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섭씨 0도씨 이하의 온도에서는 얼음이 되고, 100도 이상의 온도에서는 수증기가 된다. 이렇게 전이 온도transition temperature 라고 부르는 온도를 기준으로 물질의 상태가 변하는 현상을 상전이phase transition 라 부른다. 상전이는 온도뿐 아니라 압력, 외부 자기장과 같은 다른 변수에 의해서도 일어난다. 상전이 전후로 물질은 전혀 다른 성질을 갖게 되지만, 물질을 구성하는 성분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물이 상전이를 겪으며 된 얼음과 수증기가 모두 같은 H2O 분자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외부 조건에 따라서 분자들의 배열이 바뀌는 것뿐이다. 어는점 아래에서는 분자들이 서로 단단하게 결합되어 분자들이 움직일 수 없는 고체 상태가 되고, 끓는점 위에서는 분자들이 따로 행동하는 기체 상태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상전이를 겪는 이유는 외부 조건에 따라, 분자들이 해당 조건에서 가장 안정적인 (에너지가 낮은) 상태에 도달하려고 배열이나 상호 결합 상태를 바꾸기 때문이다.
고온 초전도체에 대한 이야기를 물의 상전이로 시작하는 이유는 수은이나 알루미늄 같은 금속이 초전도체로 변화하는 것이 상전이 현상이기 때문이다. 초전도 상전이는 물의 상태 변화처럼 원자의 배열이 바뀌지는 않지만, 전자들의 상태가 변하는 상전이 현상이다. 겉으로 보기에 금속 원자들은 원래의 자리에 있지만, 그 안의 전자들의 상태는 자유 전자로 만들어진 유체 상태에서 쿠퍼 쌍으로 이루어진 초유체 상태로 바뀐다.
이러한 초전도체로의 상전이를 도표로 나타내면 우측의 [그림1]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그래프의 가로축은 온도, 그리고 세로축은 자기장의 세기를 나타낸다. 그리고 그래프상의 위치로 물질이 어떤 상phase을 띠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초록색 원으로 위치가 표시된 A는 전이 온도보다 높은 온도에 있고, 자기장은 걸려있지 않다. 따라서 정상 금속인 상태에 있어야 한다. 상도표에서도 A는 정상 금속에 해당하는 영역에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A에서 온도를 낮추어 초전도 전이 온도 이하로 내려가면 초전도체가 된다. 그래프에서 보면 가로축을 따라서 왼쪽으로 쭉 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파란색 원으로 표시된 B에 도달한다. 상도표 상에서도 B 점은 초전도체의 영역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상도표에서 세로축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도 물론 가능하다. 외부 자기장을 걸어주면 도표상에서 위 방향으로 이동하게 된다. B의 지점에서 자기장을 걸어주면 경계선을 넘어 빨강 원으로 표시된 C에 도착하게 되고, 이때에는 정상 금속인 것을 볼 수 있다. 온도를 높이지 않아도 자기장으로 인해 초전도체의 특성을 잃는 것은 초전도체의 기본적인 특성으로, 전이 자기장보다 큰 자기장에 의해 쿠퍼 쌍이 불안정하게 되어서 초전도 상태가 아닌 정상 상태로 바뀐다.
이렇게 상도표는 상전이 현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유용한 그림이다. 수많은 실험으로 얻은 정보를 한 장의 그림으로 요약해서 볼 수 있고, 초전도와 같은 물리 현상에 관한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림1]의 경우에는 온도가 낮거나, 자기장이 작을 때에만 초전도체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초전도체를 설명하는 이론은 이러한 상도표의 형태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어야 한다. 실제로 지난 글에 소개한 BCS 이론은 외부 자기장과 온도에 대한 초전도체 상도표의 형태를 완벽히 재현해낸다.
이제 구리 산화물 초전도체의 상도표를 살펴보자. 왼쪽에 보이는 [그림2]의 상도표는 구리 산화물 초전도체가 띠는 물리 현상을 요약하여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가로축은 홀 도핑 그리고 세로축은 온도를 나타내는데, 가로축의 홀 도핑에 대해서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니 잠시 후에 다루기로 한다. 일단 상도표를 보면 한눈에 보기에도 두 가지의 상으로 이루어진 고전 초전도체의 상도표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온 초전도체의 상도표는 반강자성, 슈도갭, 전하밀도파, 초전도체, 이상 금속 등의 현상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중세 시대 유럽 지도처럼 복잡한 이 상도표에서 고온 초전도 상태에 도달하려면, 생소한 이름을 갖는 영역을 거치지 않고는 도달하기 어렵다. 구리 산화물 초전도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복잡한 상도표를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필요하니, 아직 난제로 남아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고온 초전도 현상만을 설명하기도 쉽지 않은데, 이 모든 현상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어야 하니, 이론 물리학자들의 고민이 깊을 것이다.
그래도 상도표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구리 산화물 초전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웃하는 모든 현상에 대한 이해를 높여야 한다는 점이다. 고온 초전도체를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은 상도표를 채우고 있는 다른 현상들과 초전도와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에 큰 노력을 쏟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상도표를 채우고 있는 흥미로운 물리 현상과 그들이 고온 초전도체 현상에 시사하는 바에 대해서 다루려 한다. 본격적으로 물리 현상에 대해 다루기 전에, 상도표의 가로축인 홀 도핑과 구리계 초전도체의 화학 조성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구리 산화물 초전도체의 구조와 홀 도핑
지난 글에서도 소개했듯이 구리 산화물 초전도체는 종류가 다양하다. 여러 원소를 조합하여 만든 화합물이기 때문에, 조성과 구조에 따라서 무수히 많은 구리 산화물 초전도체를 만들 수 있다. 여기에서 다룰 물질은 La-Ba-Cu-O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진 물질이다. 줄여서 LBCO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물질은 구리 산화물 초전도체 중에서 가장 간단한 구조로 되어 있기도 하고, 고온 초전도체의 발견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베드노츠와 뮐러가 발견한 최초의 구리 산화물 초전도체이기도 하다.
먼저 구조를 살펴보면 LBCO는 [그림3]의 왼쪽에서 볼 수 있듯이 층상 구조로 되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두 종류의 층이 번갈아 가면서 쌓여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파랑으로 표시된 구리Cu 와 빨강으로 표시된 산소O 로 이루어진 Cu-O층이 있고, 녹색으로 표시된 란타늄/바륨La/Ba 과 산소로 이루어진 La/Ba-O층이 있다. 여기에서 Cu-O층은 모든 구리계 산화물 초전도체가 공유하는 시그니쳐이며, 구리 산화물 초전도체의 핵심적인 물리는 이 Cu-O로 이루어진 층에서 일어난다.
상도표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변수를 흔들어보아야 한다. 온도는 물질을 냉각기에 넣음으로써 바꾸어줄 수 있지만, 어려운 것은 물질이 가진 전자의 농도를 바꾸는 것이다. 화학에서는 물질에 불순물을 섞는 방식으로 물질이 가진 전자의 농도를 조절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을 도핑이라고 부른다. LBCO에서는 Ba이 불순물의 역할을 한다. LBCO의 정확한 화학식은 La2–xBaxCuO4 인데 오로지 La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어미 화합물 La2CuO4 에서 시작해, La을 Ba으로 치환해 불순물의 양인 x를 늘려가며 물질을 도핑한다. 즉 La/Ba-O층의 조성을 바꿔서 물질의 성질을 조절하는 것인데, 이 방법의 장점은 구리 산화물 초전도체의 핵심 구조인 Cu-O층을 화학적으로 건드리지 않고 물질의 성질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이다.
La을 Ba으로 치환하면 Cu-O층의 전자 개수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 그 이유는 La과 Ba 이온이 가질 수 있는 전하량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온이 갖는 전하량은 각 원소의 특징이다. La은 화합물이 되었을 때 전자를 세 개 내놓으며 La3+ 이온이 되지만 Ba은 전자를 두 개만을 내놓으며 Ba2+ 이온이 된다. 이웃하는 Cu-O층의 입장에서는 원래 세 개를 받던 전자를 두 개만 받았으니, Ba이 들어올 때마다 전자를 하나씩 잃는 꼴이 된다. 이런 방식으로 Cu-O층에 공급되는 전자의 개수는 줄어들고, 이로 인해서 원래 전자가 있었던 자리에 구멍이 생기니 이를 홀hole이라 부른다.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물리학자들은 음의 전하를 갖는 전자가 빠져나간다는 표현 대신에 양의 전하를 갖는 홀이 추가된다는 표현을 선호한다. [그림2]의 상도표에서 오른쪽으로 가려면 물질에 Ba을 추가해가며 실험한다. 반대로 홀이 아닌 전자를 도핑 해도 고온 초전도 현상이 나타나는데, 지면의 한계도 있고, 홀 도핑에 대한 연구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홀 도핑이 된 물질에 대해서만 다룬다.
구리 산화물 초전도체의 상도표는 세 개의 영역으로 나뉜다. 상도표를 보면 초전도를 보이는 영역이 돔 형태를 띠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돔에서의 위치를 기준으로 영역을 나눈다. 세 개의 영역은 돔의 정점을 기준으로 왼쪽이 덜 도핑된underdoped 영역, 돔의 정점에 해당하는 영역이 알맞게 도핑된optimally doped 영역, 그리고 정점의 오른쪽을 과도하게 도핑된overdoped 영역으로 부른다. 덜 도핑된 영역에서 알맞게 도핑된 영역으로 갈수록 초전도 전이 온도는 증가하다가, 알맞게 도핑된 영역에서 가장 높은 전이 온도를 갖고, 과도하게 도핑된 영역에서는 다시 초전도 전이 온도가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 각각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물리 현상을 살펴보자.
모트 절연체와 반강자성
덜 도핑된 영역은 도핑이 되지 않은 상도표 가장 왼쪽의 어미 화합물에서 시작된다.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어미 화합물은 놀랍게도 전기가 흐르지 않는 절연체이다. 그중에서도 모트 절연체라고 불리는 특이한 물질 군에 속한다. 모트 절연체는 1977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네빌 모트Neville Mott,1905-1996 에 의해서 이론적으로 설명된 물질 군이다. 모트의 이론이 개발되기 이전에 사람들은 원자의 전자구조에 기반해서 전도체와 절연체의 차이를 설명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한 원자에서 다른 원자로 전자가 넘어가는 것이 전류인데, 전자가 이웃하는 원자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옆 원자에 전자가 들어갈 수 있는 빈자리가 필요하다. 절연체와 전도체의 차이는 옆 원자로 전자가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빈자리가 있는지로 결정됐다. 즉 절연체인 물질은 전자가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자리가 없고, 전도체는 전자가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자리가 있는 물질이다.
하지만 다양한 물질을 연구하면서 이런 이론에 맞지 않는 물질들이 등장했다. 그중 하나가 산화니켈이다. 산화니켈은 기존의 이론에 의하면 전자가 넘어갈 수 있는 빈자리가 있으므로 전도체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측정 결과 산화니켈은 전기가 흐르지 않는 절연체였다. NiO라는 아주 간단한 화학식을 갖는 물질이 이론적 예측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모트는 전자 간의 전자기적 척력을 고려하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이론을 고안했다. 이웃하는 원자에 빈자리가 있지만, 원래 있던 전자가 옆에서 넘어오려는 전자를 밀어내면서 전자를 넘어오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마치 전자의 교통체증 같은 이런 상황은 많은 물질의 성질을 설명할 수 있었다.
모트의 이론의 또 다른 결과는 전자가 가진 스핀의 정렬이다. 모트 절연체에서 이웃하는 전자는 서로 반대 방향의 스핀을 가지려는 경향이 있다. 결과적으로 전자의 스핀 방향은 번갈아 가며 방향이 바뀐다. 스핀의 방향을 화살표로 표현한다면 한 원자에서는 위 방향으로 그리고 다음 원자에서는 아래 방향을 가리키는 식으로 정렬이 된다. 이러한 형태의 정렬을 [그림2]의 상도표에도 적혀있는 반강자성antiferromagnetism 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모트 절연체의 성질은 두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하나는 전자들 사이의 전자기적 척력이 강하다는 것, 둘째는 전자들 사이의 스핀이 반대 방향으로 정렬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자녀들이 부모님과 똑같은 특징이 발현되지 않아도 유전자를 몸속에 갖고 있듯이, 어미 화합물을 도핑해서 얻은 물질도 이 두 가지 성질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을 기억해두자.
모트 절연체인 어미 화합물을 도핑하면 본격적으로 덜 도핑된 영역의 중심부로 들어가게 된다. 도핑으로 인해서 반강자성은 빠르게 사라지고 낮은 온도에서 초전도가 자리를 잡는다. 이 영역은 최근까지도 가장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영역이다. 모트 절연체였던 물질이 도핑으로 빠르게 초전도체로 변화하는 양상을 연구하기 위해서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홀 도핑을 해도 어미 화합물인 모트 절연체에서의 강한 전자기적 척력과 스핀 사이의 상호작용이 물질 안에 존재한다. 많은 물리학자는 이 두 가지 특징이 고온 초전도 현상을 이해하는 데에 핵심이라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현재 고온 초전도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의 후보 중 가장 유력한 후보들도 이 스핀 사이의 상호작용에 기반을 두고 있다. 스핀 요동에 기반을 둔 더글라스 스칼라피노Douglas Scalapino,1933- 의 이론이나 [1] , 필립 앤더슨Philip Anderson,1923-2020 의 공명하는 원자가 결합 이론Resonating valence bond theory [2] 모두 이런 가정에서 시작된 이론이다.
너울거리는 전자들, 전하 밀도파
덜 도핑된 영역의 상도표에서 눈에 띄는 현상 중 하나는 전하 밀도파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고체에서 원자는 일정 주기를 가지고 규칙적으로 배열되어있다. 일반적으로 전자의 공간상 분포는 바로 이 원자들이 만드는 주기와 같은 주기를 따른다. 전자는 원자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하 밀도파에서는 전자들이 원래 물질이 이루던 주기와는 다른 독립적인 주기성을 띠는 구조를 형성한다. [그림4]는 이러한 전하 밀도파를 표현한 그림이다.
[그림4]에서 원자 위에 너울거리는 표면은 전자의 밀도를 나타낸다. 이 그림을 보면 전자의 밀도가 기존의 격자 주기보다 몇 배 긴 주기로 너울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전하 밀도파는 일부 영역에 전자가 모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전자 간에 일종의 인력이 작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구리 산화물 초전도체뿐 아니라, 다른 초전도 물질의 상도표에서도 전하 밀도파가 많이 발견된다. 그래서 초기 초전도 연구에서는 이 전하 밀도파와 같은 현상이 초전도 현상의 원인이라는 설도 있었다. 물론 지금은 전하 밀도파가 초전도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라는 것은 밝혀졌지만, 여러 정황을 고려했을 때 고온 초전도 현상과 전하 밀도파의 기저에는 같은 상호작용이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전하 밀도파는 초전도를 일으키기보다는 오히려 초전도 현상과 ‘경쟁’하는 독특한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경쟁은 상도표에서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전하 밀도파의 전이 온도가 정점을 이루는 영역에서 초전도 전이 온도가 푹 꺼지는 형태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쟁 관계는 최근 10년 넘는 기간 동안 활발한 연구 주제였다. 2012년 네이처 피직스에 발표된 실험 결과는 두 현상의 경쟁을 처음으로 직접 증명하기도 했다 [3].
이 연구에서는 엑스선 회절로 구리 산화물 초전도에 있는 전하 밀도파를 직접 측정할 수 있다는 점을 이용했다. 실험에서 온도를 내리면 전하 밀도파에 해당하는 신호가 증가하다가 초전도 전이 온도 아래에서 초전도 상태로 진입하면 갑자기 신호가 감소했다. 반대로 강한 자기장을 걸어주어 초전도 현상을 억제하면 다시 전하 밀도파의 신호가 증가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후에도 전하 밀도파와 초전도의 관계는 꾸준히 연구되고 있으며, 최근에도 장력, 자기장, 빛 등을 이용해 전하 밀도파를 조종하는 연구들이 이뤄지고 있다 [4].
뭉뚱그려서 이야기했지만, 사실 구리 산화물 초전도체에 있는 전하 밀도파는 화학 조성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그림4]에 나와 있는 것처럼 바둑판 같은 형태를 가진 것도 있고, 마치 밭의 이랑과 고랑처럼 줄무늬의 형태를 띤 것도 있다. 그래도 전자의 밀도가 너울거리는 현상이라는 것은 공통된 사실이다. 상도표에서 볼 수 있듯이 전하 밀도파와 초전도 현상은 공존하고 있다. 따라서 균일하지 않은 전하의 분포는 초전도 현상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최근 물리학자들은 전하 밀도파와 초전도가 얽혀 있는 쌍 밀도파pair-density wave 라고 불리는 요상한 상태를 연구하고 있는데, 앞으로 많은 발견이 기대되는 분야이다.
기묘한 금속 상태
[그림2]의 상도표에서 덜 도핑된 영역을 지나면 초전도 돔의 정점인 ‘알맞게 도핑된 영역’에 도달한다. 이 영역에서 초전도와 맞닿아 있는 것은 이상 금속이라고 불리는 상태이다. 영어로는 strange metal 이라고 불리는 이 상태는, 그 이름처럼 참 기묘하다. 일반적인 금속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마치 전자로 이루어진 유체와 같은 성질을 갖는다. 그리고 저온에서 금속 안의 전자의 행동은 페르미 액체Fermi liquid 이론을 따른다.
페르미 액체 이론의 가장 두드러지는 실험적 특징은, 저온에서 전기 저항이 온도의 제곱의 형태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고온에서는 열에 의해서 활성화되는 격자의 진동인 포논과 같은 것들에 의해서 페르미 액체 이론이 완벽하게 맞지 않을 수 있지만, 저온으로 갈수록 이 경향은 뚜렷해진다. 하지만 이상 금속 상태에서는 온도의 제곱이 아닌 온도에 대해 선형관계를 갖는다. [그림5]의 주황색 곡선에서 볼 수 있듯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일반적인 페르미 액체의 행동과는 다르게 이상 금속은 파랑 직선을 따라 저항값이 떨어진다. 대부분 금속들의 저항 곡선이 정확히 온도의 제곱을 따르지는 않더라도, 대부분 곡선을 이루기 때문에 직선으로 떨어지는 이 현상은 물리학자들에게 아직까지도 풀어야 할 문제로 남아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상 금속 상태가 구리 산화물 초전도체의 상도표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모트 절연체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강한 전자기적 척력이다. 물리학자들은 다양한 물질들을 연구하며, 전자기적 척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물질들을 발굴했다. 이러한 물질군을 강상관계strongly correlated 물질이라고 부르는데, 이 강상관계 물질의 상도표에서 이상 금속 현상이 흔하게 관찰되었다. 이는 기묘한 금속 상태가 전자기적 척력 때문이란 것을 암시했다. 하지만 전자기적 척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아도, 실제로 이것을 이론으로 정립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2015년에 <네이처>에 쓰인 리뷰 논문에서는 이 문제를 양자 물질에서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꼽으며,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하다는 제언을 남겼다 [5].
알맞게 도핑된 영역을 넘어서면 과도하게 도핑된 영역에 도달한다. 이 영역에서는 초전도 전이온도가 점점 줄어들다가 사라지고, 정상 금속 상태가 나타난다. 즉, 앞에서 언급했던 페르미 액체의 행동을 따른다는 이야기이다. 온갖 신기한 현상으로 가득한 덜 도핑된 영역보다 흥미가 떨어져 보였기에, 지금까지 가장 적게 연구된 영역이기도 하다.
얼핏 들으면 지루해 보이지만, 최근 이 영역이 재조명받고 있다. 일부 연구에서는 이상 금속 상태가 과도하게 도핑된 영역에서도 지속된다고 보고하고 있고 [6], 초전도 현상이 사라지지 않고 높은 홀도핑 영역까지 지속된다는 보고도 있다 [7]. 이외에서 평범한 줄 알았던 영역에서도 계속해서 새로운 발견이 되고 있으니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고체 물리학의 보물창고
지금까지 구리 산화물 초전도체의 상도표에 있는 다양한 물리 현상을 살펴보았다. 상도표의 시작에서 끝까지 정말 어느 것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는 물질이다. 그래서 그런지 구리 산화물 초전도체는 고체 물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영원한 사랑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어렵고 매력적인 문제가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오랜 시간 고체 물리학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지난 글에서 다루었듯이 구리 산화물 초전도체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는 말 그대로 과학계는 열광의 도가니였다. 아마 물리학계에 다시는 없을지 모르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많은 물리학자들이 이 문제에 빠져 골몰했고, 일부는 좌절하고 떠나기도 했으며, 아직도 전력을 다해 연구하고 있는 연구자도 많다.
필자는 운이 좋게도 박사 학위 중 구리 산화물 초전도체를 연구할 수 있었다. 전공은 나노미터 단위의 얇은 박막 형태로 산화물을 합성하는 것과, 합성된 박막의 물리적 성질의 측정하는 것이었는데, 지도 교수님 덕분에 구리 산화물 초전도체 박막을 많이 연구했다. 필자는 학위 과정 중 최신 합성 기술을 이용하여 전에는 불가능했던 높은 농도의 도핑을 할 수 있었고, 덕분에 초전도 돔을 더 높은 도핑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었다 [7]. 또한 구리 산화물 초전도체에서 산소 원자 일부를 제거해 연구하기도 했고 [8], 자성을 지닌 물질과 접합했을 때 유용한 자기적 성질을 띠는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9].
필자는 학위 과정 중 많은 박막을 합성했는데, 최근 이 박막을 이용해 동료 연구자들이 힉스 입자와 관련 있는 흥미로운 실험 결과를 얻기도 했다 [10]. 이따금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여전히 이 박막을 이용한 연구들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물질이 처음 발견된지 40년이 되어가지만 여전히 새로운 물리적 발견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고온 초전도체의 수수께끼가 풀릴 때까지 계속해서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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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J. Scalapino et al., Phys. Rev. B 34, 8190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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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W. Anderson, Science 235, 1196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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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Chang et al., Nature Physics 8, 87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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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 Kim et al., Science 362, 104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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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Keimer et al., Nature 518, 179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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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egros et al., Nature Physics 15, 14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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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Kim et al., Proc. Natl. Acad. Sci. 118, e210617011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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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Kim et al., Phys. Rev. Mater. 1, 05480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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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Kim et al., Phys. Rev. Mater. 3, 08442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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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Chu et al., Nat. Comm. 11, 1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