살의 성숙한 성년으로 접어든 한국의 고등과학원 역시 당장 눈앞에 보이는 연구비나 논문 편수, 혹은 실용적 유용성이라는 세속적 제약에 빠지지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설립 당시 두 롤모델 연구소가 굳건히 지켰던 초심, 즉 ‘쓸모없는 지식의 유용성’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최우수 인재 선발, 그리고 완전한 자유의 시스템을 유지, 강화시킬 때 고등과학원은 앞으로의 30년을 향한 진정한 제2의 도약을 이룩하고 인류 지성의 최전선을 이끄는 세계적 중심지의 하나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 https://www.ias.edu/flexner-life
- https://www.ams.org/notices/199903/ihes-changes.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