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3월, 직장도 쉬면서 넉 달 동안 동경제대의 동물학회 도서관에 틀어박혀 자료를 정리하던 석주명(石宙明, 1908~50)은 마침내 『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 (이후 Synonymic List) 원고를 탈고했다. 2년 전 그는 ‘왕립 아시아학회 한국지회’의 잡지인 <Transactions of the Korean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에 발표하기 위해 조선산 나비에 관해 150쪽가량의 논문을 준비했는데, 이를 확장시켜 한국산 나비에 관한 총목록을 작성해달라는 ‘왕립 아시아학회 한국지회’의 요청을 받고 두툼한 책을 집필한 것이다. 이 책의 표지에는 1939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인쇄와 발간은 1940년에 이루어졌다[1]. 석주명은 Synonymic List에서 한반도에 서식하는 나비를 255종으로 정리하고, 일부 미기록종과 함께 212개에 달하는 동종이명synonym의 목록을 덧붙였다.

4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그림1]Synonymic List는 출판 직후부터 한반도의 나비 연구를 위해 꼭 필요한 참고도서가 되었다. 이 책은 특정한 주제를 체계적으로 기술한 모노그래프가 아니라, 한국산 나비 각종에 대한 그간의 모든 연구를 망라하여 전체 분류 체계를 제시한 목록집이었다. 이 책의 제목이 ‘한국 나비의 동종이명 목록’이라는 사실은 석주명의 연구가 같은 종이지만 다른 학명으로 보고된 동종이명의 제거를 목표로 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당시에는 한반도산 특정 생물종에 대한 종합적인 목록집 자체가 드물었고, 특히 Synonymic List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인 과학자가 펴낸 유일한 영문 단행본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송도고보의 박물 교사였던 석주명은 이 책을 통해 일본을 넘어 구미학계에까지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과학기술 분야에서 전문 연구자로 활동할 수 있는 한국인은 매우 드물었다. 고급 과학기술 교육을 위한 제도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과학기술자가 되기 위해서는 일본 유학이 필수적이었다. 좁은 길을 거쳐 뛰어난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일본 제국 대학 교수까지 오른 이태규나 이승기 같은 인물도 있었으나 그들이 거의 전부였다. 그렇지만 동식물 분류학을 중심으로 한 박물학은 높은 수준의 실험장비나 전문지식이 없어도 연구가 가능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졌고, 한국인 연구자들도 많은 편이었다. 1923년 결성된 조선박물학회(朝鮮博物學會) 회원 중 10% 정도가 한국인이었고, 학회지인 『조선박물학회잡지(朝鮮博物學會雜誌)』에 논문을 게재한 한국인 연구자들은 10여 명이 넘었다. 당시 박물학은 동식물학과 보건위생은 물론 광물학까지를 포괄했지만, 생물학이 중심이었고, 『조선박물학회잡지』에 실린 논문도 생물학이 중심이었다. 이렇게 볼 때 박물학・생물학이 일제강점기 한국, 나아가 한국인의 과학연구를 대표하는 분야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 생물학자 중 석주명은 양적으로 가장 많은 100여 편 이상의 학술논문을 발표했으며, Synonymic List를 통해 한국산 나비에 대한 최고 전문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한국인들이 해방 이후 새로운 국가를 꿈꾸던 1948년 6월 8일,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학장 김동일, 문리대학 학장 이태규, 약학대학 학장 도봉섭, 화학공학과 학과장 이승기 등 당대의 대표적 과학기술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가건설을 위한 과학기술(자)의 역할과 미래에 대해 좌담회를 가졌다. 그들은 과학기술 진흥이 국가재건에 필수적인 과제라고 주장하면서 당시 한국 과학의 수준이 국제적으로 낙후된 상태임을 인정했다. 그런데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연구부장 석주명은, “동식물 방면에서는 향토성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가령 우스운 이야기 같습니다마는 물리화학 방면에서는 (한국)물리화학자들에게 외국 사람들이 선생님 대접을 하면서 무엇을 물어보게 될 것은 이후에 10년이나 20년 있어도 그렇게 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마는, 동식물 방면만큼은 외국 사람들이 와서 우리에게 물어볼 것도 배울 것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자신감을 보였다[2]. 동식물이 지니는 토착성 혹은 향토성 때문에 한국 생물학자들이 외국 학자들보다 우위에 있어 한 수 가르쳐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사실 석주명의 발언은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근거 있는 의견이었다. 한국산 나비에 대해서는 전 세계 어느 누구도 그보다 많은 지식과 표본을 갖고 있지 않았다. 단순히 한국산 생물에 대한 연구이기에 한국 학자가 유리하다는 일반론이 아니라 20여 년간 남다른 노력으로 국제 학계에서도 그 성과를 인정받은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당당함이었다. 하지만 40세의 의기충천한 나비학자 석주명은 그로부터 2년 뒤 한국전쟁 와중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학문적 자부심도 묻히게 되었다.

우리나라 생물에 대한 근대적 연구는 19세기 중반 서양인의 채집 활동에서 비롯되었다. 개항 이전부터 각종 목적의 탐사선에 의해 동물과 식물이 채집되었고 이 표본은 외국으로 보내져 분류학적 연구 대상이 되었다. 19세기 말부터는 일본인 학자의 참여가 시작되었고, 일제의 한국 강점 이후 한국산 생물에 대한 연구의 주도권은 이들에게 넘어갔다. 조선 박물학회 설립쯤부터 식물학자 정태현(鄭台鉉)을 시작으로 한국인 생물 연구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1930년대 들어서면서 상당한 연구성과가 곤충학자 조복성(趙福成), 석주명 등에 의해 발표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이 생물학자로 활동하는 길은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3]. 우선 일본인 연구자의 연구를 도와주면서 자신도 연구자의 길을 걷게 되는 경우로 정태현, 조복성이 대표적이다. 두 번째로 고등농림학교 등을 졸업하고 중등학교에서 박물 교사로 근무하면서 생물학 연구를 수행했던 경우로, 석주명과 그의 스승이었던 조류학자 원홍구(元洪九) 등 많은 한국인 생물학자들이 이 범주에 해당한다. 이들은 교사라는 본업과 연구자를 겸했기 때문에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나 연구비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한편으로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서 동식물의 우리말 이름이나 용어 등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등 ‘교사 겸 연구자’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일본제국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1940년대부터 전문적인 연구자로 활동했던 경우로, 동물학의 강영선(姜永善), 식물학의 이민재(李敏載)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만주나 일본 등 한국 밖의 기관에서 연구를 수행했는데, 그들의 연구주제는 세포학, 생리학 등으로 대부분 한국인 생물학자들이 동식물 분류를 중심으로 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교사 겸 연구자’의 대표 격인 석주명은 나비에 집중하여 교사라는 자신의 처지를 연구 방법의 한 부분으로 활용함으로써 남다른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일본의 가고시마(鹿兒島)고농을 졸업하고 모교인 송도고보의 박물 교사가 된 석주명은 주변에서 나비를 채집하는 일에서부터 나비 연구를 시작했다. 초기에는 단순히 채집한 표본을 무리 지어 정리하는 ‘원시적 방법’의 분류를 수행하다 1930년대 초 일본에서 간행된 곤충도감을 바탕으로 채집한 표본들을 동정하고 목록을 작성하여 1932년부터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을 진행하면서 석주명은 자신의 조사 결과와 참고문헌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자신이 같은 종으로 분류한 표본들이 도감에는 다른 종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한참을 궁리하다 같은 종의 개체변이를 학자들이 새로운 학명으로 보고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개체변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표본을 조사해야 하지만 많은 학자들이, 특히 한국산 나비를 다룬 외국 학자들은 소수의 표본만을 대상으로 하여 변이가 심한 표본이 나타나면 신종이나 신아종으로 발표하곤 했다. 여기에는 학명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려는 학자들의 공명심과 “새로운 종을 발표할 때는 전형적인 하나의 수컷으로 기재한다”고 규정한 만국명명규약 자체의 문제점도 작용했다는 것이 석주명의 판단이었다.

이에 따라 석주명은 많은 표본을 채집하여 개체변이의 범위를 밝히는 데 집중적인 관심을 쏟게 되었고, 학생들에게 나비채집을 방학 과제물로 내주어 이를 자신의 연구재료로 삼았다. 분류학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 없는 학생들이 신종이나 미기록종 등을 채집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지만, 개체변이를 규명하는 연구에는 학생들이 채집한 표본 하나하나가 의미 있는 자료가 되었다. 물론 학생들이 채집하는 시기는 대개 여름 방학이고, 출신지가 도회지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석주명은 수시로 직접 벽지를 다니며 채집하였으며, 각지에 조수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그는 제주도에서부터 백두산까지 한반도 모든 지역을 다니며 채집활동을 펼쳤는데, 이 덕분에 해방 이후 조선산악회의 부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33년 『조선 박물학회 잡지』에 발표된 은점표범나비의 변이에 대한 논문을 시작으로 동종이명을 제거하는 석주명식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연구 방법을 석주명이 처음으로 창안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1950년에 완성한 유고 “한국산 접류의 연구(제3보)”에서 자신이 처음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연구 과정에서 독자적으로 개체변이에 주목한 연구방법론을 인식했다고 주장했다. 석주명이 자신의 주장대로 순전히 독자적인 연구 과정에서 개체변이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다른 학자들의 문헌으로부터 그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지 명확하게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그가 처음부터 개체변이의 범위를 밝히는 작업에 나선 것은 아니었으며, 개체변이의 의미를 자신의 채집・조사 과정에서 더욱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1934년 이후 논문에서 나타나듯이 개체변이 범위를 객관적으로 보일 수 있는 정량적 형질을 추출하고 이를 통계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은 석주명이 고안한 것이었다. 1934년 “조선산 접류의 연구(제1보)”에서부터 개체변이의 범위를 보일 수 있는 정량적인 형질로 앞날개 길이, 뱀눈 무늬의 수와 위치를 택하여 연속적인 변이를 더욱 설득력 있게 보여줄 수 있었다. 이 형질들은 객관적인 통계처리가 가능한 것들로서 도표화를 통해 변이의 정규분포곡선을 그려낼 수가 있었다. 이러한 연구 방법은 석주명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물론 현재 관점에서 볼 때 석주명식 연구는 지극히 소모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배추흰나비의 변이곡선을 작성하기 위해 그는 167,847개체를 조사했는데, 현재의 수량 통계 분류학에 따르면 개체변이의 정규분포곡선을 작성하는 데는 1,000개체 정도의 표본이면 충분하며, 정밀한 표본 추출이 될 경우 훨씬 소수의 표본으로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통계학적 지식을 생물분류학에 본격적으로 적용시킨 논의는 서구 학계에서도 1930년대 후반부터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 때문에 석주명이 활동했던 당시의 분류학 수준에서는, 그리고 통계학을 깊이 공부할 기회가 없었던 그의 처지에서는 가능한 한 다수의 개체를 모으는 일이 중시될 수밖에 없었다.

석주명의 분류학 연구는 가능한 한 이미 인정된 체계에 포함시켜 분류군을 크게 나누려는 통합론자lumper의 것으로, 당시 많은 학자들이 택하고 있는 세분론자splitter의 대척점에 있었다. 그는 수년에 걸친 채집・조사 결과 자신도 모르게 극단적인 통합론자가 되었다면서 장차 학자들이 변이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면 통합론자의 방식이 올바름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석주명은 Synonymic List 서문에서 “지금까지 조선산 나비는 많은 세분론자에 의해 분류되었으나 나는 통합론자로서 다시 분류하여 이 목록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석주명의 나비 연구는 Synonymic List 이후 분포연구라는 새로운 면모를 추가했다. 사실 분포연구는 방대한 표본의 채집을 기본으로 하는 석주명식 분류학의 자연스러운 연장이었다. 변이 연구와 분포연구는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변이 연구를 위해서는 다수의 개체를 채집해야 하고, 그 과정을 통해 분포 양상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변이 연구보다 분포연구는 훨씬 넓은 범위의 자료 축적이 필요하다. 그 때문에 1939년부터 분포연구를 담은 논문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은 1929년부터 시작하여 10여 년에 걸친 채집・연구의 결과로 한국산 나비의 분포를 밝힐 수 있을 만큼 석주명의 조사 자료가 축적되었음을 뜻했다. 10여 년 이상의 연구로 많은 표본과 함께 그 표본의 채집지에 대한 정보도 쌓이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산 나비의 분포 범위를 밝히는 작업을 본격화했다. 석주명은 자신이 직접 채집을 다닌 곳과 나비를 채집한 장소를 지도에 꼼꼼하게 기록했으며, 여기에 해당 지역의 기온, 강수량 등 환경정보가 추가된다면 특정 종과 서식 환경 사이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바탕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분포연구는 생물지리학・생태학 연구의 출발점이 된다. 1939년부터 등장한 분포연구는 변이 연구를 다룬 논문 뒤에 [그림2]분포지도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석주명은 분포연구와 변이 연구를 바탕으로, 형태에만 치중하는 분류학에서 벗어나 유연관계를 고려하여 계통을 세우고 환경과 분포와의 관계까지 밝혀내는 곤충학을 추구하려 했다. 비록 그러한 연구를 완성하기 전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석주명의 분포연구 가치는 1973년 유고로 간행된 한국산 접류 분포도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4]. 여기에는 250여 종 한국산 나비 각종마다 그와 그의 제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해당 종을 채집한 위치가 하나하나 표시된 한국 지도와 그가 세계 각지의 학자와 표본, 학술 자료를 교환하여 얻게 된 정보를 바탕으로 해당 나비가 발견된 지역을 표시한 세계지도가 한 장씩 담겨있다.

한국산 나비라는 한 분야에만 집중하고, 많은 수의 개체를 채집하여 개체변이 범위를 규명함으로써 잘못된 기존 연구를 수정해 나갔던 석주명의 접근법은, 이미 50여 년 이상 나비 연구 성과가 축적된 상황에서 후발 연구자가 택할 수 있는 매우 적절한 방향이었다. 물론 변이연구의 가치를 인식했다 하더라도 실제로 수행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방대한 표본의 확보와 조사라는 쉽지 않은 전제를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석주명은 20여 년의 연구생활 동안 한반도 전역을 누비며 나비를 잡았으며, 송도교보 교사로서 학생들의 과제물을 연구에 활용하여 무려 75만 개체에 이르는 표본을 조사함으로써 그 전제를 충족시켰다. 석주명식 연구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과 비용이 요구되었으나, 그는 남달랐던 노력으로 그러한 연구를 실천에 옮겼다.

그동안 식민지에서 이루어진 과학 활동을 바라보는 주된 시각은 ‘서구의 과학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도입되었는가’였다. 그러나 최근 중심-주변부의 구분을 비판하고 식민지의 토착적 지식이나 방법이 ‘식민지 과학’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식민지 과학이 단순한 서구 과학을 이식한 결과물이 아니라는 사실이 다양한 연구를 통해서 밝혀지고 있다[5]. 기본적으로 생물이 지니는 토착적 성격이 있고, 필드 워크가 필수적인 생물 연구에는 토착 연구자의 역할이 중요하므로 특히 생물학 분야 형성은 단순한 도입・수용 과정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석주명의 나비 분류학은 식민지 과학에 대한 최근 연구 흐름과 잘 부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방대한 표본을 통계를 바탕으로 처리하여 개체변이 범위를 밝혀 동종이명을 제거하는 석주명식 분류학은 한국에 거주하지 않는 외국인 연구자가 따라 하기 어려운 방식이었다. 후발주자로 뛰어든 그였지만 효과적인 방법론과 이를 뒷받침한 부지런함으로 왜곡되지 않은 한국 나비 상을 규명해냈다. 그는 연구에 불리한 ‘교사 겸 연구자’라는 처지를, 제자들을 활용해 조직적인 채집활동을 벌이고 학생들의 과제물까지 연구재료로 흡수하면서 자신의 연구가 지니는 강점으로 전환시켰다. 연구 방법이 아주 고차원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에 거주하며 학생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그리고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야만 가능한 방식을 통해 한국산 나비의 최고 권위자가 되었다. 비록 석주명과 같은 연구가 당시 한국인 연구자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가장 다수를 차지했던 교사 겸 연구자를 대표하는 그의 연구는 일제 강점기 한국인 생물학 연구의 중요한 특성을 보여주었다.

1950년 세상을 떠난 석주명이 최근 다시 주목 받는 배경에는 나비학자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융복합 연구 혹은 지역학의 선구자라는 평가가 자리 잡고 있다[6]. 그는 변이 연구가 분포연구로 연장될 즈음부터 산과 들이 아닌 역사에서 나비를 찾는 일을 시작했다. 석주명은 1930년대 말부터 조선왕조실록이나 개인 문집 속에서 나비에 관한 기사를 찾는 데 많은 관심을 두었다. 이를 통해 나비에 대한 조상들의 인식이나 이름, 그리고 생태적 정보를 얻으려 했다. 그가 찾아낸 기사들 중에서 학술적 가치가 있는 것은 드물었지만 나비 이름 변화나 나비에 대한 전통적 관념 등을 제한적이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역사적 자료를 통해 나비 연구 폭을 넓히려 했던 석주명의 태도는 일차적으로 그가 계속해서 수행해 왔던 나비에 대한 연구사 정리의 연장이었다. 한편으로 고전을 뒤지는 작업은 나비 이름을 추적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나비라는 일반적인 이름의 변화뿐 아니라 특정 종의 나비 이름과 관련된 정보를 찾는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전근대의 분류 방식이 세밀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이름은 아니더라도 호랑나비, 흰나비, 황접, 왕나비, 분접 등 몇 가지 나비 이름을 찾았고, 이는 나비 속명(俗名)을 정하는 데 참고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대부분의 학술 활동은 일본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나비의 경우 흔한 종을 제외하고는 우리말 이름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연구 논문을 쓰는 데는 우리말 이름이 없어도 가능하지만,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효과적인 교육을 위해서는 우리말 이름이 있어야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석주명을 비롯해 박물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던 한국인 생물학자들은 동식물의 우리말 이름 제정과 지역마다 다른 명칭 통일에 관심을 보였다. 실제 석주명이 우리말에 대해 보여준 열의와 지식은 나비의 우리말 이름 짓기에 중요한 지적 기반이 되었다. 그가 1947년 1월 조선 생물학회에서 통과시킨 한국산 나비 248종의 우리말 이름에는 [그림3]각시멧노랑나비, 떠들석팔랑나비, 알락그늘나비 등 순수한 우리말 이름들이 많이 들어있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짓거나 조사한 우리말 나비 이름의 유래를 구체적으로 밝힌 책을 펴내기도 했다[7].

석주명이 지닌 우리말, 특히 방언에 대한 깊은 관심은 일차적으로 전국 각지를 누비는 채집활동에서 기인했다. 각 지역의 독특한 방언을 접한 그는 몇 가지 흥미로운 개념을 중심으로 여러 지역의 방언을 수집했으며, 방언과 곤충 간에는 지방 차이(지방型)와 개인 차이(개체변이)가 있는 등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고 연구 방법에도 유사한 점이 많다고 여겨 방언 탐구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석주명이 보였던 민속・역사에 대한 관심 역시 각지를 다니는 채집활동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옛 문헌에 나타난 제주도에 대한 기록을 모아 발표하는 등 제주도, 울릉도 등에 대한 향토사 기록을 조사하여 발표했으며, 한국을 중심으로 한 박물학 연표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가 자신의 나비 연구를 분류학에 제한하지 않고 나비와 관련된 역사・언어 연구까지 확대한 것은 연구사 정리의 연장이자 우리말 이름 찾기와 관련된, 즉 나비 연구와 연결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동시에 자신의 나비 연구를 자연과학의 틀을 넘어 국학의 일부로 인정받기 위한 시도였다. 그는 1930년대 중반부터 전개되었던 ‘조선학운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조선학운동의 중심인물들과 교류를 하며 역사와 국어에 대한 관심과 소양을 키울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석주명의 생물학 연구는 그 자체로 한국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넓은 의미의 국학(조선학)이었다. 석주명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나비연구에 나비와 관련된 역사・언어 연구를 결합함으로써 좁은 의미의 국학에까지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또한 석주명은 방언, 인구학, 곤충, 문헌조사 등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포괄하는 제주학의 선구자였다. 그의 제주와의 인연은 1936년 7월 나비채집을 위해 제주도를 찾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통계처리를 기본으로 하는 석주명식 분류학을 위해 한반도 곳곳을 누비던 그는 지역마다 상이한 특성을 보이는 방언에 대한 관심을 키웠고, 특히 제주도의 특이한 방언은 그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1943년부터 경성제대 생약연구소 제주도 시험장에서 일하게 된 석주명은 본업인 나비표본 채집 외에 제주 방언을 채집하고, 인구 양상을 모아 인구분포표를 만들고, 제주와 관련된 문헌과 자료를 총정리했다. 이러한 노력은 『제주도방언집』, 『제주도 생명조사서 – 제주도의 인구론』, 『제주도 자료집』 등 총 6권에 이르는 제주도 총서의 집필로 이어졌고, 지역학에 대한 이해가 싹트기도 전에 석주명이 명명한 ‘제주도학’이 시작했던 것이다. 한편으로 석주명은 『국제어 에스페란토 교과서 附 소사전』을 펴내고 대학에서 에스페란토를 직접 강의한 한국 에스페란토 운동의 선구자 중 한 명이었다. 실제로 석주명에게 에스페란토는 해외 여러 나라 연구자들과 나비 연구를 위한 학문적 교류 수단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이처럼 석주명은 좁은 의미의 과학적 나비 연구를 넘어 다양한 인문학적 탐구를 수행했는데, 이는 진정한 나비연구를 완성하기 위한 긴 여정에 놓여 있었다. 다시 말하면 ‘나비 연구를 위한 인문학’ 혹은 ‘인문학적 나비학’인 셈이었다.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인문 사회 분야에 학문적 관심을 보이고 본격적인 조사에 나서는 것은 분명 흔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생물학 연구, 특히 분류학 연구를 위해서는 ‘채집’이라는 행위가 필수적이며, 표본수집을 위한 채집 여행 혹은 필드 워크를 통해 생물을 넘어 해당 지역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즉, 필드 워크를 기본으로 하는 생물분류학, 특히 곤충학 연구자들의 경우 자료수집에 특히 민감하며 그러한 성향이 인문학적 관심사로 확장될 여지가 상대적으로 컸다. 물론 자료수집에서 좀 더 체계적인 학문적 탐구로 나아가는 것이 항상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개인의 특별한 재능과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아울러 연구자 자신도 그 같은 확산형 학문 추구에 대한 논리적 정당화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석주명은 나비 연구의 수준을 높인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자연법칙을 찾아내 자연과 인생의 조화를 도모하는 것이 과학자의 의무이고, 이를 위해 삶과 관련된 인문 사회에 대한 탐구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비록 언어나 지역학 연구가 그의 나비 연구에 어떻게 실질적 도움을 주었는지 충분히 보여줄 기회를 잡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만, 그의 학문적 여정은 결국 나비 연구에서 시작해 나비 연구로 향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석주명의 학문은 나비 연구를 중심에 탄탄히 놓고 주변을 인문학으로 둘러싸면서 확대・보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최근 융복합이 강조되면서 단순히 한 우물을 파기보다는 우물을 넓게 그리고 깊게 파라는 권고를 많이 한다. 아직 융복합이라는 기치에 맞는 방법론의 확립이 충분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따로 또 같이’라는, 개별 분야의 접근에서 출발하여 공동의 목표로 나아가는 방안이 유력하다. 그렇게 본다면 넓게 팔을 벌린 석주명식 학문은 그러한 접근에 어울리는 방식이 될 수 있다. 그에게 나비 연구는 깊고 넓게 파는 우물의 중심부에서 지속적으로 주변에 물줄기를 공급하여 우물을 넓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전 국토를 누비는 채집 여행에서부터 시작한 석주명의 나비 연구는 통계적 분류학과 생태학 초기 단계인 분포연구를 거쳐 국학적 생물학으로 이어졌으며, 더 나아가 역사・언어연구까지 가지를 뻗쳐나갔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상당 부분은 미완의 기획으로 남았지만 나비 연구, 제주 연구, 에스페란토 등 각각은 이후 개별적 발전의 굳건한 토대가 되었다.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간 석주명식 확산형 학문은 그의 설명에 의하면 자신의 학문 활동 출발점이었던 나비 연구의 가치와 위상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석주명은 대학을 졸업하지도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를 ‘나비 박사’라고 불렀다. 다양한 분야를 섭렵했지만 역시 석주명은 ‘나비 박사’였다.

참고문헌

 

  1. D.M. Seok, 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 (Seoul: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1939).

  2. “좌담회: 새과학을 이야기하는 밤”,  『현대과학』 8호 (1948), 44-51쪽.

  3. Manyong Moon, “Becoming a Biologist in Colonial Korea: Cultural Nationalism in a Teacher-cum-Biologist”, East Asian 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an International Journal 6-1 (2012), pp. 65-82.

  4. 석주명, 『한국산 접류 분포도』  (보진재, 1973).

  5. Minakshi Menon, “Indigenous knowledges and colonial sciences in South Asia”, South Asian History and Culture, 13:1 (2022), 1-18.

  6. 윤용택, 『한국의 르네상스인 석주명』  (궁리, 2018); 윤용택 외, 『제주학의 선구자 석주명』  (한그루, 2021).

  7. 석주명, 『조선 나비이름의 유래기』  (백양당, 1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