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홋카이도제국대학에서 일본유전학회 삿포로담화대회가 개최되었다. 참석자들 가운데에는 훗날 국립서울대학교의 생물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한국 생물학계의 기틀을 마련할 강영선(1917~1999)이라는 이십 대 중반의 조선인 청년이 끼어 있었다. [그림1] 당시 학구열로 가득한 젊은 조선인 생물학도에게 학술대회의 발표는 꿈같은 일이었을 텐데, 일본으로 ‘유학’ 온 지 일 년이 채 안 되어 강영선은 유전학이라는 당대 최신 생물학 분야의 일원으로 자신의 연구 성과를 발표할 기회를 맞이했던 것이다.[1]

강영선은 1937~1940년 동안 당시 식민지 조선에 거의 유일한 생물학 관련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수원농림전문학교에서 축산학을 공부했고, 이듬해에는 생물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겠다는 일념으로 홋카이도제대 동물학과에 방계로 입학했다.

 

그는 당시 일본 유전학의 선구자이자 동물 염색체 연구로 유명한 오구마 간小熊捍, 1885~1971이 주임교수이고 마끼노 사지로牧野佐二郎, 1906~1989가 조교수로 근무하던 세포형태학교실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마끼노의 지도를 받으며 강영선은 삿포로에 흔한 만주집쥐Rattus norvegicus의 난자 내 여포를 현미경으로 관찰하여 기록하는 세포형태학적 연구에 몰두했다. 그가 1942년 삿포로담화대회에서 발표한 내용은 바로 이와 관련한 초기 연구 성과였다. 해당 내용은 일본유전학회 저널인 『일본유전학잡지日本遺伝学雑誌』를 통해 호쿠다이(北大, 홋카이도제대의 약칭) 학파의 신진 연구자의 발표로 소개되었다. 강영선은 1944년 17회 일본유전학회 학술대회에서도 계절에 따른 난자의 비정상 여포의 변화에 관한 형태학적 관찰 연구를 발표하면서 본인의 존재를 일본 유전학계에 알렸다.

 

1942년 일본유전학회 삿포로담화대회가 강영선이라는 한국인 과학자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가 유전학이라는 한 전문 분야 과학 공동체의 성원이 된 최초의 계기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과학자 전기는 종종 근현대 한국 과학자들의 삶을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정치체의 경계, 예를 들어 한국과 일본이라는 구별 아래 놓고 검토하는 경향을 보인다. 최근 과학사학자들은 이를 일국사적(一國史的) 관점이라고 부르고, 이 같은 관점이 한 과학자의 학문적 경력이나 연구 궤적에 영향을 끼친, 일국적 경계를 넘어선 지적, 인적, 물적 교류들을 간과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일국적 관점에서 쓰인 강영선에 관한 대중적 저술들에서 삿포로담화대회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이 대중 서술들에서 강영선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대학교 동숭동 문리대 캠퍼스에서 과학 연구를 수행할 지적, 물질적 기반이 전무한 고난과 역경의 상황에서도 온갖 노력을 통해 최신 세포학, 유전학 연구들을 일구어 내기 위해 홀로 분투한, 고독한 선구자로만 그려진다.

이 글에서는 강영선이 이런 “온갖 노력”을 추구할 수 있게 만든 사회적 배경과 그의 “분투”에 힘을 보탰던 한국 바깥의 동료 과학자들에 주목한다. 필자는 강영선이 일본 유전학계에서 홋카이도제대 동물학과의 성원으로 출발해 1950-60년대 이후 미국 중심으로 재편되는 세포유전학 공동체의 일원으로 성공적으로 안착했고, 이처럼 유전학 연구 네트워크의 일원이 되는 과정이 그가 한국전쟁이 남긴 폐허더미를 헤치고 괄목할만한 수준의 유전학 연구를 수행하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요했음을 보여줄 것이다.

 

 

해방 이후의 호쿠다이네트워크

2018년 여름, 필자는 홋카이도 대학의 대학 문서고를 뒤지다가 흥미로운 자료를 발견했다. 문서고가 소장하고 있는 「마끼노 문고牧野文庫」에는 강영선의 스승 마끼노 사지로가 평생 동안 수집한 논문들과 해당 논문들을 효율적으로 분리, 보관해 놓기 위해 만든 수천 장의 카드 리스트가 보관되어 있었다. 1940-60년대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인터넷으로 논문을 내려받는 일은커녕 유전학과 관련된 모든 저널을 학교 도서관이나 학과가 구독하는 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읽고 싶은 논문이 있다면 논문 저자에게 직접 우편으로 연락을 취해 논문을 보내달라고 요청해야 했다. 스승 마끼노에게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강영선 역시 매일 아침을 해외 학자에게 논문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고 받은 논문들에 대한 카드를 작성하는 데 썼다고 한다.

 

 

중요한 점은 그렇게 지난한 수고를 들여야 하는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마끼노가 해방 이후 강영선이 집필한 원고와 관련 카드를 거의 빠짐없이 모두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마끼노 문고의 카드 리스트에 강영선 논문과 관련된 카드는 117장으로, 마끼노가 가장 긴밀하게 협력하고, 공동 연구를 수행하기도 한 중국계 미국인 세포학자 T. C. 쑤 T.C. Hsu, 徐道覺, 1917~2003의 카드가 80장에 불과함을 고려하면 매우 인상적인 숫자이다. [그림2]에 소개된 논문은 『생물학회보』에 실린 「국제유전학회 참가 기행문」으로, 1956년 일본에서 열린 국제유전학회에 참가한 경험을 한국어로 적은 글이다. 이런 종류의 글은 당연히도 마끼노의 과학 연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글을 읽을 수 없었던 그에게는 보내달라고 요청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마끼노의 강영선 카드 리스트에 포함된 상당수는 이와 유사하게 한국어로 적힌 기행문이나 에세이들이다. 이 카드들은 구체적인 편지들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인 스승과 한국인 제자가 한일 지식인 간의 공식적인 교류나 협력이 허용되지 않던 1950년대 이승만 정권기에도 얼마나 적극적으로 교류했는지를 보여주는 간접적인 증거이다.

마끼노와 강영선의 사제 관계가 해방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던 것 이외에도, 일본 유전학계가 1950년대 초까지도 강영선을 호쿠다이 학파의 유전학자로 여겼다는 증거들이 여럿 발견된다. 한 가지는 패전 이후의 혼란이 다소 진정된 1947년 학술 잡지 출간을 재개하면서 마끼노가 강영선의 연구들을 출판해주었다는 것이다. 강영선의 1945년 8월 이전의 만주집쥐에 관한 세포유전학적 연구들은 마끼노가 편집하는 저널 『생물生物』에는 마끼노와 공저로, 『홋카이도제국대학이학부기요北海道帝國大學理學部紀要』에는 강영선 단독 저자로 게재되었다. (홋카이도 제국대학은 이 논문집을 출판한 직후 같은 해에 홋카이도 대학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같은 해에 마끼노는 주임교수 오구마 간의 정년퇴임을 기념하기 위해 오구마의 주요 연구 분야인 유전학과 세포학 연구 “동학들”同学의 논문을 모아 논문집을 내기로 결정했다. 강영선의 연구 또한 두 권의 논문집의 74개의 일본어 논문 가운데 하나로 포함되었다. 강영선이 논문집에 실린 논문에서 밝힌 것처럼 마끼노는 해방 이후에도 그의 연구를 잊지 않고, 호쿠다이 네트워크의 성원으로 받아주는 “은사”恩師였다.

1950-60년대의 여타 한국 과학기술자들처럼 강영선 역시 미국에서 최신 학문으로 “재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었다. 1950년 4월에 미국 정부는 갓 수립된 남한 정부와 남한 엘리트의 미국 연수를 목적으로 국제교육교환 촉진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풀브라이트 협정을 체결했고,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부터 본격적으로 확대했다. 이 해부터 미 국무부는 스미스먼트법the Smith-Mundt Act으로 제공되는 예산을 바탕으로 한국 대학 교수들의 미국 유학 및 연구 지원을 실시했다. 강영선은 한국전쟁 이전에도 교환교육사업에 지원했지만, 전쟁 발발로 무산되었고 1954년에야 교환교수로 선발되어 약 일 년 동안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UC Berkeley 동물학과에서 체류할 수 있게 되었다.

강영선이 UC 버클리를 선택한 것은 그가 호쿠다이 네트워크의 성원이었다는 점과 무관치 않다. UC 버클리 동물학과에는 두 명의 독일계 유전학자가 있었는데, 한 명은 당시 막 퇴임을 준비하는 리처드 골드슈미트Richard Goldschmidt, 1878~1958였고, 다른 한 명은 유전학자 커트 스턴Curt Stern, 1902~1981이었다. 골드슈미트는 1920년대부터 일본에 장기간 체류해 연구하면서 일본 유전학자들에게 지적, 방법론적으로 심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그는 특히 강영선의 스승이었던 오구마 간의 정년퇴임기념논문집의 서론을 써줄 정도로 호쿠다이의 유전학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커트 스턴 역시 원폭 상해 조사위원회Atomic Bomb Casualty Commission, ABCC 활동과 일본인류유전학회의 초청으로 일본과 미국을 수차례 오가던 과학자로, 훗날 마끼노 사지로의 정년퇴임 기념논문집에 서론을 써줄 정도로 호쿠다이 그룹의 친밀한 후원자였다.

이런 이유로 UC 버클리는 1949년 이래 일본 유전학자들이 미국 유전학을 학습하고 일본 유전학을 “재건”하겠다는 목적으로 미국으로 방문 조사 및 교환 교육을 나갈 때마다 일본과 미국의 유전학계를 잇는 중요한 교두보가 되었다. 강영선의 또 다른 스승 마끼노 사지로 역시 1952년 3월부터 1953년 4월까지 진행한 미국의 인류 염색체 및 암세포유전학 연구 현황 조사 및 연수 활동의 출발점과 종착점을 UC 버클리로 삼고, 커트 스턴의 도움을 받아 연수 활동을 진행했다. 마끼노 외에도 기하라 히토시木原均, 1893~1986와 그의 제자들, 그리고 고마이 다쿠駒井卓, 1886~1972 등과 같은 원로 유전학자들 역시 미국에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골드슈미트와 스턴의 연구실을 방문했다. 이런 점을 고려해볼 때 강영선에게 UC 버클리에서의 연수는 당연한 것이었다.

UC 버클리를 연수지로 선택한 일은 강영선이 인류 집단 유전학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관심을 갖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강영선은 전후의 열악한 연구 환경에서 일제강점기에 마끼노와 함께 진행하던 동물 세포학 연구, 특히 세포형태학 교실의 핵심 프로그램인 염색체에 관한 형태학적 관찰 연구를 추진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강영선이 UC 버클리에 체류하던 당시에는 과거 한국인을 포함한 일본 제국 내의 여러 종족 집단의 출생 성비와 쌍둥이·다둥이 출산율을 조사하고 연구해 오던 교토대학 동물학과의 원로 교수 고마이 다쿠가 방문 중이었다. 또 UC 버클리에서 사실상 강영선의 지도 교수 역할을 맡아주었던 커트 스턴이 2차 대전 이후 인류 유전학 분야를 우생학과 분리된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만들기 위해 교과서 『인류 유전학의 원리The Principle of Human Genetics』(1948)를 출간하고 개정판을 집필하던 시기였다. 강영선은 이 책에서 스턴이 한국인 집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출생성비(113.1)를 보이는 집단으로 소개하는 데 주목했다. 강영선에게 출생 성비나 쌍둥이 및 다둥이 출생률을 조사하는 연구는 실험 도구 없이, 설문지를 인쇄할 종이와 이를 배부할 현장 연구원들만 있으면 수행할 수 있으면서도, 스턴의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국제적인 관심을 받을 수 있는 매력적인 연구 주제였다.

1955년에 귀국한 강영선은 곧장 제자 조완규와 함께 같은 해 4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서울, 제주도, 울릉도의 중고교생들에게 가족의 출생 성비, 출생률, 사망률, 쌍둥이 및 다둥이 출생률, 사촌 간 결혼(근친결혼) 여부 등의 내용을 담은 설문지를 배부하여 19,084가구의 한국인 가족의 인구통계 자료를 수집했다. 이처럼 중고교를 대상으로 한 설문지 조사법은 UC 버클리에서 만난 고마이 다쿠의 조사 방법론을 활용한 것이었다. 당시 서울대 동물학과의 강영선의 제자들은 학부 졸업 후 주로 생물 교사로 취직했기 때문에 이들을 통해 설문지를 배부하고 수거하는 일이 용이했다. 1957년에는 조사 대상이 되는 내용의 변인들을 약간 변형시킨 설문지 조사를 12,616가구의 한국인 가족에게, 1958년에는 10,914가구의 한국인 가족에게 수행하여 추가적인 데이터를 확보했다. 1959년에 강영선과 제자들은 약 사 년여에 걸친 조사 결과를 토대로 한국인 집단의 출생 성비에 초점을 맞춘 논문을 『계간 우생학Eugenics Quarterly』 (현재 Biodemography and Social Biology)에, 한국의 근친혼 비율과 쌍생아 출산율, 그리고 일반 인구통계에 대한 정보를 보고하는 논문을 『인간 생물학Human Biology』에 출판했다. 이 두 논문은 해방 이후 한국인 유전학자가 처음으로 인류 유전학 관련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한 사례였다.[2] 강영선은 이 내용들을 정리한 연구 결과로 1960년에 모교인 홋카이도대학 동물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1958년도에 개최된 제10차 국제유전학회(캐나다 몬트리올)와 1961년에 열린 제2차 국제인류유전학회 (이탈리아 로마)에서 발표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도 유전학을 하는 학자가 있다는 점을 세계에 알리”게 되었다고 자평할 정도로, 강영선은 호쿠다이 네트워크를 통해 점차 국제 유전학 네트워크 일원의 위치를 확고하게 잡아갔다.

 

 

호쿠다이 네트워크와 함께 염색체 세포유전학으로

강영선의 제자이자 한국의 세포유전학에 중요한 기틀을 마련한 박상대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스승은 국제원자력위원회(IAEA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의 지원 가운데 국제적인 수준의 과학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 유전학자들에 앞서 최신 세포유전학 기술들을 학습하고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여 세계적인 세포유전학자로 성장”하게 되었다.[3] 실제로 강영선은 1960년에 IAEA 펠로십을 받아 매사추세츠의 실험생물학에 관한 우스터 실험생물학재단Worcester Foundation for Experimental Biology (현 우스터생의학연구재단)에서 일 년 동안 데이비드 스톤David Stone뿐만 아니라 보스턴 다나파버 암센터Dana-Farber Cancer Center의 세포유전학 분야 선임연구원 조지 예르게니안George Yerganian, 1923~의 지도를 받았다. 그 결과 세포배양기술과 핵형조사법karyotyping 같은 최신 염색체 연구 기법을 학습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록펠러재단이 제공한 연구비를 활용해 고배율 전자 현미경 등을 구매해 세포유전학 연구를 진행할 실험실을 마련했다. 1962년에 귀국한 이후로는 IAEA와 한국원자력원의 지원을 받아 꿈에 그리던 인간 염색체의 세포형태학적인 연구를 당시 미국의 실험실들이 수행하던 수준으로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세포방”이라 불리던 대학원생 연구실에서 진행되던 그의 염색체 연구는 주로 한국인으로부터 얻은 정상 세포와 암세포나 헬라 세포(HeLa cell), 혹은 중국햄스터 난소 세포(CHO)에 호르몬 처리나 엑스선을 조사한 후에 염색체 변이를 관찰하는 것이었다. 강영선은 자신의 암세포 염색체 연구가 암 연구에 기여할 가능성을 특별히 강조했다.

이 지점에서 마끼노의 홋카이도대학 연구실이 1950년대부터 추진한 연구가 무엇인지를 자세히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 1951년 마끼노는 홋카이도대학에서 염색체 연구 프로그램을 재건할 방안을 모색하던 와중에 새로운 연구 프로그램으로 암에 관한 염색체 연구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마끼노는 당시 염색체의 구조적 이상이 종양 발생과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보베리Theodor Boveri, 1862~1915의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만주집쥐를 대상으로 해당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고, 염색체 분석에 활용되는 새로운 압착법squashing을 고안하여 미국 세포유전학자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1952~1953년 동안의 미국 연수 기간에는 특히 텍사스 갤버스턴 의과대학University of Texas Medical Branch의 실험 생물학자 찰스 포메라트Charles Pomerat의 실험실에서 연구 중이던 T. C. 쑤에게 자신의 압착법을 전수하고 세포배양법을 학습했다. 일본으로 귀국한 후에는 쑤와 함께 초기에는 만주 집쥐의 암세포에 새로운 염색체 관찰법을 적용하는 연구를, 이후에는 인간 암세포에서 발견되는 염색체의 구조적 이상에 관한 연구를 공동으로 진행했다. 1960년대 후반에 마끼노는 홋카이도 대학에 이학 부속 동물 염색체 연구시설을 세워 암 염색체 연구 프로그램을 호쿠다이 그룹의 대표 연구 프로젝트로 자리 잡게 했다. 미국의 동료 유전학자들은 마끼노의 평생에 걸친 염색체 연구에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그를 “미스터 염색체”나 “동물 세포유전학의 대부”라고 불렀다.

비록 직접적인 자료는 남아있지 않지만, 마끼노가 강영선이 이 새로운 연구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일을 도운 것으로 보인다. 강영선이 우스터 실험생물학재단에 방문 중일 때 그에게 세포배양 기술과 핵형분석 기술을 전수한 예르게니안은 마끼노와 1953년부터 알고 지낸 절친한 동료 연구자로 설치류를 대상으로 암 연구를 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긴밀히 교류해오던 세포학자였다. 1955년부터 약 3년 동안은 마끼노가 홋카이도대학의 제자 도노무라 아키라1926~2004를 중국 햄스터 세포를 이용한 암세포유전학 연구 방법을 배우게 하기 위해 예르게니안의 실험실에 연수시켰다. 이런 맥락들은 우스터 재단에서 근무하지도 않던 예르게니안이 기꺼이 일면식도 없는 강영선에게 핵형조사법 등을 공들여 전수해 준 까닭을 추론할 수 있게 해준다.

1960년대 초반에 강영선은 마끼노의 진영에 서서 인간 염색체 수에 관한 마지막 국제 논쟁에 참전했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 사이에 세포유전학자들은 새로운 세포학적 관찰 기법들을 활용해 인간 염색체 수나 구조에 인종적 차이가 있는지를 검증하려고 시도했다. 이 가운데 동아시아인들과 유럽인들 사이에서 염색체 개수와 구조에서 차이가 존재하는지에 관한 논쟁이 일어났다. 이 논쟁을 일으킨 당사자는 아이오와 대학의 일본계 미국인 유전학자인 마스오 코다니Masuo Kodani, 1913~1983로, 그는 일본인의 염색체 개수가 46개에서 48개로 여러 변이를 보인다고 보고하며, “코카서스 인종(백인)과 동양인종” 사이에 염색체 개수의 인종차가 존재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1959년에 커트 스턴은 “미스터 염색체”로 유명한 마끼노에게 이 같은 일본인 염색체 수에 관한 주장에 대해 평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1960년대에 쑤와 공동 연구를 진행하느라 텍사스대학에 방문 중이던 마끼노는 급히 초고를 작성해 스턴에게 보냈고, 해당 연구 결과는 1962년에 『미국인류유전학회지American Journal of Human Genetics』에 게재되었다. 마끼노는 본인이 43명의 일본인과 136명의 인공적으로 유산된 일본인 태아의 여러 장기에서 추출한 6,596개의 무작위로 추출한 세포 샘플들을 분석한 결과 염색체 개수가 모두 46개였다고 보고했다. 그의 실험 결과에 따르면, 염색체 개수나 구조와 관련해 어떠한 인종적 차이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 같은 논쟁의 맥락에서 강영선의 최초의 한국인 염색체 연구는 한국인과 다른 집단 사이에서 염색체 개수가 다른지를 확인하는 일을 목표로 진행되었다. 1964년에 출판된 논문에서 강영선은 본인의 연구팀이 6명의 한국인으로부터 얻은 세포들을 활용해 한국인의 염색체가 46개이며, 이는 마끼노가 일본인으로부터 확인한 것과 동일하다고 결론지었다. 1965년에는 6명의 남성과 4명의 여성으로부터 얻은 886개의 세포를 관찰한 후, 이 가운데 783개의 세포는 일관되게 46개의 염색체를 나타낸다고 보고하며 염색체 수에 인종 차가 없음을 재확인했다. 강영선의 한국인 염색체 연구 결과는 마끼노가 편집인으로 봉사하는 영문 저널 『염색체정보서비스Chromosome Information Service』에 출간되었으며, 이 논문에서 강영선은 자신의 은사 마끼노가 해당 연구에 도움을 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이후에 마끼노는 강영선의 한국인 염색체 연구를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는 증거로 제시하며 염색체 개수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은밀한 협력에서 공식화된 교류로

과학자들의 국가 간 경계를 넘어선 협력은 국가 간의 외교적 관계에 따라 가능해지거나 불가능해지기도, 또 외부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게 되기도 한다.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반발로 2022년 2월 미국의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는 모스크바 부근에 실리콘 밸리를 건설한다는 목표로 러시아 스콜코보 과학기술연구소(SkoltechSkolkovo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와 진행하던 공동 연구를 중단했다.[4] 유사하게 같은 해 3월 독일 연구재단(DFGDeutsche Forschungsgemeinschaft)은 러시아와의 공동 연구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우크라이나 난민 연구자들의 연구를 지원한다고 발표했다.[5] 이처럼 과학 협력과 외교가 복잡하게 뒤얽히는 양상은 오늘날보다 냉전과 탈식민주의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던 1950-60년대에 더 분명하게 확인된다. 필자가 여기서 그려낸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의 강영선과 호쿠다이 그룹을 중심으로 한 일본 유전학자들 사이의 교류는 당시에 출판된 논문들과 회고들, 한국, 일본, 미국에 산재하여 있는 개인 서신 자료나 일기 등을 모두 꼼꼼하고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고서는 드러나지 않는 은밀한 협력 관계이다.

 

 

1965년 6월 22일 맺어진 한일기본조약으로 양국 간의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에야 이들의 관계가 표출적으로 드러나고, 나아가 양국에서 공적으로 인준 받는 협력 활동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사적으로만 이루어지던 한일 유전학자들 간의 교류는 국교정상화로 인해 공식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나아가 국가에 의해 공공외교public diplomacy의 일환으로 장려되었다.

이처럼 일본 과학자들이 한국 과학자의 초청을 받아 강연이나 연구를 목적으로 한국에 방문하는 일이 용이해진 1968년에 강영선은 마끼노 사지로를 한국생물과학협회 연례 학술대회 특별 강연 연사로 서울로 초청하여 은사가 평생 일군 염색체 연구를 국내 유전학자들에게 소개했다. [그림3] 강영선은 마끼노가 김포공항에 도착할 때나 일본으로 귀국할 때나 변함없이 그의 일본인 스승을 깍듯이 배웅했다. 마끼노는 은퇴 후 자비 출판한 일기에서 그동안 “한국에서 일본 연구자들에게 협력적인 수많은 학자와 함께 행복한 날들을 보냈다”고 회고했다. 1960년에 강영선이 학위를 수여 받는 해에 마끼노는 UC 버클리에서 강영선의 교환교육 연수를 도와주던 커트 스턴에게 “서울대 동물학과 교수 강영선 박사가 곧 홋카이도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것”이며, 호쿠다이 네트워크의 연구자가 다른 일본인 유전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스턴과의 교류 가운데 훌륭한 연구자로 성장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1971년 10월에는 국제생물학사업(IBPInternational Biological Program)의 한국위원회와 일본위원회가 서울에서 공동 회의를 갖고, 두 국가위원회 간 “연구 교류”를 진행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결과 당시 IBP 한국위원회 위원장이자 인간 적응성human adaptability 분과의 분과위원장이었던 강영선은 1973년부터 일본 도쿄의과치과대학의 인류 유전학자 오구라 고지大倉興司, 1921~1997 연구팀과 공동 협력 연구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진행했으며, 이들의 협력 연구는 한국과 일본의 인류 유전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6]

강영선은 국제 연구 동향에 늘 관심을 기울이며 새로운 연구 주제와 협력 대상을 찾아 나가는 정력적인 연구자였다. 그는 자신의 연구의 출발점인 세포학과 세포유전학 분야나 인류 집단 유전학뿐만 아니라 초파리 유전학과 어류 유전학, 생태학, 그라고 자연보존에까지 관심을 두루 보이며 자신과 서울대 동물학과의 연구 영역을 끊임없이 확장해 나갔다. 따라서 이 글에서 다룬 인류 유전학자이자 세포유전학자로서의 강영선의 연구 경로에 대한 서술만으로는 그가 구축한 국내외 연구 네트워크와 다양한 연구 프로그램들을 모두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국전쟁 이후 국제 유전학계의 일원이 되고, 지역적인 연구로 국제적으로 중요한 학문적 의제에 문제를 제기하는 유전학자로 성장하는 데에는 일제강점기에 그가 진입한 호쿠다이 네트워크에 크게 빚지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1942년 일본유전학회의 삿포로담화대회는 그와 한국 유전학에 분명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연재글    한국 과학기술의 결정적 순간들

  1. 1936년 우장춘, 감격의 도쿄제국대학 박사학위 취득
  2. 1939년 석주명, 한반도 나비 연구 총정리
  3. 1976년 이호왕, 유행성출혈열 병원체의 발견
  4. 1970년 정근모, 과학자로 살 것이냐 과학정책가로 살 것이냐
  5. 1966년 김삼순, 한국 최초의 여성 농학박사 탄생
  6. 1942년 강영선, 유전학 연구 네트워크에 첫 발을 내딛다
  7. 1977년 허문회, 통일벼로 쌀 자급 달성
  8. 2004년 최형섭, 영원한 ‘과기처 장관’으로 남다
  9. 1982년 전길남, 네트워크 세계에 한국을 연결하다

참고문헌

  1. 이 글은 필자가 2017년에 출판한 영문 논문의 내용을 일부 가져와 수정, 보완한 것으로, 이 글에서 논의되는 에피소드들의 출처가 궁금한 독자들은 해당 원고를 참고하기 바란다. Jaehwan Hyun (2017), “Making Postcolonial Connections: The Role of a Japanese Research Network in the Emergence of Human Genetics in South Korea, 1941-1968”, The Korean Journal for the History of Science 39(2) (2017), pp.293-324.
  2. 초파리 유전학과 관련해서는 여러 한국인 초파리 연구자들이 1957년부터 『초파리 정보 서비스Drosophila Information Service』에 논문을 게재해왔다.
  3. 박상대 (2010), “[이학부] 故강영선 교수 회상록”, (http://www.kast.or.kr/, 2022년 11월 23일 접속)
  4. “MIT Ends Skoltech Partnership over Ukraine War”, Times Higher Education, 28 February 2022 (https://www.timeshighereducation.com/news/mit-ends-skoltech-partnership-over-ukraine-war, 2022년 11월 23일 접속)
  5. “DFG Takes Steps in Response to Russian Attack on Ukraine”, DFG Press Release, 2 March 2022 (https://www.dfg.de/en/service/press/press_releases/2022/press_release_no_01/index.html, 2022년 11월 23일 접속)
  6. Jaehwan Hyun, “Between Engaement and Isolation: Population Genetics and Transnational Nationalism in South Korea”, The Korean Journal for the History of Science 42(2) (2020), pp.357-3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