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우리는 19세기 말 선교사들을 통해서 도입된 수학 교재를 바탕으로 한국에서 서양식 수학교육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살펴보았다. 특히 호머 헐버트, 이상설, 이상익 등은 기존의 교육기관에 수학 교육과정을 마련하거나, 산술전문학교를 만드는 등의 방법으로 수학교육의 저변 확대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렇다면 한국의 대학수학교육은 언제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한국 최초의 대학수학교육은 20세기 초 정리사, 중동학교, 평양 숭실학원, 연희전문학교, 20세기 중반 경성제국대학, 경성고등공업학교, 경성대학 등에서 대학 1, 2학년 수준의 수학 강좌가 제공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의 영향으로 1945년까지 한반도에 현대수학을 연구한 경험이 있는 수학자가 단 한 명도 없었고, 1948년의 분단 및 1953년까지의 6‧25 전쟁은 대학수학교육의 또 하나의 걸림돌이 되었다. 1953년 휴전 선언 후 전시대학들이 서울로 돌아오고 다수의 수학과가 전국적으로 신설되는 1950년대 중반부터 대학수학교육이 정상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개척자 역할을 한 몇 분을 이번 글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1. 한국인 최초의 수학학사, 유일선

 

조선 후기 선교사들을 통해 서양 수학이 잇달아 도입되고, 갑오교육개혁 이후 근대식 학교들이 설립되면서 각 학교에서 수학과목 교육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수학교사로 이상설, 이상익, 남순희, 이교승 등이 활발히 활동하였고, 이들의 노력으로 우리말 수학교과서들이 많이 발간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유일선은 일본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여 학사학위를 받은 후 귀국하여 고등교육을 받은 첫 번째 탁월한 조선인 수학교사로 활약하였다.

이전까지 조선 산학 외에 근대서양수학교육은 중학교 수준 이하에 머물러 있었는데,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될 기회를 놓친 유일선은 일본인 목사의 도움을 받아 유학하여 1904년 도쿄 물리학교(현재 도쿄이과대학)를 졸업하였다. 이로서 그는 조선인 중 최초로 수학을 전공한 전문학교 졸업생이 된다. 졸업 후 잠시 도쿄 중앙기상대에서 근무하다 귀국하여 1905년 일신학교의 수학 및 과학 교사를 시작으로 이듬해부터 상동청년학원에서 교장 겸 산술 교사를 역임하는 등 교육계에 종사하였다.

유일선의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 중 하나는 한국 역사 최초의 수학 저널을 발행했다는 점이다. 유일선은 정리사精理舍, 數理專門라는 수리과학 출판사 및 전문학교를 경영하며 <수리학잡지>를 1905년 12월 창간호부터 1906년 제7호까지를 발행하였다. 아마도 신채호, 주시경과 함께 1906년 순수한 한글 잡지의 효시격인 <가정잡지家庭雜誌> 발간에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관여하였던 경험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유일선이 경영했던 정리사1는 정신과精神科와 이과理科로 교과과목이 나눠어 있었는데, 정신과에서는 심리·윤리·논리 등을 이과에서는 수학·물리·화학 등을 지도하였다.

유일선은 또한 근대의 수학 교재인 『초등산술교과서初等算術敎科書(1908)를 저술했다. 그는 1907년 일본어를 가르치는 관립한성일어학교의 교관으로 부임하였고, 사립명신여학교(후에 숙명여학교)와 휘문의숙에서 교무주임과 교장을 지내는 등 귀국 초기에는 개화파 교육자로 활동했다. 이와 같이 유일선은 수학 교육과 학교 운영, 수학저널 발행, 수학 교재 저술 등 다방면으로 영향을 끼친 중요한 인물이지만, 근대수학의 기여에 대한 연구는 그 후 친일파로 활동한 그의 경력 때문에 오랫동안 터부시된 경향이 있다.

 

 

2. 한국 최초의 서양수학교육 전문가, 아서 베커

1903년 한국에 파송된 감리교 선교사인 아서 베커Arthur Lynn Becker, 백아덕, 1879- 1966는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그는 세계 어느 곳이든 현대과학교육이 가장 절실히 요청되는 곳에 가고 싶다고 자원했고, 극동선교 책임자의 권유로 조선에 오게 되었다. 베커는 이전까지 조선인들이 보던 단순한 선교사나 영어교사가 아니라 조선에 온 첫 번째 서양인 수학, 과학 전공의 교육자이다.

숭실학당은 1905년 베커를 교관으로 초빙하였다. 숭실중학 수학과의 1909-1910년 교육과정을 보면 1년 기초산수 5시간, 2년 고등산수 5시간, 3년 대수 5시간, 4년 대수 2시간, 평면기하 3시간으로 전 학년에 걸쳐 5과목 매주 주 20시간을 배정하였고, 응용과학은 7과목에 15시간, 자연과학은 5과목에 14시간을 배정하였다. 이는 다른 교육기관과 달리, 당시 수학과 과학에 배정된 주당 17과목 49시간의 강의를 감당할 자연과학을 전공한 우수한 외국인 교관들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베커는 첫 연구년이 되자 모교인 앨비온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수물과2 개설을 위해 서울로 이사하기 전인 1915년까지 평양의 숭실대학에서 양질의 수학과학교육으로 큰 기여를 한다.

한일병탄 후 1910년대 말 일제하에 모든 대학부를 폐쇄당하면서 우리나라 고등수학은 위기를 맞이한다.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는 1917년 수물과를 만들어 수학 교육을 이어나가고자 하였는데, 평양 숭실대학에서 근무하던 물리학 석사 아서 베커를 초대 학과장으로 초빙하게 된다. 연희전문의 수학 및 물리학과에서는 베커, 루퍼스W.C. Rufus, 1876-1946, 응용화학과 학과장에 임명된 밀러E.H. Miller, 1873-1966 등 비교적 우수한 교수진을 확보한 덕분에 조선인들에게 양질의 고등교육을 제공할 수 있었다.

 

 

아서 베커는 연구년(1919-1921년)을 이용하여 미시간대학U. of Michigan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이후에도 계속 한국 근대수학사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특히 1923년 3월에 총독부가 <개정조선교육령>을 공포하면서 연희전문 수물과를 폐쇄하였으나 다행히 아서 베커의 노력으로 학칙을 개정하고 1924년 4월 수물과를 다시 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1903년 한국에 파송되어 근대고등수학을 지도하기 시작한 이후 1940년 일제에 의해 추방되기까지 27년간 가장 높은 수준의 수학을 이해하고 또 직접 우리 학생들에게 고등수학을 가르쳤다. 베커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제자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수학박사, 물리학박사, 천문학 박사가 되었다. 이후 그는 부산대 초대 총장으로 다시 한국을 방문하여 1946년 8월부터 1년간 부산대의 기틀을 잡았다.

베커에 대한 소개를 마치며 그가 연희전문학교 수물과를 이끄는 동안 배출된 한국인들 중 몇 명을 간단히 언급하려고 한다. 첫 번째로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1924년 8월 귀국한 이춘호가 연희전문의 첫 한국인 수학교수로 강의를 맡았다. (이춘호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다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1924년에는 신영묵을 수학전공 졸업생으로, 1925년에는 장기원을 수학전공 졸업생으로 배출한다. 1919년 4명의 수물학과 졸업생3을 배출했는데 그중 3명이 다시 연희전문학교에서 조수와 강사로 교편을 잡았다.

이 중 장세운은 미국 시카고대학 수학과에서 학‧석사를 취득한다. 장세운은 유학생 시절 시카고지역 유학생회 총회장으로 신망이 높았으며, 북미유학생회가 발간한 잡지 <우라키The Rocky>의 편집장이자 첫 자연과학부 기자였다. 장세운은 이후 1938년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Affine Differential Geometry of Ruled Surfaces from the Point of View of Wilczynski’ 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한국인으로는 첫 번째 수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3. 한국인 최초 수학석사, 이춘호

 

이춘호1893-1950는 1893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한영서원(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여 2년간의 고등과 과정을 마치고 1914년 1회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부산에 있는 초량여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한영서원의 선교사 추천서를 가지고 유학을 떠나 1914년 7월 미국에 도착하여 매사추세츠주 마운틴 호먼Northfield Mountain Hermon고등학교에 입학하고 1916년에 졸업했다. 그 후 1920년 오하이오 웨슬리언Ohio Wesleyan 대학 수학과를 졸업했고, 2년 후인 1921년 6월 오하이오주립대 대학원을 졸업하며 한국인으로서는 수학을 전공한 최초의 석사학위자가 되었다.

이춘호는 그 후 3년간 오하이오주립대에서 박사과정을 일부 이수하면서, 이승만이 총재인 ‘재미 한국 독립운동 동지회’ 학생부장으로 독립운동에도 참여하다 1924년에 귀국했다. 그는 1925년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연희전문에서 수학강의를 시작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이춘호가 처음에는 수학을 공부할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동광> 1931년 9월호에 실린 “될뻔기-나는 소년시대에 어떤 야심을 가졌었나?”라는 기사에 소개되어 있다. 이춘호는 미국에 유학해 공학을 배우다가 광산 실습 도중 광벽이 무너져 2명이 즉사하는 것을 보고 방향을 수학으로 전환했다고 회고했다.

 

장세운의 뒤를 따라 당시의 수재들인 최규남, 국채표, 박철재4 등도 이춘호에게 지도를 받은 20세기 초반의 수학전공자들이었다.

이춘호는 초대총장인 미국인 앤스테드 대위에 이어 1947년 10월 서울대 제2대 총장에 임명되었다. 초대 서울대 총장이 미국인 해군 대위였기 때문에, 보통 이춘호 교수를 서울대 총장에 오른 최초의 한국인이라고 부른다. 이춘호는 ‘국립서울대학교 설치령 파동’(이하 국대안 파동)을 수습한 후, 1948년 총장직을 사임했다. 그는 6·25 전쟁이 일어난 1950년 가을 공산군에 납치당하여, 평양 감옥에 수감 중 악성 이질로 1950년 작고했다. 현재는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愛國烈士陵에 안장되어 있다.

 

 

4. 한국인 최초의 한국수학사 전문가, 장기원

장기원1903-1966은 1903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1915년 용천의성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선천의 신성중학교를 졸업한다. 그 후 1년간 근처의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1921년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 수물과에 입학하여 1925년에 졸업하고 잠시 조교로 근무한다.

1924년 교토제국대학 이과에 위탁생으로 유학을 간 연희전문 수물과 1년 선배인 신영묵의 영향을 받아, 장기원은 한국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1926년 일본 도호쿠東北제국대학 수학과에 입학하여 1929년 수학과를 우등으로 졸업하며 이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장기원은 졸업 후 귀국하여 1929년부터 이화여전(현재 이화여자대학교)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러나 이화여전에는 수학과가 없으므로, 전공이 아닌 화학, 영양화학 등을 강의하면서 연희전문 수물과에 수학강사로 출강하였다. 당시 강의한 과목은 ‘해석기하’였다.5 장기원은 1940년 이화여전을 사직하고 9월부터 연희전문 수물과의 전임강사로 강의를 시작한다.6 1940년에는 간단한 주판 계산기를 발명하여 특허를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7 그 후 1946년 연희대학 수물과에서 수학과가 분리되면서 장기원은 해석학, 미분기하, 현대대수학 등을 강의했다.

1960년 대한수학회 초대 회장인 최윤식 박사가 갑자기 별세하자 부회장이던 장기원이 회장직을 맡게 되어 1960년부터 1966년까지 대한수학회 2대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66년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1962년에는 경북대학교에서 명예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6년 11월 5일 안타까운 사고로 별세하기 전까지 연세대 수학과에서 많은 후진을 양성하며 학장과 부총장을 역임하였다.

학자로서 장기원은 평생 두 개의 과제를 가지고 살았다. 첫 번째는 조선수학사 연구였다. 그는 조선의 옛 수학 고문서를 수집해가면서 연구를 진행하였다. 장기원이 졸업한 도호쿠대학에 가면 조선의 수학책 중 일부의 기증자가 장기원으로 되어있다. 한국수학사에 대한 연구는 장기원이 최초였으며, 당시에는 그가 유일한 연구자이기도 했다. 선진국에서는 주요 과제로 부상한 수학사 연구를 우리 수학자들이 모두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에 통탄해하던 그는 일찍이 도호쿠대학 유학시절부터 한국수학사료 수집에 손대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방방곡곡에 흩어져 있던 고서적 서점, 도서관, 개인의 서가, 그리고 사찰의 서가를 찾아다니며 많은 사료를 발굴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산학정의算學正義(1867), 『묵사집黙思集』, 『중간산학계몽重刊算學啓蒙』, 『구수락九數略』(1700), 『양휘산법楊輝算法』, 『산학원본算學原本(1700), 『산학입문算學入門』, 『산법전서算法全書』, 『습산진벌習算津筏(1850) 등이 있다. 그가 대한수학회 회장으로 재직할 때 발간했던 대한수학회 저널 2호 <수학>에는(1965년 10월) 자신이 권두언을 쓰고, 더불어 <한국수학사료 수종數種>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이 발굴한 조선 산학 사료들에 대해 소개하였다.

두 번째 과제는 1852년 제기된 이래 수학계의 미해결문제로 남아있던 ‘4색 문제Four Color problem’였다. 장기원은 유학하던 학부생 시절부터 이 문제에 도전하였다. 수학 자료와 정보가 미흡하고, 대학의 수학교육도 걸음마 시절이던 1940-50년대 신학문 여명기에, 한 세기를 걸친 수학의 미해결 문제를 연구한 장기원은 문제의 실마리를 발견했다고 믿고 내용을 영문으로 정리하여 동료 수학자들에게 보냈으나 발표되지는 않았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유행하던 말 가운데 ‘최대수와 장기하’란 표현이 있다. 대수를 잘한다고 소문난 최규동과 기하에 탁월하다는 장기원 두 사람을 가리킨 말이었다. 그만큼 1930년대에 최규동과 함께 장기원은 식민지 시기 수학 대중화에도 큰 공을 남긴 당대의 대표적 수학자였던 셈이다. 현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내 ‘장기원 기념실’에는, 장기원이 어려운 연구 여건 속에서도 헌신적으로 수집한 전통산학 사료 약 155종이, 그가 수집한 과학 분야 고서 등과 함께 보관되어 있다.

 

 

5. 한국이 배출한 첫 번째 수학박사, 최윤식

최윤식1899-1960은 1899년에 태어나 1917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심상과와 1918년 사범과를 졸업한 후, 수학에 재능을 보여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유학을 간다. 1922년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히로시마대학의 전신) 제1부를 졸업한 후, 방계로 도쿄제국대학 이학부 수학과에 입학하였다. 이후 1926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도쿄제국대학 이학부 수학과에서 이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한 후에는 휘문고등보통학교, 전주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31년 4월 경성공업학교(서울공고의 전신) 교사로 임명되고, 1932년 4월 경성고등공업학교(서울대 공대의 전신) 조교수를 거쳐 1936년 10월 경성고등공업학교 교수가 되었다. 1940년에는 연희전문학교 강사를 겸임하였고, 1943년 경성제국대학 예과 강사도 겸임하였다. 해방 후 1945년 9월 경성광산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에게 해방 후의 국대안 파동은 커다란 위기와 동시에 학술적 성취의 기회를 주었다.

국대안 파동으로 김일성대로 간 경성대 수학과 초대 학과장 김지정을 포함하여 서울대 문리대 수학과의 모든 교수가 사표를 내고 북한으로 가자, 도쿄제국대학 수학과 졸업생으로 경성광산전문학교장으로 근무하던 최윤식이 서울대 수학과의 주임교수(현재 수리과학부 학부장)로 추천되었다. 최윤식은 1946년 10월 국립서울대학교 수학과 초대 주임교수로 취임한 후 새로운 교수진을 구성하고, 조선수물학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최윤식은 1947년 9월에 정봉협과 국대안 파동으로 고향인 북한에 다녀온 후 휘문고에서 교사를 하던 이임학을 전임강사로 초빙하였다. 그리고 허식, 윤갑병, 오순용 등은 6‧25 전쟁 때까지 조교로 활동하면서 강의를 맡기도 하였다. 최윤식은 1948년 9월 서울대 문리과대학 학장의 직책을 수행하면서 이임학, 윤갑병 등과 함께 연구와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쓰며, 해방 후 한국수학계 초기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1947년 이후 초창기 서울대 수학과 역사는 최윤식 교수와 함 한다. 6‧25 전쟁 중인 1952년 조선수물학회가 수학회와 물리학회로 분리되었고, 이때 수학회는 이름을 대한수학회로 바꾸고 최윤식은 대한수학회 초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1954년 서울이 완전히 수복되었을 때 대한수학회 첫 번째 총회가 동숭동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강당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 최윤식은 대한수학회 회장으로 재선출되었고, 1954년에는 대한민국 학술원의 추천회원이 되었다.

최윤식은 1955년 미국 시카고대 방문연구를 마치고 귀국한 후, 그간의 연구결과들을 제출하여 1956년 서울대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수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이어 서울대 대학원장·문교부고시위원 등을 지냈다. 1956년 서울대 최윤식교수가 제출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수학박사 학위논문은 (1) 베르누이 수와 함수에 관한 연구, (2) 미분방정식 해법과 이론, [부기] 전미분방정식·편미분방정식 그라스만 대수적 연구, (3) 다중 푸리에 급수의 총화법A Method of summation of multiple fourier series’ 이렇게 세 개의 저작물을 묶어 놓은 것이다.

 

 

6. 한국 최초의 여성 수학박사, 홍임식

8·15 광복 당시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이학사 학위를 취득한 한국인의 수는 10명 내외였다. 이 중 여성은 한 명뿐이었는데, 그가 바로 홍임식1916-2009이다.

홍임식은 1936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재 경기여고)를 26회로 졸업한 후, 1940년 일본 나라柰良여자고등사범학교 이과를 졸업했다. 이후 1943년 히로시마 문리과대학 수학과를 졸업하고, 1944년 귀국한 후 경성제국대학 이학부에서 우노 토시오1902-1998 교수의 조교로 근무하다 해방을 맞았다.

도쿄제국대 수학과를 졸업한 우노는 경성제국대학 예과 교수로 근무하면서 물리학과 1기 학생이던 이임학에게 대학수학을 가르친 사람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일본으로 돌아간 우노는 1949년부터 도쿄도립대학 교수로 근무하다, 1959년 니혼대학日本大学 수학과 교수가 된다. 그는 ‘일본 수학 수치계산분야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우노가 일본으로 돌아가자 홍임식은 모교인 경기여고 교사로 근무하다, 우노가 일본으로 돌아가서 홍임식의 일본 유학을 주선하자, 당시 국교가 없는 상황에서 밀항하여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

홍임식은 일본으로 가기 전에 청구문화사로부터 부탁을 받은 그랑빌Granville의 미적분학Calculus 책 번역하는 일을 못 하게 되자, 대신 이임학에게 번역을 권하고 떠났는데, 이임학이 번역한 이 책은 당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홍임식은 도쿄대 대학원에 진학하여 1959년 9월 9일 도쿄대에서 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이로써 그는 한국인 최초의 여성수학박사가 된다. 그리고 1964년부터 우노宇野교수가 근무하는 니혼대학 이공학부 교수로 부임하고 그곳에서 정년퇴임하였다.

우노와 홍임식은 연구와 저술에서 당시로써는 적지 않은 공저를 남겼다. 1961년에는 ‘신수학시리즈’의 물리책 『Potential Theory(전위)』을 우노와 공저한다. 1966년에는 해석학을 배우는 사람을 위한 급수 입문을 출판한다. 1972년에는 『응용복소함수(공립수학강좌)을 단독으로 집필한다. 1973년과 1974년에는 『라플라스 변환共立全書을 같이 저술한다. 

우노 이치로宇野一郎가 2007년에 쓴 『수학자 우노 도시오와의 약속이라는 책의 147쪽에는 <애제자 홍임식 선생에 대하여>라는 부분에 홍교수에 대한 추억을 쓴 내용이 있다. 수치해석을 연구하고 일본의 컴퓨터 개발에 기여한 수학자인 우노 교수와의 각별한 관계는 홍임식이 2000년에 쓴 우노교수를 위한 추도사 <우노 선생님을 그리워하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자료로부터 니혼대학 이공학부 수학과 홍임식 교수의 인생을 알아볼 수 있었다.

한국인 최초의 여성수학박사 홍임식의 연구업적은 고정점 진동문제의 고윳값에 대한 등주부등식 연구, 진동 고윳값의 점근분포, 적분방정식 등이며, 연구논문으로는 ‘근사 이론 실행에의 Gleichverteilung 응용(1968)’, ‘방정식 의 해에 대한 고찰(1968)’, ‘A Remark on maximum modulus principle of the Helmholtz equation(1970)’ 등이 있다. 

2000년 ICME-9 Tokyo 조직위원으로 일하던 홍교수의 도쿄대학 수학과 박사 후배인 미츠오 모리모토Mitsuo Morimoto 교수(상지대 및 Yokkaichi대, 수학사학자)는 ICME-9에 한국인 수학자가 참석하면 도움이 되도록 기금을 조직위원회에 헌금하였다고 필자에게 구술하였다. 미혼이었던 홍임식 교수는 정년퇴임 후에도 평소와 같이 공부하며 지내다, 알츠하이머로 혼자 생활이 어려워지자 모든 재산을 대학에 신탁하고, 대신 대학은 요양원에서 홍 교수가 노후를 보내도록 조치하고 돌봐주었으며 2009년 돌아가셨다.

 

이상구
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대 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