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우리의 하루 생활을 돌아보자. 현대인은 보통 지구의 에너지원인 태양빛 아래서 지내는 시간보다 건물 내 인공 조명 밑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길다. 게다가 우린 빛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광통신망과 디스플레이 기술에 둘러싸여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며 업무를 처리하거나 영화나 게임 등 즐길 거리를 찾아 즐긴다. 시각을 통해 취하는 정보의 양이 압도적으로 많은 인간에게 빛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유엔은 2015년을 “세계 빛과 광기술의 해International Year of Light and Light-based Technologies; IYL 2015로 정해 빛과 광기술의 중요성을 알린 바 있다.
전자기학과 광학은 조명 및 디스플레이 기술의 구현에 있어 핵심적인 기반이다. 빛이 응용되는 가장 대표적 광기술인 이 두 기술은 현대인의 삶의 방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일반인뿐만 아니라 전문가들도 이 광기술들의 구체적인 구현 원리나 발전해 온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특히 디스플레이 기술의 발전 속도는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빨라 매년 우리들을 신제품의 홍수 속에서 헤매게 한다. 본 연재에서는 빛의 원리가 적용되는 대표적이고 대중적인 과학기술 분야로서 (1) 조명, (2) 디스플레이, 그리고 (3) 빛의 특성 분석에 있어 핵심적 역할을 하는 분광학 등 세 분야가 성립되어 온 역사를 간략히 조망함과 동시에 각 기술 분야의 현주소, 앞으로의 발전 전망에 대해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짚어본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유명한 얘기처럼, 아는 만큼 이 문명의 이기들을 더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지는 않을까 기대해 본다.
들어가며
전세계 각 민족의 신화와 종교 속에 등장하는 빛의 이미지는 대부분 고결함과 신성을 상징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가 상징하듯 빛과 불은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불을 인류가 언제부터 사용해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약 100만 년 전 남아프리카 본더벌크(Wonderwerk) 동굴에서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가 불을 사용했던 흔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인류는 오래 전부터 자연발화된 불을 동굴 속으로 가져와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1]. 이 불은 난방과 요리에 이용되거나 짐승을 쫓는 데에도 활용되었지만 빛을 제공함으로써 동굴 속 어둠을 물리치고 활동의 시간을 밤으로 확장하는데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현대인들에게 조명은 매일 숨쉬는 공기처럼 익숙하지만 조명이야말로 근대 이후 인류가 거둔 가장 중요한 과학적, 기술적 성취 중 하나로 손색이 없다. 하지만 전기 조명이 보편화된 현대와는 다르게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에는 화학적 연소에 기반한 조악한 조명이 사용되었다. 영국의 화학자 에드워드 프랭클랜드(Edward Frankland, 1825-1899)는 1853년 영국 왕립 협회(Royal Institution)에서 인공 조명에 대해 행한 한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2].
“인공 광원의 주요 두 원천이 있는데, 즉 전기와 화학적 요인이 그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리고 현재도 후자가 인공 광원의 유일하고 실질적인 원천으로 활용되어 왔다.”1
신은 하늘과 땅을 만든 후 “빛이 있으라(Let there be light)”라는 명령 하나로 이 세상에 빛을 가져왔으나 현대인들은 이제 손가락 하나 까딱함으로써 빛을 마음껏 얻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조명의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빛을 인공적으로 얻기 위한 인류의 분투를 보면 우리가 자연스럽게 누리는 빛이 결코 하찮거나 공기나 물처럼 그냥 주어진 게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두 회로 나누어 전개할 조명 기술의 역사는 각 조명의 발광 원리와 같은 과학적 측면에 더해 조명기술이 당대 사회와 맺은 관계에 대해서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화학적 연소와 빛
인류가 언제부터 램프 기술을 발전시켜 빛을 이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단, 구석기인들의 다양한 거주지에서 발견된 석등을 통해 적어도 수만 년 전부터 석등을 사용해 왔다고 추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 남부에 있는 라스코 동굴(Grotte de Lascaux)에서는 수천 점의 아름다운 벽화와 함께 [그림 1]의 사진에서 보이는 석등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빨간색 사암으로 조각한 이 석등은 아름다운 손잡이를 갖고 있어서 아마도 구석기인들이 치른 의식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손잡이의 반대편 그릇 속에 동물의 지방을 넣고 심지를 꽂아 불을 피웠을 것이다.
물론 모든 석등이 손잡이를 갖고 있는 건 아니다. 고고인류학의 연구에 의하면 빙하기 시대 사용되었던 석등은 평편하거나 약간의 굴곡을 가진 개방형 램프(open-circuit lamps), 가장 흔했던 폐쇄형 램프(closed-circuit lamps), 그리고 폐쇄형에 손잡이를 갖고 있던 램프(closed-circuit lamps with carved handles) 등으로 나뉜다2. 석등에 남아 있는 탄화된 재료를 분석한 결과 가장 흔한 연료는 동물의 지방이었고 이끼나 침엽수를 활용해 심지를 만든 사실도 확인되었다[3] 3. 석등이 만들어 낸 빛은 표준적인 양초보다 훨씬 적었으나 사람이 동굴 속을 이동하거나 작업 중인 벽화를 비추는 정도로는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악한 조명에 기대어 창조한 아름다운 벽화들을 보면 인류의 예술적 감성이 구석기 시대 속으로 수만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새삼 알 수 있다4.
화학적 연소에서 시작한 조명은 인류 역사 속에서 언제까지 이어져 왔을까? 전기등의 역사가 140년 이상 된 오늘날에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많은 지역에서는 화학적 연소를 이용하는 램프나 양초가 주된 조명 수단이다. 화학적 연소란 탄소를 기반으로 하는 연료 물질이 산소와 결합하는 산화 반응 중에서 방출되는 분자 결합의 에너지가 온도를 급격히 올리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화염 속의 탄소나 탄소화합물이 에너지를 받아 고온으로 달구어지며 방출하는 백열광(incandescent light)이 화학적 연소 과정에서 나오는 빛의 주요 원인이다. 물론 연소에 관여하는 개별 원자들의 양자 전이에 의한 선 스펙트럼이 중첩되어 보이기도 한다.
제인 브록스가 [인간이 만든 빛의 세계사]에서 소개한, 빛을 얻는데 세계 각 지역에서 사용한 재료들을 열거해 보자[5]. 밀랍 혹은 수지 양초, 반딧불이, 캔들 너트, 골풀 양초, 말린 연어, 절연유가 풍부한 슴새, 소나무 옹이, 월계수 열매, 동물이나 가축의 기름 등등… 불붙여 탈 수 있는 온갖 재료가 전통적인 조명의 원료로 사용되었다. 기름기가 많은 조류나 물고기의 경우, 잘 말려 몸통을 관통하는 심지만 꽂으면 훌륭한 조명등이 됐다. 예를 들어 백열등의 발명자 중 한명인 조지프 스완(Sir Joseph Wilson Swan, 1828-1914)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6].
“내 어린 시절은 어두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태어나던 때는 골풀 양초, 지방 양초, 혹은 화로의 약한 불이 실내 조명의 보편적인 수단이었다. 2~3미터 높이의 나무 기둥 위에 올린 유리 그릇 속에선 끔찍한 악취가 나는 고래 기름이 담겨 있고 그 속에 면으로 된 심지를 꽂아 어둠을 몰아내곤 했다. 국가적 행사에서는 예외적으로 밀랍 양초를 하나 혹은 여러 개를 켜서 행사장의 어둠을 물리쳤지만,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정도의 밝기를 원하던 서민들은 해가 지면 곧 잠자리에 들었다.”5
브록스가 자신의 저서에서 묘사한 다양한 문헌 기록에 의하면 양초를 만드는 과정은 무척 시간이 많이 들고 고통스러웠으며 양초의 촛불을 켜고 유지하고 관리하는 과정도 품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수천 년 동안 사용되어 온 골풀 양초(rushlight)를 만드는 방법이 로마의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플리니우스(Pliny the Elder, A.D. 23-79)의 자연사(Natural History)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소개해 보자[2]. 골풀 양초는 말린 골풀의 껍질을 벗기고 녹인 지방에 반복적으로 담가서 만드는데 이때 골풀의 심 자체가 양초의 심지 역할을 했다. 일반 양초보다 경제적이었던 골풀 양초는 한 시간 정도 안정적인 불빛을 제공했기에 평민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고 한다.
밀랍(beewax)은 최고의 양초 재료 중 하나지만 공급이 제한적이라 귀족 등 부유층이 사용하는 양초로 주로 사용되었고 서민들의 경우 냄새가 심한 동물의 지방(tallow)으로 만든 양초를 사용했다. 지방 양초는 골풀 양초의 제조 과정처럼 심지를 녹아 있는 지방에 여러 번 담그거나 늘어뜨린 심지에 녹은 지방을 부어서 만들었다.
양초는 서양식 초를 일컫는 말이지만 초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랜 시절 사용되어 왔다. 한국의 경우에도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금동 촛대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초의 사용이 적어도 통일신라시대 혹은 삼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추정된다. 하지만 고려나 조선의 문헌을 보면 초 대신 등잔 혹은 횃불을 사용토록 한 기록들이 남아 있어서, 초는 일반적인 생활 조명이라기보다 다양한 국가 혹은 종교 행사용 조명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6.
중세나 근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양초 구매는 지출의 큰 부분을 차지했고 거래의 수단으로도 쓰였다. 예를 들어 마이클 패러데이는 1813년 영국왕립학회에서 일하기 시작할 때 주당 1파운드와 석탄, 양초를 지급받았다. 일부 학교는 수업료의 일부로 양초를 요구했다는 기록도 있다.7 18세기 말에 향유고래의 뇌에서 추출한 기름으로 만든 고래 왁스 혹은 경랍(spermaceti, 鯨蠟)이 새로운 최고급 양초 재료로 사용되며 각광을 받았다. 경랍으로 만든 양초는 매우 안정적이고 밝은 빛을 발산했기에, 70그램짜리 경랍 양초는 조명의 밝기를 측정하는 표준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18세기 중반에는 팜유나 코코넛 오일에서 추출한 스테아린(stearine or stearin acid)이 양초 재료로 떠올랐으나 가공 중 스테아린이 결정화(crystallization)되는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야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양초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 마이클 패러데이가 1848년 크리스마스 강연의 주제로 삼았던 “양초의 화학사(The Chemical History of a Candle)”를 들 수 있다. 이 강연은 1861년에 동일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다[7]. 양초는 그 뒤로도 꾸준히 개선되었는데, 특히 19세기 중반 역청질의 혈암에서 추출한 파라핀이 양초의 원료로 사용되며 그을음이 적고 안정적인 불빛을 내는 양초가 등장할 수 있었다.
양초나 조악한 램프로부터 나오는 빛은 워낙 희미했기에 이를 반사나 굴절을 통해 더 밝게 확대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부유층은 값비싼 거울을 이용해 램프나 양초에서 나오는 빛을 반사, 실내를 더 밝게 만들 수 있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는 사람들의 경우 보통 물이 채워진 유리구를 양초 주변에 배치해 빛을 굴절시키고 모아 바느질이나 독서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곤 했다. 검색 사이트에서 “lace+maker+lamp” 등의 검색어로 검색을 하면 가운데 촛대가 놓여 있고 그 주위를 감싸는 네 개의 유리구가 배치된 조명 시스템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사방으로 퍼지는 촛불을 유리구가 모아 굴절시켜 네 명의 작업자에게 빛을 보내주었음이 쉽게 상상된다.
오일과 가스의 시대
도예 기술이 발전하면서 심지를 고정하거나 뚜껑을 갖추는 등, 세밀한 구조의 기름 램프가 탄생했다. 그리스의 경우 기원전 6세기 경부터 회전판 위에서 램프를 만들고 램프 분출구(lamp spout)를 별도로 제작해 손으로 붙이는 방식으로 도기 램프를 만들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도기 램프가 대량으로 상용화되며 다양한 장식과 형상을 가진 램프들이 제조되었다. 이들은 그 다양성으로 인해 고고학적 시기 추정이나 고대 무역 경로를 추적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2].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삼국시대부터 시작해 매우 다양한 형태의 등잔 및 등잔을 받치는 등잔대가 출토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등잔을 검색어로 소장품을 검색하면 [그림 5]와 같은 다양한 등잔들이 검색된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등화 기구들에 대한 연구 결과를 보면 과거에 매우 다양한 구조와 기능을 가진 조명 장치가 사용되었다는 점과 미적 관점에서도 돋보이는 등기구가 존재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8].
근대로 접어들어 기름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새로운 램프 원료를 찾는 과정에서 고래 기름이 대중화되면서 포경 산업이 급속히 발전했다. 18세기부터 양질의 기름을 제공하는 긴수염고래나 최상의 품질을 가진 기름을 얻을 수 있는 향유고래가 집중적으로 포획되었다. 게다가 향유고래의 머리에서 나오는 고래 왁스, 즉 경랍은 품질 좋은 양초의 원료로 각광을 받아서 비싸게 팔렸다. 고래 기름이 대규모로 공급되며 많은 이들이 더 오래, 더 많은 수의 램프를 켜며 밤의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포경 산업의 규모가 커지고 전세계 대양을 포경선이 휩쓸고 다니던 상황8에서 고래의 개체수가 급감하며 대체재에 대한 요구가 증가했다.
기름 램프의 확대와 더불어 화학의 발전으로 화학적 연소 과정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면서 연소의 효율이 올라간 램프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었다. 프랑스의 화학자 앙투안 라브아지에(Antoine Lavoisier, 1743-1794)는 연소 과정 중 연료가 공기 중 산소와 결합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로 인해 기름 램프의 연소에 있어 기름의 충분한 공급뿐만 아니라 공기의 안정적인 공급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 알려졌다. 프랑스의 기름 램프 중에는 편평한 심지를 사용해 더 많은 공기가 화염에 공급될 수 있도록 디자인한 종류도 있다. 하지만 당시 가장 대표적인 기술 혁신의 사례는 18세기 등장한 아르강 램프(Argand lamp)였다.
라부아지에 연구실에서 일했던 프랑수아 피에르 아미 아르강(Francois-Pierre Ami Argand, 1750-1803)은 화염 속에서 연료가 더 완벽히 연소되도록 램프의 하단부에 금속 실린더를 설치하고 그 형상에 맞는 편평한 리본 심지를 끼워 넣어 연소를 시켰다. 이 경우 더 많은 공기가 심지 내외부 공간으로 공급되어 연소의 효율이 올라갔다. 그는 특히 유리 실린더를 윗부분에 설치에 공기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위로 올라가도록 했다. 일반 촛불 6~10개 정도의 밝기를 띤 아르강 램프의 빛은 흰색에 훨씬 가까웠고 그을음이나 냄새도 훨씬 적었다. 그 후에도 기름 램프의 편평한 심지를 기름 저장소에 깊이 담그거나 기름 저장고의 위치를 최적화하는 등 다양한 개선의 노력이 뒤따랐다.
19세기 중후반부에는 램프의 원료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캐나다의 지리학자였던 에이브라함 게스너(Abraham Pineo Gesner, 1797-1864)가 아스팔트에서 등유 추출에 성공한 후 정유업자들이 석유에서 등유를 분리해 정제하는데 성공했다. 펜실베니아와 피츠버그의 유정 지대 등 미국 각지에서 운영된 정유 시설로 인해 막대한 양의 등유가 생산되었고 록펠러와 스탠더드 오일사는 세계적인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에 따라 고래 기름은 등유로 재빠르게 대체됐다. 양초 10 개 내외가 내는 빛과 비슷한 밝기를 냈던 등유 램프는 기존의 기름 램프에 비해 냄새도 덜 나고 깨끗하게 타오르는 장점도 있어 급속히 확산되면서 가스등의 혜택이 미치지 않는 마을이나 농가의 밤을 밝힐 수 있었다. 고래기름을 대체한 등유로 인해 사람들의 밤은 더욱 밝아졌고 더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는 자신의 저서 [촛불의 미학]에서 등유램프에 대해 “우리는 어두운 물질에 빛나는 생명력을 부여하는 램프를 꿈꿔 왔다. 석유라는 단어가 석화된 기름이라는 어원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배우는 순간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램프가 바로 빛을 땅속 깊은 곳에서 발굴한 셈이다”9 라 서술한 바 있다.
석탄에서 가연성 가스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문헌 상에 최초로 기록된 때는 언제일까? 아마도 1739년 “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에 출간된 존 클레이톤(John Clayton, 1657-1725)의 편지일 가능성이 높다[2].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1627-1691)에게 보낸 이 편지에서 그는 석탄을 증류하는 과정에서 가연성 가스가 방출되었다는 사실을 담았다. 19세기 산업혁명의 시기에 석탄을 일종의 숯인 코크스로 가공하는 산업이 크게 성장했고 이 가공 과정에서 얻어지는 부산물인 석탄 가스는 그냥 버려지곤 했었다. 그러나 이 부산물을 조명에 활용하려는 노력이 곧 시작되었다. 1801년 프랑스의 기술자 필리프 르봉(Philippe Lebon, 1767-1804)은 파리에서 나무로부터 추출한 가스를 이용한 램프를 최초로 시연한 바 있었다. 촛불과 비슷하게 고온의 불꽃에 포함되어 달구어지는 탄소나 탄화수소 입자들의 백열광이 발광의 주요 원인이었다. 르봉은 나무에서 가연성 가스를 추출해 난방과 조명에 사용할 수 있음을 처음으로 시연했으나 이 연구가 상업화로 이어지진 못했다.
세계 최초로 증기기관차를 선보였던 영국 불턴 와트(Boulton & Watt)사의 엔지니어였던 윌리엄 머독(William Murdoch, 1754-1839)는 석탄에서 추출한 가스를 활용한 다양한 실험을 진행하면서 가스등의 제작에 성공, 자신의 집과 불턴 와트사의 방직 공장에 설치하는데 성공했다. 독일계 이민자 프레더릭 앨버트 윈저(Frederick Albert Winsor, 1763-1830)도 가스등의 상업화에 있어 경쟁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특히 1807년 영국 국왕의 생일을 기념하며 런던 폴 몰(Pall Mall)에 최초의 가스등 기반 가로등을 설치했고 그후 차터드 가스라이트 코크사(Chartered Gas Light Coke Company)를 설립, 가스등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가스등의 개발과 적용에는 가스의 추출, 전송, 저장, 정제, 램프의 개발과 관리 등 다양한 공정 과정이 필요하다. 윈저의 접근법은 중앙 저장고에서 생산, 저장된 가스를 관을 통해 소비자에게 공급하고, 소비자는 미터기로 사용량을 측정해 구입한 가스량만큼 지불한다는 관점을 처음으로 제공했다. 양초나 기름 램프처럼 개별적으로 구매해 개인이 관리하고 유지하던 조명이 시스템의 일부로 포함되어 활용되는 최초의 사례가 탄생한 것이다. 이런 공급 체계는 이후 에디슨이 진행한 백열등의 상용화 과정에서도 주요한 참고 사항이 되었다.
가스등은 런던을 중심으로 급속히 보급되어서 1820년대 초반 가스 저장소(gasometer)의 수가 50 곳, 가스관의 전체 길이만 수백 km에 달하게 되고 4만 개 이상의 가로등에 가스를 공급했다. 이후 영국의 소도시, 유럽과 미국 등 각국에서도 가스등의 보급이 개시되거나 급속히 확대되었고 19세기 중반 나이트라이프(nightlife)라는 신조어가 등장한 것처럼 야간의 쇼핑 및 오락의 확대가 이루어졌다. 특히 조명의 확대가 샹들리에, 창유리 등 다양한 유리 제품의 공급과 맞물리면서 저녁 쇼핑가의 인테리어가 화려하게 재탄생했다. 그러나 가스 저장소는 보통 가스등에 접근하기 힘든 극빈층들이 사는 지역에 설치되곤 했다. 가스 설비의 확대로 인한 주변 토양 및 대기의 오염에 더해 가스 폭발 사고도 주기적으로 발생하며 사회문제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스등의 등장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 방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기름 램프에 기름을 주기적으로 공급하고 기름 램프나 양초의 심지를 다듬거나 교체하는 일은 빛을 얻기 위해 사람들이 해야만 하는 귀찮은 작업이었다. 가스등은 점등만으로 빛을 즉각 얻을 수 있었고 별다른 관리도 필요치 않았다. 사무실이나 집 혹은 공장에서의 작업 효율이 크게 증대해 공장주들은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을 늘릴 수도 있었다. 19세기 스코틀랜드 문학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 1850-1894)가 쓴 수필, “가스불 예찬(A plea for gas lamps)”의 한 문단으로부터 당시 가스등을 사용했던 사람들이 느끼던 경이감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9].
“프로메테우스가 시작한 위업은 한 단계 더 발전했습니다. 인류와 그들이 즐기는 저녁 파티는 더 이상 몇 마일의 바다 안개에 휘둘리지 않았고, 해가 지더라도 산책로를 비우지 않았으며, 모든 사람이 원하는 만큼 낮이 길어졌습니다. 도시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별이 생겼습니다. 매수할 수 있고 길들여지는 별들.“10
조명이 바꾸어 온 근대의 삶
근대 이전의 밤은 어둠 그 자체였다. 가로등이 없는 시대의 밤은 위험과 금지의 시간이었다. 달빛의 상태가 야간 활동의 수준이나 범위를 결정하곤 했다11. 가스등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에는 밤에 안전하게 이동하기 위해 횃불을 들고 에스코트를 하는 소년(link boy)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안전이 보장되기 힘든 밤에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는 통행금지를 실시했다12. 조악한 램프로 만든 집안의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보내던 시간도 잠깐, 밤은 실내건 밖이건 완벽한 어둠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이는 역으로 빛이야말로 당시 권력을 상징함을 의미했다. 기념일을 맞이한 교회의 예배당, 왕족이 도착한 도시의 밤은 각종 양초, 횃불이나 모닥불 등 다양한 종류의 빛으로 장식되곤 했다. 밤에 보이는 불빛은 때로는 전쟁이나 대화재의 신호가 되었다. 전쟁의 시기에는 평민들이 사용하던 조악한 램프나 양초조차도 징발의 대상이었다[5].
도시의 규모가 커지고 야간 활동이 증가하면서 유럽과 미국의 일부 도시들에서는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창문에 램프나 촛불을 걸어두라는 지침이 내려졌다. 공공이 관리하는 가로등이 설치되기 전, 시민들의 조명 자원을 활용해 공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그렇지 않아도 조악한 조명의 유지에 사용하는 시민들의 지출을 증가시켜 시민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대도시들은 곧 시민들에게 강요한 창문의 램프를 가로등으로 대체해 관리했다. 초기의 가로등에 대한 영국 작가 윌리엄 시드니(William Sidney, 1862-1910)의 묘사를 살펴보자.
“작은 양철통 수천 개가 가로등 불빛의 원천이었다. 최하품 고래기름을 양철통에 반 정도 부은 다음, 반투명 유리를 놓고 면을 꼬아 만든 심지를 넣었다… 희미한 빛을 깜빡이거나, 어두운 거리 한구석을 비추거나, 해가 진 다음부터 자정까지 횡단로를 비추는 용도로 사용했다.”13
초기에는 희미하고 쉽게 꺼지는 가로등이 사용되었지만, 도시의 가로등은 공권력의 상징이자 야간에 시민들의 활동을 증가시키는 주요 원천이 되었다. 도시의 권력자들은 가능하면 가로등의 숫자를 늘리고자 했다. 특히 가스등과 후에 소개할 전기 아크등이 가로등으로 활용되면서 도시의 밤은 한층 밝아졌고 안전해졌으며 시민들의 삶도 덩달아 밤의 무대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가로등과 조명의 제한적 공급은 도시 내 계급과 계층의 차이, 도시와 시골의 차이도 명확히 보여주었다. 밝은 도로와 어두운 도로는 부유층이나 번화가와 빈민가를 극명히 나누었다. 귀족과 부유층이 밤새 파티를 즐기며 놀고 잠자리에 들 새벽은 밤을 늘길 수 없는 노동자들이 출근하는 시간이었다. 보통 오늘날 2교대, 혹은 3교대로 불리는 장시간 노동 체제가 도입된 시기 역시 대규모 가스 조명이 공장에 도입된 후였다.
조명의 역사를 단순화시켰을 땐 조명 기술이 단선적으로 발전한 것처럼 착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근대와 현대를 보면 지역적, 계층적으로 다양한 조명 기술이 공존했음을 알 수 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상당히 많은 인구가 20세기 초중반까지 양초나 램프에 기대어 살았음은 이를 보여준다. 중장년층의 경우 어린 시절 집에 항상 양초와 성냥이 상비품으로 준비되어 있던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지금도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전세계 많은 지역에서는 양초와 기름 램프가 조명으로 활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복합적으로 발전되어 온 다양한 조명의 개발과 도입 및 보급의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도약의 순간은 19세기 전기 조명의 발명일 것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에드워드 프랭클랜드가 1853년 영국 왕립 협회에서 했던 강연 내용을 소개했다. 그는 십 년 후인 1863년 같은 주제로 다시 한번 강연을 했다. 이 강연에서 그는 지난 10년 간 전기에 기반한 광원과 발전기의 발전에 대해 소개했다. 당시는 비록 전기 조명이 공급되기 전이었으나 프랭클랜드는 전기가 바로 조명의 미래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 같다. 불과 10년 만에 프랭클랜드의 생각을 바꾼 전기 기술의 발전은 결국 아크등과 백열등으로 대표되는 전기 조명의 상용화로 이어진다. 하지만 전기등은 양초와 램프처럼 개별적으로 사용하는 조명이 아니다. 배터리나 발전기 관련 기술의 발전을 통해 충분한 전기의 공급이 필연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게다가 가스등과 마찬가지로 전기의 생산 및 분배 시스템의 개발과 보급이 있어야 전기 조명의 대중화가 가능하다. 다음 글에서는 인류가 화학적 연소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조명의 역사에 가장 큰 혁신을 불러온 전기 조명의 개화와 발전을 이루는 과정에 대해 다룰 예정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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