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12월 20일, 대한민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쌀 자급을 달성했음을 선포하고, 벼 신품종 개발에 참여한 농업과학자들과 신품종 보급에 앞장선 농촌지도 공무원들에게 훈장을 수여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녹색혁명 성취”라는 붓글씨를 써서 농촌진흥청에 선물하여 연구자들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이 붓글씨를 바탕으로 1978년 5월 10일 수원 농촌진흥청 경내에 “녹색혁명 성취의 탑”이 건립되기도 했다.

그에 앞서 12월 8일에는 14년 만에 쌀막걸리 판매가 재개되었다. 앞서 1964년에는 쌀 소비 억제를 위해 백미를 양조 원료의 20% 이하로 사용해야 한다는 행정명령이 시행되었고 1966년에는 백미 사용을 전면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시중의 모든 막걸리는 밀가루를 원료로 하게 되었는데, 1977년 쌀 생산량이 국내 수요를 여유 있게 넘어서게 되자 정부가 쌀막걸리의 부활을 허용한 것이다. 도시 사람들은 오랜만에 쌀막걸리를 맛보면서 한국이 오랜 보릿고개의 기억을 뒤로 하고 쌀을 여유 있게 소비할 수 있게 되었음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이와 같은 “한국의 녹색혁명”은 불과 10년도 안 되는 기간에 이루어진 일이어서 더욱 놀랍다. 다수확 신품종 “통일”을 농가에 본격적으로 보급하기로 결정한 것이 1971년의 일이고, 그로부터 일곱 해 만에 쌀 자급 달성을 선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허문회 박사1927-2010가 개발한 통일벼는 녹색혁명의 선봉으로 칭송받으며 국내외의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

통일벼는 당시 국내에서 재배하던 품종들과 여러 면에서 달랐는데,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통일벼는 필리핀에서 개발하여 국내로 들여온 품종이었으며, 당시 필리핀에서는 냉전이라는 더 큰 맥락 안에서 농업과학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냉전, 노먼 볼로그, 그리고 국제미작연구소IRRI

녹색혁명은 한국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냉전 체제 안에서 미국의 주도로 전 세계에서 전개되었던 녹색혁명의 국제적 흐름에 한국이 올라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식민지의 시대도 막을 내리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에서 수많은 신생독립국들이 나타났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초강대국은 냉전이라는 경쟁구도 안에서 하나라도 더 많이 자기편을 확보하기 위해 각종 원조 프로그램을 시행하였다. 그중에서도 미국이 특히 공을 들인 것이 농업과학기술 원조였다. 미국의 발달된 농업과학으로 수확량이 높은 신품종을 개발하여 신생국에 제공하면, 신생국은 식량위기를 걱정할 필요 없이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뒤집어 말하면 식량위기가 사회 불안을 부추기고 그것이 “적색혁명”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예방주사가 “녹색혁명”이라는 것이 미국측의 생각이었다.

미국의 농업과학자들이 생각한 녹색혁명의 비결은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것이었다. 바로 키가 작은 품종을 만드는 것이었다. 미국의 농업원조 프로그램에는 다량의 화학비료를 공급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질소비료를 많이 투여하면 작물은 덩치가 커지지만, 너무 웃자라면 낟알이 여물기 전에 쓰러져 버리고 만다. 키가 작은 품종을 개발하는 까닭은 바로 이렇게 웃자라 쓰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즉 키 작은 품종을 심고 질소비료를 더 많이 줌으로써 더 많은 열매가 열리도록 하는 것이 바로 1950년대 확립된 녹색혁명의 기본 틀이었다.

이 생각을 실현한 이가 미국의 농학자 노먼 볼로그1914-2009였다. 볼로그는 1950년대 말 기존 품종보다 훨씬 키가 작은 반왜성半矮性, semi-dwarf 품종을 개발하여, 멕시코와 인도 등에 제공하였다. 1963년이 되자 멕시코에서 재배하는 밀의 95%는 볼로그가 개발한 품종이 되었고, 멕시코의 밀 생산량은 1944년과 비교하여 무려 6배로 껑충 뛰었다. 밀의 뒤를 이어 옥수수에서도 반왜성 품종이 속속 개발되었고, 벼의 반왜성 품종 개발을 위해 1960년에는 필리핀에 국제미작연구소IRRI가 설립되었다. 볼로그는 녹색혁명을 주도하여 세계의 식량 위기를 피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197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IR8, 헨리 비첼, 그리고 허문회

국제미작연구소의 과학자들은 “키 작은 품종을 만들어 질소비료 사용량을 늘림으로써 다수확을 추구한다”는 녹색혁명의 기본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여러 지역의 키 작은 재래 품종을 시험해 보았다. 그 가운데 8번째로 개발한 품종이 놀라운 생산량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IRRI에서 개발한 8번째 품종이라는 뜻으로 “IR8”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대중들에게는 “기적의 쌀”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졌다. 첫 해 수확한 IR8은 사람들의 엄청난 관심 덕에 금세 동이 나서, 호텔 로비에서 선물용으로 팔 정도로 귀하신 몸이 되었다. 필리핀을 방문한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도 따로 시간을 내어 IRRI의 시험 농장을 찾을 정도로 깊은 관심을 보였다.

 

 

IRRI가 설립 후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데에는 베테랑 농학자 헨리 비첼1906-2006의 역할이 중요했다. 비첼은 텍사스에서(우리는 미국이 벼농사와 벼 연구를 하는 나라라고 여기지 않지만, 텍사스의 벼 재배 면적은 일본 전체의 논 면적보다 크다) 평생 벼농사 연구에 매진한 육종학자로, IRRI가 설립될 때 육종책임자로 스카우트되었다. 그리고 다양한 연원을 지닌 전 세계의 벼품종을 교배하여 새로운 품종을 만들면서 녹색혁명의 구상을 실현시키려 노력한 끝에 IR8을 비롯한 반왜성 품종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사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비첼의 신임을 받으며 IR8 개발에 깊이 관여했던 한국인 연구자가 당시 IRRI에 머물고 있었다. 그가 바로 통일벼의 아버지로 알려진 허문회 박사다.

허문회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과 교수로 재직하던 중, 1964년 IRRI로 연수를 떠났다. 당시에는 대학 제도의 과도기여서 학사나 석사학위를 가진 채 교수로 임용이 되고 나중에 박사학위를 따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는데, 허문회는 텍사스 시절부터 비첼의 연구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있는 IRRI를 찾은 것이다. 그는 현지에서 IR8의 개발에 관여하면서, 만성적인 쌀 부족에 시달리는 한국에도 반왜성품종을 도입하여 녹색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만 문제는 IR8이 한국의 벼와는 여러모로 달랐다는 점이다. 재배벼는 크게 인도형(인디카)와 일본형(야포니카) 두 종류로 나누는데, 이들은 벼라는 한 종에 속하지만 오랜 세월 각자의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거의 다른 종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여러 가지 형질이 차이를 보인다. (이 때문에 인디카와 야포니카는 “아종亞種“이라고 구별하기도 한다.) 수확량이 높은 반왜성 인디카를 한국의 기후에서 재배하기 위해서는 야포니카와 교잡해야 하는데, 인디카와 야포니카를 교잡하면 이삭도 제대로 패지 않고 쭉정이만 나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허문회는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IRRI에 연수 중이던 일본인 농학자들의 조언을 구하기도 했지만, 일본 학자들은 “인디카와 야포니카의 교잡은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너무 확고한 나머지 그를 만류할 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돌파구를 열어준 것은 비첼의 풍부한 경험이었다. 비첼은 텍사스에서 인디카와 야포니카의 교잡 실험을 여러 차례 해 보았고, 생산성을 회복하는 몇 가지 테크닉을 알고 있었다. 허문회는 비첼의 조언을 받아 “3원 교배”, 즉 인디카와 야포니카의 잡종을 다시 제3의 품종과 교배하는 방식으로 몇 가지 품종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가 1966년 귀국하기 전까지 약 2년간 IRRI에서 시험한 품종은 500여 개에 이른다.

 

 

허문회, 김인환, 그리고 박정희

하지만 허문회가 귀국했을 무렵 그가 만들어 온 “IR” 번호가 붙은 품종에 관심을 보이는 이는 많지 않았다. 인디카 쌀은 찰기가 없고 뱃속에서 쉬이 꺼지는 느낌이라 한국에서는 성공할수 없다는 선입견이 강했다.

더욱이 당시 농촌진흥청은 이집트의 인기 품종 “나다Nahda“라는 벼를 들여와서는 한국에 적응시키려는 연구에 온힘을 쏟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나다에 큰 기대를 걸고 자기 이름자까지 붙여 “희농熙農“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으니, 농촌진흥청이 허문회의 제안에 귀를 기울일 여력은 없었다.

하지만 결국 희농은 한국 기후에 적응하는 데 실패하여 농가에 보급되지도 못한 채 퇴출되고 말았다. 그리고 1968년 새로 농촌진흥청장이 된 김인환1919-1989은 실패한 희농의 기억까지 지워버릴 수 있는 성공 사례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허문회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김인환에게 자신이 개발한 IR 계열 품종들의 잠재력을 설명했다. 그리고 IRRI의 세계 최고 수준의 설비와 인력의 지원도 받을 수 있다고 김인환을 설득하였다. 허문회는 비첼을 비롯한 IRRI 핵심 연구자들과 김인환이 만나도록 주선하였고, 김인환은 결국 IR 계열 품종의 실용화 연구를 결심하게 되었다.

청장이 결단을 내리자 농촌진흥청은 IR 계열 품종의 실용화 연구에 총력을 기울였다. IRRI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실용 품종을 개발하려면 열 세대 정도는 재배를 계속 해 봐야 하는데, 벼 재배가 어려운 한국의 겨울에는 씨앗을 공수하여 따뜻한 필리핀에서 재배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이렇게 국제적인 협력이 진행되는 사이, 허문회가 필리핀에서 가져온 수백 종의 씨앗 가운데 IR-667이라는 품종이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것은 대만의 토종 반왜성 품종인 TN1과 일본 홋카이도의 줄기가 짧은 품종 유카라Yukara를 교배하고, 이 1대 잡종을 다시 IR8과 교배하여 얻은 2대 잡종이었다. 인디카 반왜성 품종의 여러 형질을 유지하면서도 추운 홋카이도에서 자라는 유카라의 형질을 이어받아 온대 지방에서도 재배할 수 있는 품종이었다. 정부는 이에 “통일”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1971년부터 농가에 보급하기로 결정하였다.

농민들은 통일벼에 대해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일단 기후, 비료, 수리 등 조건이 모든 잘 맞으면 통일벼는 놀라운 수확량을 보여주었다. 농민들 사이에 과장을 보태 “두 해 농사를 한꺼번에 지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다만 이런 조건들 중 하나라도 빠질 경우에는 들쭉날쭉한 수확량을 보여주었다. 전격적으로 보급하다 보니 안정성 면에서는 오랜 세월 적응해 온 재래 품종만 못했던 것이다. 또 하나의 결정적인 문제는 밥맛이었다. 통일벼는 인디카와 야포니카의 잡종이므로 순수한 야포니카에 비해서는 쌀의 끈기가 적었다. 따라서 통일벼가 차진 밥을 좋아하는 한국인에게 환영받을 것인지 회의적인 시각이 만만치 않았다. 이런 시선을 넘어서기 위하여, 정부는 1972년 2월 국무회의 시간에 통일쌀밥의 시식회를 열었다. 이 시식회는 무기명으로 진행됐으나, 박정희 대통령은 평가지에 일부러 자기 이름을 쓰고는 “밥맛 좋음”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밥맛에 대한 논란을 자기 권위를 앞세워서라도 잠재우고자 했던 것이다.

 

 

녹색혁명의 빛과 그림자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통일벼는 급속도로 보급되었다. “통일벼는 해거름을 한다”는 말이 농민 사이에 돌 정도로 성적이 들쭉날쭉하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 1970년대 한국의 쌀 생산량은 가파르게 상승했다. 1974년에는 쌀 생산량이 3000만 석을, 1977년에는 4000만 석을 넘어서서 마침내 쌀 자급 달성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통일벼의 개발자 허문회는 후속 품종의 개발에 전념했다. 통일벼의 보급은 행정적 과제이므로 정부와 농촌지도 공무원들에게 맡기고, 농학자는 통일벼의 장점을 더하고 단점을 보완한 새로운 품종을 만드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 하면 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찰기가 적다는 통일벼의 단점을 보완한  “통일찰”, 생육 기간을 앞당겨 이모작 등 겨울철 농지 이용의 효율을 높일 수 있는 “조생통일” 등 통일IR-667의 친척뻘 되는 품종들이 속속 개발되었다. 공동연구자들도 한국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밥맛을 개선한 “유신”과 “노풍”, “래경”, “밀양23호”, “밀양30호” 등의 품종을 개발했다. 오늘날 우리가 “통일벼”라고 기억하는 품종들은 IR-667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후속 품종을 뭉뚱그려 가리키는 것이다. (정확히는 “통일계 품종” 또는 “통일형 품종”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통일벼가 급속도로 보급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놀라운 생산성이었다. 다만 생산량이 높아져도 시장 가격이 그것을 뒷받침해 주지 않으면 늘어난 생산량이 농가소득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통일벼는 평균적으로 일반벼(종래의 야포니카 품종)에 비해 30% 이상 높은 수확을 거둘 수 있었지만, 시장에서는 양질 일반벼 품종에 비해 심할 경우 절반 가까이 낮은 가격으로 팔렸기 때문에, 늘어난 생산량의 효과가 낮은 시장 가격으로 거의 상쇄되다시피 했다. 농민 입장에서는 더 많은 힘과 자원(농약, 비료 등)을 들여 농사를 짓고 많이 거두기는 했는데, 손에 남는 것은 별반 차이가 없는 이상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정부는 추곡수매 제도를 적극 활용했다. 통일벼를 우선 수매하고 쌀의 품질 등급도 한 단계 올려서 가격을 더 후하게 쳐 주었다. 이것은 사실상 정부에서 통일벼 재배 농민에게 현금으로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과 마찬가지 효과였으므로, 농민들에게 큰 유인책이 되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통일벼를 권장한 결과 1978년에는 통일벼 재배 면적이 전국 논의 4분의 3을 넘게 되었다.

다만 군사작전을 펼치듯 전격적으로 녹색혁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지역별로 통일벼 재배 면적이 할당되었고, 실적을 채우는 데 지나치게 골몰한 일부 농촌지도 공무원들은 통일벼 재배에 협조하지 않는 농민들의 모판을 뒤집어엎는 등 폭력적으로 간섭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 여전히 낮은 통일벼의 시장 가격도 농민과 정부에 부담이 되었다. 또 화학비료와 농약의 사용량이 크게 늘어나면서 농약 중독 등 부작용도 늘어났다.

지나친 통일벼 일변도의 농업 정책은 결국 1978년 “노풍 파동”으로 한계를 드러냈다. 쌀 자급 선언 후 새 통일형 품종 “노풍”을 야심차게 보급했는데, 때마침 통일형 품종을 잘 감염시키는 도열병균의 돌연변이가 나타나면서 노풍을 비롯하여 새로 보급한 통일형 품종들이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것이다. 이후 유신 정권의 붕괴라는 정치적 혼란까지 겹치면서 유신 시대를 상징했던 통일벼 권장 정책은 동력을 잃게 되었고, 1980년대 들어 통일벼는 차츰 퇴조의 길을 걷게 되었다.

 

 

통일벼가 남긴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7년의 쌀 자급 선언은 한국 현대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비록 쌀 자급이 농촌의 여러 사회 문제들을 모두 해결해 준 것도 아니었으며, 1980년에는 심각한 냉해로 다시 쌀을 수입하는 일도 있었지만, “보릿고개”라는 관용구가 사라졌다는 상징성은 국민들에게 엄청난 변화로 다가왔다.

통일벼의 전성기가 유신 시대이기는 하지만, 통일벼를 유신 정권과 한 몸처럼 생각하는 것도 통일벼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다. 물론 통일벼가 일세를 풍미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지원 덕분이었다. 하지만 정치권력이 통일벼를 만든 것은 아니다. 통일벼는 냉전 체제에서 비롯된 국제적 과학기술 협력의 산물이다. 녹색혁명이 전 세계의 농업에 큰 변화를 일으킬 때, 한국은 처음에는 그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있었다. 미국이 IRRI를 필리핀에 설립한 것은 그들이 구상한 벼의 녹색혁명이 인디카 품종을 재배하는 동남아시아 국가를 대상으로 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허문회를 비롯한 한국의 과학자들이 세계적 흐름을 파악하고 거기에 참여하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한 덕에, 한국도 녹색혁명의 파도에 올라탈 수 있었다. 농학 뿐 아니라 1960년대 한국 과학기술의 전 분야로 시선을 넓혀도, 이 정도로 긴밀하게 당시의 세계적 조류와 연결하여 추진한 연구 프로젝트는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통일벼의 개발 과정에서 한국 농학은 귀중한 자신감을 얻었다.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경험과 일본과의 지리적, 기후적 유사성 때문에 한국 농학은 광복 후에도 한동안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허문회가 비첼을 비롯한 국제적 연구자들과 협력을 통하여 일본 농학자들은 어렵다고 여겼던 인디카와 야포니카의 교배에 성공하면서, 한국 농학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 통일벼를 앞세운 한국의 녹색혁명은 국제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았고, 허문회는 1980년대 이후 녹색혁명을 꿈꾸는 아시아 각국의 농업 고문으로도 활발히 활동하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 농학은 벼 육종은 물론 여러 분야에서 매우 높은 수준에 도달했으며, 한국의 농업 과학기술을 배우기 위한 유학생 파견과 국제협력도 매우 활발하다. IRRI와의 관계도 지원을 받았던 처지에서 이제는 지원을 하는 처지로 바뀌었다. IRRI와 협력하여 통일벼를 개발하던 1960년대와 비교하면 많은 것이 바뀌었는데, 허문회가 개발한 통일벼는 그 모든 것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1. 김인환, 『한국의 녹색혁명』, 농촌진흥청, 1977
  2. 김태호, 『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 들녘, 2017
  3. 이완주, 『라이스워』, 북스캔, 2009
김태호
전북대학교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