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개최되는 미국물리학회APS의 3월 학술대회 March Meeting가 2018년에는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렸다. 학회 장소였던 컨벤션 센터는 농구팀 레이커스Lakers와 클리퍼스Clippers의 홈구장인 스테이플스 센터 옆에 위치했다. 학회장 앞 건물에서 세레나 윌리엄스의 영상이 반복 상영되던, 미국 땅인 게 실감 나는 장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2018년 학술대회에서 가장 주목을 끌었던 발표 중 하나는 스페인 발렌시아 출신의 MIT 대학 교수 파블로Pablo Jarillo-Herrero의 마법 회전각 두 겹 그래핀magic angle twisted bilayer graphene, 즉 특정 각도로 비틀린 두 겹 그래핀의 물성에 대한 강연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일반적으로 ‘비틀린 그래핀 이중 층’ 또는 ‘회전된 이층 그래핀’이라고 명칭하는 물리계를 ‘회전 그래핀’이라고 줄여서 부르기로 한다.
당시 이미 그래핀은 저항이 작아 전류가 잘 흐르는 반금속semimetal 물질로 잘 알려져 있었으나, 여기서 한 발 나아가 파블로의 강연은 그래핀 두 장을 적당한 각도로 비틀어서 만든 구조에서 저항이 아예 사라지는 초전도체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점을 실험적으로 증명하는 강연이었다. 강연 이틀 전 초고속으로 심사가 완료된 파블로의 네이처 논문을 인터넷에서 볼 수 있었고, 이 결과의 중요성을 인지한 학회 위원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참관할 수 있도록 컨벤션 센터 메인홀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여 파블로 교수의 강연을 실시간 스트리밍할 정도였다. 헐리웃의 본고장답게, 학회장이라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도 물리 깜짝쇼에 수백 명의 인파가 모여 들뜬 기대감으로 파블로의 발표를 경청하는 드물고 진기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제부터 회전 그래핀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이 물질이 중요한 연구 주제로 대두되고 있는지에 대한 개인적 단상을 서술하려고 한다.
회전 그래핀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그래핀이 무엇인지 간략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래핀 관련된 연구를 하는 과학자들이 많고 심지어 초중고 학생들도 그래핀을 벤젠 분자보다 더 잘 아는 경우가 많다. 그래핀은 연필심의 재료인 흑연을 구성하는 탄소로 이루어진 원자 한 층 두께의 박막으로, 벌집 격자 모양처럼 생긴 대표적인 이차원 물질이다. A4 용지보다 약 1백만 배 가량 얇은 물질로서 2004년과 2005년에 걸쳐 이루어진 그래핀 박막 분리와 물성 측정 실험 이후 수많은 과학자의 집중적인 연구 대상이 되었다. 이 분야에 불씨를 지피고 개척한 공로로 영국 멘체스터대학의 가임Geim과 노보셀로프Novoselov 교수는 2010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원자 한 층 두께의 박막이라는 특수성과 함께 그래핀의 우수한 전기적, 열적, 기계적 물성을 활용하고자 하는 가능성이 그동안 꾸준히 제시되어 왔지만, 아직 그래핀에 대한 관심은 공학보다는 자연과학, 응용과학보다는 기초과학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 배경에는 우선 그래핀 성장이나 원자 구조의 제어 기술 측면에서, 전자 소자에 활용되는 실리콘 기반 소재에 비해서 아직 경제적인 타산이 없다는 이유가 있다. 그래핀의 탄소 원자 간 공유 결합력은 다이아몬드보다 강하며 그래핀 물질을 녹이는데 섭씨 4천도 이상의 온도가 필요할 정도로 구조 변형이 용이하지 않다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그래핀에 대한 설명은 HORIZON의 이전 기사 “양자 물질의 역사 [5]: 그래! 핀다!”를 참고해도 좋다.)
두 겹 그래핀의 층간 결합력은 단층 그래핀 내부의 탄소 원자 간 결합보다 훨씬 약하기 때문에, 얼핏 단순하게 한 장짜리 그래핀 두 장을 겹쳐 놓은 것이 곧 두 겹 그래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막상 두 겹짜리 그래핀에 존재하는 전자의 운동 방식은 단층 그래핀과는 많이 다르다. 두 겹 그래핀 사이를 오가는 전자의 이른바 터널링tunneling 운동이 결정적인 변화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전자의 에너지 구조 특성을 이해하려면 우선 에너지 띠라는 개념을 알아야 한다. 이 개념은 전자의 에너지를 전자 운동량의 함수로 표현할 수 있다는 블로흐 정리Bloch’s theorem에 기초하는데, 주기적인 구조의 원자 격자에서 운동하는 전자에 적용 가능한 개념이다. 단층 그래핀의 에너지는 운동량에 정비례하지만 두 겹 그래핀에서는 에너지가 포물선 모양을 그린다. 두 겹 그래핀에는 1 + 1 = 2의 공식이 성립하는 물성도 있다. 가령 빛을 흡수하는 광흡수 효과는 층의 개수에 거의 비례해서 증가한다. 한편 두 겹 그래핀에서는 1 + 1 = 3 이라고 부를 만한 전혀 새로운 성질이 나타나기도 한다. 전자 에너지 구조의 변화가 좋은 사례다.
두 겹 그래핀을 만들려면 일단 한 장의 그래핀 위에 다른 한 장의 그래핀을 얹는다. 그다음 윗 층의 그래핀을 일정 각도만큼 회전시킨다. 예를 들어 위층의 그래핀을 아래층에 대해 정확히 60도만큼 돌린 뒤 다시 겹치면 앞서 말한 포물선 형태의 에너지 모양이 나온다.([그림2]) 만약 층간 비틀림 각이 60도가 아니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층간 상대적 회전 각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격자 불일치 구조가 형성되면서 수학적으로나 물리학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물질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림2 좌 단층 그래핀의 밴드구조. 전자의 에너지가 운동량에 비례해서 증가한다. 가운데 두 겹 그래핀의 모습. 위 층 그래핀은 아래 층에 대해 60도 회전한 모양이다. 에너지 띠 구조는 포물선 모양으로 바뀐다. 우 회전 각 θ에 따른 무아레 격자의 에너지 밴드 구조 변화. θ=1.06도의 마법 각도에서는 매우 평탄한 에너지 밴드가 생성이 되고 이 각도에서 벗어나면 에너지 띠폭이 증가한다. /스리바니 자바지, 박영주, 비마 치타리 제공
두 겹 그래핀의 회전각과 (준)결정 구조
단위 격자unit cell라는 개념은 고체의 주기적인 격자 구조를 기술하기 위해 반복되어야 하는 최소 크기의 원자 구조를 의미한다. 가장 간단한 격자 구조 사례는 일렬로 무한히 반복되는 동일 원소 원자 사슬이다. 이 경우 단위 격자 안의 원자는 단 한 개이며 일직선으로 단일 원자를 무한히 반복시키면 원하는 1차원 원자 사슬을 만들 수 있다. 그래핀의 경우 단위 격자에 두 개의 탄소 원자가 있다. 탄소 원자쌍을 삼각형의 꼭지점에 해당하는 지점마다 하나씩 무한 반복해서 배치하면 벌집 모양의 격자가 구현된다. 60도 회전으로 만든 두 겹 그래핀은 원자 네 개가 포함된 단위 격자를 반복하면 얻을 수 있다. 두 겹 그래핀의 층간 회전각도가 0도나 60도가 되면 두 개 혹은 네 개의 아주 적은 원자 개수로 구성된 단위 격자의 반복된 구조 속에서 움직이는 전자의 문제를 다루면 된다. 이런 문제는 대학교 학부 학생도 (적절한 지도를 받으면) 해결할 수 있다.
일반적인 회전각으로 만들어진 회전 그래핀의 경우도 단위 격자가 존재할까? 이에 대한 답은 비틀림 각도의 값에 따라 달라진다. 회전 각도에 따라서 두 겹 그래핀의 단위 격자가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즉 회전 각도에 따라서 두 겹 그래핀은 주기적 격자가 될 수도 있고 아예 주기성이 사라질 수도 있다.
단층 격자의 최소 단위 격자(단층 그래핀의 경우 원자 두 개로 구성된 최소 격자)에 비해 두 겹 그래핀의 주기적 격자가 훨씬 크고, 그 안에 많은 원자들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를 가리켜 초격자superlattice, 또는 슈퍼셀super cell이라고 부른다. 두 겹 그래핀이 유한한 크기의 단위 격자를 갖는 회전 초격자를 형성할 수 있는 조건은 i1, i2, i3이란 세 개의 정수를 동원해 적을 수 있다. 이 세 정수가 만약 디오판토스의 공식Diophantine equation 3i12 + i22 = i32 을 만족하는 동시에 어떤 회전각 θ에 대해 cos θ = i2/i3 식을 만족하면 된다. 정수는 띄엄띄엄 바뀌기 때문에 회전 각도 역시 당연히 띄엄띄엄한 경우에만 이런 조건을 만족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조건을 만족하는 초격자의 크기는 비틀림각 θ가 조금만 바뀌어도 들쭉날쭉 변동이 심하다. 고체의 전자 구조 계산을 하는 연구원 입장에서 보면 애를 먹을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다른 한 가지 문제점을 꼽는다면 초격자의 크기는 비틀림각 θ가 작아질수록 증가한다는 것이다. 조금 후에 설명하게 될 마법 각도에 가까운 1도 정도로 비틀린 두 겹 그래핀의 경우 초격자 하나에 포함된 탄소 원자 개수가 무려 1만 개 정도 되어서, 컴퓨터를 이용한 전자 구조 계산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메모리 용량도 만만치 않게 필요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위에서 말한 디오판토스 방정식을 만족하지 않는 회전 각도의 경우는 위아래 층 격자 일치가 일어나지 않고, 따라서 아예 초격자가 형성되지 않는다. 이런 경우는 두 겹 그래핀 구조에서 주기성이 사라져 버린다. 예를 들어 회전각이 정확히 30도일 때 두 겹 그래핀의 주기성이 사라지고 대신 준결정quasicrystal 구조가 등장한다. 2018년 성균관대의 안종렬 교수와 고등과학원의 손영우 교수가 공동으로 사이언스지에 준결정 그래핀의 전자 구조에 대한 연구를 발표한 바 있다.
회전 그래핀 탐구의 시초
두 겹 또는 그 이상의 그래핀이 쌓여있는 다층 그래핀은 2005년 무렵, 그래핀이 꿈의 신소재로 각광을 받기 시작할 때부터 관심을 끌었던 소재다. 관심의 배경에는 순전히 과학적인 이유뿐만이 아니라 누가 최초로 그래핀을 만들고 특성을 연구했는지에 대한 업적 다툼이 있다. 그래핀을 만든 사례로만 보면 백금 표면에 그래핀 성장을 했던 1969년 존 메이의 논문이 있다. 다층 그래핀 구조를 원자힘 현미경으로 분리한 뒤 전자 현미경을 통해 관측한 결과는 현재 울산 과기대 교수로 재직 중인 루오프Rodney Ruoff 교수가 1999년 보고한 바 있다. 맨체스터 그룹이 그래핀 소자를 스카치테이프 방식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2004년에도, 조지아텍Georgia Tech의 드히어Walt de Heer 그룹에서는 실리콘 카바이드SiC 기판에 그래핀을 성장하여 광학적, 전자 수송 특성을 보고한 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비싸고 까다로운 실험으로 그래핀을 마련하는 성장 기술보다는 저렴하고 간단한 (스카치테이프를 이용한) 박리형 그래핀 실험이 대세를 이루게 된 것은 시장경제 원리를 따른 결과로 그래핀 연구의 불씨를 활활 타오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리콘 카바이드의 표면 위에서 성장한 그래핀의 문제점은 정확히 언제부터 단층 성질을 갖는 탄소 물질이 형성되는지 모호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성장 시간을 길게 잡으면 단층 그래핀이 아니라 기판과의 상호 작용 효과로 인해 일정한 회전각을 두고 쌓인 다층 그래핀이 형성된다. 드히어 교수는 비틀린 다층 그래핀에서도 단층 그래핀과 유사한 전자 에너지 구조가 보였다는 이유로 그래핀의 성질을 최초로 관측했다는 주장을 펼치곤 했다. 드히어 교수가 비틀린 그래핀 역시 단층 그래핀과 특성이 많이 다르지 않다는 점을 이론 물리학자들에게 증명해달라고 부탁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어쨌든 이런 논쟁이 오가던 2007년 두 겹 회전 그래핀의 전자 에너지 구조 이론 논문을 산토스Lopes dos Santos와 다른 공저자들이 발표했다. 이들이 수행한 계산의 결과로는 한 장짜리 그래핀의 전자 구조와 비교했을 때 비틀림 각도가 작아질수록 전자의 운동 속도가 줄어들기는 하지만 전반적인 그래핀의 전자 구조 자체는 비틀린 각도에 따라 크게 변하지 않았다. 드히어 교수가 만족스러워 할 만한 결과였는지 잘 모르겠다.
마법각도의 예측
연구의 방향이나 주제 선택은 연구자로서의 성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실험 결과에서 영감을 받아 이론 연구자들이 새로운 연구 방향을 정하는 일은 흔히 있다. 오랫동안 당연하다고 믿었던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오는 발견도 간혹 있으며 나중엔 뻔하게 느껴지는 사실도 막상 실험적 물증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세간의 관심을 끌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필자가 상상하기에 드히어 교수의 그래핀 성장 실험 연구가 이론 연구자들이 회전 그래핀 연구를 추진하는 동기가 되었고, 마법 회전각 그래핀의 이론 연구가 다시 실험 연구의 동기가 되는 실험-이론 간의 선순환 구조가 있었다.
두 겹 그래핀의 마법 각도magic angle와 평평한 밴드flat band 생성에 대한 연구는 2011년 라피 비스트리처Rafi Bistritzer 박사와 앨런 맥도널드Allan MacDonald 교수가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에 ‘Moire bands in twisted double-layer graphene’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논문에 등장했다. 무아레Moire는 두 장의 엇비슷한 구조물을 겹쳤을 때 나타나는 커다란 크기의 구조를 말한다. 두 장의 그래핀을 비틀어서 쌓으면 앞서 말한 디오판토스 공식에 따라 훨씬 큰 크기의 초격자가 형성된다. 이런 초격자 구조를 무아레 구조라고 부른다. 이 계산 결과가 몇 년 뒤 MIT 파블로 그룹의 실험 동기가 되었으므로, 일단 이 이론 논문이 세상에 나온 경위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 논문은 그래핀 간의 회전 각도가 1.05도일 때 전자의 에너지 구조에서 벌어지는 특이한 현상을 보고했다. 에너지 띠 또는 밴드는 고체 속을 움직이는 전자의 운동량이 \(p\)일 때 그 전자가 가지는 에너지 \(E(p)\)를 가리킨다. 에너지 띠의 최소값과 최대값의 차이를 띠폭bandwidth이라고 하며, 이 띠폭이 줄어들면 그만큼 어떤 특정 에너지를 가지는 전자들의 개수가 많아지고 동시에 전자의 이동 속도가 0에 가깝게 작아짐을 의미한다. 전자 개수는 많고 운동 에너지가 작을 때는 전자 간의 전기적 상호 작용에서 비롯되는 에너지가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그런 특징을 보이는 전자계를 강한 상관계strong correlation, 또는 강상관 전자계라고 부른다. 앞서 말한 산토스의 논문은 1~2도 가량의 충분히 작은 각도에서 벌어지는 전자 띠 구조에 대해 구체적인 연구를 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비스트리처-맥도날드 논문은 아주 구체적으로 회전 각도 1.05도 근방에서 전자의 에너지 띠 폭이 거의 완벽하게 0으로 줄어든다는 점을 예측했다.
필자는 이 논문의 주저자인 라피와 미국 오스틴Austin에 있는 텍사스 주립대에서 사무실을 공유하였던 터라 마법각 그래핀의 발견까지 이르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볼 수 있었다. 이제부터 그가 회전 그래핀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된 재미있는 경위를 설명하고자 한다. 2009~2010년은 그래핀에 대한 열기가 뜨겁게 지속되던 시기였다. 그 당시 맥도널드 교수 밑에는 대학원생과 박사후 연구원을 포함한 10여 명의 연구 인력이 있었는데 절반 이상이 그래핀과 관련된 연구에 매진하고 있었다. 맥도널드 교수는 본인이 평상시에 고민하는 흥미있는 물리 문제들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풀어보라고 제시하기는 하지만 막상 연구 진행에 있어서는 압력을 전혀 넣지 않는 독특한 관리 방식을 가졌다. 연구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일을 재촉하기는커녕 같이 돌파구를 찾아가는 모습에서 결과에 대한 중압감이 사라질 정도로 마음이 편해지게 하는 그런 성격이었다.
당시 맥도널드 교수는 이미 회전 그래핀 문제에 관심이 있어 연구실 모임 중에 여러 연구원에게 관련 문제를 제시한 적 있었지만, 다들 할 일이 많아서 딱히 복잡해 보이는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연구원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마침 맥도널드 교수가 대학원 고체 물리 수업을 가르쳤는데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두 겹짜리 회전 그래핀의 회전 각도에 따른 터널링 전류tunneling current를 구하는 문제가 이론적으로 흥미로운 것 같으니 도전을 해 보라고 제시했다. (두 그래핀 층 사이에 전압 차이를 주면 전류가 한 층에서 다른 층으로 흐른다. 이 전류를 터널링 전류라고 부른다.)
마침 맥도널드 교수 연구실에 있던 구루 칼사라는 학생이 그 수업을 들었는데 과제 제출 마감 기한이 다가오고 있으나 문제 풀이를 어떻게 할지 몰라 선배 연구원이 있는 우리 사무실로 와서 도움을 요청했다. 라피는 대화를 좋아하고 물리에 다방면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연구자였는데, 그의 책상이 방 입구에 1미터 정도 더 가까웠던 이유 때문이었는지, 구루는 라피에게 먼저 질문을 했고 필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라피는 이런 문제는 식은 죽 먹기이겠거니 하며 당당하게 터널링 전류 공식을 칠판에 쓴 뒤 그래핀의 밴드는 이렇고 터널링 전류는 저렇다는 설명을 보태가며 문제 풀이를 시작했다. 라피는 학생의 수업 과제쯤이야 10분 안에 끝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30분이 지나도 문제가 풀리지 않자 자기 책상으로 돌아와서 머리를 싸매며 심각한 표정으로 1시간 정도 구루와 함께 고민했다. 이리저리 궁리해도 답이 보이지 않으니 구루에게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다음 기회에 문제를 살펴보자고 하고 상담을 종료했다.
라피는 구루와의 상담을 마친 직후 바로 아래층 사무실에 있는 맥도널드 교수를 찾아가서 이 과제 문제를 어떻게 푸는 거냐고 물어보았고, 맥도널드 교수는 빙그레 웃으며 자신도 아직 답을 잘 모른다고 하였다. 라피는 그제야 본인의 물리 실력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고 한다. 이 문제를 연구자의 자세로 접근하기 시작한 라피는 필요한 수학식을 차례로 정리해서 회전 각도에 따른 층간 터널링 전류 공식을 성공적으로 풀어냈고 그 결과를 2010년에 발표했다. 두 겹 회전 그래핀 사이의 터널링 전류 계산이라는 그의 첫 번째 선행 연구를 바탕으로 그의 유명한 PNAS 논문이 만들어졌다.
라피가 마법 각도 계산 그래프를 얻어냈을 때, 각도에 따라 띠폭이 이상할 정도로 심하게 요동하는 모습을 보고 계산상의 실수가 아닐까 고민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이미 라피는 수치(컴퓨터) 계산으로 전자 에너지 띠폭이 현저히 줄어드는 마법 각도를 구한 상태였지만, 이에 대한 이론적 이해를 심화하고 수학적 해석을 찾기 위해 이 결과를 몇 달 동안 묵혀두고 있었다. 라피는 자녀 교육과 다른 개인적인 상황 때문에 학자로서의 길을 접고 미국을 떠나 본국 이스라엘로 귀국하기로 했다. 맥도널드 교수의 기준으로는 아직 미완성의 연구였지만 그대로 논문을 써서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투고하기로 했다.
라피가 쓴 두 편의 논문, 즉 회전 그래핀 간의 터널링 전류 문제와 마법 회전각에서의 평탄한 밴드 형성이라는 결과는 파블로 교수의 2018년 실험 결과에 힘입어 올해 노벨상에 버금가는 권위를 갖는 울프상Wolf prize의 수상 배경이 되었다. 현재 라피는 Applied Materials라는 회사에서 소재 설계를 위해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알고리즘 개발자로 일하고 있으며 마법 회전각 그래핀의 전자구조에 대한 이론적 해석은 아직도 완전히 풀리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다.
마법각 그래핀의 초전도 현상이 여는 새로운 지평
세계적으로 많은 연구 그룹이 이미 2004년부터 그래핀 관련 연구 경험을 축적한 덕분인지 2018년 MIT의 실험 보고 이후 급속한 속도로 후속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LA에서 발표를 한지 채 2년이 안 된 현재 마법 각도 회전 그래핀에서 저항 없이 전류가 흐르는 초전도 현상을 발표한 MIT의 논문의 구글 스칼라 피인용 횟수는 1천 회를 넘어섰고 매일 2~3편의 관련 논문이 발표되고 있다.
초창기 그래핀이 누렸던 폭발적 인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동안 그래핀 물리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던 강상관계 물질 연구자들의 이목을 끌었다는 점이다. 이 뜨거운 관심이 얼마나 오래 갈 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엇갈린다. 한편에선 관련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니 핵심적인 문제들은 1~2년 내로 다 해결될 것이라고 추측하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원자층 단위 두께의 물질을 정밀하게 제어하면서 적층 구조로 쌓아 올리는 기술은 대단히 까다롭기 때문에 앞으로 10년 이상 활발한 연구 주제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다중겹 그래핀의 물성이 실험 조건에 따라 민감하게 변하는 현상도 이 분야의 연구자가 당면하게 되는 도전이자 기회다. 그래핀이 아닌 다른 소재에서 유사한 물리 현상을 찾아보는 탐색 경로도 열려 있다. 그래핀 이외의 다른 원자층 두께의 박리 가능한 소재를 활용해서 무궁무진한 소재 조합을 탐색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에너지 밴드의 띠폭이 이미 좁은 물질들을 층층이 쌓은 뒤 그중 일부 층을 비틀면 기존의 물성을 증폭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가능성도 기대된다.
한편 이미 발견된 마법 각도 회전 그래핀의 초전도 현상의 원인을 규명하는 일 이외에도 다른 질문들이 흥미롭게 부상하고 있다. 가령 전자 간 상호 작용에서 비롯되는 자발적 에너지 밴드 구조 변화, 빛에 대해 비틀린 물질이 반응하는 방법, 무아레 구조에서 존재하는 위상기하적 성질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질화 붕소 기판 위에 쌓인 두 겹 회전 그래핀이나 마름모계 삼층 그래핀에서는 전자의 상호 작용으로 인한 자발적 맴돌이 전류가 존재하고, 그 효과로 인해 양자화된 홀 효과quantized Hall effect가 외부 자기장의 도움 없이도 자발적으로 나타난다는 보고가 있다. 이런 소자에서는 전기적인 방법으로 소자의 자기적 성질을 제어할 수 있는 자기전기 효과magnetoelectric effect도 관측되었다. 이런 발견들은 정밀한 시료 제어 기술이 발전하고 소자의 품질이 높아지게 되면서 그동안 다른 물질에서 보지 못한 신기한 물리 현상을 기대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론적인 면에서는 무아레 초격자의 물성을 보다 정밀하게 기술하려는 노력이나, 새로운 물리적 개념의 이해가 있어야 출현 가능한 성질에 대해 신뢰도 있는 예측을 하려는 노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핀 회전 초격자를 필두로 이차원 소재, 위상밴드, 강상관계 분야를 아우르는 이 연구 분야는 앞으로 수년간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사로 부상하여 활발한 연구 활동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