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서울 혜화동의 한 연구실. 이호왕은 조교로 있던 이평우와 함께 밤늦은 시간까지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구멍 뚫린 천장에 구공탄 난방으로 추위를 막아야 했던 허름한 연구실에서 두 연구자는 형광현미경을 이용한 관찰을 이어가고 있었다. 슬라이드 위에 샘플을 올려놓고 현미경의 초점을 조절하자 밤하늘의 은하수 같은 노란 빛이 관찰되었다. 국내외의 수많은 연구자들이 오랫동안 밝혀내고자 했던 유행성출혈열의 병원체가 발견된 순간이었다.[그림1]




유행성출혈열은 봄, 가을에 많이 발생하는 전염병으로 발병 초기에는 발열, 두통 등의 증상을 보이다가 요통, 신부전, 출혈 증세가 나타나며 심한 경우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휴전선 부근에 주둔한 미군들에게 많이 발생했으며, 이러한 까닭에 세균전으로 의심되기도 했다. 이 전염병은 과거 소련과 일본에 의해 연구된 바 있지만,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확인되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으로 자국군의 피해가 커지게 된 미국이 이 전염병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만 역시나 병원체가 무엇인지는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미 육군은 한국에 출혈열센터를 설치하고 이곳에서 수집한 실험 재료를 일본에 위치한 406의학연구소와 워싱턴에 있는 월터리드의학연구소에 보내 병원체를 분리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우수한 연구진이 출혈열 병원체를 분리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연구에 나섰지만 결과는 계속 실패였다. 이호왕은 이러한 가운데서 유행성출혈열 연구에 뛰어들었다.

사실 이호왕이 처음부터 유행성출혈열 연구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 속에서 몇 번의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놓였고, 그 선택에 충실히 응함으로써 유행성출혈열 분야의 세계적인 연구자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이호왕은 함경남도 신흥군 출신이다. 어머니의 권유로 의학 공부를 선택하여 함흥의과대학에 입학했는데 재학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고향을 떠나 서울로 내려왔다. 의학 공부가 중단될 수도 있었지만 전시연합대학으로 운영되고 있었던 서울대학교에 북한 출신 학생의 편입이 가능해짐에 따라 이호왕은 서울대 의대 본과 1학년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1954년에 의대 졸업장을 받았다. 학부 졸업 후 이호왕은 대학원에 진학하여 미생물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는데, 전시연합대학 시절 매우 열악했던 여건 속에서도 열정 넘치게 가르쳤던 기용숙 교수의 미생물학 수업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듯하다.1 당시 한국에 창궐하고 있었던 많은 전염병도 그가 미생물학을 공부하기로 선택한 주된 요인이기도 했다. 대학원에 진학하여 세균 염색과 현미경 관찰을 하며 조교로 지내는 동안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생겼다. 이른바 미네소타프로젝트가 실행되면서 미국 유학길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이었다.2


처음에는 말이 잘 통하지 않아서 휴강이 공지된 줄도 모르고 강의실에서 계속 기다린 적도 있었고, 수업 내용을 잘 알아듣지 못해 미국 학생의 노트를 빌려 주말 내내 옮겨 적으며 공부해야만 했다. 이러한 노력 속에서 이호왕은 지도교수의 제안으로 당시 한국에 창궐했던 일본뇌염바이러스 연구를 시작했다. 석사와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그는 바이러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길에 들어섰고, 일본뇌염바이러스를 대상으로 당시로서는 첨단 연구 방법이었던 조직배양법을 배워 연구에 몰두했다. 그 결과 1959년 “일본뇌염바이러스의 면역에 관한 연구Studies on Immunity to Japanese Encephalitis Virus”로 미네소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에도 이호왕은 한동안 일본뇌염바이러스 연구를 지속했다. 한국의 연구 환경이 여전히 열악한 가운데 어렵사리 미국 국립보건원NIH에서 연구비를 지원받게 되었고, 1964년부터 일본뇌염바이러스의 월동기전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본에서 백신 개발 성공 소식이 들려오면서 이호왕은 다른 연구 주제로 관심을 돌려야 했다.

 

이호왕은 일본뇌염 연구 수행 중 미국 월터리드 육군 연구소Walter Reed Army Institute of Research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유학 시절 친분이 있었던 동료로부터 유행성출혈열 연구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당시만 해도 유행성출혈열은 무엇이 원인인지 알지 못한 상태에 있었고, 특히 한국에 주둔한 미군의 피해가 커서 미국의 관심이 큰 전염병이기도 했다. 이호왕은 여기에 주목하여 미국에서 연구를 지원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최신의 바이러스학 연구 방법을 구사할 수 있고, 실제 전염병이 발생하는 지역인 한국의 연구자로서 유행성출혈열 연구의 적임자임을 보여주었고, 이를 인정받아 1970년부터 미육군의학연구개발사령부의 지원을 받으며 유행성출혈열 연구를 시작했다.

과거 소련, 일본, 미국 연구자들에 의해 수행된 연구들을 꼼꼼히 분석하면서 이호왕은 자신이 주로 살펴야 할 실험 대상들을 추려냈다. 출혈열 환자의 혈청과 야생쥐, 체외기생체가 바로 그것이었다. 환자 혈청은 병원체를 보유한 숙주동물과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선택되었고, 야생쥐와 체외기생체는 출혈열 발생지역에서 많이 채집된 것으로 특히 발병 시점과 채집 시기 간의 관련성이 높아 매개체일 가능성이 크게 의심되는 대상이어서 선택되었다. 이호왕 연구의 핵심은 출혈열을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조직배양세포법을 적용했는데, 이 방법은 조직배양세포에 실험 재료를 접종한 후 세포 변화 여부를 보고 병원체의 존재 유무를 가리는 방법으로 그가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부터 다루어 온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그림2]


 

이호왕은 돼지신장세포와 원숭이신장세포, 헬라세포 등을 이용하여 한국의 유행성출혈열 환자 혈액을 접종하는 실험을 실시했다. 그러나 세포 변화 반응이 지속적으로 일관되지 못함에 따라 실패하고 말았다. 다음으로 체외기생체를 이용한 실험이 진행되었다. 체외기생체는 출혈열 발생 지역에서 채집한 야생쥐 등의 몸에 기생하는 진드기, 벼룩, 이 등을 가리킨다. 과거 일본, 소련 연구자들이 체외기생체에서 바이러스 분리를 보고한 바 있었지만, 이 실험이 재현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이호왕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체외기생체도 수집하여 실험에 사용했다. 종별 분류를 통해 출혈열 발병과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자 했지만, 가장 많이 채집된 종은 정작 흡혈하지 않아 출혈열과의 관계성이 의문시되었고, 결과적으로 체외기생체로부터 병원체 분리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출혈열 병원체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게 의심된 야생쥐에 대한 실험도 수행되었다. 야생쥐는 군 캠프 지역의 야생쥐 출현 양상이 출혈열의 발생 시기와 일치함에 따라 주요 실험 대상으로 선택되었다. 이호왕은 채집한 야생쥐를 종별로 구분했고, 그 결과 가장 많이 채집된 종은 등줄쥐Apodemus agrarius였고, 그 다음이 갈밭쥐Microtus fortis였다. 부검을 통해 얻은 장기를 완충액으로 여러 번 세척하여 작게 자른 후 이 조직편을 시험관에서 배양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호왕은 갈밭쥐의 장기에서 알 수 없는 병원체 1개를 분리하면서 갈밭쥐에 주목했다. 등줄쥐가 가장 많이 채집된 종이기는 했지만 이는 전국에 걸쳐 분포하는 것이었던 데 비해 갈밭쥐는 출혈열이 유행했던 경기 북부 지역에서 주로 발견된 까닭에 갈밭쥐에 더욱 주목했던 것이다. 게다가 연구팀에서 채집을 담당했던 연구원이 채집 도중 출혈열에 감염되는 일이 있었는데, 그가 발병 2~3주 전에 채집했던 것도 갈밭쥐였다.

이호왕은 갈밭쥐에 출혈열 회복기 환자의 혈청을 접종하는 실험을 했다. 회복기 혈청에는 항체가 형성되어 있으므로 갈밭쥐에서 분리한 병원체가 항원이라면 이 혈청 내에서 중화반응이 일어날 것이라 기대했다. 돼지 신장 세포에서는 변성효과가 나타난 반면, 원숭이 신장 세포와 헬라세포에서는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즉 회복기 혈청과 갈밭쥐에서 분리한 병원체 간 반응 실험에서 중화반응이 불규칙하게 나타남에 따라 이 병원체와 출혈열과의 관련성은 설명될 수 없었다. 이후 채집한 등줄쥐와 갈밭쥐에서 몇 차례 병원체가 분리되었지만, 출혈열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확인되었다. 1973년 갈밭쥐에서 분리된 2주의 병원체가 일부 환자 혈청과 중화반응을 보이기도 해서 이호왕은 이것이 출혈열의 병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대조군 실험을 위해 미육군의학연구개발사령부에 출혈열에 노출된 적이 없는 혈청을 요청하여 반응을 살펴보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실험 역시 결과가 일정치 않았고, 출혈열 환자의 혈청과 정상 혈청 간 반응 차이도 크지 않음에 따라 이호왕은 또 한 번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그는 출혈열 연구의 첫 3년간의 내용을 미 육군 측에 보고했고, 이 내용을 본 파나마 중미의학연구소 소장이었던 존슨Karl M. Johnson은 이호왕이 분리한 바이러스에 관심을 보이며 공동연구를 제안했다.존슨이 이호왕으로부터 전달받은 2개의 균주를 연구한 결과 하나는 사람 혈청에서 발견되기 쉬운 레오바이러스Reovirus였고, 다른 하나는 허피스바이러스Herpesvirus였다.

즉 이호왕이 분리한 바이러스 2주는 출혈열과는 무관했던 것이었다. 이렇듯 출혈열의 병원체를 분리하기 위해 시도했던 조직배양세포 연구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실패가 계속되자 이호왕은 새로운 조직배양세포를 활용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세포의 변성은 확인되지 않았고, 연구에도 별 진전이 없었다. 이로써 실험을 시작할 때 주요 대상으로 삼았던 환자 혈액, 체외기생체, 야생쥐와 이들에 대한 조직배양법 적용은 실패로 마무리되었다.

이호왕은 새로운 연구방법을 도입하기로 결심했다. 앞서 야생쥐 채집 중 출혈열에 감염된 연구원의 사례를 통해 출혈열에 감염되었다가 회복된 사람은 같은 질병에 다시 걸리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발병 환자의 혈청에 항체가 존재하는 이른바 면역 체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호왕은 발병 후 회복한 환자의 혈청 안에 존재하는 특이항체를 찾는 것으로 연구 방향을 전환했고, 혈청 내 면역글로불린Immunoglobulin, Ig4의 함량을 측정하는 실험을 실시했다. 1974년 실험에서 그는 출혈열 환자의 초기, 회복기 혈청을 수집, 분석했다. 이는 질병의 경과에 따라 혈청 내 면역글로불린의 함량이 변화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그림3] 다섯 종류의 면역글로불린 중 IgD는 정상 혈청에서는 반응이 없었지만, 회복기 환자 혈청에서 그 농도가 증가하는 모습이 발견되었다. 이호왕은 혈청 내 면역글로불린 함량 변화에 주목한 실험을 이어 나갔다. 1975년 실험에서는 IgM의 농도가 발병 10일 이후 급증하다가 20일경 최고치에 달한 후 빠르게 감소했다. IgG는 발병 14~20일부터 증가했고, 30일 이후 감소했다. 이처럼 발병 시점에 따라 면역글로불린 함량이 변화하는 모습을 통해 이호왕은 질병이 경과하는 동안 특이항체가 형성됨을 확인했다.

 

 

그 다음으로는 이 항체에 특이적으로 결합하는 항원을 찾아야 했다. 그의 출혈열 연구의 궁극적 목적이었던 병원체 분리를 위해서는 그간 사용했던 방법과는 다른 새로운 방법이 적용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이호왕은 형광항체법을 적용하고자 했다. 형광항체법은 바이러스가 있을 것으로 의심되는 조직에 형광물질이 부착된 항체를 가해 결합한 후 형광현미경으로 관찰하는 방법으로 1973년 이호왕의 실험실을 찾은 존슨의 추천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 사실 이 방법은 형광현미경, 냉동조직절단기와 같은 장비가 필요한 방법이었고, 조직을 냉동시켜 절단하거나 조직 절편의 염색, 현미경 작동법 등을 숙지해야만 사용할 수 있었다. 장비는 존슨의 도움으로 구할 수 있었지만 연구방법은 생소한 것이었다. 이호왕은 당시 연구팀 내 조교로 있었던 이평우에게 연구방법을 익히도록 했고, 이평우는 호주에서 형광항체법을 배우고 돌아온 가축위생연구소의 최철순을 만나 도움을 받았다. 면역글로불린 함량 변화 실험이 진행되던 1974년 말쯤 이호왕 연구팀은 형광항체법을 이용한 실험을 실시할 수 있게 되었다.

1975년 연구부터는 그동안 실험에 사용되지 않았던 야생쥐의 폐장이 추가되었다. 폐장은 호흡기관이므로 오염물질이 많아 실험 재료로 잘 쓰이지 않던 장기였다. 또한 다른 장기와 달리 병변이 관찰되지 않아서 출혈열 연구자들은 이 장기를 실험에 사용하지 않았다. 이호왕 역시 그간의 실험에서 폐장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1975년부터 폐장을 실험 재료로 추가한 것이었다. 이호왕은 미 육군을 통해 젤리슨William L. Jellison이라는 출혈열 연구자의 책을 전해 받았는데, 그 책에는 들쥐의 폐장에 기생하는 곰팡이가 출혈열의 병원체 같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출혈열의 병원체가 곰팡이라는 점에는 코웃음을 쳤지만, 그것이 존재하는 장기가 폐장이라는 점에는 크게 주목했고 이후 실험부터는 폐장을 주요 실험 대상으로 포함시켰다.

야생쥐에서 수집한 장기 조직들을 대상으로 형광항체법이 적용되었다. 출혈열 환자의 회복기 혈청에 양성 반응을 보인 조직들을 추려냈다. 1974년 수집한 야생쥐 조직 중 [그림4]등줄쥐의 폐장조직 9개와 신장조직 5개에서 특이반응이 나타났고, 1975년에 수집한 야생쥐 조직에서도 역시 등줄쥐의 폐장조직 14개와 신장조직 4개에서 특이반응이 나타났다. 형광현미경 관찰을 했던 이평우의 회고에 의하면 특히 폐장조직에서 형광물질이 가장 많이 관찰되었다고 했다. 특이반응이 나타났던 등줄쥐의 조직에 대해 각각 출혈열 환자의 초기 혈청, 회복기 혈청과 중화반응이 시도되었다. 환자 혈청 안에 존재하는 항체에 특이적으로 반응하는 항원이 등줄쥐의 조직에 있는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중화되는 농도가 높을수록 항체가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화반응 실험 결과 출혈열 초기 혈청에 비해 회복기 혈청에서 중화 농도가 4배 이상 높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즉 출혈열 환자의 혈청 안에 있는 항체는 등줄쥐 조직에 있는 항원과 특이적으로 반응했고, 항체 농도는 질병이 경과함에 따라 크게 증가했다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서서히 감소하는 모습이 관찰되었다.


 

사실 이 모습은 오랫동안 수많은 출혈열 연구자가 발견하려고 애썼던 항원의 존재를 확인한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앞서 몇 차례의 실패를 경험했던 이호왕은 이 결과가 진짜 옳은지를 좀 더 정교하고 분명하게 확인해 보기 위해 다시 실험해 보기로 했다.

실험에 사용되는 조직을 여러 번 세척하고, 형광항체법에 사용되는 모든 시약도 정량적으로 측정했다. 이 과정을 거쳐 등줄쥐 폐장을 다시 관찰해보니, 역시 출혈열 회복기 혈청에만 반응하는 항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호왕은 또한 이 항원이 오직 출혈열에만 반응하는 것인지도 확인해 보았다. 정상 혈청과 출혈열 환자 혈청을 섞고 무작위로 번호를 붙여 검사하는 이른바 맹검을 실시했는데, 그 결과 항원에 반응하는 환자 혈청을 모두 찾아냈고 이 실험을 수차례 반복하면서 결과의 신뢰도를 높였다. 이호왕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증명된 항원을 일단 ‘코리아 항원Korea antigen’이라 이름 붙였고, 이 사실은 대한내과학회 학술대회를 며칠 앞둔 1976년 4월 29일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되었다.5

 

언론보도와 학회 발표 이후 이호왕의 출혈열 병원체 증명 사실에 대한 국내외 연구자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특히 연구비 지원 기관이었던 미 육군 측은 이호왕이 연구비를 계속 지원받기 위한 쇼를 벌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도 했다.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 이호왕은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자신의 실험을 재현해 보였고, 그 후로도 여러 연구자들로부터 맹검 의뢰를 받아 자신이 발견한 항원이 출혈열의 병원체임을 확인해 주었다. 그리고 이 항원이 바이러스로서 가지는 물리화학적 특징을 밝히고, 이것을 미국 절족동물매개바이러스위원회The American Committee on Arthropod-borne Viruses 카탈로그에 ‘한탄바이러스Hantaan virus’라는 이름으로 등록했다. 이로써 이호왕은 유행성출혈열을 일으키는 병원체인 한탄바이러스를 세계 최초로 발견한 연구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국내외를 넘나들며 도심에서 발생한 출혈열 유사 사례에 대한 연구를 이어갔고, 그 결과 서울바이러스라는 새로운 바이러스의 존재를 증명했으며, 일본 연구자와의 공동 연구를 통해 1989년 유행성출혈열 진단키트인 한타디아를 만들었다. 1990년에는 녹십자와의 협업으로 예방백신 한타박스를 출시하여 출혈열 예방에도 기여했다.[그림5]


 

바이러스의 발견을 넘어 진단법과 예방백신까지 개발하는 성과는 바이러스 연구자로서 좀처럼 달성하기 힘든 일이다. 이호왕은 이러한 성취를 통해 과학후발국인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국제적인 연구의 구심점을 형성했다. 여전히 전염병의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한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이호왕의 연구가 갖는 가치에 다시 한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연재글    한국 과학기술의 결정적 순간들

  1. 1936년 우장춘, 감격의 도쿄제국대학 박사학위 취득
  2. 1939년 석주명, 한반도 나비 연구 총정리
  3. 1976년 이호왕, 유행성출혈열 병원체의 발견
  4. 1970년 정근모, 과학자로 살 것이냐 과학정책가로 살 것이냐
  5. 1966년 김삼순, 한국 최초의 여성 농학박사 탄생
  6. 1942년 강영선, 유전학 연구 네트워크에 첫 발을 내딛다
  7. 1977년 허문회, 통일벼로 쌀 자급 달성
  8. 2004년 최형섭, 영원한 ‘과기처 장관’으로 남다
  9. 1982년 전길남, 네트워크 세계에 한국을 연결하다

참고문헌

  1. 이호왕, 이평우, “한국형출혈열: Ⅰ. 원인 항원 및 항체 증명”, 『대한내과학회잡지』 19권 5호(1976), 371~383쪽.
  2. Ho Wang Lee, Pyung Woo Lee, and Karl M. Johnson, “Isolation of the Etiologic Agent of Korean Hemorrhagic Fever”, The Journal of Infectious Diseases Vol. 137, No. 3(1978), pp. 298~308.
  3. 이호왕, 『한탄강의 기적』 (시공사, 1999).
  4. 이호왕, 『바이러스와 반세기』 (시공사, 2003).
  5. 신미영, “이호왕의 유행성출혈열 연구와 한탄바이러스 발견”, 『한국과학사학회지』 29-2(2007), 201-229쪽.
  6. 신미영, 『주변에서 중심으로: 바이러스학자 이호왕의 연구 활동』 (전북대 박사논문, 2015).
  7. 이왕준, “미네소타프로젝트가 한국 의학교육에 미친 영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박사학위논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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