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화학적 연소를 기반으로 다양한 조명 장치를 개발해 활용해 온 인류는 19세기 후반 빛의 새로운 원천으로 전기를 활용하게 되었다. 그 출발점은 영국의 뛰어난 화학자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 1778-1829였다. 데이비는 볼타의 전지 발명 사실을 듣고 자신이 일하던 영국 왕립협회의 실험실에 대용량 전지를 설치해 다양한 실험을 진행했다. 그는 볼타 전지를 이용한 전기 분해 실험으로 알칼리 금속을 포함한 여러 원소를 성공적으로 분리해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로선 가장 강력한 볼타 전지를 지하실에 설치해 다양한 전기 실험을 진행하면서 전기로 빛이 만들어지는 두 가지 방식을 발견했다. 1800년 데이비는 고압 전지에 연결된 두 탄소숯, charcoal 전극 사이에서 발생한 전기 아크arc가 만드는 빛을 발견했다. 1802년에는 얇은 전선에 전류를 주입해 달구어진 백금 선이 방출하는 백열광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전자가 아크등의 원리를 나타낸다면 후자는 백열등의 발광 원리를 보여준다. 하지만 데이비는 이 두 가지 현상에 대해 더 파고들거나 조명으로 실용화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이는 후대 과학자와 공학자들의 몫으로 남았다. 이번 이야기는 바로 데이비가 남긴 과학적 유산을 끝내 실용화한 이들의 이야기다.

 

 

아크등

기록에 의하면 전기 아크를 처음 구현한 사람은 험프리 데이비다. 1800년 전지를 이용해 아크를 구현한 실험 결과를 1801년에 논문으로 발표한 데이비는 1802년 왕립협회에서 공개적으로 아크를 시연했다. 그는 탄소 전극 두 개를 접촉시킨 상태로 전류를 흘린 후 두 전극 사이 간격을 띄워 희미한 아크가 생김을 보였다(당시의 현상은 지속적인 아크라기보다는 단속적인 스파크에 가까웠다고 한다).1

아크란 절연체인 공기가 높은 전압으로 절연 파괴dielectric breakdown를 겪으면서 두 전극 사이에 플라스마의 흐름이 생기는 현상이다. 일종의 인공 번개라 할 수 있는 아크가 유지되기 위해선 전극으로부터 전자가 공급되어야 하는데, 아크등은 이를 열전자의 방출로 공급받는다. 데이비의 인상적인 시연에 대해 왕립협회는 더 강력한 전지를 제공했고 이를 활용해 그는 1808년 더 크고 뚜렷한 아크를 만들 수 있었다. 뜨거워진 공기의 부력으로 휘어지는 플라스마에 ‘아크’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붙인 이가 바로 데이비다. 아크가 인상적인 전기 현상임은 분명했지만 그는 이를 더 연구해 실용적으로 응용하려 하지 않았다.

보통 두 전극을 잇는 아크 플라스마에서 강한 빛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리고 실제로 플라스마에서도 약한 빛이 발생하지만, 아크등의 빛은 바로 아크와 연결된 탄소 전극의 접촉점(“white hot tips”이라 불린다)에서 나온다. 뜨겁게 달궈진 접촉점에서 발생하는 백열광이 아크등에서 방출되는 빛의 원천이다. 아크등 구동 시에는 고온으로 인해 탄소 전극이 소모되고 전극 사이 간격이 변하기 때문에 이를 검출하고 보정해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조절기가 필요했다. 게다가 화학 전지를 이용해 지속적으로 전기를 공급하며 아크를 유지한다는 건 실용적인 면에서 비용이 많이 들었다. 따라서 초기 아크등은 화학 전지나 작은 증기 엔진으로 발전기를 돌려 얻는 전기를 이용해 점등하며 제한적인 용도로만 활용되었다. 예를 들어 1856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차르 알렉산더 2세의 대관식을 밝히는데 아크등이 이용되었다. 당시 아크등으로 밝힌 대관식의 모습을 기술한 기록을 보자.

크렘린의 낡은 종탑에 매달린 수많은 전등이 모스크바 시를 밝혔다. 수천 개의 금빛 돔이 난생처음 보는 불빛을 발산했고 가까이 자리 잡은 오랜 성당의 매력적인 아치와 멋진 대비를 이루며 모스크바 강에 은빛을 입혔다.”[1]

아크등의 본격적인 개발과 대중화가 실현되기 위해선 안정적으로 전기를 공급하는 발전기의 개발이 필수적 전제였다. 1869년 벨기에의 제노베 테오필 그램Zénobe Théophile Gramme, 1826-1901이 발명한 발전기dynamo가 그 전환점을 이뤘다. 기존의 발전기에 비해 훨씬 효율이 좋고 구조가 단순한 그램의 발전기는 전기등의 본격적 공급이 가능한 기반이 되었다. 이런 면에서 전기 조명의 발명과 보급의 일등공신은 전자기 유도 현상을 발견한 마이클 패러데이일 것이다.

아크등의 본격적인 개화에는 러시아 공학자인 파벨 야블로치코프Pavel Nikolayevich Yablochkov, Jablochkoff로 번역됨, 1847-1894의 공이 컸다. 1875년 미국으로 건너가 필라델피아 박람회를 구경하며 전기등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파리로 돌아와 아크등과 발전기를 결합하는 시스템을 연구했다. 흔히 야블로치코프 캔들Yablochkov candle로 불리는 그의 아크등은 두 개의 길쭉한 탄소 전극을 나란히 배치한 후 그사이를 소석고plaster of Paris로 채워 메운 구조를 가졌다.([그림 2]) 전극 상단에 흑연으로 만든 연결선이 자리 잡고 있어 점등 초기 전류의 통로가 된다. 여기에 아크가 발생하면 탄소 전극과 소석고가 같은 속도로 녹아 소모되며 아크가 아래로 내려왔고, 이 모습이 흡사 양초가 타는 양상과 비슷해 캔들이란 별칭이 붙었다. 일정한 전류와 밝기를 유지하려면 탄소 전극 사이의 간격을 동일하게 유지시켜주는 섬세한 장치가 필요한데 야블로치코프 캔들은 이미 소석고로 고정되어 전극 사이 간격이 일정하므로 부가적인 장치가 필요 없었다. 게다가 두 탄소 전극의 소모 속도가 현저히 달랐던 직류 구동 대신 교류를 선택해 양쪽 전극의 소모량을 동일하게 할 수 있었다.

 

 

야블로치코프 캔들에서 탄소 전극이 모두 소모되는 데는 약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정도 걸렸다고 한다. 따라서 일회성 전등이 수명을 다해 꺼지면 주기적으로 등을 자주 교체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크등은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 in Paris 때 오페라 가도Avenue de l’Opera와 오페라 광장Place de l’Opera에 설치되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그림 2]는 오페라 가도에 아크등이 설치된 모습이다. 야블로치코프 캔들은 그 후 프랑스로부터 유럽의 여러 도시로 퍼져 나가며 아크등의 가능성을 명확히 보여줬다. 당시 영국은 엔지니어 스테이튼G. H. Stayton을 파리로 보내 해당 기술을 파악하도록 한 바 있다. 스테이튼의 감상이 아래와 같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즉각적인 점화와 소화의 결과로 … (에너지가) 절약되고, 방출되는 빛이 가스등의 빛보다 훨씬 우수하고 해롭지 않으며, 빛의 생산과 연소 과정에서 유독한 냄새가 없고, 가스의 경우 발생하는 견딜 수 없는 실내의 열이 거의 느껴지지 않으며, 가장 섬세한 색이 보존되고, 가스처럼 공기를 소비하지 않으며, 폭발의 가능성이 전혀 없고, 거리에서 빛이 매우 강력하지만 말에 대한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2]

영국도 곧 이 기술을 받아들여서 1878년 영국 셰필드의 한 경기장에 아크등을 최초로 설치했다. 이를 기점으로 1890년 영국의 거리에만 700여 개의 아크등이 설치되었고 이 수는 20세기 초에는 2만 개까지 늘어났다.

아크등은 1880년 전후 상용화된 후 급격히 시장이 커지며 20세기 초반까지 야외용 전등 및 거대 건물 내 전등으로 활발히 사용되었다. 미국에서 아크등의 상용화에 앞장선 이는 찰스 브러시Charles Brush, 1849-1929란 발명가였다. 그는 아크등과 발전기를 결합한 전등 시스템을 연구했고 1879년 미국 클리블랜드의 광장에 자신이 개발한 아크등을 설치, 야외용 전등으로서의 가치를 뚜렷이 보여주었다. 이후 아크등은 미국의 주요 도시로 확산되었고 일종의 문명의 상징처럼 자리 잡았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매우 넓은 면적을 비출 수 있는 아크등이 가난한 이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민주적인 빛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아크등이 주는 느낌은 이탈리아의 미래주의 화가 지아코모 발라Giacomo Balla, 1871-1958가 1910년경 그린 가로등Street Light이란 작품에 잘 표현되어 있다. 발라는 로마의 테르미니Termini 광장에 설치된 아크등을 관찰한 후 새로운 문물이 퍼뜨리는 빛의 역동적 에너지를 그림에 담았다. 비록 화폭에 담긴 이차원의 이미지지만 그의 그림은 아크등의 번쩍거림과 밝음을 입체적으로 화려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1890년대 들어서서 아크의 발생 부위를 작은 유리 튜브 속에 담아 탄소 전극의 소모를 줄이는 경제적 아크등이 등장하기도 했고, 탄소 전극 가운데 다양한 염을 넣어 백열광에 더해 아크 자체의 발광까지 이용하는 전등이 개발되었다. 하지만 아크등이 만드는 빛은 가까이 두기에는 매우 거친 빛이었다. 아크등의 구동 중에는 노이즈나 유해한 기체가 발생했고 직렬 구동이라 전등이 하나라도 죽으면 연결된 다른 전등 전체가 소등되는 문제도 있었다.

아크등의 단점에 대한 여러 연구 중 영국의 여성 공학자인 헤르타 에어튼Hertha Ayrton, 1854-1923의 노력이 특히 돋보였다. 에어튼은 아크등에서 발생하는 소음(흔히 hiss라 불린다)이 탄소 전극과 접촉하는 산소의 유입에 의한 것으로 설명했고 이에 관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2 이런 다양한 노력과 개선에도 불구하고 아크등은 실내용으로는 과도하게 밝은 데다가 빛의 깜박거림도 심해서 실내용 전등으로 사용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아크등의 거대한 빛을 작게 나눠 사무실과 가정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전등이 필요했다. 바로 백열등이 켜질 공간들이다.  

 

 

백열등

어린 시절 읽던 위인전 시리즈에 단골로 등장하던 에디슨은 백열등의 발명가로 기억되곤 한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에디슨은 백열등의 상용화에 성공한 사람이다. 당시 백열등의 발명은 과학자들보다는 당시 기술적 수준을 잘 활용할 수 있던 공학자 혹은 발명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험프리 데이비의 백열광 시연 후 많은 이들이 실용적인 백열등의 개발에 매달렸다. 유리구 속의 공기를 빼고 지지대를 이용해 필라멘트를 설치한 후 여기에 전류를 흘리고 필라멘트의 온도를 높여서 백열광을 만드는 방식은 당시나 현대나 공통적이다.([그림 4]) 그런데 19세기에 안정적으로 작동되는 램프를 구현하기 위해선 해결해야 할 다양한 문제들이 산재했다. 그중 핵심적 문제는 램프 내부의 진공도와 필라멘트 재질이었다. 현대물리에서 배우는 흑체복사 이론에 의하면 발열체의 온도가 높을수록 적외선 대비 가시광선의 발광 비중이 올라가며 백열등의 효율이 좋아진다.([그림 5]) 하지만 고온을 오래 견딜 수 있는 필라멘트 재질을 찾는 게 당시로선 큰 숙제였다. 게다가 진공도가 나빠 전구의 내부에 상당량 남은 습기나 산소가 필라멘트를 산화시키며 다양한 문제를 일으켰다.

 

 

진공도를 높이는 문제는 1865년 헤르만 슈프렝겔Hermann Sprengel, 1834-1906이 수은 공기 펌프를 개발하며 해결되기 시작했고 필라멘트 재질로는 백금과 탄소 재질이 다양하게 시도되었다. 영국의 스완Joseph Swan, 1828-1914은 면에 적당한 산 처리를 해 구조를 더 치밀하게 만든 탄화된 선carbonized parchmentized string을 필라멘트로 사용, 1880년에 공개적인 시연을 하며 특허를 신청했다. 그는 자신의 회사를 차려 백열등을 생산, 영국에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에디슨은 초기에는 브리스톨 보드Bristol board라 불리던 부드럽고 무거운 종이를 태워 탄화시킨 필라멘트를 사용해 1879년 자신의 멘로파크 연구실에서 대중적인 시연을 했지만 1881년 후에는 일본 큐슈 지방의 대나무를 태워 제작한 필라멘트 재질로 정착했다. ‘필라멘트’란 단어를 처음 사용한 이는 에디슨으로 알려져 있다.

 

백열등의 특허권을 두고 치열한 법적 분쟁과 회사 사이의 합종연횡이 벌어졌지만, 상용화의 관점에서는 에디슨의 노력과 역할이 중요한 분기점을 만들었다. 직렬 시스템으로 구동되는 아크등의 문제점을 알고 있던 그는 램프 자체의 완성도를 높이는 문제에 더해 이를 보급하기 위한 물적 기반, 즉 전기의 공급 체계까지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는 특히 가스등 시스템처럼 중앙에서 전기를 공급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시스템을 고안하려 했다. 에디슨은 결국 전압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병렬 시스템을 고려하면서 백열등을 손쉽게 추가하거나 뺄 수 있는 배분 체계를 완성했다.

당시 백열등을 개발해 상용화를 추진하던 개인과 그룹들의 기술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가 1881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 전기박람회International Electrical Exhibition에서 있었다. 네 발명가가 출품한 백열등([그림 4] 왼쪽 하단에 세 램프가 그려져 있다)에 대한 평가단의 심사표가 아래 표에 제시되어 있다. 여기 숫자들은 동일한 전기에너지(전력)를 공급할 때 방출되는 빛의 양을 표시한다고 보면 된다. 당시 언론들의 보도를 보면 효율이 제일 높은 에디슨의 백열등에 가장 주목했으나 숫자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네 발명가가 보여준 램프들 사이의 기술 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다.

* candlepower는 촛불과 같은 점광원에서 특정 방향을 향한 단위 고체각에 포함된 루멘lumen을 일컫는 광도의 과거 단위로 오늘날에는 칸델라candela, cd가 사용된다. 1 candlepower는 약 1cd 정도다. 마력으로 번역되는 horsepower는 약 740W다. 가령 196이란 숫자는 1마력의 전력을 공급하면 196 candlepower란 광도를 만드는 백열등이라는 의미다.
** 루멘lumen, lm은 발광출력 혹은 광속의 단위로, 가시광선 영역의 단위 시간당 복사에너지를 인간 눈의 시감도 곡선으로 규격화한 양이다. 555nm 파장의 녹색광 1W는 683lm에 대응된다. 조명이나 디스플레이의 발광 효율은 lm/W로 표현한다.


실용적으로 작동되는 백열등의 개발 후, 램프 관련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에디슨은 여러 개의 회사를 설립해 램프, 발전기, 전송선과 다양한 전기 부품들을 생산해 공급했고 1882년 9월 뉴욕 펄 스트리트에서 59개 사업장에 직류 전원을 공급하며 최초의 상업서비스를 시작했다. 개별 사용자에게 발전기와 전등 시스템을 판매한 이력은 산발적으로 있었으나, 중앙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분배 체계를 통해 나누어 다수의 사용자에게 공급하는 서비스로는 이 사례가 세계 최초였다. 당시 처음으로 백열등 조명을 접했던 뉴욕타임스 기자의 소감은 다음과 같았다.

이 빛만 있으면 인공의 빛을 비춘다는 인식도 없이 몇 시간이고 앉아서 글을 쓸 수 있었다.. 빛은 부드럽고, 우아하고, 달콤했으며, 전혀 깜빡임이 없고 열도 나지 않아 일광 밑에서 일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1]

그해 말까지 에디슨의 회사는 미국 내에서 150개의 발전소를 판매, 3만 개 이상의 백열등에 전원을 공급하며 사업을 확장했다. 특허 분쟁을 겪던 스완의 회사와도 협상을 통해 양 전기회사를 합병, 영국 내 조명 산업을 이끌었다.

 

부상하는 전기 램프의 면모를 화려하게 드러낸 대표적 행사는 1893년 시카고에서 개최된 국제 박람회였다. 모든 건물을 백색으로 칠해 ‘백색 도시’라는 별명을 얻었던 당시 행사장은 [그림 6]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건물 외부에 20만 개 정도의 백열등이, 내부에는 더 많은 수의 백열등이 인공 빛을 만들어 냈고, 가로등으로 6천여 개의 아크등이 동원되었다. 모두 2,500개에 달하는 각양각색의 백열등으로 장식된 에디슨의 빛의 타워는 GEGeneral Electric 전시관의 중앙을 장식했고, 이는 20세기를 앞둔 시점에 새로운 문명의 도래를 알리는 상징과도 같았다.

 

 

백열등의 현대적 진화

20세기로 넘어가는 시점 부근에 에디슨의 특허가 만료되면서 네덜란드의 필립스를 포함, 많은 램프 회사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에디슨은 유럽 각국과 합작하면서 여러 회사를 세웠고 회사 간 경쟁은 치열해졌다. 하지만 백열등에 기반한 전기 조명의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백열등의 보급으로 위협을 느낀 가스등 업체들은 가스 맨틀gas mantle이라 불리는 조명을 개발해 판매했다.

이 기술의 효시는 오스트리아 발명가 칼 아우어 폰 벨스바흐Carl Auer von Welsbach, 1858-1929다. 그는 1872년 가스 화염 속에서 가열된 염salts이 매우 밝은 빛을 낸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는 가스 버너분젠 버너의 발명으로 유명한 하이델베르크 대학 분젠Bunsen의 학생이었다. 벨스바흐는 적당한 공정을 통해 금속 산화물의 그물망, 즉 맨틀을 만들었다. 가스의 화염이 맨틀을 가열하면 밝은 불빛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가스 맨틀은 20세기 전반 3분의 1 정도의 기간에, 전기등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에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백열등에 대한 또 하나의 경쟁 기술은 1920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독일의 화학자 발터 네른스트Walther Hermann Nernst, 1864-1941가 개발한 네른스트 램프였다. 그는 상온에선 절연체지만 가열하면 전도체로 변하는 고체 전해질로 구성된 봉(glower라 불렸다)을 전류로 가열해 달구어 백색광을 만들었다.([그림 9]) 이 램프는 수명이 길고 효율이 높아 탄소형 필라멘트를 채택한 백열등의 경쟁자로 부상했지만 금속 필라멘트가 백열등에 도입되면서 도태되게 된다.

백열등의 발광 현상은 플랑크 흑체복사 이론이 등장하기도 전에도 현상적으로는 잘 이해되고 있었다. 탄소 필라멘트를 적용할 경우 공급되는 에너지의 대략 1%만 빛으로 변환되었다. 필라멘트의 온도를 높여야 발광효율이 좋아지는데 탄소 필라멘트의 증발 속도를 줄이기 위해선 섭씨 약 1,600~1,700도에서 구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단점에 더해 가스 맨틀의 보급으로 백열등 업계는 큰 위기감을 느끼며 기술적 혁신을 추구해야만 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현대적인 구조의 백열등이 탄생한다.

녹는점이 높은 금속을 필라멘트로 사용하려는 노력은 백열등 개발 초기부터 있었다. 대표적인 금속이 백금이다. 금속은 탄소보다 저항이 작아 훨씬 길고 가늘게 가공해야 한다([그림 4]의 가운데 위치한 초기 디자인을 보자). 아울러 쉽게 부서지는 성질도 금속 필라멘트의 단점이었다. 백금, 바나듐, 나이오븀, 오스뮴, 탄탈럼, 오스뮴과 텅스텐의 합금등 다양한 재질의 금속 필라멘트가 시도되거나 개발되었고 일부는 상용화되기도 했다. 금속 중 녹는점이 가장 높은 텅스텐(녹는점 섭씨 3,422도)은 백열등 초기부터 중요한 후보 물질이었다. 원석을 화학적으로 처리해 산화텅스텐WO3을 얻은 후 이를 수소로 환원시켜 얻는 금속 텅스텐은 매우 복잡한 소성 공정을 통해 금속 선으로 가공되어야 했다.

소성된 텅스텐 필라멘트를 활용한 백열등이 20세기 초부터 유럽 몇 개국에서 생산되면서 높은 효율(7.8lm/W)과 같은 장점이 부각되었고 곧 탄소 필라멘트 타입의 램프를 교체했다. 그러나 텅스텐 필라멘트의 제조에 동원된 복잡한 생산 공정이나 쉽게 깨지는 텅스텐의 속성을 개선해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었다. 이를 푼 사람은 미국 클리블랜드 GE 연구소의 윌리엄 쿨리지William Coolidge, 1873-1975였다. 그는 텅스텐 금속 가루를 압축, 가열, 단조의 과정을 거쳐 연성ductile 텅스텐으로 가공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그는 소량의 첨가제를 동원해 텅스텐의 재결정화를 막고 섬유질 구조를 강화함으로써 수명이 길고 쳐지지 않는 실용적 필라멘트를 개발할 수 있었다. 이 기술은 유럽으로도 곧 퍼지며 1912년경 기존의 텅스텐 필라멘트를 완전히 대체했다.

또 하나의 혁신은 1932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어빙 랭뮤어Irving Langmuir, 1881-1957로부터 나왔다. 초기의 백열등은 유리구 내부의 공기를 모두 제거한 디자인이었다. 그 후 등 내부에 약간의 비활성 기체를 채움으로써 필라멘트의 증발을 억제하고 수명을 늘릴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단 기체는 대류를 통해 필라멘트를 냉각시키는 단점도 있었다. 랭뮤어는 기체 속에서 가열된 금속 선의 냉각 효과를 이론적으로 연구한 후, 열의 손실률이 금속선의 직경보다는 유효길이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따라서 랭뮤어는 코일형으로 감아 유효길이를 줄인 필라멘트 디자인을 제안했다. 열 손실률이 적기 때문에 질소나 아르곤을 채워서 필라멘트의 증발을 억제하고 온도를 더 높여 효율을 개선할 수 있었다. 공기를 빼고 연성 텅스텐을 필라멘트로 사용한 백열등의 효율이 9 lm/W였다면 코일형 필라멘트에 기체를 채운 백열등의 발광 효율은 조건에 따라 12~18 lm/W에 달했다. 1914년 오스람이 시장에 내놓은 백열등은 초기 텅스텐 백열등의 구동 온도보다 무려 600도나 높은 섭씨 약 2800도로 구동되었기에 백색의 색감이 훨씬 강했다. 1930년대 중반에는 코일형으로 감긴 텅스텐을 한 번 더 코일로 감은, “coiled-coil” 형태의 필라멘트가 채택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백열등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필라멘트가 바로 이 “coiled-coil” 형태이고 [그림 4]에 사진이 제시되어 있다. 


백열등 진화의 종착점은 할로겐halogen 램프다. 백열등의 문제점은 공급되는 에너지의 5% 정도만 빛으로 바뀌는 낮은 효율과 짧은 수명이다. 백열등 속에 약간의 염소를 넣어 흑화를 막는 아이디어는 19세기 말에도 제안된 바 있었지만 본격적인 연구는 1950년대 이루어졌다. 1958년 엘머 프리드리히Elmer Fridrich와 에멧 와일리Emmett Wiley는 백열등 내부에 한 종류 이상의 할로겐 원소(요오드 브롬 등)를 첨가하면 광효율이 증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할로겐 원소는 필라멘트로부터 증발해 램프 내부를 떠돌거나 유리 내벽에 부착된 텅스텐 원자와 만나 화합물을 만든다. 이 화합물은 뜨거운 필라멘트 근처로 이동하고 거기서 분리되는데, 분리된 텅스텐 원자는 근처 차가운 곳에 달라붙으니 유리구의 흑화가 방지된다. 흑화가 발생하지 않으니 필라멘트 온도를 올려 구동하며 백열등의 효율을 올릴 수도 있고 온도를 올리지 않고 수명을 늘릴 수도 있었다.

할로겐이 도입되어 필라멘트의 구동온도가 약 250도 정도 올라가면 일반 유리는 내구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할로겐 램프의 유리 재료로 연화점이 높은 유리나 석영 유리를 작게 가공하고 내부의 기체압을 높여 램프를 제작했다. 보통 외부에는 보호용 유리구가 별도로 있었다.  높은 압력은 필라멘트의 기화 속도를 늦추면서 필라멘트 구동온도를 3000 K 이상으로 올릴 수 있게 했다. 할로겐 램프는 1960년 미국 시장에 처음 등장했는데 1970년대 한 번 더 변화를 겪는다. 당시 램프 회사들은 할로겐 원소로 불소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텅스텐-불소 화합물은 뜨거운 필라멘트 위에서만 분리되고 이때 분리된 텅스텐은 필라멘트에 다시 달라붙어 재생되는 효과가 있었다. 투광조명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할로겐 램프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공항의 조명 등으로 응용 분야를 넓히다가 1990년대에는 일반 가정용 전등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전기 조명의 개화에 동반된 다양한 변화들

연소에 기반한 조명 기술의 발전에 더해 전기 조명의 개화는 일반인들의 조명 접근성을 대폭 향상시켰다. 제인 브룩스가 『인간이 만든 빛의 세계사』에서 정리한 조명에 드는 비용의 변화를 살펴보자. 1800년엔 가구당 1년에 20달러로 하루에 세 시간씩 촛불 5개 밝기의 조명을 1년 동안 켤 수 있었다. “촛불 5개×3시간×365일”이면 연간 약 5500캔들시candle hour가 확보되는 것이다. 19세기 중반에 동일한 비용으로 확보할 수 있었던 빛의 양은 연간 8700캔들시로 늘어나다가 1890년에는 73000캔들시가 된다. 1900년에는 일반인들도 매일 밤 촛불 154개에 해당하는 조명을 다섯 시간 유지할 수 있었고 이는 무려 28만 캔들시에 해당되었다. 하지만 전기 조명의 공급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데에는 상당한 기간이 걸렸고 나라별로 보급 속도의 차이도 컸다. 전기 조명의 확산에는 전력망의 설치와 전기의 공급이 전제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20세기 중반까지도 가스 맨틀을 포함한 연소형 조명이 시골 지역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백열등의 상용화 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기술 개발은 램프 기술이 종합 과학이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백열등의 성공적인 개발과 개선에는 진공 기술, 유리 제조 기술, 기체의 고순도화, 필라멘트의 재료인 금속의 정제와 가공 기술 등 매우 다양한 요소 기술들이 필요했다. 이는 물리학, 화학 등의 기초 학문 외에도 재료공학, 금속야금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의 협업이 필요함을 의미했다. 에디슨은 특유의 집요함으로 자신의 사설 연구소에서 필요한 요소기술들을 개발하고 관련 회사들을 동원해 끝내 상용화에 성공했지만, 20세기엔 거대 기업들이 설립되면서 기업 연구소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예를 들어 1920년경 영국에 설립된 GECGeneral Electric Company의 연구소를 보면 초기 구성은 6명의 물리학자, 2명의 화학자, 2명의 엔지니어, 그리고 한 명의 야금학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처럼 다양한 배경의 연구자들이 모인 기업 연구소에서는 이론적, 실험적 협업을 통해 램프의 근본적인 특성들을 규명하고 성능을 개선해 나갔다. 이런 연구는 새로운 학문 분야의 개척을 낳기도 했다. 가령 백열등에 대한 체계적 연구는 열이온 방출, 플라즈마 현상, 화학적 수송 이론 등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로 이어졌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의 상황은 어땠을까? 전기 조명의 개발과 개화에 동양의 역할은 없었다. 산업혁명에 뒤쳐진 상태에서 서구 문물의 도입을 통한 활용만 있었을 뿐이다.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기 지식 역시 이를 먼저 받아들인 중국과 일본을 통해 도입이 이루어졌다. 그 통로는 주로 청나라로부터 들여온 서양과학서 번역본, 청나라에 파견한 유학생, 그리고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 등이었다. 고종이 주도한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단행된 경복궁의 전등사업이 한국 최초의 전기 시설 도입으로 이어졌다.

1884년 미국 에디슨의 전기회사에 발주한 전등 설비는 여러 사정을 겪은 후 1887년 3월 경복궁을 밝혔다. 조선 최초의 전기등이 켜진 순간이었다. 당시 도입된 전기 설비는 “보일러, 엔진, 발전기, 배전반 등으로 구성되어… 백열등 750개를 점등할 수 있는 규모”였다.[3] 시내의 경우 전철이 운행되던 종로의 정거장과 매표소 주변에 세 개의 가로등이 켜진 1900년을 기점으로 그 다음해 최초의 영업용 전등이 경운궁에서 점등되었다.

백열등은 20세기에 가장 사랑받았던 조명임에도 불구하고 25 lm/W를 넘지 못하는 조악한 발광효율로 인해 언젠간 퇴출될 운명의 조명이었다. 현재 대부분의 국가들이 전기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백열등의 생산과 일반 조명으로의 사용을 금지하는 정책을 수행하고 있다. 20세기 전반부, 백열등이 급격하게 보급되던 와중에 매우 높은 효율을 보이는 램프가 발명된다. 바로 형광등의 등장이다. 방전 현상에 기반한 램프들의 원리와 역사, 그 뒤를 잇는 반도체 광원, 즉 발광 다이오드가 바로 다음 글의 주제다. 

참고문헌

  1. 제인 브룩스, 『인간이 만든 빛의 세계사』, 박지훈 옮김, 을유문화사.
  2. Brian Bowers, 『Lengthening the Day, A History of Lighting Technology』 , Oxford Univ. Press, 1998.
  3. 이봉희, 『전기의 역사』, 기파랑.
  4. J. M. Anderson, and J. S. Saby, “The electric lamp: 100 years of applied physics”, Physics Today, 1979년 10월호, pp.33-38.
  5. D. DiLaura, “A Brief history of lighting”, Optics and Photonics News, 19권 Issue 9, pp. 22-28 (2008).
  6. C. Weisbuch, “Historical perspective on the physics of artificial lighting”, Comptes Rendus Physique, 19권, pp.89-112 (2018).
  7. M. Guarnieri, “An historical survey on light technologies”, IEEE Access, 6권, pp.25881-25897 (2018).
  8. P. Pust, P. J. Schmidt, and W. Schnick, “A revolution in lighting”, Nature Materials, 14권, pp.454-458 (2015).
  9. Robert Karlicek et al, 『Handbook of Advanced Lighting Technology』, Vol.1 , Springer, 2017.
고재현
한림대학교 반도체 ∙ 디스플레이스쿨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