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ence and Nature

 

과학은 자연을 탐구하는가?

흔히 과학은 자연을 탐구한다고 한다. 물론 사회 현상을 연구하는 사회과학이나 인간의 행동, 심리를 연구하는 인간과학 등의 학문 분야도 있지만, 일반인에게 상식적으로 과학이란 ‘자연과학Natural Science’, 즉 ‘자연의 과학Science of Nature’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후의 논의에서 과학은 자연과학으로 한정하자.

그런데 (자연과학으로 이해한) 과학은 정말 자연을 탐구할까? 이 점을 차근차근 따져보기 위해 일단 ‘자연’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자연自然이라는 명사는 뜻이 6가지나 된다. 각각의 뜻이 동음이의어 수준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모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는 하다. 그중에서 마지막 3가지 뜻은 각각 철학의 전문적 개념 2가지와 초등학교 교과서의 명칭이므로 제외하고 앞의 세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 (예: 자연의 법칙)
  2.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저절로 생겨난 산, 강, 바다, 식물, 동물 따위의 존재. 또는 그것들이 이루는 지리적ㆍ지질적 환경 (예: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다)
  3. (일부 명사 앞에 쓰여)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스스로 존재하거나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 (예: 자연 건조)

1번은 자연과학의 자연과 가장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뜻이고, 2번은 우리가 자연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가장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이미지(등산을 가서 호연지기를 기르거나 태양이 이글거리는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경험처럼 ‘자연과 함께 한다’의 전형적 이미지)와 어울리는 뜻이다. 3번은 자연의 한자 뜻, 즉 ‘저절로 이루어진다’에 가장 가까운 뜻이다.

이렇게 세 가지 뜻을 나누어 보았지만 결국 구별되는 세 가지 뜻에 공통적으로 포함된 의미 요소는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라는 부분이다. 즉, 우리에게 언어적 의미로서의 자연은 ‘인공’과 대비되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꾸어 진술될 수 있다. (자연)과학은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한’ 대상을 연구하는가?

대답은 너무나 당연하게 ‘그렇다!’인 것처럼 보인다. 과학의 세부 연구 분야 자체가 위에서 살펴본 의미의 자연을 기준으로 나누어져 있으니 말이다. 우주를 연구하는 우주론, 살아있는 생명체를 연구하는 생물학, 대기 현상을 연구하는 기상학처럼 과학은 너무나 당연히 ‘자연’을 연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 이렇게 뻔한 답을 하려고 국어사전의 정의까지 들먹이며 난리를 치는지 독자들이 슬슬 짜증이 날지도 모르겠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예상하겠지만, 그 이유는 오늘날 실제로 자연과학 실험실이나 연구실에서 이루어지는 과학 연구가 ‘인공’과 대비되는 의미의 자연을 탐구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상당히 많은 과학 연구가 실은 ‘자연’에 대한 탐구라기보다는 ‘인공’에 대한 탐구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과학은 (자연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공’ 과학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자연과 인공의 변증법

전형적인 과학 실험실을 떠올려 보자. 복잡하게 연결된 관으로 여러 실험 재료가 정제되고, 혼합되고, 다시 정제되고를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연구자들은 자신이 관심 있는 인과 작용(예를 들어 화학 반응에 끼치는 온도의 영향)에 집중하기 위해 다른 가능한 인과 요인을 모두 제거하거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우면 일정한 조건으로 통제한다. 이 ‘통제’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수행하는지가 실험 결과의 성패를 결정하는 경우도 많다. 결국 과학 실험실에서 직접적으로 탐구하는 현상은 자연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복잡한 인과 관계가 중첩된 현상 자체라기보다는, 그 현상에서 우리가 관심 있는 부분만을 골라내서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현상이다.

이 상황을 비유로 설명해 보자. 한 식품회사가 설렁탕을 간편조리 식품으로 개발하기로 결정하고, 표적집단면접법focus group interview을 사용하여 가장 ‘이상적인’ 설렁탕의 특징 몇 가지를 선별하여 이를 최첨단 기술로 구현해 냈다고 해보자. 설렁탕은 일반인들도 가정이나 식당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자연적인’ 음식이다. 하지만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설렁탕은 수많은 인과적 요인에 의해 엄청나게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식품 회사의 목적은 설렁탕의 다양성을 모두 담아내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연적’ 설렁탕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특징만을 극대화시켜 소비자의 인기를 끌면서도, 보존성과 편리성을 높이기 위해 간편조리 방식으로 제조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설렁탕을 만드는 것이다.

비유의 본성상 실험실에서 이루어지는 과학 연구와 식품회사에서 간편조리 설렁탕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정확히 똑같지는 않다. 예를 들어 ‘자연적’ 설렁탕도 간편조리 설렁탕만큼이나 사람이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다. 그에 비해 지구상에 사람이 등장하기 전에도 우주에는 이미 수많은 자연적 존재들이 있었고, 과학연구의 최종 목적은 이러한 자연적 존재들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렁탕의 유비에는 과학이 연구하는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공통점도 여럿 있다. 우선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만들어 내는 현상은, 식품회사가 만든 ‘설렁탕’이 수많은 식당의 ‘자연적’ 설렁탕과 다르듯, 진짜 자연 현상과 다르다. 식품회사의 ‘설렁탕’은 ‘자연적’ 설렁탕의 수없이 다양한 특징 중 두드러진 특징만을 (소비자 의견 수렴을 통해) 추려내 만든 것이다. 이는 과학자들이 자신이 속한 연구집단에서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인과 요인에 집중해 특정 현상을 탐구하는 것과 유사하다.

식품회사의 ‘설렁탕’이 그렇다고 해서 설렁탕이 아니라고까지 할 수는 없다. 분명 많은 사람들이 설렁탕의 한 종류라고 생각하고 사 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품회사의 설렁탕을 다양한 ‘자연적’ 설렁탕의 한 종류라고 볼 수는 없다. 판매를 염두에 두고 소비자의 기호 등을 체계적으로 조사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설렁탕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리 편의성 등을 고려한 이 ‘설렁탕’은 간편조리 방식이라는, 소비자가 자신이 기대하는 효과를 얻기 위해 특정 ‘절차’를 따르도록 만들어졌다. 마치 ‘짜파구리’가 ‘일종의’ 짜장면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자연적’인 짜장면과는 분명히 구별되듯 식품회사의 ‘설렁탕’도 ‘자연적’ 설렁탕과는 분명히 구별된다고 보아야 한다.

마찬가지의 상황이 과학연구에서도 발생한다. 이 점은 ‘동일한’ 자연을 연구하는 과학의 여러 분야 사이에서 연구 주제를 선택하는 방식, 연구를 수행하는 방식, 그리고 연구 결과를 제시하고 동료평가를 거쳐 출판하는 방식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에서도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이 과정에서 어떤 연구 집단에서는 매우 과학적이라고 판단되는 연구 방식이 다른 분야에서는 엄밀하지 못하다고 거부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예를 들어 물리학자들은 수학식으로 간결하게 표현되지 않는 과학연구 결과를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일부 물리학자들은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생물학이 ‘우표 수집’에 해당한다고 폄하하기도 한다.1 하지만 정작 일부 생물학자들은 물리학의 연구방식이나 설명방식이 생명체의 주요 특징을 피상적으로 서술할 뿐 인과 메커니즘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처럼 과학 내에서도 연구하는 대상이나 방법에 따라 ‘제대로 과학을 연구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넓은 의견 차이가 존재한다. 이러한 사실은 과학연구의 분과학문마다 특정 연구 목적이나 스타일을 다르게 ‘선택’해서 나름대로 설정한 ‘자연’의 특정 측면을 탐색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선택된 ‘자연’의 특정 측면 혹은 현상을 분과학문마다 독특한 ‘인공적’ 방식으로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과학

하지만 과학이 ‘인공적’ 현상을 연구한다는 생각은 절대 다수의 과학자에게 공감을 주지 못할 것이다. 실험과학자들은 자신이 실험실에서, 이론과학자라면 모형을 만들어 계산하거나 사고실험을 통해 자연 세계에서 관찰하기 어려운 조건이 부과된 현상을 탐구한다는 점을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그 현상은 ‘원칙적으로는’ 자연에 존재할 수도 있었던 현상이고, 그런 의미에서 자연의 ‘가능성’를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주기율표의 무거운 원소를 예로 들어보자. 주기율표 끝부분에 자리 잡은 발음도 어려운 이름의 원소들은 자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원소가 아니라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만들어 낸 원소이다. 그중에는 반감기가 워낙 짧아서 만들어진 직후 순식간에 보다 가벼운 원소로 붕괴하는 원소들이 많다. 이런 원소들을 자연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는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원소들이 ‘자연적’이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서는 그런 무거운 원소가 만들어질 수 있는 물리적 조건이 갖춰지지 않아서 볼 수 없을 뿐이지, 우주의 다른 시공간에서 원소가 만들어질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물리적 조건이 ‘자연적으로’ 구현되지 말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법’은 자연법칙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자면 현재 우리가 실험실에서 만들어 내는 엄청 무거운 원소들이 자연에 ‘스스로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존재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하지만 그런 원소들이 우리가 밝혀낸 자연법칙을 위배하지 않으며 실험실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자연이 존재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생각은 강력하고 매혹적이다.2 무엇보다 과학 연구를 자연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한’ 방식을 탐구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이론 과학자나 실험 과학자의 연구 활동을 이해하기 훨씬 쉬워진다. 이론 과학자들이 여러 이론적 가정을 사용하여 특정 인과 작용을 탐색하는 것은 그 인과 작용을 제외한 다른 인과 과정을 모두 통제한 상황이 물리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잘 고안된 실험이 종종 이론 물리학자들의 계산 결과를 실제로 구현하는 것을 볼 때, 이론이나 실험으로 탐색되는 상황이 분명 쉽게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스스로 이루어지는’ 자연은 아니지만, 원칙적으로 우주의 어딘가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는 ‘이상화된idealized’ 조건의 자연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생각이 매혹적이기는 하지만 ‘자연의 가능성’을 어디까지 탐구할 것인지 확정 짓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아 문제가 발생한다. ‘자연의 가능성’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어떤 경우에는 수학 연구와 구별하기 어려워지고, 다른 경우에는 공학 연구와 구별하기 어려워진다.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과학이 자연의 ‘가능성’을 탐색한다고 할 때 연구 대상이 되는 ‘가능성’의 범위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가장 자연스러운 답은, 자연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의 내용이 자연의 가능성이므로, 자연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야 될 것 같다. 하지만 이는 비유적으로는 공감할 수 있는 답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별 도움이 안 되는 답이다. 자연과 직접 의사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갖고 있는 과학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자연의 가능성은, 우리가 자연에서 작동한다고 믿고 있는 원리나 자연법칙에 의해 그 범위가 결정된다.

예를 들어 물체의 물리적 속성이 시공간의 한 점에서 유일한 값을 가진다는, 직관적으로 호소력 있는 생각을 살펴보자. 이는 자연이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방식인 것처럼 보인다. 내 몸무게가 동일 장소, 동일 시간에 70kg인 동시에 1톤일 수는 없다. 이는 앨리스가 등장하는 ‘이상한 나라’에서는 가능할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가 사는 실제 물리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과학자들은 20세기 초까지 이 ‘유일값의 원리’를 물리적 세계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자명한 원리로 받아들였다.3 하지만 현재 우리는 ‘결/위상phase’이라는 물리적 속성이 시공간의 동일한 점에서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이 개념에 따르면 물리학의 몇몇 중요한 속성은 한 자리에서 360도를 회전시켜도 원래 상태로 돌아오지 않고 2바퀴 혹은 n바퀴를 돌려야 제자리로 돌아온다. 현대 물리학은 이런 기묘한 물리적 속성의 존재를 단순히 인정할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이론적, 실험적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자연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생각이 역사적으로 바뀌는 일은 물리학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생물학자들도 산소가 생명 현상의 가능한 범위를 확정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다가 혐기성 생물을 발견하면서 그 범위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는 미생물 배양의 표준 방식인 코흐 배양법으로 분리될 수 없는 미생물이 전체 미생물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발견이 이루어지면서, 미생물이 ‘자연스럽게’ 존재할 수 있는 범위에 대한 과학자들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유기화학이 유기체에서만 생성될 수 있는 물질을 다루는 학문에서 탄소 기반 물질에 대한 탐구로 바뀌게 된 과정 역시, 화학자들이 유기 물질의 ‘가능성’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규정한 결과였다.

이처럼 자연의 ‘가능성’의 범위 자체를 재규정하는 일은, (자연의 가능성을 규정하는) 자연법칙이나 존재론적 원리 자체를 연구 주제로 삼는 이론물리학에서 더욱 자유롭게 시도된다. 혁신적인 과학이론일수록 기존에 규정된 자연의 존재 가능한 범위 자체를 새롭게 설정하는 일이 흔하다. 상대성 이론이 시간을 관측자의 운동 상태에 상대적인 것으로 규정하거나 양자물리학이 에너지 보존법칙을 매 시점 타당한 것이 아니라 통계적으로만 타당한 것으로 재규정하는 것이 그에 해당한다. 최근 초끈 이론은 자연법칙에 등장하는 주요 물리 상수의 값을 설명하기 위해 다중우주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중력 상수 값이 우리 우주에서 경험적으로 확인한 값이어야 할 필연적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중력 상수의 가능한 값이 각각 실현되어 있는 무한하게 많은 우주가 존재하는데 단지 우리가 현재 ‘이 우주’에 살고 있어서 중력 상수 값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값이 되었다는 설명이다. 다시 말하자면 중력 상수 값 자체가 그 값이어야 할 아무런 과학적 이유는 없지만, 무수히 많은 복권 중에 분명 당첨 복권이 하나 있는 것처럼 우리가 마침 그 값을 배당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중력 상수 값이 조금이라도 달랐으면 인간이 생존하기 어려운 우주 환경이 되었을 테니 우리가 당첨복권을 뽑은 것이 맞다고 할 수도 있다. 이 설명이 물리 상수에 대해 얼마나 설득력 있는 설명인지와 무관하게, 자연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와 그 가능성을 규정하는 자연법칙과 원리에 대한 탐구가 대부분 밀접하게 상호 연관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자연적 가능성의 범위가 미리 확정되어 있어서 과학자들이 확정된 범위 내에서 자연을 탐구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의 범위’ 자체가 연구 대상이라면, 원칙적으로 과학의 연구 대상을 수학의 연구 대상과 구별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과학은 자연이 존재할 수 있는 방식, 즉 물질적 가능성을 탐구하는 학문이고 수학은 수학적 대상이 존재할 수 있는 방식, 즉 수학적 혹은 논리적 가능성을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상식이다. 예를 들어 아무리 식욕이 좋은 사람이라도 ‘실제’ 사람이라면 짜장면 천 그릇을 한 시간 내에 먹을 수 없다. 그에 비해 이 상황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각각을 모두 기호화해서 Epz(1000, 1)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이런 표현이 정합적으로 가능한 공리 체계를 가정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물론 수학자들이 ‘모든’ 수학적 가능성을 연구하지는 않는다.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수학자들도 수학적으로 흥미롭거나 의미 있다고 판단하는 수학적 구조만을 탐구한다. 하지만 여전히 수학적 가능성이 물질적 가능성보다 훨씬 클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어떨까? 물리학자가 자신이 판단하기에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물질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여태까지 자연법칙이나 자연의 원리가 허용하지 않았던 수학적 가능성을 도입하였다고 가정해 보자. 우주가 수없이 많이 존재하거나 물리 상수가 실은 상수가 아니라 우주의 진화 과정에서 그 값이 변화한다는 가정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이런 가정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결/위상phase’이 현대 물리학에서 발휘한 생산적인 역할을 기억하면, 물리학자들이 직관적으로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수학적으로 가능한 존재론적 가정이나 낯선 물리 법칙을 설정하는 일 자체를 금기시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앞서 지적했듯이 수학적 가능성은 물질적 가능성에 비해 무궁무진할 정도로 범위가 넓다. 따라서 과학자들이 수학적 가능성의 영역을 자유롭게 가져다 별다른 부가조건 없이 물질적 가능성의 영역에 덧붙이는 방식으로 과학 연구나 과학적 설명을 수행한다면 과학과 수학의 차이점은 점점 불분명해질 것이다. 게다가 최근 일부 물리학자들은 전통적으로 과학과 수학의 결정적 차이라고 간주되었던 ‘경험적 검증’이 어려운 상황에서는 과학이론의 수학적 일관성과 아름다움만으로도 그것의 참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된다면 과학은 수학적 가능성 중에서 과학자들이 물질 현상과 연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연구하는 학문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이렇게 과학 연구를 규정하면 과학이 자연의 가능성을 탐구한다는 생각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과학자들이 탐구하는 ‘자연’의 가능성이 정확히 ‘어떤 자연’의 가능성을 의미하는지 자체가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다른 극단으로 가보자. 나노과학이나 합성생물학과 같은 첨단 과학연구는 연구 주제를 공유하는 관련 첨단 공학연구와 구별하기 어렵다. 탄소나노튜브처럼 특정 소재에 집중하는 전문 학술지의 경우, 논문을 투고하는 연구자의 소속이 과학과 공학에 퍼져 있는 경우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도 과학은 ‘자연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공학은 과학지식을 활용하여 그 가능성을 ‘인공물’로 만드는 연구를 한다는 상식적 직관이 타당할까?

현대 생물학 실험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유전자변형생물체LMO, Living Modified Organism, 보다 구체적으로 특정 암 기작을 규명하기 위해 암 발생에 영향을 주는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쥐 유전체에 포함시킨 온코마우스OncoMouse를 고려해 보자. 온코마우스는 하버드마우스라고도 불리는데 그 이유는 하버드대학교 유전학자 필립 레더 연구팀에 의해 개발되었고, 더 중요하게는 유전자변형 쥐 중에서 최초로 1980년대에 특허를 획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코마우스는 논란의 여지 없이 인공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진 뒤 상업적 이해관계를 갖는 듀폰과 같은 회사의 관리하에 현재도 분자유전학 연구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런 상황, 즉 온코마우스가 인공적 개발과 상업적 특허, 그리고 과학 연구에서 결정적인 역할 수행한다는 특징을 모두 갖는 상황은 더 이상 첨단 과학연구에서 낯선 현상이 아니다. 대학을 비롯한 많은 연구기관은 소속 연구자들이 자신의 ‘순수 과학 연구’를 상업적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특허로 연결시키기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많은 과학자들은 이에 부응해서 과학 연구와 인공물 개발, 이를 통한 상업적 이익을 자연스럽게 함께 고려하고 있다.

이 글의 목적은 현대과학의 상업화에 대한 분석이 아니다. 그보다 핵심 질문은 온코마우스가 과연 ‘자연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활동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는가이다. 생물 유전체를 특정한 방식으로 ‘변형’하고 변형의 효과를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분석하기 위해 야생종wild type과의 번식을 완벽하게 통제하여 순수 혈통으로 길러내는 일련의 실험 기법은, 자연의 가능성보다는 인간이 이런 생명체를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과학자들은 이런 ‘인공의 가능성’을 활용하여 관련 과학지식, 온코마우스의 경우 암유전학의 지식을 확장한다. 그에 비해 생명공학자라면 온코마우스 자체를 보다 개량하고 이를 통해 암 치료제 등을 만드는 일에 더 집중할 것이다. 물론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연구 현장에서 분명하게 가려내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동일한 온코마우스를 바라보는 과학자와 공학자 사이에 문화적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현대 첨단 과학의 여러 연구 분야에서 공학자들만큼이나 과학자들도 ‘인공의 가능성’을 탐색한다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인공의 가능성’을 통해 무엇을 성취할 것인지에 대해 과학자와 공학자가 약간 다른 태도를 보인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온코마우스와 같은 LMO 연구자들이 ‘자연의 가능성’을 탐구한다는 주장은 모호한 은유적 의미 이상을 갖기는 어려울 것 같다. 결국 현대 과학의 많은 영역에서 ‘자연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은 실은 ‘인공적 가능성’에 대한 탐색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고, 이는 이들 영역에서 과학과 공학의 구별이 쉽지 않다는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자연의 모형을 탐색하는 과학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자연)과학은 자연을 탐구하는가? 글 앞부분에서 설명했듯 과학이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않은’ 자연 그 자체를 탐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과학은 자연의 가능성을 탐구하는가? 이 제안은 매력적이지만 앞서 설명했듯 현대 과학연구의 풍경을 고려할 때 ‘자연의 가능성’의 범위를 확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좀 과격하게 들리겠지만 과학이 자연을 탐구한다는 생각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연구가 자연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활동이라는 말은 물론 아니다. 통념과 달리 과학연구와 자연의 관계는 중요한 인식적 매개물을 거친 간접적인 것이다. 즉, 과학은 자연을 그 자체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모형model을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말이다. 과학자들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연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자연의 모형을 이론적·실험적으로 탐구한다. 이 주장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좀 더 자세하게 논의하기로 하고, 이 글은 모형기반 과학연구에 대한 간단한 소개로 마무리하겠다.4

과학 교과서를 보면 수많은 모형이 등장한다. 과학자들은 모형을 이용해서 특정 자연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를 설명하거나 모순적으로 보이는 현상이 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인과법칙과 위배되지 않는다는 점을 납득한다. 주목할 점은 이 모형들은 설명하거나 이해하려는 현상의 ‘모든 측면’을 담아내고 있지 않을뿐더러, 처음부터 그럴 의도로 만들어지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너무 많은 인과요인을 포함한 모형은 그 모형으로부터 정확한 예측 값을 도출하기도 어렵거니와 제한된 인지 능력을 가진 우리에게 명료한 과학적 이해를 주지도 못한다.

다시 말하자면 모형은 단순할수록 유용하다. 물론 단순하기만 하고 자연 현상에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 모형은 쓸모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뛰어난 과학자일수록 너무 단순해서 별다른 가치가 없다고 여겨졌던 모형의 구성 요소를 ‘창의적으로’ 해석해서 복잡한 현상의 인과적 핵심을 포착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이런 일에 성공하면 그전까지 너무 단순해서 큰 관심을 끌지 않았던 모형이 관련 과학자들의 핵심 연구 주제가 되곤 한다. 응집물질 물리학에서 XY-모형의 사례가 이에 해당한다. 처음에는 흥미로운 수학적 모형에 지나지 않았던 이 격자모형은, 여러 과학자들이 모형에 등장하는 변수와 상호작용을 수많은 물리계에서 ‘창의적’으로 해석해냄으로써 중요성이 획기적으로 높아졌다.[6]


이론과학자들은 복잡한 자연이 정확히 어떻게 작동하는지 전체를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자신이 주목하는 특정 현상이나 주요 변수 값 사이의 관계를 포착할 수 있는 모형을 개발하고, 모형이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 탐색하고, 모형을 통해 자연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해석의 틀을 만들어 내는 데 집중한다. 실험과학자들은 이런 일련의 작업, 즉 모형 개발, 탐색, 적용, 해석 틀 개발 등을 실험실에서 다양한 인공적 방식으로 수행하며 이론과학자들과 협업한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과학연구의 초점을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자연에 대한 ‘모형’으로 옮기는 것이 수학에 대비되는 과학의 정체성을 보다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다.5

참고문헌

  1. 장하석 2015,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서울: 지식플러스.
  2. Carroll, Sean 2018, The Big Picture: On the Origins of Life, Meaning, and the Universe Itself, New York: Dutton.
  3. Cartwright, Nancy 1983, How the Laws of Physics Li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4. Cartwright, Nancy 1999, The Dappled World: A Study of the Boundaries of Scienc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5. Petroski, Henry 1992, To Engineer is Human: The Role of Failure in Successful Design, New York: Basic Books.
  6. Yi, Sang Wook 2002, ‘The Nature of Model-Based Understanding in Condensed Matter Physics’, Mind and Society 5(3): 81-91.
이상욱
HORIZON 편집위원, 한양대학교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