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제국의 등장

조직화된 도시국가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주변 지역의 촌락들은 도시국가에 복속되지 않으려면 비슷한 수준으로 조직 체제를 갖추어야만 했다. 그 결과 도시국가가 형성된 지역 주변으로 다른 도시국가들이 속속 형성되면서 문명화된 지역이 점차 확장됐다. 도시국가들이 늘어나면서 도시국가 간 교류와 경쟁이 활발해졌고, 때로는 갈등이 정복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경쟁은 단순히 생존과 방어의 차원을 넘어, 최고 지배자나 지배층이 부와 명예를 넓히려는 욕망으로 더욱 격화되었다. 그 결과 여러 도시국가를 무력 또는 정치적 방식으로 통합한 하나의 중앙집권적인 권력이 등장했는데, 이것이 초기 제국이다. 문명 발생 지역 대부분에서 초기 제국의 형성이 이루어졌지만, 그 속도와 양상은 지역의 지리적 조건에 따라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모두 강 주변에 형성된 문명이지만, 지리적 조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개방된 평야에 놓인 메소포타미아는 인구 유입이 많고 외부 침입에 취약했던 반면, 사막으로 둘러싸여 고립된 이집트는 외부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에 따라 두 지역은 제국의 형성 과정, 정치 구조, 안정성 면에서 다른 양상을 보였다. 나일강 주변의 좁은 띠를 따라 형성된 이집트 문명에는 일찍부터 초기 제국 형태의 통일 왕국이 생겨났고, 내부 갈등으로 인한 왕조의 흥망성쇠는 있었지만, 비교적 안정된 통치가 오래 유지됐고 외부로의 세력 확장은 제한적이었다. 반면 메소포타미아에는 수많은 도시국가가 생겨났고, 이들을 통합한 초기 제국들도 내부 전쟁과 외부 침략으로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이러한 과정은 문화의 융합과 함께 전쟁 기술과 통치 제도의 발달을 이끌었고, 이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포괄하는 본격적인 제국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그 영향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넘어서 소아시아와 동지중해, 이란고원 등에 파급되어 이들 지역이 새로이 문명권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또한 정주농업 국가 주변의 유목민 집단에도 영향을 끼쳐 이들이 느슨한 동맹 형태의 연맹체로 조직화하면서 새로운 세력으로 떠올랐다.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강 유역의 광범위한 평야에서 발달했다. 하라파와 모헨조다로 같은 계획도시들이 형성될 정도로 높은 문명 수준을 보여주었지만, 도시 간 거리가 먼 지형적 특성 때문에 정치-경제 네트워크가 분산돼 일관된 중앙 권력을 유지하기 어려워 통합된 제국이 형성되지 못했다. 또한 외부 침입이나 기후 변화 등 외적 요인에 취약해 문명 전체가 갑작스럽게 쇠퇴한 것으로 보인다. 황허 문명은 황허강 유역의 넓은 평야와 주변 산지가 결합한 지리적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비교적 제한된 외부 간섭 덕분에 상 왕조와 주 왕조 같은 통일적 정치체제가 일찍부터 등장했고, 내부 통합을 기반으로 지속적인 왕조 국가의 발전이 가능했다. 이는 중국 문명이 초기부터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통을 갖추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중앙아메리카에서는 기원전 1500년경 올멕 문명이 출현했다. 엘 마나티, 산로렌소, 라 벤타와 같은 중심지를 바탕으로 고도의 종교 체계와 권력을 행사했으며, 거대한 석상과 제단, 계획된 도시 구조는 일정 수준의 권력 집중과 조직화된 노동 동원을 보여준다. 비록 완전한 제국 형태는 아니었지만, 이후 마야와 아즈텍 문명에 중요한 토대를 제공했다. 남아메리카 안데스 지역에서도 초기 제국적 성격을 띤 정치 체계가 나타났다. 기원전 900~200년경 차빈 문화는 종교 중심의 통합 구조를 통해 고지대를 문화적으로 연결했고, 100~700년경 모체 문명은 대규모 관개 농업과 피라미드형 건축, 군사적 상징을 통해 지역적 통합을 이끌었다. 이어 600~1000년경 등장한 와리 문명은 도시 계획과 행정 중심지를 기반으로 고도로 조직화된 통치 체계를 갖추었으며, 이는 후대 잉카 제국의 중앙집권 행정의 선구가 되었다. 안데스 문명은 고산지대라는 제약 속에서도 해안과 고원의 상호 보완적인 교류를 통해 안정적인 경제 기반을 마련했다. 해안에서는 어업과 염 생산이, 고원에서는 감자와 퀴노아 재배, 라마와 알파카 목축이 이루어졌으며, 이들 자원을 교환하는 네트워크가 대규모 관개 농업과 장거리 무역로를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통합이 정치권력 확립과 중앙집권적 통치 체계 형성의 토대가 되었다.

지리적 강점으로 인해 현재까지 이어지는 문명의 모태가 되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역사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루크에 이어 우르, 라가시, 키시 등 도시국가들이 속속 등장하며 메소포타미아 남부는 본격적인 도시국가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들 도시국가는 농경지, 수로, 자원, 교역로를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도시국가 간 전쟁과 연합, 분열이 반복되며 수백 년간 정치적 균형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지속적인 농업은 삼림의 감소와 토양 염류화, 목초지의 황폐화를 불러왔고, 이는 도시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하는 ‘농업의 역습’을 초래하였다.1 도시국가 내부에서는 계급 간 갈등과 사회 모순이 심화했고, 외부에서는 주변 지역에서 성장한 새로운 세력이 기존 중심지의 주도권을 위협했다. 이동 수단과 교역로의 발달은 도시 간 연결망을 넓히는 동시에 정복 전쟁의 범위도 확대시켰고, 이로 인해 여러 도시를 아우르는 중앙집권적 제국이 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기원전 2300년경, 사르곤이 이끄는 아카드 제국이 출현하여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통일하며 최초의 제국을 세웠다. 사르곤은 각 지역에 총독을 파견하고 직접 통치하는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였으며, 이후 등장하는 제국 통치 방식의 원형을 제시했다. 아카드 제국은 150년 정도 존속했으나, 내부 분열과 이란고원에서 내려온 구티족의 침입으로 붕괴하면서 이후 약 100년간 혼란기가 이어졌다.2 기원전 2100년경, 우르-남무가 구티족을 축출하고 메소포타미아를 재통일하여 우르 제3왕조를 세웠다. 그는 중앙집권 체제를 재정비하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완전한 성문법으로 알려진 우르-남무 법전을 반포하며 법치 행정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 왕조도 기원전 2000년경 엘람족과 서쪽에서 이주해 온 아모리인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이후 아모리인들은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여러 도시국가를 세웠으며, 그중 바빌로니아가 점차 세력을 확대해 제국으로 성장하였다. 함무라비 왕은 기원전 18세기경 메소포타미아 대부분을 통일하고,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을 제정함으로써 법과 제도의 기반 위에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1600년경, 아나톨리아에서 남하한 히타이트 제국의 무르실리 1세가 바빌로니아를 침공해 약탈하면서 구 바빌로니아 왕국은 붕괴했다. 이후 메소포타미아는 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 새로운 강대국들이 차례로 패권을 다투는 무대가 됐다. 이 지역의 끊임없는 흥망성쇠는 유목민과 농경민의 충돌, 기후 변화, 교역로 통제 등 복합적인 요인이 얽힌 결과였다. 다양한 민족과 권력들이 충돌하고 융합한 메소포타미아는 이후 제국의 통치 방식, 법제, 관료제의 기초를 제공하며, 문명의 역사에 오랜 유산을 남겼다.


본격 제국의 등장

본격적인 제국은 초기 제국을 넘어 인구, 영토, 정치적 복합성에서 한 단계 확장된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였다. 제국의 등장에는 초기 제국을 경영하며 축적된 통치제도와 교역로 등 사회적 기반에 더해서 말과 바퀴의 사용이 가져온 교통수단의 혁신이 촉매가 됐다. 말은 기원전 4,000년경 유라시아(현재의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의 초원 지대에서 가축화되어, 처음에는 고기와 우유를 얻는 용도로 쓰였으나 점차 운송과 전쟁 수단으로도 활용됐다. 바퀴는 기원전 3,000년경 수메르에서 발명되었고, 기원전 2,000년 무렵 유라시아 초원의 인도-유럽계 유목민이 살 바퀴를 개발해 전차를 가볍고 빠르게 만들었다.3 말과 살 바퀴의 조합이라는 기술 혁신은 이들의 이동을 따라 아나톨리아, 유럽, 인도 대륙으로 확산됐다. 이를 바탕으로 도입된 전차와 기병은 전쟁 양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기동력의 향상은 유목민에게 농경 사회를 압박하고 정복할 힘을 주었고, 농경 제국에는 광활한 영토를 연결하고 통치하는 수단을 제공했다.

이런 변화 속에서 히타이트 제국은 아나톨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기원전 17세기에 본격적인 제국 체제를 갖췄으며, 전차 전술을 활용한 군사력으로 패권국으로 부상했다. 기원전 13세기경 이집트 신왕조와 벌인 카데시 전투는 전차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충돌로 유명하다. 아시리아 제국은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기원전 14세기경부터 세력을 확대하여, 이후 철기를 결합한 기동 전술과 중앙집권적인 행정 체계로 서아시아 전역을 통치하는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했다. 미탄니 제국은 히타이트와 아시리아 사이에서 성장한 제국으로, 인도-유럽계 전차병의 활약과 말을 활용한 기병 전술로 한때 메소포타미아 북부와 시리아 지역을 지배했으나, 히타이트와 아시리아의 부상으로 점차 쇠퇴했다. 이집트 신왕조는 기원전 16세기부터 11세기까지 이어졌으며, 말과 전차를 본격적으로 도입하여 군사력을 강화해서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며 이집트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경험했다.

말과 바퀴의 결합은 단순한 군사 혁신을 넘어, 유라시아 전역의 문명권을 하나의 거대한 상호작용 네트워크로 연결하며 ‘제국의 시대’를 열었다. 말과 바퀴를 통해 서로 다른 문명권이 연결됐고 제국의 확장이 가능해졌으며, 유목 사회와 정주농업 사회 간의 교역과 경쟁은 제국 형성과 문명 발전을 이끄는 핵심 동력이 되었다.


철기 문명

기원전 1200년 전후, 근동 지역과 지중해 동부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청동기 문명 제국들이 일제히 붕괴하는 대전환기가 찾아왔다. 소아시아의 히타이트 제국, 그리스의 미케네 문명, 이집트 신왕조 등이 일제히 무너지거나 약화된 것이다. 이 시기의 붕괴는 기후 변화로 인한 기근과 그것이 촉발한 것으로 보이는 외부 민족의 침입 등이 겹치면서 일어났다고 추정된다. 하지만 이는 고대 문명 세계에서 드문 동시다발적이고 구조적인 재앙이었으며, 단순한 침략이나 자연재해가 아니라 교역망, 군사력, 자원체계, 정치체제 등 복합 시스템이 일제히 붕괴한 결과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 붕괴 이후에 몇백 년간 문화적 공백기가 있다가, 철기 사용의 확산과 함께 새로운 제국들(아시리아, 페르시아, 고전기 그리스 등)이 등장하며, 문명사적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지게 됐다. 청동기 문명의 붕괴는 재앙이었지만, 그 폐허 위에서 철기라는 새로운 기술을 바탕으로 한 제국과 사회질서가 태어났다. 철기의 선구자는 히타이트 제국으로 기원전 1,500년 이전부터 철기를 사용했다. 이후 기원전 1,200년 경에 히타이트가 멸망하면서 철기 기술이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며 철기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청동기에 비해 기술적으로는 어려웠으나 적은 비용으로 대량 생산을 할 수 있어서 무기와 농기구에 혁신을 가져왔다. 철기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사회는 군사력과 농업 생산력이 향상되며 제국으로 올라섰고, 그렇지 못한 사회는 흡수되거나 소멸했다. 청동기 문명에서 철기 문명으로의 이행은 기술 혁신을 넘어, 군사력의 팽창, 행정 체계의 정비, 농업 생산성의 향상, 계층 구조의 재편 등 사회 전반의 패러다임 전환을 이끌어낸 문명의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이후 세계사의 주도권은 이 철기 문명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한 제국들인 아시리아, 페르시아, 로마, 마우리아, 등에게 넘어가게 됐다.



상업 문명

문명화된 지역이 지중해 동부 해안으로 확장되면서 청동기 시대 말기에 레반트와 소아시아 해안에서 그리스 에게해 연안으로 이어지는 지역에는 상업을 기반으로 하는 우가리트, 페니키아, 미노아와 미케네 문명이 생겨나 세계사 최초의 국제 무역 체계를 형성했다. 이들의 교역망을 통해 구리, 주석, 목재, 향신료 등의 상품뿐만 아니라 문자, 예술, 종교 등의 문화도 교류됐다. 하지만 이들도 청동기 문명 붕괴를 피해 가지 못하고, 기원전 1200년 무렵의 혼란 속에 대부분 붕괴했다. 그러나 일부 해양 중심 문명, 특히 페니키아인은 살아남아 철기 시대의 상업 문명을 다시 일으키고 지중해 세계의 중심 세력으로 부상했다. 이는 이후 그리스, 로마, 카르타고 문명으로 이어지는 지중해 중심 세계 질서의 기반을 형성했다. 특히 페니키아 문자는 서양 알파벳의 기원이 되어 후대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5



인도, 중국, 아메리카의 제국

인도 아대륙에서는 최초의 문명인 인더스 문명이 기원전 1900년경부터 점차 쇠퇴하여 제국의 등장까지 이어지지 못했지만, 기원전 1,500년경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한 인도-유럽계 유목민이 진입하여 기존의 하라파 문명의 잔존 세력과 뒤섞이며 새로운 문명을 열었다. 이 시기는 리그베다 등 베다 문헌의 형성과 전승에 기반해 ‘베다 시대’로 불리며, 족장 중심의 부족 공동체가 점차 왕국으로 발전했고, 카스트 제도의 기반이 이때 형성되었다. 기원전 600년경부터는 북인도 전역에 십육대국이라 불리는 여러 왕국과 공화국이 난립하였다. 그중 갠지스 중류의 마가다 왕국이 가장 강력하게 성장하여 주변 국가들을 차례로 병합하고 정치적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이 시기 철기의 보급과 농업 생산력의 향상, 상업과 도시의 발달은 바이샤 계층을 성장시키고 사회 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브라만교 중심의 기존 종교 질서에 대한 비판 속에서 불교와 자이나교 같은 새로운 사상도 등장하였다. 기원전 4세기 말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마가다의 난다 왕조를 무너뜨리고 인도 최초의 광역 제국인 마우리아 제국을 수립했다. 마우리아 제국은 갠지스와 인더스 유역은 물론 데칸 북부까지 아우르며 본격적인 중앙집권 체제를 갖춘 고대 인도 최초의 제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아소카 왕은 신흥 종교였던 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인도 고대 제국사에서 문화적 황금기를 만들었다. 이러한 제국의 성립은 유목민의 정주농업 지역 진출, 정착과 농업화, 경제력의 확대, 사회 구조의 변화, 그리고 정치적 통합이라는 역사적 연속성 속에서 이루어진 결과였다.

황허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문명보다 훨씬 늦은 기원전 1,600년경 상 왕조부터 본격적인 국가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지만, 불과 500년이 지나서 주 왕조 시기에는 이미 광역 통치 체제를 갖추었다. 황허 문명에서 다른 문명보다 빠르게 제국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요인이 맞물린 결과로 보인다. 먼저 황허 유역은 지리적으로 중심지가 응집되어 있어 정치적 통합이 쉬웠고, 후발 문명으로서 앞선 지역들의 문명 요소를 간접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이점을 가졌다. 또한 은 왕조의 조상 숭배와 제례 중심의 종교 질서가 주 왕조에서 ‘천명天命’ 사상으로 발전하며 정치 권위와 결합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가 조기에 정립됐다.6 주 왕조는 기원전 1,050년경 상 왕조를 멸망시키고, 종법제와 봉건제를 결합한 독특한 통치 방식을 통해 황허 중원 일대를 포함한 광범위한 지역을 효과적으로 다스렸다. 이 과정에서 주변 부족 및 문화 집단과의 경쟁과 흡수 과정은 통합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마지막으로, 황허 평야의 높은 농업 생산력은 인구 밀집과 잉여 자원 축적을 가능하게 하여 국가 조직의 발전을 뒷받침했다. 이러한 정치, 사회, 지리, 경제적 조건이 결합하여, 황허 문명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문명의 발생 자체가 늦기도 했지만, 제국 형성 과정 또한 기술적, 생태적, 지리적 제약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제국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다. 유라시아는 동서로 넓게 펼쳐져 작물과 기술의 확산이 쉬웠지만, 아메리카는 남북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어 농업과 문명의 전파가 제한됐다. 또한 말, 소, 양 같은 가축이 부재해 운송과 농업, 군사적 기동력이 부족했고, 바퀴를 알고 있었음에도 실용화에 이르지 못했다. 농업 작물로는 옥수수와 감자 등이 있었지만, 밀이나 벼처럼 대규모 잉여 생산과 도시 집중을 뒷받침하기엔 농업 기술의 축적이 부족했다. 금속 기술도 장신구 수준에 머물러, 도구와 무기 개발이 제한되었고, 도시 간 교류와 경쟁도 유라시아보다 훨씬 약했다.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아메리카에서는 기원후 15세기 무렵에야 아스텍과 잉카 같은 제국이 출현했다. 기술적 열세와 지리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아즈텍과 잉카는 뛰어난 조직력, 농업 혁신, 행정 능력, 종교 이데올로기, 군사력 등을 결합하여 ‘제국적 질서’를 창출해냈다. 아즈텍 제국은 테노치티틀란이라는 섬 도시를 중심으로 치나암파 농업을 발달시켜 식량 문제를 해결했고, 주변 부족을 정복해 조공 체제를 운영하며 통합을 이뤄냈다. 잉카 제국은 안데스 고산지대의 험준한 지형 속에서 계단식 농업과 정교한 도로망을 구축했고, 노동력을 조직하는 미타 제도와 회계 관리 체계를 통해 강력한 중앙 통제를 가능케 했다.7 두 제국 모두 종교를 지배 이념으로 적극 활용했다. 잉카는 황제를 태양신의 자손으로 신격화했고, 아즈텍은 인신 공양을 통해 전쟁과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또한 고립된 지리 조건은 외부 침입에는 방어적 이점을 주었고, 내부적으로는 체계적인 통치 체제를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제국들이 제한된 조건에서도 고도로 조직화된 정치 체제, 도시 문명, 사상 체계를 발전시켰음은 인류의 창조성과 적응력을 보여주는 증거이자, 문명 발달의 다양한 경로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이들 제국 역시 내부적인 모순이 축적되고 있었지만, 소멸적 한계에 도달하기 전에 문명적으로 월등히 앞선 유럽인의 침략으로 멸망하는 비극을 맞았다.8



축의 시대, 보편 종교와 사상의 출현

제국은 단일 민족 중심의 국가에서 벗어나 여러 지역과 민족을 포괄함으로써 다양성의 문제와 통합의 과제를 동시에 안게 됐다. 그에 따라 제국의 구성원이 감당해야 할 사회적 부담도 제국의 규모만큼 커졌다. 규모가 커질수록 부와 권력의 불평등, 정복 전쟁이나 기근 등으로 겪어야 하는 고통은 심화했고, 그로 인한 사회 불안과 구제의 필요성도 증가했다. 이는 지역과 민족을 초월하는 보편적 윤리와 구원의 사상을 요구하게 됐고, 그 결과 기원전 500년 전후에 동서양의 여러 문명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보편 종교와 철학적 성찰이 등장하게 됐다. 그리스에서는 존재와 이성, 윤리를 탐구하는 철학이 시작됐고, 인도에서는 불교와 자이나교가 고통의 근원을 성찰하고 해탈의 길을 모색했으며, 중국에서는 공자와 노자를 비롯한 제자백가가 사회질서와 인간의 도리를 둘러싼 사상적 논쟁을 펼쳤다.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였던 유대교는 예언자 전통과 계시 중심의 유일신 신앙이 정립되어 이후 기독교와 이슬람교라는 보편 종교의 사상적 기반이 됐고, 페르시아에서는 선악의 이원론과 윤리적 선택을 강조하는 조로아스터교가 발전해 이후 사산 왕조에서 공식 종교로 채택됐다. 이러한 정신적 전환이 서로 교류가 거의 없던 문명권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는 사실은 인류가 일정한 시기에 보편적 정신 발전의 경로를 공유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이 같은 공통된 흐름에 주목해 이 시기를 ‘축의 시대Axial Age’라고 명명했다.9 제국의 등장은 인간을 지역적 존재에서 보편 윤리의 주체로 발전시키는 토대를 마련했고, 그런 의미에서 제국은 단순한 군사적·행정적 조직을 넘어 인류의 인식 세계를 확장시키는 틀이 되었다.

축의 시대에 싹튼 보편 윤리와 구원의 사상은 이후 보편 종교로 조직화되고 제도화되면서, 인류 역사에서 정치적 사회적 주체로서의 위치를 확보했다. 초기에는 인간의 내면과 구원, 공동체 윤리를 중심으로 했던 사상들이 점차 경전 체계, 교단 조직, 의례 제도를 갖추며 신앙의 외적 구조를 발전시켰고, 각 지역의 왕권이나 제국의 통치 이념과 결합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불교는 아소카 대왕의 지원을 받아 인도와 동남아시아에 전파되었고, 유대교는 바빌론 유수 이후 율법 중심의 공동체 종교로 정비됐으며, 그 흐름 위에서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각각 로마 제국과 이슬람 제국의 국교로 자리 잡았다. 조로아스터교 역시 사산 왕조의 국교로 제도화되었고, 유교는 한나라 이후 국가 통치의 이념으로 정착되었다. 축의 시대의 사상은 이후 세계 여러 문명에서 종교와 정치가 결합하는 핵심 기제가 되었고, 문명 역사의 주요 동인으로서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대제국의 시대

축의 시대가 지나 기원 전후에 유라시아 대륙은 대제국의 시대로 전환되며 새로운 정치 질서 체제가 구축됐다. 지중해에는 그리스 문명을 흡수한 로마 제국이, 이란고원에는 페르시아의 뒤를 이은 파르티아 제국이, 인도에는 마우리아 제국의 유산을 계승한 쿠샨 제국이, 중국에서는 진 제국의 통일을 계승한 한 제국이 등장했다. 이들 정주농업 제국 주변 초원 지대에는 유목 민족들이 세력을 키워 이들과 교류하고 때로는 경쟁했으며, 그중 일부는 한 나라 북방의 흉노 제국처럼 유목 제국으로까지 발전했다. 이후 중국의 북방에는 선비, 돌궐 등 다양한 유목 세력들이 흉노의 뒤를 이었으며, 로마의 북방에는 게르만인들이 진출하여 로마의 변경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걸쳐 대제국이 거의 동시에 등장한 것은 여러 역사적 조건이 성숙한 결과였다. 철기 도구의 확산에 의한 농업 생산력의 향상으로 인구와 부가 늘었고, 이를 바탕으로 장거리 도로망과 상업망의 구축, 관료제와 조세 제도의 정비, 문자사용의 확산 등 광역 통치를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행정적 기반을 갖추게 했다. 동시에 축의 시대를 통해 형성된 유교, 불교, 헬레니즘 철학 같은 보편 종교와 사상이 제국 통치의 이념으로 자리를 잡으며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통합할 수 있는 정신적 기반을 제공했다. 여기에 유목민의 위협은 방어를 위한 정주 사회의 통합을 자극했고, 비단길과 인도양 해상로 같은 동서 교역망의 확장으로 교역로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정치적 질서가 필요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제국은 단순한 정복 국가가 아니라, 다양한 지역과 문화를 조직하고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효과적인 체제로 등장한 것이다.

기원 전후 유라시아 전역에 등장한 대제국들은 수 세기 동안 문명의 질서를 유지했지만, 3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 공통된 역사적 한계를 드러내며 해체되기 시작했다. 과도한 영토 확장은 행정과 군사 체계의 부담을 키워 중앙 권력을 약화시켰고, 지방 세력과 귀족층이 자율화를 강화하면서 내부 결속이 흔들렸다. 로마 제국은 정치 혼란과 경제 위기, 게르만족의 침입 속에 서방이 5세기에 붕괴했고, 동방 역시 점차 축소되었다. 한 제국은 외척과 호족의 분열로 3세기에 멸망하여 삼국 시대와 위진남북조의 분열기로 접어들었으며, 파르티아 제국은 귀족 세력의 분열과 외적 압박 속에 3세기 초 사산 왕조에 대체되었다. 쿠샨 제국도 북방 유목 세력과 인도 내 정복 왕조들의 등장으로 무너졌다. 흉노나 게르만족과 같은 외부 침입 세력의 압박, 장기 전쟁이 초래한 재정 파탄, 자영농 몰락과 빈부 격차 심화는 조세 기반과 사회 구조를 붕괴시켰다. 무엇보다 제국을 정당화하던 이념과 보편 질서의 이상이 권력 투쟁과 부패 속에 퇴색하자 백성들의 충성은 제국이 아닌 지역과 개별 세력으로 향했다. 이로써 대제국의 붕괴는 단순한 정치 체제의 종말이 아니라 문명을 통합 유지하던 보편 질서의 해체였으며, 제국이 복잡한 세계를 얼마나 지속 가능하게 조직할 수 있는가에 대한 역사적 실험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었다.

 

이런 분열과 불안의 시기를 지나서 7세기 초, 아라비아반도에서 광범위한 상업망을 가지고 있던 이슬람 세력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로마 제국 사이의 권력 공백을 빠르게 파고들었다. 무함마드의 종교적 가르침을 바탕으로 단결한 아랍 세력은 급속히 팽창하여, 불과 수십 년 만에 사산 제국을 멸망시키고 동로마의 영토를 잠식하며, 중동,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에 걸친 사라센 제국(우마이야 왕조)을 건설했다. 사라센 제국은 상업 문명과 종교, 언어, 법, 제도에 기반한 새로운 통합 질서를 제시하면서, 대제국들이 무너진 뒤의 세계 질서의 공백을 메운 새로운 문명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한 제국의 멸망 이후의 혼란기에 북방 초원 지대에서 남하한 유목민족인 선비족이 세력을 키워 정주농업 지역에 정착했고, 이들이 패권을 차지함으로써 정주농업 문화와 유목 문화가 융합된 수와 당 제국이 성립했다. 수와 당은 다민족, 다문화적 기반 위에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와 광역 교역망을 재건해 동아시아 대제국 질서를 부활시켰다. 사라센 제국과 수, 당 제국은 변방 세력이 주도한 정치 재편과 문화 융합이 새로운 통합 질서를 창출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였다. 사라센 제국(압바스 왕조)과 당 제국은 모두 동서양의 경계를 넘어 세력 확장을 시도했다. 751년 탈라스 전투는 중앙아시아에서 두 제국이 맞붙은 최초의 본격적인 동서 문명 충돌이었다. 이 전투의 패배로 당은 중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상실했고, 이슬람 세력은 이 지역의 문화적, 종교적 이슬람화를 본격화했다. 또한 포로로 잡힌 중국 기술자들로부터 종이 제조법이 이슬람 세계로 전해졌다는 전승은 이후 지식과 문명이 동에서 서로 확산되는 흐름을 촉발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전해진다.10 탈라스 전투는 단순한 국지전이 아니라, 무력 충돌을 통해 동서 문명의 경계와 세계사의 흐름을 재편한 전환점이었다.

 

 

김항배
test EN Description:
EN Position:
EN Display Name:
한양대학교 물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