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날이 제정된 1970년 그 해 2월 2일, 타임지는 생태학자 베리 커머너(Barry Commoner, 1917-2012)를 표지모델로 선정했다. 1950년대 말부터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생태학자로 부상한 커머너는 환경오염으로 인한 문제의 심각성을 대중에게 널리 알린 과학자였다. 그는 특히 핵 개발로 인해 환경에 무분별하게 퍼지고 있던 방사성 물질들이 생태계와 인간의 신체에 미치는 영향들을 밝히고 그 위험성을 경고한 생태학자로 그 명성을 얻었다.

1960년대 커머너는 화학 물질과 대기 오염과 같은 환경오염의 양상에 대한 탐구로 자신의 생태학적 연구의 지평을 확대했을 뿐만 아니라, 환경 위기에 대한 광범위한 사회적 인식을 불러일으키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생태학의 시기였던 1960년대, 그는 레이첼 카슨과 함께 가장 영향력 있는 생태학자로 부상했다. 그의 저서, <원은 닫혀야 한다(The Closing Circle: Nature, Man, and Technology)>는 지구의 날 제정과 함께 환경문제가 과학적 해결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개혁이 필요한 복합적인 위기임을 경고한 선구적인 저서이자 환경운동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1950년대 원폭 시험과 유치조사, 방사성 물질 낙진의 위험을 날리다

냉전의 시작으로 인한 군비경쟁으로 인해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보다 더 파괴력 높은 핵무기 개발을 위해 매진했다. 그 일환으로 1951년부터 미국의 네바다 사막에서는 약 900회에 달하는 핵폭탄 실험이 실시되었다. 특히 이 중 100회 정도가 넘는 핵폭탄 실험은 지하가 아닌 지상에서 실시되었다. 이러한 지상 핵폭탄 폭발의 순간에는 오렌지색 불빛과 검붉은 낙진이 핑크빛 구름이 피어올랐다. 순간적으로 500km에 걸쳐 퍼진 낙진은 그 후 동풍을 타고 미국 전역으로 퍼져갔다. 동시에 보이지 않지만, 치명적인 방사성 낙진들이 퍼져나갔다.

생태학자 커머너는 과학자들과 함께 이 핵폭탄 실험으로 인해 퍼져나간 방사성 물질들의 위험에 대해 밝힌 과학자 중의 한 명이었다. 1953년 뉴욕의 실험실에서 방사능 수준을 측정하고 있던 물리학자들은 비가 내린 후 방사성 수준이 급격히 증가하는 것을 발견했고, 그것이 네바다에 있는 원폭 시험 후 낙진에 의한 것이라는 의심이 나타났다. 이에 커머너는 원폭 시험의 위험을 밝힐 생태학적 연구를 계획했고, 이후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워싱턴 대학, 세인트루이스에서 핵폭탄 실험의 위험에 대해 연구하고자 유치조사(Baby Tooth Survey) 연구팀을 결성했다. 특히 그는 1958년 유치조사를 시작으로 핵폭발 낙진 중 하나인 스트론튬(strontium-90)에 대해 연구하고자 했다.


 


스트론튬은 핵분열 시 방출되는 방사성 동위원소로 고에너지를 방출하여 동, 식물, 그리고 인간의 신체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험 물질이었다. 또한 이 방사성 물질은 약 28년의 반감기를 지니고 있어 핵폭발과 핵발전으로 방출되는 물질 중 환경에 오래 머무르고 널리 퍼져나가 우리의 환경과 동, 식물, 그리고 인간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물질로 거론되었다. 특히 스트론튬의 화학적 특성이 칼슘과 비슷하여 식물이나 체내에 잘 흡수되고, 특히 뼈나 치아에 누적되어 고에너지를 방출하여 돌연변이 등을 일으키며, 치명적인 골수암과 백혈병을 발생시킬 수 있는 물질이었다.

이에 그의 <유치조사> 연구팀은 매년 세인트루이스 지역에 사는 아이들의 유치 50,000개를 수집하고 이에 포함된 스트론튬-90의 수준을 측정하기 시작했다. 1961년 11월 <사이언스>지에 출판된 이 연구 결과는 미국 전역에 핵폭탄 실험의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이에 의하면 첫 핵폭탄 시험이 실시된 1945년부터 유치의 스트론튬-90 수준은 빠르게 증가했으며, 이후 1965년까지 연구된 결과에 따르면 그 수준은 1945년 이전에 비해 최근 유치의 스트론튬-90 수준은 무려 100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유치조사>의 연구결과는 1960년대 미국과 소련이 지상에서 핵폭탄 시험의 위험을 알라고 이를 금지하는 협약이 체계 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생태학 연구를 통해 다양한 환경오염 물질을 추적하다

1950년대 방사성 물질의 위험에 대해 경고한 커머너는 미국과 소련의 지상 원폭 시험 금지 협약이 생태학을 통해 환경을 지키려는 캠페인의 첫 승리라고 평가했다. 1966년 “자연계의 생물학 연구센터”를 설립하는 등 커머너는 자신의 생태학적 연구를 대기 오염, 수질 오염과 농약과 인산염과 같은 화학물질 오염, 그 외 다양한 환경 위험으로 확장했다. 1960년대 내내 그의 연구는 환경오염의 위기의 생태학적 특징을 규명하고 이를 통해 대중들에게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알릴 수 있었다.

커머너는 특히 자동차의 도시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의 대기오염에 대한 사례가 인간에 의해 나타나는 환경문제가 사람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매우 심각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경고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1960년대 대기청정법을 비롯한 다양한 환경보호 법안이 제정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커머너는 1960년대 환경 의식의 성장과 환경오염의 생태적 측면에 대한 인식에 기반하여 더욱 근본적인 차원에서 환경 문제의 사회경제적 측면에 대해 인식할 것을 촉구하기 시작하였다. 일례로 커머너는 자동차에 의한 대기오염을 논의하며, 현재와 같이 내연기관을 개선하고 배출물을 감소시키는 몇몇 기술적 해결책으로는 대기오염과 같은 복합적 환경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지적했다. 대기오염은 자동차 사용과 도시의 확대, 그리고 소비 패턴의 변화와 에너지 시스템 전반의 문제들이 결합하여 복합적으로 나타난 것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태학적 통찰에 바탕을 둔 환경문제의 사회경제적 측면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라 주장하기 시작했다.

 

 

1971년, 원은 닫혀야 한다

지구의 날 제정 다음 해인 1971년 출간된 커머너의 책, <원은 닫혀야 한다>는 즉각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로 인해 커머너는 생태학자로서의 그의 과학적 업적과 이를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해서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 책에서 그는 스트론튬-90에 대한 연구를 포함하여, 대기와 수질오염, 농약과 화학물질의 순환과 축적이 동, 식물의 생존을 위협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며, 인간의 신체에 치명적 건강 위험을 가져오는 생태학적 메커니즘에 대해 다층적으로 서술하였다. 환경위기가 나타나고 확대되는 과정에 대한 그의 명확하고 설득력 있는 설명을 통해 그는 레이첼 카슨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생태학자로 부상하였다.

커머너는 이 책에서 환경위기의 심각성에 대해 미국 대중에게 경고하였다. 그는 미국 중부의 이리호Lake Erie의 ‘죽음’을 분석하며, 최근 인간의 활동이 오랜 세월 동안 지속가능한 자연생태계를 유지해온 이리호 생태계를 돌이킬 수 없는 파괴로 이끌 수 있다는 점을 보였다. 그가 1960년대 연구한 수질오염에 관한 연구에 기반하여, 그는 호수에 화학비료와 오수의 유입으로 그 안에 살아가고 있는 생물들이 죽고, 이렇게 죽은 생물체들이 다시 더 많은 영양분을 공급하며 부영양화eutrophication가 일어나 호수에 살고있는 플랑크톤과 다른 생물들을 급격히 증대시켰다. 그 결과 호수에는 생명체에 필요한 산소가 급격히 감소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이리호는 인간의 활동을 통해 급격히 파괴되며, 그 생태계는 더 이상 생물이 살아가기 어려운 생태계로 변모하여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커머너는 <원은 닫혀야 한다>에서 생태계의 ‘죽음’에 이를 수 있는 환경위기의 사회경제적 측면에 대해 보다 본격적으로 논의하였다. 그는 환경문제가 단순히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인해 나타난 문제가 아니며, 생태학과 새로운 기술 혁신은 환경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중요한 도구의 하나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오히려 그는 인간사회가 자연을 사용하고, 각종 상품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회, 경제적 방식이 환경문제의 기원에 있다고 지적했다.

커머너는 거대규모로 행해지는 상업적 농업을 그 한 예로 들었다. 농업은 역사적으로 환경친화적인 인간의 활동이었다. 하지만 현대의 대규모 농업산업은 생산성을 증대시키기 위해 막대한 양의 화학비료와 살충제를 사용하고, 이로 인해 광범위한 수질 오염과 유해 물질에 노출된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나며 심각한 환경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 이윤을 중시하는 현대 농업산업의 발달과정에서 나타난 특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며, 그 대안으로 인간의 농업 활동을 다른 사회, 경제적 방식으로 조직할 수 있는 과학기술을 상상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환경위기의 복합성과 정치가로의 시도

커머너는 점차 환경위기의 사회, 경제적 측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일례로 그는 로스앤젤레스 지역의 대기오염을 논의하며, 무엇보다 대기오염이 기술의 발전과 사회경제적 진화의 영향과 복잡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지적했다. 나아가 그는 보다 중요한 생태학의 성찰의 하나로, 대기오염의 피해가 사회 계층에 따라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했다. 오염물질의 자연적 순환과 사회 공간적 순환의 교차점에서 부유한 이들은 이를 피할 수 있었지만, 그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가난한 이들이 환경 위험에 훨씬 더 노출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환경위기의 영향 또한 사회, 경제적으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환경정의의 문제 또한 제기했다.

1980년 그는 자신이 조직한 ‘시민당’Citizen’s Party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며 환경정치가로서 새로운 도전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특히 출마를 통해 환경오염과 공해가 보다 구조적인 빈곤과 경제적 불평등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문제임을 지적하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생태학적 통찰에 기반해 있던 환경주의environmentalism를 보다 사회, 정치적인 이슈와 연결하며 환경 이슈를 광범위한 사회정의의 문제로 재정의하려 시도했다. 이 정치적 실험 이후 그는 뉴욕으로 이주하여 대기오염, 특히 발암 물질인 다이옥신 오염의 문제에 천착하였다. 2000년 그는 컴퓨터 모델링을 통해 미국 도시의 다이옥신이 북극에까지 퍼져나가 원주민들에게 해를 미친다는 극지방 다이옥신 연구를 수행하였다. 그의 다이옥신 연구는 대기오염의 국제적 성격을 밝혀주었으며, 그 공로는 2002년 칼라웨이 시민상(Callaway Award)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20세기 후반에 걸쳐 커머너는 환경위기의 생태학적 기원을 밝히고, 이 위기가 사회, 경제적 차원과 얽혀있는 복합적인 것을 지적하는 데 성공적이었던 생태주의 과학자-활동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