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인류는 언제부터 자신이나 공동체의 삶의 모습을 남기고 싶어 했을까? 삶의 한 순간을 정지시켜 이미지로 표현하려 했던 흔적은 역사 속 어느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갈까? 지금까지 발굴된 다양한 동굴 벽화로 미뤄 보면 그 시기는 적어도 4~5만 년 이전으로 되돌아간다1. 여러 감각 기관 중 시각을 통해 취득하는 정보가 압도적인 인간에게 그림 혹은 영상은 정보를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대표적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오늘도 아침 눈을 뜰 때부터 취침 전까지 스마트폰을 포함한 디스플레이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디스플레이는 정보를 시각적 형태로 전달하는 전자 소자다. 그 크기는 작은 전자시계부터 100인치가 넘는 대형 TVtelevision2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화면은 보통 수백만 개의 화소pixel 배열로 구성된다. 각 화소는 다시 적록청이라는 빛의 삼원색을 방출할 수 있는 부화소subpixel로 구성되어 있는 게 일반적이다. 이들이 섞이는 비율과 세기가 화소의 색상과 밝기를 결정하고, 이런 화소 수백만 개가 협력해 작동함으로써 우리가 보는 고품질의 영상이 구현된다.  결국 디스플레이의 역사는 피사체를 스캔하고 샘플링해서 화소 단위로 정보를 획득하고 이를 유선 혹은 무선으로 전송한 후, 받은 정보를 바탕으로 피사체의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기술을 개발한 역사라 할 수 있다.

 벽화나 미술 작품이 정적 영상이라면 디스플레이는 움직이는 동적 영상을 구현한다. 움직이는 영상 정보에 대한 욕구는 19세기 후반 벨Alexander Graham Bell, 1847~1922의 전화기 발명으로 촉발되었다. 전화기는 전기를 이용한 소리 정보의 원거리 전송을 가능케 했고, 이는 다시 전기를 이용한 영상 정보의 원거리 전송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가령 프랑스의 소설가 알베르 로비다Albert Robida, 1848-1926는 1883년 펴낸 [20세기Le vingtième siècle]란 자신의 SF 소설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는 대형 스크린 텔레비전 세트, 라디오, 24시간 전 세계 “실시간” 뉴스 보도, 비디오 전화, 대학 텔레비전 강좌, 전화 쇼핑, 빠른 항공 운송, 패스트푸드점, 심지어 유전 공학”3까지 예측함으로써 다가올 20세기의 과학기술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준 바 있다.

동영상을 구현하는 TV가 대중에게 처음 공개된 것은 약 한 세기 전이지만, 지난 세기 디스플레이 기술의 발전은 상전벽해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눈부셨다. 디스플레이 기술에 대한 세 편의 원고 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이 글에서는 인류가 영상에 매혹되어 온 과거로부터 출발해서 20세기 초 발명되었던 기계식 TV의 등장과 쇠퇴에 대해 다룬다. 두 번째 글에서는 음극선관cathode-ray tube,CRT에 기반한 전자식 TV의 등장과 진화, 후퇴를 다루고자 한다. 마지막 글에서는 CRT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고 대면적 디스플레이의 등장을 가능케 한 평판형 디스플레이flat-panel display, FPD 기술의 등장과 기술적 진화, 그리고 디스플레이의 미래에 대해 다룰 예정이다.

영상 구현의 시작

벽화나 미술 작품은 그 자리에서 눈으로 직접 감상하는 대상이다. 햇빛이나 주변의 조명이 이들을 비추면 염료나 안료의 종류에 따라 가시광의 일부 색의 빛이 흡수되고 나머지가 반사됨으로써 우리가 느끼는 그림의 색이 펼쳐진다. 그런데 디스플레이는 한 장소의 영상 정보를 다른 곳으로 전송해 구현하는 기술이다. 현대적 의미의 디스플레이 기술은 20세기 초에 무르익었지만 영상을 넓게 펼쳐 다수의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는 영상 기술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 되었다. 그 시초는 일종의 영상 프로젝터에 해당하는 매직 랜턴magic lantern일 것이다.

매직 랜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645년 예수회 사제이자 과학자였던 안타나시우스 키르케르Anthanasius Kircher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한 저서에 실린 [그림 1]을 보면 (비록 광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그림이나) 오목 거울의 앞에 놓인 불꽃의 빛을 슬라이드에 비추고 이 빛이 스크린에 영상을 만드는 매직 랜턴의 기본적인 구도가 잘 나타나 있다. 슬라이드는 보통 유리로 만드는데 그림이 그려져 있는 부분으로 빛이 통과하고 나머지 부분은 불투명해서 빛을 차단했다. 매직 랜턴의 최초 발명자로 빛의 파동이론으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하위헌스Christiaan Huygens, 1629-1695가 거론되기도 한다. 그는 특히 [그림 2]에 제시된 것처럼 매직 랜턴에 2~3개의 렌즈를 이용함으로써 더 우수한 품질의 영상을 얻을 수 있었다. 매직 랜턴 초기에는 [그림 1]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무서운 이미지를 띄워서 사람들에게 겁을 주고 교회로 유도하기 위한 종교적, 교육적 수단으로 활용되었지만 18~19세기를 거치며 강의, 엔터테인먼트 등으로 영역이 넓어지며 다양한 목적으로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 ([그림 3] 참조).

[그림 1] 안타나시우스 키르케르의 저서에 수록된 그림으로 매직 랜턴의 개념과 기본 구조를 보여주고 있으나 광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그림이다. @public domain

 

[그림 3] 매직 랜턴에 사용된 출처 미상의 종이 슬라이드로, 꿀통에 빠진 소년의 모습이 순차적으로 그려져 있다. @public domain

 

매직 랜턴은 슬라이드라는 작은 면적 속 그림을 스크린 위에 대면적으로 펼친다는 면에서 한 공간의 영상 정보를 근처 다른 공간으로 확대해 옮긴다는 측면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장거리 영상 정보라는 디스플레이의 조건을 충족할 수는 없었다. 매직 랜턴은 오히려 오늘날 우리가 프로젝션projection 디스플레이라 부르는 기기와 매우 닮아 있고, 디스플레이 시스템의 수신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영상 정보를 원거리로 송신하는 기술의 초기 아이디어는 19세기 중반 등장한다. 바로 1843년 영국 특허를 취득한 알렉산더 베인Alexander Bain, 1810~1877의 발명품으로서, 전선으로 연결되어 동기화된 두 진자의 한쪽에서 획득된 영상 정보는 전선을 타고 다른 쪽으로 이동해 복제된다. 송신기 쪽 진자 밑에 놓인 금속판에는 비전도성 물질로 송신할 패턴이 그려지고, 진자에 연결된 금속 탐침이 표면을 스캔하며 패턴 유무에 따라 전류가 선택적으로 생성되어 수신기로 전송된다. 수신기 진자의 탐침은 송신기 쪽과 동기화되며 기록지 위를 스캔하는데, 종이 위 화학물질은 전류에 반응해 색이 변하기 때문에 송신기 쪽 패턴을 그대로 복제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오늘날 팩시밀리의 원조 격인 것이다.

비록 상용화되지는 못했으나 베인의 발명품은 디스플레이 기술의 탄생에 필요한 중요한 개념을 제시한다. 바로 피사체를 선의 형태로 스캔해 정보를 취득한다는 개념이다. 오늘날 우리가 래스터 스캔raster scan이라 부르는 방식의 맹아가 이미 19세기 중반 탄생한 셈이다. 하지만 디스플레이는 팩시밀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디스플레이는 움직이는 피사체를 스캔하며 실시간으로 위치별 빛의 정보를 감지하고 전달해야 한다. 따라서 빛을 효율적으로 감지하는 물질 혹은 이 물질을 활용한 센서의 개발이 필수적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1873년 윌로비 스미스Willoughby Smith, 1828~1891가 셀레늄selenium, Se이 빛에 반응해 전기전도도가 변하는 성질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4은 TV 개발에 있어 획기적 전환점이 된다. 피사체를 스캔해 위치별 밝기를 전기 신호로 변환할 하드웨어적 기반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1880년 존 페리John Perry, 1850~1920와 윌리엄 에드워드 에어턴W. E. Ayrton, 1847~1908은 저널 네이처에 “전기로 본다는 것Seeing by electricity”이란 제목의 원고를 발표했다5. 이 글에서 두 사람은 작은 셀레늄 조각들을 모자이크식으로 배치한 송신기의 개념을 제안한 후, 강한 빛으로 비춰진 피사체가 렌즈를 통해 송신기에 입사되면 셀레늄 조각들이 위치별 광량에 비례하는 전류를 생성할 것이라 보았다. 이 조각들의 신호가 수신기로 전달되면 이를 조합해 2차원 영상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 이 논문의 핵심 아이디어였다. 페리와 에어턴은 논문에서 수신기에 전달된 전류 신호의 세기에 의해 광량이 조절되는 두 가지 방식을 제안했다. 하나는 자기 바늘이 전류에 반응하도록 함으로써 위치별 빛의 투과율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한 방법은 송신기와 동일한 수의 셀레늄 조각을 모자이크처럼 배치한 후 각 조각이 전송되는 전류의 세기에 비례해 빛을 내도록 함으로써 송신기가 포착한 피사체의 빛의 분포를 그대로 흉내내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셀레늄에 대한 빛의 효과의 발견은 ‘전기로 본다는 것’의 계획 수립에 필요한 원리를 담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원고를 마침으로써 몇 년 전 발견된 셀레늄의 광전도 효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림 5] 1879년 한 잡지(Punch Almanac)에 실렸던 미래 기술의 모습을 담은 만화. 대형 디스플레이에 투영된 영상을 두 사람이 감상하며 영상통화를 하고 있다. @public domain

 

19세기 중반 이루어진 여러 발명과 발견으로 인해 디스플레이의 구현에 필요한 피사체 스캔이라는 개념과 이 정보를 전기 신호로 변환할 기반이 마련됨으로써 TV 기술의 구현을 위해 필요한 기술적 요소들이 갖춰지게 된다. 게다가 19세기 말, 사진술과 영화 촬영법이 발달하면서 영상을 멀리 전송하는 기술에 대한 다양한 제안이나 상상력이 덩달아 풍부해진 것도 이 시기다([그림 5] 참조). 그 다음 전개는 당연히 이 요소들에 기반해 TV를 구현하려는 발명가와 공학자들의 시도가 될 것이었다. 그 선두주자는 움직이는 구성 부품을 내장한 기계식 TV였다.

기계식 TV의 구현

기계식 TV의 개발과 상용화에 있어 스캐닝 디스크라고도 불리는 닙코 디스크Nipkow disk는 가장 중요한 핵심 부품이었다. 1884년 독일의 파울 고틀리프 닙코Paul Gottlieb Nipkow, 1860~1940에 의해 발명되고 특허 출원된 이 원형 디스크에는 [그림 6]에 보이는 것처럼 회전하는 판에 등간격으로 뚫은 구멍이 나선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전송하고자 하는 대상을 렌즈를 이용해 닙코 디스크에 투사시키면, 디스크가 회전하며 각 점의 회전선을 따라 대상을 순차적으로 스캔한다. 회전 중심으로부터 떨어진 점의 위치나 각도가 모두 다르므로 각 점은 투사된 장면에 대해 자신이 스캔하는 선을 따라 정보를 취하는 것이다. 가령 [그림 6]의 왼쪽 그림을 보면 검정 실선으로 둘러싸인 부분에 들어오는 장면을 8개의 구멍이 8개의 선으로 분리해 스캔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이때 각 점을 통과한 빛의 세기는 셀레늄과 같은 검출기에 의해 실시간으로 측정되고 전송된다. 대상의 위치별 밝기가 검출기에 동시에 들어오지 않고 순차적으로 감지되기 때문에 광검출기는 여러 조각으로 구분될 필요 없이 하나로 충분했다.

[그림 6] 닙코 디스크의 개념도(왼쪽) 및 1930년대 사용되었던 닙코 디스크 기반 TV 수신기(오른쪽). @ CC BY-SA 3.0

TV 수신기에는 송신기의 닙코 디스크와 동기화된 또 다른 닙코 디스크가 회전을 했다. 송신기에서 전달된 신호는 수신기의 디스크 앞에 배치된 램프에 연결되어 램프의 밝기를 조절한다. 즉, 송신기의 닙코 디스크가 스캔한 대상의 위치별 밝기가 그대로 램프에 전달되어 동기화된 밝기를 재현하고 이것이 수신기의 디스크 구멍을 통해 연출되는 것이다. 닙코 디스크를 기반으로 한 TV 시스템의 구현을 시도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스코틀랜드 출신 발명가인 존 로지 베어드John Logie Baird, 1888~1946였다. 일찍이 다양한 사업에 뛰어 들었던 베어드는 당시 활발히 모색되던 TV 기술의 잠재가치를 알아본 후 “진정한 텔레비전은 물체의 빛과 그늘의 모든 계조와 세부적인 이미지를 실제 관찰자의 눈에 보이는 것처럼 수신 화면에 보이도록 전송하는 것”6이라 정의하면서 닙코 디스크에 기반한 기계식 TV 개발에 뛰어들었다.

[그림 7] 1925년 닙코 디스크에 기반한 TV 송신기 앞에서 명암이 뚜렷한 얼굴 모양의 인형을 들고 있는 베어드의 모습. @public domain
[그림 7] 1925년 닙코 디스크에 기반한 TV 송신기 앞에서 명암이 뚜렷한 얼굴 모양의 인형을 들고 있는 베어드의 모습. @public domain

 

베어드는 다양한 방식을 시도하다가 송신기와 수신기 모두 닙코 디스크로 구현한 기계식 TV를 개발하며 1925년 영국 런던 셀프리지 백화점에서 처음으로 공개 시연을 했다. 당시 시연 영상은 외곽만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희미하고 조잡했으나 이를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한다. 이 행사는 그가 당시 TV 시연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발명가임을 보여준 것이었다. 베어드는 시스템을 개선하며 영상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피사체의 이미지를 선명히 만들기 위해 매우 강한 조명을 비춰주거나 [그림 7]에 보이는 인형처럼 명암 차이가 뚜렷한 대상에 대해 영상 정보를 획득해 중계하곤 했다. 1926년 1월, 그는 영국 왕립연구소에서 움직이는 얼굴 영상을 전파를 이용해 중계하는 TV 시연을 진행했다. 송신기에서 획득된 영상 정보는 라디오 무선 신호를 통해 수신기로 전달되었고 이 신호가 네온 램프의 밝기를 조절한 후 두 번째 닙코 디스크를 통과하며 영상이 구현되었다. 영상의 조잡함과는 별도로 이 사건은 보통 세계 최초의 공개 TV 시연으로 간주되고 있다. 당시 저널 네이처에 실린 러셀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물론 결과는 완벽하지 않았다. 구현된 이미지는 좋은 영화 필름으로 만든 이미지와 비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물체와 영상이 닮았음은 분명했고 모든 동작이 절대적으로 충실하고 완벽하게 재현되었다. 우리가 실제 텔레비전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한 베어드 씨는 이 놀라운 업적을 달성한 최초의 사람이다.”7

베이드는 자신의 TV 회사를 설립해 상용화를 시도했고 영국과 미국을 포함한 몇 나라에서 일부 상용 방송이 1930년 전후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닙코 디스크에 기반한 기계식 TV는 기술적 관점에서 태생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닙코 디스크의 회전하는 일부 면적을 통해 대상을 스캔하고 동일한 일부 영역으로 대상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인해 영상이 구현되는 면적이 매우 작았고 주로 얼굴이나 어깨를 커버하는 정도의 장면들을 담을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주사선에 해당하는 구멍의 수도 제한되었는데 가령 1926년 왕립연구소에서 시연된 베어드의 디스크에는 30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오늘날로 비유하면 주사선의 수가 30개에 불과해 대상의 세부적인 모습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게다가 송신기 쪽에서 영상을 스캔하거나 수신기 쪽에서 램프의 빛을 닙코 디스크에 보낼 때에도 입사되는 빛의 극히 일부만 디스크의 구멍을 통과해야 했기에 매우 강한 광원이 필요하거나 영상이 흐려서 영상 내 형상이 정확히 인지되기 힘들었으며 깜박거림 현상도 매우 심했다8.

이후 미국의 벨 전화 연구소Bell Telephone Laboratories에서는 상당한 자금과 인력을 기반으로 기계식 TV의 기술적 수준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려는 노력이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최소한 100명 이상의 과학자와 공학자들이 이 개발 과제에 기여했다고 한다. 1927년 벨 연구소가 구현한 기계식 TV에는 50개의 구멍을 가진 디스크가 사용되었고 (이는 50개의 주사선에 해당된다) 초당 18 프레임의 영상이 구현되었다. 수신부의 경우 전통적인 닙코 디스크에 기반한 2인치급 소형 화면과 네온 램프를 적절히 가공하고 대면적으로 배치해 60×75 cm2의 화면을 구현한, 당시로서는 최대의 디스플레이를 구현하는 두 가지 방식을 선보였다. 게다가 일부 나라에서는 기계식 TV의 주사선 수를 180까지 올려 해상도를 높인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기계식 TV는 베어드로 대표되듯이 한 명 혹은 소수의 발명가가 아이디어와 집념을 갖고 개발하고 상용화를 밀어붙인 대표적 사례에 해당되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기계식 TV가 상용화되기에는 한계가 매우 뚜렷하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냈다. 고품질 TV 시스템의 개발은 이미 개별 발명가들의 역량이나 아이디어 구현 차원을 넘어 거대한 자본과 다양한 영역의 엔지니어들이 협업을 통해 완성해야 하는 종합 공학의 성격을 가진다는 점이 뚜렷해졌다. 움직이는 부품이 제거되고 송신기와 수신기 모두 전자공학적 부품들로 구성되는 “전체 전자식 TVall-electronic TV”의 개발이야말로 시스템으로서의 TV 기술의 완성 및 상용화로 이어질 터였다. 미국의 대형 회사들을 중심으로 전자식 TV의 개발과 상용화가 진전되던 시기는 기계식 TV의 쇠퇴와 맞물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스플레이의 역사에서 기계식 TV가 남긴 족적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송신기-전송-수신기로 구성되는 디스플레이 시스템에 대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이해, 피사체를 화소 단위로 나누어 스캔하고 실시간으로 전송한다는 개념, 이를 다시 인간의 시각을 속일 정도의 빠르기로 재현하는 과정에서 쌓인 기술적 경험은 전자식 TV 개발과 상용화에 소중한 발판이 되었다. 그렇지만 기계식 TV의 시대가 저물고 나서야 음극선관 기반의 전자식 TV가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두 기술의 맹아는 20세기 초 병렬적으로 싹트며 발전해 온 측면이 강하다. 음극선관 방식의 전자식 TV의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사람은 영국의 공학자 캠벨 스윈턴A. A. Campbell Swinton, 1863~1930이었다. 후속의 글에서는 스윈턴이 저널 네이처에 제시한 아이디어9로부터 출발해 음극선관에 기반한 전자식 TV의 개화와 쇠퇴에 대해 다룰 것이다. 

고재현
한림대학교 반도체 ∙ 디스플레이스쿨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