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지구를 정복하다.

호모 속 인류가 고향인 아프리카를 벗어나 유라시아 대륙으로 진출한 시기는 200만 년 전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상첸에서 호모 하빌리스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120만 년 전쯤의 석기가 발견됐고, 조지아 드미니시에서 180만 년 전쯤의 초기 호모 에렉투스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됐다. 하지만 본격적인 진출은 140만 년 전쯤에 아슐리안 석기를 갖춘 호모 에렉투스에 의해 이루어졌다. 100만 년 전쯤까지 호모 에렉투스는 북위 50도 아래의 유라시아 대륙 곳곳에 퍼져나갔다. 이즈음 동남아시아 해변에 도달한 호모 에렉투스는 낚시와 항해 능력을 갖추기 시작했고, 이에 힘입어 섬 사이에 흐르는 강한 조류를 극복하고 인도네시아의 섬들을 정복해 나갔다. 호모 에렉투스의 뒤를 이어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도 80만 년 전쯤에 유라시아 대륙에 진출했는데, 호모 에렉투스보다 뛰어난 적응력을 발휘하며 유라시아 대륙 구석구석에 퍼져 나갔다. 50만 년 전 전후에 현지에 적응한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로부터 유럽에서는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가, 아시아에서는 호모 데니소바가 분기했다. 유라시아 대륙에 퍼져나갔던 여러 인류 종은 호모 사피엔스가 유라시아 대륙에 진출하기 전까지는 지역을 나누어 공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역시 아프리카가 고향인 호모 사피엔스는 이른 추정치에 의하면 27만 년 전쯤부터 시작해서 여러 차례에 걸쳐 아프리카를 벗어나 유라시아 대륙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21.5만 년 전쯤에 그리스에 도착한 흔적이 있으며, 13만에서 11.5만 년 전쯤 사이에는 북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를 거쳐 소아시아로 진출했으며, 8만 년 전쯤에 중국까지 도달한 흔적이 있다. 하지만 초기에 진출했던 호모 사피엔스는 모두 멸종했거나 일부만 살아남아 아프리카로 귀환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진출해 자리를 잡고 있었던 다른 호모 속 인류와 경쟁에서 밀렸거나 현지 적응에 실패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결정적인 판도 변화는 7만에서 5만 년 전 사이에 소위 ‘남쪽 경로’를 통해 아프리카를 나갔던 호모 사피엔스 무리의 이주로 일어났으며, 이들은 현재 비아프리카 지역에 있는 모든 인류의 조상이 됐다. 동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를 잇는 남쪽 경로가 선택된 이유로는 레반트 지역을 지나는 ‘북쪽 경로’에는 네안데르탈인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들과의 경쟁이 쉽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호모 사피엔스의 본격적인 유라시아 대륙 진출 시기는 소위 ‘인지 혁명’이 일어난 시기와 겹친다. 이 시기에 호모 사피엔스는 이전보다 월등한 적응력을 갖추게 됐으며, 그 결과 이전의 진출과는 사뭇 양상이 달랐다. 먼저 진출해 있던 호모 속 인류와 경쟁해서 빠른 속도로 이들을 밀어냈고, 호모 에렉투스나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는 진출하지 못했던 호주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에도 진출했다. 호주에는 6.5만에서 5만 년 전 사이에 도착했는데, 인도네시아 섬과 호주 대륙 사이의 거리를 고려하면, 이들이 배를 제작하고 대양을 항해할 능력을 갖추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진출은 당시에는 빙하기로 인해 해수면이 낮아서 육지로 이어져 있던 베링 해협을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호모 사피엔스가 훨씬 고위도 지역의 추위도 극복할 수 있었음을 말해준다.

동물 종이 집단으로 이주하는 주요 요인은 생태환경 변화와 개체수 증가다. 호모 속 인류가 유라시아 대륙으로 이주한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후변화와 인구 증가라는 요인이 발생하고 인류의 향상된 적응력이 이를 가능케 했다. 한 서식지 먹잇감을 감당할 수 있는 개체의 수는 유한하다. 온난한 기후가 유지되는 동안 개체수가 한계 이상으로 늘어나면 이주 압력이 발생한다. 온난한 기후로 초원이 북쪽으로 확대돼서 이동 경로가 형성된다. 온난한 기후가 한랭한 기후로 전환되는 시기에는 인구는 늘어난 상태지만 먹잇감은 전반적으로 감소해 이주 압력은 더욱 높아진다. 서식지 이주가 생존과 번식에 무조건 유리하지는 않다. 적응력이 부족하면 이주는 멸종의 길이 된다. 반면 적응력을 갖춘 집단은 더 강한 집단으로 성장하고, 가끔은 원래 서식지로 회귀에 기존의 집단을 몰아내기도 한다. 이런 과정이 인류를 더욱 적응력이 높은 종으로 진화하게 했을 것이다. 기후변화에 따른 사냥감의 이동을 따라 인류도 같이 이주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사냥감의 이동과 호모 에렉투스의 이동이 시기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반론이 있다. 왜 굳이 추운 지역으로까지 이주했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추운 지역으로 이주가 장점도 있다는 주장이 있다. 아프리카에는 동물에서 기원한 전염병이 많고, 이것이 인류의 생존에도 큰 영향이 있는데, 추운 지역에서는 전염병이 줄어들어 인구 증가를 제한하는 한 요소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호모 에렉투스의 적응력이 향상된 데는 커진 몸과 길어진 다리도 한몫했다. 커진 몸은 추위에 유리하고 길어진 다리는 오래 걷는 데 유리하다.

호모 사피엔스의 주요 이주 시기는 극심한 기후변화 시기와 맞물려 있다. 13.5만 년 전 적도 아프리카에 극심한 가뭄이 있었다. 10만 년 전후에는 한랭기로 인해 호모 사피엔스 전체 인구가 수천 명 수준으로 떨어지며 멸종 위기까지 내몰렸다. 이런 사실은 미토콘드리아 DNA를 추적해서 밝혀졌다. 현생 인류는 이때 살아남은 소수 집단의 후손이며, 그로 인해서 현생 인류의 유전자 다양성은 총개체수가 수천만에 불과한 침팬지의 유전자 다양성보다도 작다. 7.7만에서 6.9만 년 전 사이에는 인도네시아 토바 화산의 폭발이 있었고, 극심한 기후변화가 있었다. 비아프리카의 현생 인류는 이 시기 전후에 유라시아 대륙으로 진출한 소수 집단의 후손이며, 그로 인해서 아프리카 주민의 유전적 다양성이 나머지 세계 주민의 유전적 다양성보다 훨씬 크다. 멸종 위기를 넘기고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남은 호모 사피엔스는 강력한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 시기 전후에는 호모 에렉투스,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호모 플로레시엔시스,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등이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에 공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가 곳곳으로 퍼져나가면서 다 멸종하고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다. 현생 인류 계통을 제외한 다른 인류 종이 모두 멸종한 원인으로는 기후변화로 인해 혹독해진 환경과 같은 지역에서 공존하게 된 호모 사피엔스와의 접촉과 이에 따른 경쟁 등이 거론되고 있다. 네안데르탈인의 경우를 보면 유럽에 진출한 호모 사피엔스와 접촉이 있었고 상호교배를 통해 유전자 교환도 이루어졌다. 이들은 주거지와 먹잇감을 두고 경쟁 관계에 있을 수 있고, 그것이 네안데르탈인의 멸종을 초래했을 수도 있다. 다른 가능성으로 접촉을 통한 전염병에 의해 멸종됐을 수도 있는데, 신대륙에 도착한 유럽인이 함께 가져온 전염병에 의해 멸종에 이른 북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의 원시 판이라 할 수 있다. 멸종 시기를 전후해서 네안데르탈인이 북위 50도 지역까지 진출한 흔적은 호모 사피엔스와의 경쟁으로 인해 더 혹독한 환경으로 밀려난 끝에 멸종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아시아의 데니소바인도 네안데르탈인과 마찬가지로 이 지역으로 진출한 호모 사피엔스와 상호교배를 통한 유전자 교환이 있었으며 이들과의 경쟁에서 밀려 멸종했을 가능성이 크다.

호모 사피엔스의 전 세계 진출은 다른 인류 종뿐만 아니라 이들의 먹잇감이 되는 많은 대형 포유류 종에도 재앙이 됐다. 인류가 집단 협력을 통해 너무 빠르게 최상위 포식자로 올라서는 바람에 천적이 생겨날 시간적 틈이 없었다. 기후변화에 의한 멸종의 위기를 넘기고 나자 호모 사피엔스는 곧바로 인구를 회복했으며, 천적에 의한 인구증가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아 빠르게 인구가 증가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흥미롭게도 호모 사피엔스의 호주 대륙 진출 시기와 아메리카 대륙 진출 시기는 각각 이들 대륙에서 진화했던 대형 포유류나 조류 고유종의 멸종 시기와 일치한다. 인류 때문이 아니라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이들이 멸종했다는 설도 제기되긴 했지만, 오랜 기간 인류와 공존하며 적응했던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의 대형 포유류와 달리 이들은 새로 유입된 호모 사피엔스에 적응이 되어 있지 않아서 쉬운 먹잇감이 됐기에 멸종했다는 설명이 유력하다. 농경이 시작된 이후에는 천적이 없는 호모 사피엔스의 급격한 번성은 많은 육지 생물의 서식지를 빼앗음으로써 그들에게 큰 위협이 됐고, 이는 앞으로 더 심화할 것으로 보인다.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아 지구를 정복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인류, 인지 혁명이 일어나다.

인류 계통의 뇌는 지난 200만 년 동안 3배 커졌고, 지능 향상에 의한 행동 적응을 통해 인류는 혹독한 빙하기에도 생존과 번식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서로 분기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고 뇌 용량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과 현생 인류 사이에는 지능과 그에 따른 행동에 어떤 차이가 있었기에 이들의 운명이 달라졌을까? 뇌의 크기는 남겨진 머리뼈의 크기를 통해 알 수 있지만, 지능과 행동 변화는 그들이 남긴 유물과 유적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다행히 여기에도 결정적인 단서가 있다. 호모 사피엔스가 남긴 도구, 무덤 부장품, 동굴 벽화 등을 살펴보면 7만 년 전쯤을 전후로 혁신적인 변화가 생겼음이 관찰된다. 기술적인 면에서 접착제를 발명해서 창과 도끼 제작에 활용함으로써 사냥 무기는 더욱 정교해졌고, 배 제작술과 항해술을 축적해 해양을 건넜으며, 바늘을 발명해서 가죽과 모피가 복합된 옷, 신발, 텐트를 제작함으로써 추운 지역에 정착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동굴 벽화에도 물감을 제조해서 채색하는 기술적인 면뿐만 아니라 내용에서도 예술적인 면과 주술적인 면 모두에서 표현의 진전이 보인다. 이는 인류의 인지 능력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암시한다. 몸은 인간이지만 머리는 사자인 조각품은 인간이 허구적인 대상을 상상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사체와 같이 묻힌 화려한 부장품은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이 생겼음을 보여준다. 멀리 떨어진 집단 사이에도 교역이 있었다는 증거도 등장하는데, 교역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 네안데르탈인과 대비된다. 이는 친족이나 이웃 집단을 넘어서 모르는 타인과도 협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 사회가 규모가 커진 복잡한 사회로 바뀌어 가는 전조였다.

이 변화에 대해 대립하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이 시기쯤에 두뇌의 작동에 관련된 유전자 변이가 발생했고, 이것이 소위 ‘인지 혁명’이라 불리는 인간의 인지 능력과 추상적 그리고 상징적 사고 등에서 큰 향상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이는 현생 인류가 신체적으로(해부학적으로) 현대인이 된 시기와 정신적으로(행동학적으로) 현대인이 된 시기가 다르다는 주장이다. 1970년대에는 유럽에서 발견된 여러 유적을 근거로 인지 혁명이 4만 년 전 유럽에서 일어났다는 주장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시기적으로 앞선 비슷한 수준의 유적들이 발견되고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이 공고해지면서 더 이른 시기에 현생 인류 전체에 일어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이 주장의 결정적인 근거가 될 유전자 변이가 무엇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인지 능력 향상은 점진적으로 진행됐는데, 단지 7만에서 3만 년 전 사이에 폭발적으로 발현되기 시작했다는 주장이다. 하필 이 시기에 발현된 이유는 인구 성장과 이에 따른 축적 효과, 교류의 증가 등 사회적 요인이 작용했기 때문으로 본다. 다수의 학자는 인지 혁명이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과 같이 일어났다고 믿는다.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호모 사피엔스의 유적들을 통해서 볼 때 이런 변화는 7만 년 전 이전부터 있었고, 단지 수렵채집을 하는 작은 규모의 집단에서는 향상된 인지 능력이 발휘될 필요나 기회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상황을 생명의 진화에서도 볼 수 있다. 후기의 진핵세포에는 다세포 생물에 필요한 여러 기능에 관련된 유전자가 이미 존재했지만, 단세포로 지내는 동안 그 기능이 발현될 기회가 없다가 다세포 생물이 출현하면서 발현되기 시작했다.

인지 혁명은 집단 협력의 규모를 키우고 유연하게 만들었다. 그것을 통해 이룬 가장 중요한 성취는 집단학습과 문화의 축적이었다.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여러 요인 중 핵심은 상징 언어를 사용하고 허구를 상상하고 믿는 등 인지 혁명을 통해 인류가 새롭게 획득한 인지 능력이다. 많은 동물이 낮은 수준이긴 하지만 언어를 사용하고, 돌고래, 코끼리, 침팬지 등은 상당한 수준의 언어를 사용한다.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은 높은 수준의 언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호모 사피엔스가 사용한 상징 언어가 이들의 언어와 다른 점은 다양한 조합이 가능해 우리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뿐만 아니라 내부로부터 나오는 정보도 자세하고 정교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상징 언어의 발달은 인간의 의사소통, 특히 교수와 학습 능력을 끌어올려 문화와 지식의 축적이 일어나게 했다. 이는 허구를 믿는 능력과 결합하여 문화의 확산뿐만 아니라 유대감의 확산을 일으켜 집단 협력의 규모를 키웠다. 물론 이런 변화의 배경에는 인구의 증가와 집단 규모의 확대, 그리고 집단 간의 경쟁 심화 같은 사회적 요인도 중요하게 작용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지 혁명은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에서 모든 다른 인류 종을 밀어내고 호주와 아메리카를 포함한 모든 대륙의 다양한 환경에 적응할 수 있게 만든 추동력이었다. 인지 혁명이 현생 인류를 성공의 길로 이끈 데는 개체의 인지 능력이 향상된 점보다 그것을 통해 집단 협력이 더 커진 규모로 유연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이 훨씬 크게 작용했다. 유전자 변이에 의존하는 신체 적응을 통해서는 빠르게 변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을 갖추기 어렵다. 인류는 집단학습으로 문화의 진화와 축적을 함으로써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행동 적응을 이뤄냈다. 다수준 선택 진화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빠르게 변하는 환경에 잘 적응하는 문화적 진화와 행동의 혁신을 이뤄낸 집단이 다른 경쟁 집단을 밀어내고 살아남은 것이다. 그 결과 인류는 지구 정복을 넘어 농경을 시작하고 문명의 역사로 넘어갈 수 있었다. 인지 혁명은 인간과 인간 사회의 주요한 변화를 이끄는 동역학이 유전자의 진화에서 문화의 진화로 넘어가는 전환점이었다.

 

무엇이 우리를 만들었는가?

우리의 해부학적 구조는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 30만 년 전과 큰 차이가 없지만, 빠르게 진행하는 문화의 진화 때문에 행동 양상은 그때와 크게 달라졌다. 그렇다고 생물학적 진화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의 변이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인류의 진화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놀라운 변화 중 하나는 최근 1만 년 동안에는 뇌의 크기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인류가 농경을 통해 가축과 곡류를 길들여 변화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길들이기에 적응한 결과로 해석되고 있다. 거주지역에 따른 피부색의 변화도 진행됐는데, 이는 근대에 이를 근거로 한 인종차별 문제를 불러왔으며, 아직도 그 여파가 남아 있다. 피부색은 그 영향이 중대해서 환경에 빠르게 적응한 사례로, 지역의 위도에 따라 연속적으로 변하며 빠르게 진화가 진행됐다.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변화로는 파란 눈의 진화와 젖당 분해 효소의 활성화 변이가 있다. 파란 눈의 경우 성 선택이 주요하게 작용한 사례로 꼽힌다. 젖당 분해 효소를 만드는 유전자는 나이가 들면 비활성화되는데, 목축과 우유 섭취 문화가 확산함에 따라 그 문화권 내에서는 나이가 들어도 젖당 분해 효소 생성 유전자의 활성이 유지되는 사람들의 비율이 증가했다. 이는 문화-유전자 공진화 사례로 꼽힌다.

모든 다른 생물 종과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의 모습은 수많은 우연과 필연이 엮인 사건과 그 사건이 가져온 환경변화에 적응해서 진화해 온 결과가 축적돼서 만들어졌다. 다세포 동물의 생존 전략으로서 포식을 위한 뇌의 발명은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뇌는 학습을 통해 생존과 번식을 위한 행동 양식을 만들었다. 인류는 뇌 용량의 증가와 인지 혁명을 통해 사회적 학습 능력을 정교화함으로써 행동 양식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고 축적할 수 있게 됐다. 인류에게 닥쳤던 빙하기의 혹독한 환경들은 인류를 멸종의 위기까지 몰고 갔지만, 결국 살아남은 인류는 문화를 진화시키며 지식을 축적하는 행동 적응을 통해 빠른 환경변화에 강력한 적응력을 갖춘 종으로 거듭났다. 인류의 현재 모습은 단세포였던 최초의 생명체에서 출발해서 38억 년이란 오랜 시간 동안 진행된 생명의 진화와 더불어 그 과정에서 발명된 뇌를 기반으로 상대적으로 매우 짧은 시간 동안 진행된 문화의 진화가 축적된 결과다. 우리의 신체는 최초의 호모 사피엔스와 크기 다르지 않지만, 우리의 행동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기본적인 것을 제외하면 그들과 완전히 달라졌다.

끊임없이 변하는 지구가 만들어 낸 다양한 환경은 온갖 진화 경로를 개척해서 생존과 번식을 이어온 수많은 생명 가지를 만들어 냈다. 각 가지 끝에 있는 종은 각자 고유한 진화 경로를 거쳐서 현재까지 살아남았고, 그중 한 가지 끝에 인류가 자리하고 있다. 각각의 진화 경로에는 각 종이 겪어온 수많은 사건이 기록돼있다. 그렇다면 인류에 이르는 진화 경로가 만들어지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사건들은 무엇일까? 역사에 가정을 도입하는 게 무의미하다지만, 그것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우리가 존재하지 않게 되거나 우리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을 사건을 찾아보는 일은 재미와 더불어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게 됐는지를 돌아보는 계기는 될 듯하다. 우리의 존재에는 어떤 우연과 필연이 작용했을까?

(1) 6,600만 년 전에 지구로 날아온 소행성의 충돌은 대형 파충류의 멸종을 불러왔다. 작은 몸집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포유류는 이 우연한 사건 덕에 번성할 기회를 얻었고, 결국 육지의 지배적인 동물로 올라설 수 있었다. 만약 이 사건이 없었다면 공룡이 지배하는 세상이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대형 포유류인 인류가 진화할 기회는 사라졌을 것이다. (2) 판의 이동에 따른 대륙의 재배치는 인류의 진화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남극대륙이 남극 지점에 자리 잡으며 대륙빙을 형성했고, 그로 인해 지구의 기온이 낮아지며 빙하기가 시작됐다. 인도 대륙이 아시아 대륙과 충돌하자 빙하기는 가속됐다. 빙하기는 인류를 고난에 몰아넣었지만, 그 고난을 극복하려던 진화의 방향이 인류 모습의 상당 부분을 형성했다. 아프리카판이 분리되며 동아프리카 열곡대가 형성되자 동아프리카 지역은 열대 우림에서 사바나로 바뀌었다. 지리적 우연으로 하필 그곳에 인류의 조상이 살고 있었다. 사바나로의 전환은 인류의 조상을 나무에서 내려와 초원에 적응하며 직립 보행과 집단 협력을 강화해 생존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진화를 이끌었다. (3) 직립 보행의 선택은 인류 계통의 진화 방향이 정해지는 데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직립 보행으로 장거리 이동이 가능해졌고 자유로워진 손은 도구의 활용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인류가 사냥꾼으로 변모하며 육식의 비중을 높인 선택을 할 수 있었다. (4) 불의 이용과 화식은 충분한 에너지 공급을 통해 뇌 용량이 증가할 수 있게 함으로써 혹독한 기후변화를 행동 양식의 최적화로 극복하는 진화의 방향을 열었다. 이는 학습 능력과 사회성을 극대화함으로써 인류를 최상위 포식자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5) 인지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인류 종들을 압도하고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다. 인지 혁명을 통해 인류는 상징 언어를 사용하고 허구를 믿을 수 있게 되면서 집단학습과 협력을 극대화했고, 문화의 진화와 지식의 축적을 통해 농경을 시작하고 문명을 건설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됐다.

 

김항배
한양대학교 물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