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YF(사이프)

 

 

이 글은 학술 논문을 대중용 글로 다듬은 것으로, 자세한 출처들은 다음의 논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Jaehwan Hyun. “Science as a Family Affair: Won Pyong-Oh and the Transwar Origins of South Korean Ornithology.”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29, no. 1 (2024): 5-55. [1]

 

1965년 여름, 북한의 조류학자 원홍구1888~1970는 야마시나 조류 연구소山階鳥類研究所의 소장이었던 야마시나 요시마로山階芳麿, 1900~1989에게 연락했다. 평양 인근에서 북방쇠찌르레기Agropsar sturninus를 발견했는데, 그 새의 다리에 “일본 농림성農林省, Japan C7655”이 새겨진 가락지가 달려 있었다는 것이다. 야마시나는 원홍구에게 한국의 조류학자 원병오1929~2020의 연구팀이 서울에서 가락지를 달아 날려보낸 새라고 답장했다. 성씨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이 두 한국인 조류학자들은 한국전쟁으로 남북으로 서로 갈라져 십수 년 간 소식을 알지 못한 채 지내던 부자 관계였다. 아들이 남쪽에서 날린 새의 가락지를 북쪽의 아버지가 발견하며 서로의 생사를 확인했다는 일화는 냉전의 서슬 퍼런 장벽을 넘어선 과학적 교류와 분단이라는 정치적 비극을 보여주는 극적인 이야기로 널리 알려졌으며, 1990년대에 들어서는 소설과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극적인 일화와 관련해 종종 잊혀지는 두 가지 사실이 있다. 먼저 남쪽으로 온 원홍구의 아들은 원병오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특히 큰형 원병휘1911~1995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활약한 동물학자로 당시 동국대학교 생물학과 교수로 근무 중이었다. 다른 하나는 원병오가 쇠찌르레기에 가락지를 달았던 것은 그가 당시 미군의 후원을 받아 아시아에서 철새가 전염병 전파에 미치는 역할을 규명하는 이주성 동물 병리 조사Migratory Animal Pathological Survey, MAPS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미군의 후원을 받는 연구 프로젝트의 일원이던 원병오는 일본 농림성이라고 적힌 가락지 대신 MAPS의 가락지를 달았어야 했다.

그렇다면 쇠찌르레기로 이어진 원홍구·병오 부자 간의 이야기에 원병휘가 들어설 자리는 없을까? 예를 들어, 원홍구는 첫째 아들의 생사에는 관심이 없었을까? 아니면 막내 동생 원병오보다 일찍부터 과학자로 활약하던 원병휘가 원병오의 조류학 연구에 끼친 영향을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 이와 더불어 왜 원병오는 MAPS에 참여하면서도 일본 농림성 가락지를 달았고, 원홍구는 쇠찌르레기에 대한 보고를 수많은 일본 조류학자들 가운데 하필이면 야마시나 요시마로에게 했을까?

이 질문들은 과학사학자인 필자가 원홍구·병오 부자가 새로 이어지게 된 일화를 알게된 후 고민하게 된 질문들이다. 필자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면서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까지 이어진 원씨 일가의 가업家業으로서의 과학 활동과 이들의 일본 조수鳥獸 연구자들과의 기나긴 인연에 대한 역사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원병오 본인은 한국 조류학사를 회고하면서 1962년 7월부터 1년 간의 미국 예일 대학에서의 박사후 연수 경험을 미국의 과학 원조를 자신의 조류학 연구, 나아가 국내에서의 조류학 발전에 중요한 계기로 서술한다. [2] 하지만 이 글에서는 원병오가 국제적인 조류학자로 성장하고, 부친 원홍구와 쇠찌르레기를 통해 다시 간접적으로나마 이어지는 기회를 맞이한 데에는 원씨 일가의 가업으로서의 과학 전통과 일제 강점기부터 이어진 원씨 일가와 일본 조수 연구자들의 인적 관계 또한 중요하게 작용했음을 보여주려 한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조수鳥獸 연구라는 표현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영미 과학계에서는 19세기 중반에 조류학ornithology이 전문 분야로 출현했지만, 일본에서는 1912년이 되어서야 일본조학회日本鳥学会가 처음 설립되었다. 또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조류학 연구자들은 새뿐만 아니라 포유류를 비롯한 다른 동물들을 채집하고 분류하는 또한 병행하며 이를 조수 연구라고 불렀다. 한국에서도 조류와 포유류를 함께 연구하는 관행은 1950년대까지 이어졌고, 원병휘나 원병오도 그러했다. 원씨 일가의 연구나 연구 네트워크 또한 이와 같은 조수 연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이 글에서는 반드시 조류학 연구로 한정되지 않는 경우에는 조수 연구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원홍구, 식민지 조선의 유일한 조선인 조류 전문가가 되다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의 조류 연구는 사실상 일본 과학자들의 독무대였다. 1930년대 초반에 이르면 이미 일본과 동아시아의 조수 연구로 일본 조류학 및 동물학 분야의 권위자로 활약하던 구로다 나가미치黒田長禮, 1889~1978와 그의 현지 협력자인 경성제국대학 예과의 동물학 교수 모리 다메조森爲三, 1884~1962 뿐만 아니라 당시 야심차게 조류학 연구에 뛰어들었던 황족 출신의 야마시나 요시마로 등이 조선산 조류에 관한 400종에 가까운 목록을 완성한 뒤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인이 새롭게 이 분야에 뛰어들기가 쉽지 않았음에도 이에 도전한 인물이 바로 당시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의 박물 교사였던 원홍구였다.

원홍구가 조류학계에 발을 들일 수 있었던 것은 일본 학자들이 구축해 놓은 네트워크에 합류하면서부터이다. 1926년에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교육회가 박물 교사들을 대상으로 주최한 백두산 답사에 참여한 원홍구는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활동하던 생물학자들 가운데 가장 저명했던 모리 다메조의 눈에 띄었다. 그는 답사에서 자신이 채집한 희귀한 딱따구리 표본들을 모리에게 제공하며 신뢰를 쌓았고, 이를 계기로 일본조학회에도 이름을 올리고 구로다와도 직접 교류하기 시작했다.

조류에 관한 분류학적 연구나 신종 혹은 신아종 발견을 위해서는 이미 확립된 조류 표본 목록을 확인하고, 새로이 채집한 표본을 기수집한 표본들과 대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원홍구는 다른 조선인 조수 연구자들과 달리 모리와의 인맥 덕분에 모리 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조류 표본뿐만 아니라 시모코리야마 세이치下郡山誠一, 1883~??가 이왕가 박물관에 소장한 조선산 조류 표본에 접근할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조선인 가운데 유일하게 조류 연구를 본격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조류 연구에서 식민지 과학의 위계는 분명했다. 일본의 조류학자들은 원홍구의 보고를 종종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1948년에 출판한 『한국의 새 The Birds of Korea』에서 미국의 조류학자 오스틴Oliver L. Austin, 1903~1988은 그때까지 이루어진 한국의 조류에 대한 연구들을 정리하며 일본 학자들이 “원홍구의 기록은 야마시나, 구로다, 모리처럼 반박할 수 없는 [일본인] 권위자에 의해 검증되지 않는 한 믿지 않았다”고 적었다. [3] 원홍구의 연구가 순수한 과학적 탐구보다는 “애국주의적 야망”과 같은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기 때문에 이를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일본인들이 검증해야 한다는 식민주의적 시선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차별적 시선 속에서 원홍구는 자신만의 생존 전략을 찾았다. 일본 학자들이 한반도에서 새로운 종이나 아종을 발견하는 데 몰두할 때, 그는 새들의 조선식 이름을 지방명으로 정리하고, 먹이나 번식 습성 같은 고유한 생태를 깊이 연구하는 등 틈새를 파고 들었다. 당시 일본 학자들이 채택한 단기적인 방문 조사나 전문 채집인으로 하여금 대리 조사를 시키는 방식으로는 알 수 없는, 식민지 조선에서 살고 있는 조선인만이 할 수 있는 연구였다. 이 전략을 통해 식민지 과학의 위계에도 불구하고 원홍구는 일본 조류학계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혔으며, 나아가 식민지 조선의 유일한 조선인 조류학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원병휘, 가업으로서 과학을 잇다

원홍구의 연구는 결코 혼자만의 작업이 아니었다. 그의 아들들은 원홍구의 조류학 연구의 훌륭한 조수로 활약했고, 특히 장남 병휘는 원홍구의 가장 충실한 연구 조수였다. 원병휘는 1920년대 후반부터 부친의 모든 채집 여행에 동행했다. 원홍구가 1932년에 발표한 한국산 조류 목록에 포함된 표본 185종 중 무려 75종이 어린 원병휘가 직접 채집한 것이었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자면 아버지가 연구 책임자를, 아들이 현장 조수이자 채집자의 역할을 맡았는데, 이것이 바로 원씨 가문의 ‘과학적 분업’의 시작이었다.

부친이 근무하던 송도고보를 거쳐 숭실전문학교 농과를 졸업한 원병휘는 1935년에 아버지와 절친했던 모리 다메조의 추천으로 만주국의 데이카톤 페스트 조사소鄭家屯ペスト調査所에 연구원으로 취직했다. 그의 주된 임무는 페스트를 전파하는 쥐와 같은 설치류의 생태를 연구하는 것이었지만, 원씨 일가의 가업은 그곳에서도 이어졌다. 원병휘는 만주에 서식하는 조류와 포유류 표본을 꾸준히 채집했고, 부친이 그랬던 것처럼 구로다와 교토대학의 도쿠다 미토시徳田御稔, 1906~1975를 포함한 저명한 동물학자들에게 표본을 보내고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또, 만주생물학회満州生物學會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논문을 꾸준히 기고하면서 일본의 만주산 조수 연구의 인맥을 꾸준히 넓혀갔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원병휘가 둘째 동생 원병수를 만주로 불러들여 채집 조수로 삼아 공동 연구를 진행했다는 사실이다. 1939년 12월호 『만주생물학회회보満州生物學會會報』에 원병휘는 원병수와 공저로 근무지 주변에서 약 2년간 채집한 조류 수십 종을 기재하는 조류 목록을 출판했다. [4] 식민지 조선에서 아버지가 장남을 파트너로 삼아 채집을 진행하고 조선산 조류 목록을 출판했던 것처럼, 장남은 다시 동생을 연구 조수로 삼아 만주산 조류 목록을 작성해 출간했다. 이처럼 원씨 가문에서 과학은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형에게서 동생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가업이었다. 그리고 막내 원병오가 이 전통의 새로운 후계자가 될 것이었다.


분단과 전쟁 가운데 엇갈린 가족사

1945년 해방과 함께 원씨 가족의 운명은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해방 당시 원씨 일가는 평안남도에 거주하고 있었다. 원홍구는 일제강점기 동안 창씨개명을 하고 총독부가 관할하는 덕천농업학교에서 근무한 것이 친일 행적으로 여겨져 잠시간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과학자가 부족했던 북한에서 평양 김일성종합대학 생물학과 교수가 되어 곧 해방 후 생물학계의 권위자로 자리를 잡는데 성공했다. 만주에서 귀국한 원병휘 역시 만주에서 수집한 자료들을 모두 잃어버리는 불운을 겪었지만 평양의 전염병 연구소에서 조수 연구자로서의 경력을 다시금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1947년에 막내 원병오도 김일성대학 농학부에 입학하며 과학자의 꿈을 키워갔다. 한편, 북한의 질서에 순응하기로 한 원병오·병휘와 달리 만주에서 큰형의 연구를 돕던 병수는 일찍이 월남했다가 1963년 2월에 사망했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원씨 형제의 북에서의 안정된 삶을 포기하기를 강요했다. 특히 원병휘에게는 연구자로서 크나큰 시련의 시기였다. 만주에서의 귀국 때와 마찬가지로 해방 이후 그간 북한에서 수집했던 모든 연구 자료를 모두 잃어버렸던 것이다. 1950년 10월에 김일성대학을 졸업한지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던 원병오는 북한군에 징집되었으나 원병휘와 함께 평양에 남았으며,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하자 두 형제는 월남을 택했다. 1950년 12월 4일에 중공군이 평양을 침공하자 두 형제는 철수하는 유엔군을 좇아 부산행을 택했으며, 그 결과 부모와 영원히 이별해야 했다.

전쟁 후 남한에서 두 형제의 삶은 고단했다. 원병휘는 배화여고 등에서 생물 교사로 근무하다 마흔다섯이 되는 1956년이 되어서야 경희대학교의 전신인 신흥대학교의 생물학과 교수가 되어 연구를 재개할 수 있었다. 같은 해 군 복무를 마친 원병오는 스물일곱의 늦은 나이에 맏형이 교수로 있는 신흥대학 생물학과의 3학년으로 편입해 학업을 재개했다. 부친 원홍구가 북한 과학원의 핵심 인사로 승승장구하고, 일제강점기 시절 본인이 꿈꾸던 체계적인 한반도 조류 분포 조사를 북한 정부의 후원 하에 본격화하던 시점에 두 아들은 남한에서 맨손으로 모든 것을 다시 쌓아 올려야 했다.


일본 조수학계와의 보이지 않는 다리

두 형제가 남한에서 학문적 기반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놀랍게도 식민지 시절부터 이어진 원씨 일가와 일본 학자들과의 인맥이었다. 특히 큰형 원병휘가 부친 원홍구와 모리 덕분에 인연을 맺게되어 만주산 설치류 연구를 함께 진행했던 구로다 나가미치와 도쿠다 미토시 등은 전후 재편된 일본의 조류학계와 두 형제를 연결해주는 보이지 않는 다리가 되어주었다.

1958년 6월에 원병휘는 『한국산 포유류 분포 목록』이라는 중요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 논문의 서문을 써준 과학자가 바로 당시 일본동물학회 회장으로 재임하던 구로다 나가미치였다. 이 논문에서 원병휘는 자신의 논문을 지도해 준 구로다와 도쿠다에게 감사를 표했다. 흥미로운 점은 불과 석 달 뒤 동생 원병오가 당시 근무 중이던 임업시험장의 동료 우한정과 공동 출판한 『한국산 조수 분포 목록』에도 구로다가 집필한 동일한 서문이 실렸다는 점이다. 원병오 역시 구로다와 도쿠다에게 감사를 표했다. 원병오가 출판한 목록에 실린 포유류 부분은 사실상 맏형 원병휘의 연구를 보완한 것이었고, 원병휘는 자신의 『한국산 포유류 분포 목록』에서 조교 활동을 해 준 막내 동생 원병오에게 감사를 전했다.

여기서 필자는 가업으로서의 과학이라는 원씨 일가의 전통이 1950년대 한국에서도 원병휘와 원병오 사이에서 이어졌음을 확인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원병오가 우한정과 함께 쓴 『한국산 조수 분포 목록』에서 목록화에 사용된 표본은 임업시험장뿐만 아니라 맏형 원병휘가 근무했던 배화여고 및 신흥대학에 보관되어 있다고 밝혔다. 이 조수 표본들은 원병휘의 숭실전문학교 농과 선배 김헌규1910~1987가 1956년에 설립한 한국응용동물학회가 설악산 및 제주도 등에서 진행한 공동 학술 조사에 참여하며 채집한 것들이었고, 이 학술 조사들에서 원병오는 맏형 원병휘의 파트너로 참여했다.

부친과 맏형이 식민지 조선에서, 맏형과 둘째형이 만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1950년대 한국에서 맏형은 자신의 학문적 성과와 인맥이라는 자산을 동생과 공유했고, 막내 동생은 형의 채집 활동을 보조하며 본인의 학문적 경력을 시작했다. 사실 원병오가 훗날 일본 홋카이도 대학에서 구제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던 데에도 원병휘와 만주 시절부터 긴밀히 협력하던 도쿠다 박사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그가 조류학자로서의 경력을 밟아가는 과정은 부친과 맏형이 수십 년에 걸쳐 닦아놓은 길과 인적 관계들 덕분에 훨씬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동생 원병오가 미국의 지원 가운데 국제적인 조류학자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식민지 시기와 만주 시절부터 맏형 원병휘가 일본 조수 연구자들과 쌓아 올린 인적 자산이 중요한 발판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원병오가 일본 농림성 가락지를 쓰게된 까닭

1960년은 원병오의 학문적 경력에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도쿄 야마시나 조류연구소에서 개최된 국제조류보호회의International Council of Bird Preservation, ICBP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원병오는 회고에서 미국의 과학한림원 산하 태평양과학위원회의 의장인 해럴드 쿨리지Harold J. Coolidge Jr., 1904~1985가 참가를 요청했다고 밝혔지만, [5] 실제로 그를 회의에 초청한 것은 야마시나 조류연구소 소장 야마시나였다. 또 원병오는 이 일본 방문 기회를 활용해 도쿠다의 주선으로 홋카이도대학 농학부에서 구제박사로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이 회의에는 미군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민간인 조류학자 엘리엇 맥클루어H. Elliott McClure, 1910~1988가 참여했다. 맥클루어는 야마시나와 구로다 나가미치의 아들이자 야마시나 연구소에서 재직 중이던 구로다 나가히사黒田長久, 1916~2009와 함께 1963년부터 미 육군의 지원 하에 철새의 이동과 일본 뇌염 등의 질병의 전파 관계를 규명하는 MAPS에 참여했고, 이후 MAPS의 연구 책임자로 활동했다. 야마시나와 구로다 등은 원병오를 한국 측 연구원으로 추천했고, 원병오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함으로써 남한 전역에서 십수만 마리의 새에 가락지를 부착하는 대규모 연구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야마시나 조류 연구소는 이미 일본 농림성의 후원을 받아 일본 내 조류 표지(새 가락지) 방조 사업을 진행해 오던 상황이었다. 1963년부터 원병오와 한국 연구팀은 야마시나 조류 연구소에서 구로다 나가히사로부터 새 가락지 조사에 관한 교육 연수를 받았다. 아직 MAPS의 공식 가락지가 본격적으로 생산되지 않던 1963년도에 원병오 연구팀은 야마시나 조류 연구소의 일본 농림성 가락지를 조사에 사용했다. 그 해 6월 서울의 임업시험장에서 이 일본 농림성 가락지를 채워 날려 보낸 북방쇠찌르레기 한 마리가 평야에서 발견되어 부친 원홍구에게 전달되었던 것이었다. 이후 원홍구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교유하던 야마시나에게 보고했으며, 이로써 남북을 잇는 소통이 이루어졌다. 결국 냉전이라는 새로운 질서 속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연구인 MAPS가,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일본과의 오랜 네트워크인 야마시나 조류 연구소를 통해 남과 북을 잇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은 셈이다.

식민지 시기부터의 원씨 일가와 일본 과학자들과의 조수 연구를 중심으로 한 인연이 야마시나 조류 연구소를 어떻게 남북 조류학의 결절점으로 작용하게 했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몇 년 전에 치바현에 소재한 야마시나 조류 연구소 도서실에 방문하여 자료를 조사하는 동안, 필자는 1965년 10월에 원홍구가 야마시나에게 보낸 『조선조류지』 제1권과 이듬해 야마시나 및 구로다 나가미치에게 『조선조류지』 제2권을 보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 원병오가 MAPS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국에서 진행한 조류 표지 방조 사업의 1965년도 보고서를 같은 해 11월에 연구소에 증정했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이렇게 남북의 조류학자들 모두가 식민지 시기의 인연을 바탕으로 야마시나 조류 연구소와 소통하고 정보를 교류했기에 1960년대 동안 야마시나 연구소는 남북을 간접적으로 잇는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이처럼 남과 북을 가로지른 작은 찌르레기 한 마리가 남북의 부자 조류학자를 이어준 극적인 이야기 뒤에는 원씨 일가의 가업으로 이어 온 과학 활동이 해방 이후 한국과 북한, 그리고 일본의 국경을 넘어서 작동해 왔다는 사실이 놓여 있었다. 원홍구·병오 부자의 일화를 한민족만의 이야기로 한정하지 않을 때, 비로소 식민과 분단, 냉전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동아시아 조수 연구의 역사와 그 가운데 원씨 일가의 가업으로서의 과학 활동에 대한 역동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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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aehwan Hyun. “Science as a Family Affair: Won Pyong-Oh and the Transwar Origins of South Korean Ornithology.”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29, no. 1 (2024): 5-55.
  2. 원병오. 「한국의 조류학사」. 『자연보존』 148 (2009): 1-13.
  3. Oliver L. Austin, The Birds of Korea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Museum of Comprative Zoology, 1948): 22.
  4. 元炳徽, 元炳秀. 「鄭家屯、通遼にて採集せる鳥類目録」. 『満洲生物學會會報』 2, no. 4 (1939): 76-81.
  5. 원병오, 앞의 글, 5쪽.

 

 

 

 

 

현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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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