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종이의 내구성은 유명하다. 1930년대에나 등장한 한지韓紙라는 말이 “천년”이라는 수식어 덕분에 유구하게 느껴진다. “천년 한지”는 8세기 초반의 목판 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보존 상태가 보증해준 이름이다. 어떤 실험실에서도 해낼 수 없는 천년 세월의 1차 검증을 거친 명성이다. 최근에는 유럽의 복원 전문가들이 일본의 화지和紙와 비교해서 그 우월한 내구성을 재차 확인했다. 교황청의 대형 지구본 등 중요한 유물의 복원에 한지가 선정된 배경이다.1 

사실 기계식 펄프 종이와 비교하면 대부분의 수공예 종이는 그 수명이 길다.  유럽의 도서관에도 17세기 책이 20세기 책보다 보존 상태가 좋고, 종이 발명가 채륜蔡倫, 50?~ 121?을 내세우는 중국에도 천년 넘는 종이가 출토되곤 한다. 산성인 기계 종이가 변색과 부식을 면치 못하는 데 반해 염기성 잿물로 가공해서 만드는 대부분의 수공예 종이가 중성을 띠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화지와 비교한 시험에서도 드러나듯 한지의 수명은 수공예 종이 중에서도 독보적이다. 최고 공신은 닥나무와 그 닥나무의 성질을 속속들이 이해했던 장인들이다. 이 글에서는 100년이 안 된 한지라는 말 대신 닥종이라는 말로 닥나무와 장인이 함께 만든 닥종이 과학기술의 긴 역사를 훑어본다.2

닥종이 과학기술이라는 말은 과하게 들릴 것이다. 실제로 말이 되지 않는다. 닥종이를 만들던 신라, 고려, 조선에는 과학science이나 기술technology이란 말이 없었다. 과학이나 기술이란 말이 전 세계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200년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닥종이는 첨단 과학기술이 꽤 취약한 내구성이라는 성질에 강하다. 기계 종이는 물론 종이책을 대체하리라고 보았던 디지털 전자매체도 그 수명은 수십 년을 넘기지 못하고, 새로운 기술을 가미한 최근의 저장 장치는 안정성과 수명이 더 짧다고 한다.3  이러한 매체에 내구성을 부여할 수 없다면 빅데이터 없이 작동하지 않는 모든 인공지능 기반 분야는 흔들릴 수 있다. 세대를 이어 지식을 전달하며 발전시키던 일에도 문제가 생긴다. 천년 내구성을 얻어낸 일을 만만히 볼 수 없다는 존경을 담아 우선 닥종이 과학기술이라 해보자.

하지만 수공예적 내구성이 아무리 대단한 가치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과학기술에 견줄 수 있을까? 그 방식이 너무 다르지 않은가? 한땀 한땀 장인이 만든 맞춤옷과 그렇게 만든 명품 가방이 좋다고 그런 식으로 다수가 필요로 하는 옷과 가방을 만들기는 힘들다. 닥종이의 내구성과 같은 가치는 일부에게나 허용되는 사치이고, 닥종이 과학기술은 한가한 정교함이라고 할 수 있다. 다수를 위해 효율적 생산을 담당해온 과학기술이 그 가치를 지향할 수는 없지 않은가?

기술자로 꽤 여러 해 효율을 내세우며 일을 했던 내가 닥종이 역사를 공부하며 가장 신기했던 점은 바로 닥종이가 상당히 효율적인 생산 체제를 만들어갔다는 점이었다. 알다시피 조선 후기에는 인구가 많이 늘었고, 그중에서도 인구의 절반을 넘게 된 양반 인구의 증가 속도는 더욱 가팔랐다. 식자층과 그를 지향하는 계층이 폭증한 것이다. 종이가 모자라고 가격이 올랐을 법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종이 가격은 여러 물가 중 가장 안정적이었다. 오히려 종이가 흔해서 중국에서는 귀하디귀하게 여기는 종이를 코 푸는 데도 쓰고, 신발 안창으로도 쓴다는 탄식이 들렸다. 게다가 닥종이는 중국과 일본으로 수출까지 되었다. 조선 시대 국경 무역 자료와 강화도 조약 이후 개항장의 무역 자료, 구한말 한국을 방문했던 외국인들의 보고서에서 모두 확인되는 사실이다. 인삼, 말린 해삼, 소가죽 등이 주가 되는 개항 전후 조선의 수출품 목록에 거의 유일한 ‘공산품’이 종이였다.

나는 이 닥종이 과학기술의 역사를 기지機智라는 말로 포착하려 해보았다. 기는 최초의 중요한 기계라 할 수 있는 베틀을 일컫는 한자로, 기계를 통칭하기도 하고 베의 품질을 좌우하는 솜씨, 기미, 기회의 뜻을 갖는다. 지는 이러한 사물의 기미를 밝게 알아보고 처리하는 지혜 정도가 된다. “경우에 따라 재치 있게 대응하는 지혜”가 기지이다. 기지는 토마스 쿤Thomas Kuhn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기술 현장의 중요한 지식으로 지적한 암묵지tacit knowledge와도 유사한데, 닥종이의 역사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기지는 암묵지가 과학기술적 실천 지식으로써 갖는 깊이와 넓이를 풍부하게 드러낸다.

닥종이 기지의 첫 단계는 바로 닥나무라는 사물의 기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에 밀착된 독특한 공정을 만드는 데서 시작되었다. 종이를 발명한 중국의 공정과는 모든 점에서 다른 공정이다. 종이는 중국의 4대 발명품 중 하나로 들어가기도 하지만 그 착상은 간단하다. 재료가 될 식물재료를 분해해서 묽은 죽처럼 물에 풀어놓고, 김을 뜨듯이 발틀을 이용해 종잇장을 형성해 얇게 떠낸 다음, 말려서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 말로는 쉬운 일이, 몸소 해보면 생각처럼 되지 않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닥나무를 택해 종이를 만들어 본 한반도의 장인들은 이 모든 공정을 변형시켰다. 이들은 우선 닥을 돌 위에 놓고 방망이로 찧어가며 분쇄했다. 완전히 펄프를 만들지 않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중국에서 뽕나무, 삼, 대나무 등의 재료를 택해 갈아서 만들던 것과 다른 선택이었다. 떨기나무인 한반도 닥나무는 겉껍질을 벗겨내면 중국의 어떤 재료보다 흰빛을 자랑하는 질긴 속껍질을 갖고 있었다. 태평양 연안 어느 섬에서는 옷을 만들기도 한 섬유질 내피이다. 한반도 장인들도 이 질긴 섬유 올의 잠재력을 높이 샀던 모양이다. 이들은 맷돌과 같은 오래된 도구를 외면하고 찧는 방식을 택해서 이 섬유 올을 길쭉하게 살렸다. 잿물도 약한 것을 써서 섬유 손실을 최대한 막았다.

이들은 닥 섬유의 긴 올이 어우러진 재료를 물에 풀어 떠내는 과정에서도 새로운 재료와 공정을 도입했다. 아욱과 화초의 뿌리에 있는 점성 물질인데, 이들이 닥풀이라 부른 것이다. 닥풀은 닥 섬유 올이 쉬 가라앉지 않게 돕는다. 이들은 이렇게 통 속에 떠 있는 닥 섬유 올을 종횡으로 엮듯이 떠냈다. 곱게 갈아 만드는 중국에서는 어느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면 되었던 것과 달랐다.

이렇게 공들여 떠낸 종이 표면에는 긴 섬유 올이 더러 튀어나올 수 있었다. 이를 처리하기 위한 마무리 공정이 도침搗砧이라는 다듬이질이다. 이들이 택한 닥종이 공정에 맞춰 생긴 이 마감 공정은 올 처리만이 아니라 종이의 밀도를 높여 묵의 스밈을 조절하는 데도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광택과 견고함도 더했다. 중국에서 표백과 묵 스밈의 조절을 위해 밀랍이나 쌀가루 등의 첨가제를 더하던 것과 다른 방법이었다.

발명에 맞먹는 창의성이 모든 공정에서 보인다. 이 재발명의 결과는 탁월했다. 닥종이는 재료 자체의 흰 빛을 자랑하는 데다 천연 폴리머라는 닥풀로 안정성을 얻었고, 흘림 뜨기로 잘 찢어지지 않고 질겼다. 도침은 그 특성을 더욱 강화하며 광택과 묵 스밈을 향상했고, 표백이나 묵의 스밈을 조절하기 위한 부패성 첨가물이 불필요해 내구성은 더욱 높아졌다. 덕분에 ‘고려지’로 통칭되는 한반도 종이에 대한 명성이 서서히 자리 잡고, 종이의 발명국임을 자랑하는 중국에 상당한 양의 종이를 비싼 값에 역수출할 길이 열렸다.

품질은 탁월하다고 하지만 이 재발명은 어찌 보면 의아하다. 원조 공정에 비해 모든 공정이 더 어려운 개악처럼 보인다. 이 ‘개악’처럼 보이는 결정에 담긴 것이 “기지”이다. 닥나무라는 사물의 낌새에 충실한, 닥나무와 긴밀히 대화하며 발휘되는 “기지”이다. 최고의 재료를 택했으니 그 재료가 제 성질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모든 과정을 닥나무에 맞춘 것이다. 닥나무를 닥종이 과학기술의 주인공으로 대접해주는 결정이었다.

말해둬야 할 것은 닥종이 공정에 대한 내 설명은 최선을 다한 추측이라는 것이다. 하나하나 나름의 진화를 거쳤을 닥종이 공정을 제대로 기록해 놓은 문헌도 없고, 옛 기술을 이어받은 장인도 맥이 끊어진 까닭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화지의 우수한 기술을 도입하겠다는 총독부의 시도가 있었고, 이어서 전쟁의 혼란까지 따랐다. 게다가 닥종이는 언제든 한 가지가 아니었다. 두께, 크기, 용도, 색깔 별로 매우 많은 종류가 있었으니 닥종이 제작 공정이 단일할 수는 없다. 장판지 만드는 방법으로 편지지를 만들지는 않는 것이다. 과거의 현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역사학자가 그중 어느 한 공정도 확실히 밝혀낼 수는 없다. 나는 그저 닥나무를 키워가며 수없이 닥종이를 만들어본 종이 애호가, 전통을 복원해 보고자 하는 장인과 과학자, 남은 닥종이 유물을 물리적, 화학적으로 분석하며 그 성분의 특징과 시대별 변화를 기록한 여러 연구자의 성과에 의지해 닥종이가 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자 애썼고, 이를 문헌의 흩어진 기록들과 대조하며 흐릿한 윤곽을 그려보았다.

내가 살펴본 닥종이의 궤적에서 “고려지”라는 명품의 탄생보다 더 놀라웠고, 더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닥종이 제조가 조선 후기에 더욱 번성하며 새로운 생산, 소비, 재활용 체제를 만들었던 점이다. 사실 닥종이의 명성이나 과학기술적 정교함은 고려청자와 자격루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고려청자와 자격루는 일시적이고 개인적인 성취로 끝난 데 반해 닥종이의 성공은 굴곡이야 겪었지만 개항기까지 지속되었다. 유학 이념에 따라 장인을 천시했던 것은 조선 사회 전반의 현상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게다가 조선 초의 관영 제지製紙 체제가 무너지고 제지를 담당한 것은 조선 사회에서 억압받던 불교 사찰이었다.

사실 수출 기록 등에서 감지되는 닥종이 생산의 확대는 조선왕조실록 등의 관찬 기록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커다란 사찰도 하루아침에 텅 빌 정도로 사찰의 큰 폐단이 종이를 만들어 바치는 종이 사역[紙役]이라는 이야기만 많다. 이는 유교 사회 조선의 불교 탄압이라는 통념을 고스란히 확인시키는 기록인지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이들 기록은 이상한 점이 많았다. 아버지가 승려인 승려는 없다. 승려는 승려로 태어날 수 없는 것이다. 불교가 제대로 억압되었다면 승려 수는 크게 줄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승려가 종교지도자로 대접받지 못한 조선에서 새로 승려가 된 사람이 점점 늘었고, 사찰당 평균 승려 수도 조선이 일제강점기보다 많았다. 영적이고 정신적인 선택도 있었겠지만, 사회경제적인 선택이 압도적으로 보인다. 조선은 호적상의 인구가 전체 인구의 40% 정도로 추정된다. 3년에 한 번인 호구 조사가 그냥 부실하다기보다 양반으로 태어나지 못한 다수가 겹겹의 징세를 피하려 유민流民의 삶을 택한 것이 새로운 합의를 만든 결과였다. 전국에 흩어져있던 천여 개의 사찰(국초에는 36개를 남기고 폐쇄되었던)은 유민들의 중요한 피난처였다. 변변한 농지가 되기는 힘든 사찰 주변 산에 닥나무가 잘 자라고, 불경 인쇄로 제지 기술이 축적되어있는 점은 닥 재배와 제지를 새로운 승려와 유민의 핵심 사업으로 만들었다.

조선 조정이 이를 반겼다고 할 수는 없다. 백성들이 사적으로 종이를 만들고 판매하며 이익을 추구하는 일은 조선 왕조의 이상과 거리가 멀다. 서울의 조지서造紙署를 비롯해 각 군현에 관영 지소紙所를 두고, 닥과 종이를 현물세금 품목인 공물貢物로 만든 이유이다. 백성들이 말단의 이익인 상공업 대신 농업에 전념해 자급자족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우리는 혼자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무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만찮은 권력을 가진 왕과 신하들이 만든 관영 생산 체제에 틈을 낸 것은 바로 혼자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닥나무가 서울의 조지서나 관영 지소까지 움직여 주지 않으면 어떤 뛰어난 장인도 종이를 만들 수 없다. 저렴한 화석에너지를 신나게 낭비한 짧은 기간 동안 잊고 있던 사실이지만 혼자서는 움직이지 않는 닥나무를 전국 각 산지에서 운반해 오는 비용은 만만찮았다. 만든 종이도 저절로 서울로 가지 않는다. 고속도로조차 없는 조선에서 이들을 이동시키는 유통비가 제조 원가보다 비쌀 수 있는 상황은 종이 공물을 대신 내줄 사람을 찾게 했다. 살길이 막막하던 사찰의 장인들은 이 틈을 파고들어 종이를 만들었다.

우선은 여러 집단에서 사찰의 종이를 환영했다. 하지만 이들도 승려의 편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승려와 사찰에 대한 면세권이 일부 유지된 것이 화근이었다. 승려가 조정에 세를 내지 않는 특권을 받았으니 자신들이라도 그 세를 대신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믿는 집단이 많았다. 왕실 주변 세력인 궁가, 각급 관청, 지방의 관아와 군영, 기댈 세력이 있는 양반가 모두 사찰에 공짜 종이를 기대했다. 왕조실록에 승려의 종이 사역에 대한 비판이 자주 등장한 배경이다.

사찰의 종이 부담은 조정의 관료도 무리하다고 보는 수준이 되곤 했고, 점차 조정은 “승려도 백성”이라며 승려들에 대한 과도한 세금과 의무를 제재했다. 그렇지만 종이 사역으로 고통받는 사찰에 대한 호소는 19세기까지도 끊이지 않았다. 승려에 대한 천시나 자의적 권력을 행사하려는 집단이 사라지지 않은 것도 한 요소이지만, 더 주목할 것은 승려들이 이런 호소를 주도했다는 점이다. 승려들은 점차 자신들이 제공하는 현물과 의무를 하나하나 기록해서 목록을 만들고, 그 문서화 된 합의선을 넘어서는 요구가 지속되면 그 사태의 부당함을 널리 호소했다. 문제의 공론화였다. 이는 합의에 대한 준수를 강제하거나, 새로운 합의를 명문화시킬 바탕이 되었다. 사찰의 장인들은 닥나무의 요구에 귀 기울이며 좋은 닥종이를 만드는 기지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계약을 만들어낼 사회적 기지도 발휘한 것이다.

이 사물과 사회에 모두 발휘되는 기지 덕분에 19세기 사찰은 사라지지 않은 ‘탄압’의 기록과는 거리가 먼 호황을 보였다. 화재로 조정의 도움을 요청하는 호소문에조차 사찰의 놀라운 확장세는 드러났다. 불에 탄 불사가 수백, 수천 칸이 되는 사찰들이 여러 곳이었다. 천여 칸 불사가 소실되어 도움을 받은 사찰이 30년 남짓 후에는 3천여 칸이 탔다고 또 구조를 요청했다. 궁궐을 제외한 어떤 건물도 백 칸을 넘지 못했으니, 조선 후기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은 사찰이었다. 불탄 후 30년 만에 세 배가 확장된 사찰을 포함해 이렇게 거대한 사찰은 제지업이 활발했다. 종이를 뜨는 부지浮紙 칸만 120칸에 승려 수가 수백 명이라는 사찰의 경우 하루 생산량이 최소 6만 장이 된다 (종이 뜨는 통 하나로 하루 500-700장 생산한다고 한다).

조선 후기 법전에 실린 종이당 무게 기준을 참고하면, 닥 한 근(약 375g)으로 만들 수 있는 종이는 몇 장에서 수십 장까지 다양하다. 하루 6만 장 정도의 생산량이라면 닥의 수요가 1000근을 넘나든다. 수많은 닥나무 가지를 꺾고 가공해야 얻을 수 있는 재료이다. 부지 칸만 120칸 정도 되는 시설은 사찰 주변에 저절로 자라는 닥나무를 꺾어서 종이를 만드는 규모가 아니었다. 닥은 실제로 정약용조차 아들에게 재배를 권할 정도로 조선 후기 가장 유망한 상품작물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제지 사찰은 시장에만 의존하지 않고, 더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하려 애썼던 것으로 보인다. 승려들과 뿌리를 공유한다 볼 수 있는 유민들이 그 공급선이다. 해안가와 섬으로 또 산으로, 만주와 연해주까지 그 이동 영역을 넓히고 있던 유민 중에는 사찰과 밀접한 협력관계를 보이는 집단 이주민들이 있었다. 국경 지역 여러 마을에 중국말도 하는 승려들이 아내와 자식을 두고 산다고 했고, 승려가 이끌어 백두산 아래 백여 개의 마을이 생겨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제지로 유명하던 전라도 사찰 주변에도 닥 키우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화전민 마을에서 수천만 근이 넘는 닥을 사찰에 공급하고, 마을에도 제지 시설을 만든다고 했다. 태어난 고향을 등지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려는 이들이 추구한 삶은 모두 달랐을 것이다. 이들 사이의 관계도 늘 평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중 일부가 닥나무를 매개로 기지를 나누고 연대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함께 열어냈다는 것이다.

영·정조 중흥기 이후의 19세기를 보통은 쇠퇴기, 민란의 세기로 본다. 이렇게 닥나무를 중심으로 연결된 이들은 ‘쇠퇴의 19세기’에 거대한 사찰을 매개로 다양한 고부가가치 종이와 창호지 등 생활지를 수출하며 성장을 이어갔다. ‘민란의 19세기’에 이들은 일상적 협상과 연대로 새로운 사회적 계약과 생산 체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갔다. 호적에 등록되지 않은 나머지 60%가 조선 조정을 길들이며 만든 역동적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닥종이가 자격루의 길을 걷지 않은 것은 이들이 닥나무에 밀착된 사물적 기지를 다양한 사회적 기지를 통해 집단적 성취로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기지에조차 중요한 것은 닥나무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배려이다. 닥나무가 여럿이 함께 만들어간 복잡한 여정에서 한 번도 뒷자리를 차지하지 않았음은 ‘휴지休紙’로 만들어진 재활용품과 행정, 소비의 변화에서도 드러났다. 요즘은 쓰레기를 통칭하기도 하는 휴지라는 말은 ‘쉬는 종이’라는 뜻이다. 휴지는 환지還紙, ‘돌아온 종이’와 함께 쉬고 난 다음의 재활용을 염두에 둔 말이고, 한자어지만 중국과 일본에는 없는 말이다. 닥의 특성과 그 특성을 존중한 공정 덕분에 닥종이가 다양하게 재활용이 가능했던 덕분이다. 양반 관료들은 문서고의 종이를 ‘휴지’라며 가져다 재생하는 장인들을 처음에는 엄하게 벌했다. 초기의 재생지는 품질도 형편없었다. 하지만 휴지에도 그대로인 닥 섬유를 버릴 수 없었던 장인들은 이 품질을 개선하기 시작했고, 휴지 재활용품의 몸값은 높아졌다. 기름을 먹인 종이 비옷은 개항 후에 들어온 유리 등잔보다 두세 배는 비쌌다. 이런 재활용품의 변신에 양반 관료들은 휴지 다툼에 나섰다. 두껍기로 유명한 과거시험 낙방지를 놓고 벌어진 경쟁이 가장 뜨거웠다. 이 부서간 휴지 확보 경쟁 덕분에 휴지는 조선 후기에 가장 투명하게 관리되는 자원 중 하나로 <의궤>와 <등록> 등 공문서에 흔적을 남겼고, 사람들은 집에 휴지 상자를 두고 다 쓴 종이를 모아 닥종이의 다음 생을 준비했다.

한낱 휴지를 순환되는 공공자원으로 만드는 닥종이의 여정은 사물에 밀착되어 기지를 발휘하는 일의 힘을 보여준다. 닥나무를 둘러싼 모든 것의 관계를 조금씩 뒤바꿔나간 힘이다. 팬데믹과 기후 변화는 우리가 사물과 맺은 관계가 삐걱거리고 있음을 뚜렷이 전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중 상당수는 단숨에 우리를 구원해줄 마법과 같은 과학기술이나 거대한 혁명, 혹은 정치적 결단이라도 기다리듯 그저 손을 놓은 듯도 보인다. 그런 과학기술이 있을까, 모두 한 가지 목표를 향해 혁명하는 것이 가능할까? 천명을 받았다는 조선의 절대왕권 하에서도 왕의 명령이 사찰을 없애지 못했다. 닥종이를 만든 이들도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며 손을 놓았다면, 조선에서 쇠퇴의 길을 걸었던 다른 기술과 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집을 떠나 유민의 길을 택을 한 이들은 닥나무를 통해 국경을 넘나들며 천년 닥종이를 만들고, 조선 사회가 종이를 만들고 쓰고 버리는 방식을 바꿨으며, 자신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마법과 같은 과학기술의 편리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많은 것이 변해야 한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질량 보존의 법칙을 넘어설 수는 없으니, 사실 모든 것이 변하고 있다. 문제는 긍정적 변화를 만드는 것이다. 지금도 애쓰고 있을 해당 분야의 과학기술자들보다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는 지적 유민이 되어보면 어떨까? 우리의 삶을 떠받쳐왔던 사물을 하나하나 살피며 새로운 관계를 찾아가는 기지를 발휘한다면 닥나무와 장인이 함께 만든 순환의 길을 여기저기서 재발명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정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