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 2일 이른 아침, 한국 과학계의 주요 인사들이 서울 홍릉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구내 존슨 강당에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며칠 전 세상을 떠난 송곡松谷 최형섭崔亨燮, 1920~2004 박사의 영결식을 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으로 치르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이 곧 빼곡하게 들어찼다. 가장 앞줄에는 최형섭의 손자가 영정을 안고 있었고, 그 옆에 유족들이 자리했다. 그 뒤에는 백발이 성성한 과학계 원로들이 숙연한 표정으로 줄지어 앉았다. 식순에 따라 이용태李龍兌 삼보컴퓨터 명예회장이 추모사를 낭독했다. 최형섭에 대해 “불모지에 가까웠던 한국 과학기술에 신천지를 열어준 분”이라고 평가하는 대목에 이르자 이용태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흐느끼며 추모사 낭독을 간신히 마쳤다.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약 1시간 20여 분 동안 진행된 영결식이 끝나자 운구 행렬은 홍릉을 출발해 원자력연구소와 대덕연구단지를 거쳐 오후 1시경 국립대전현충원에 도착했다.[1] 최형섭은 화학자 이태규李泰圭, 1902~1992 박사에 이어 국립묘지에 안장된 두 번째 과학자가 되었다.

최형섭을 한국 현대사를 통틀어 가장 널리 알려진 과학기술자라고 말해도 전혀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 가깝게 지난 요즘도 그의 이름은 어렵지 않게 언론 지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가 초대 소장을 맡았던 KIST에서는 물론이고, 한국 과학기술계 전반에서 최형섭은 감사와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2018년에 KIST는 설립 52주년을 맞아 최형섭 박사 흉상 두 점을 제작해 본관 로비와 역사관에 전시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2020년에는 최형섭 박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KIST와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은 공동으로 16년 전 영결식이 열린 존슨 강당에서 기념 심포지움을 개최해 최형섭의 업적과 그 의미를 기렸다. 그는 앞서 소개한 이용태의 추모사에서처럼 한국 과학기술의 기틀을 세운 연구자이자 행정가로 기억된다. 2014년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유공자묘역에서 열린 최형섭 10주기 추모식에서 채영복蔡永福 전 과학기술부 장관이 언급했듯이 “대한민국 근대 과학의 역사는 최형섭 박사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었다.[2] 

“최형섭 박사의 역사”가 널리 알려지고 기억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가 수많은 글과 말을 남겼다는 사실도 한몫했을 것이다. 최형섭은 120편이 넘는 학술 논문과 공식적으로 출간된 각종 발표문 이외에도, 필생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세 권짜리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개발전략>(1980-1981)을 통해 1960-70년대 한국의 과학기술 정책을 설계한 경험을 집대성했다. 이후 1990년대에는 자신의 경험을 회고록 형식으로 정리한 글을 모아 세 권의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다.[3] 회고록을 통해 최형섭은 일본 유학생 시절인 1940년대부터 시작해 대략 1980년대까지 공식 기록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개인적 심경과 비공식적인 기억을 남기고 있다. 또한 그의 만년晩年에는 몇 건의 방송 인터뷰에 응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KBS1의 ‘대화, 세기를 넘어서’ 시리즈의 일부로 방영된 <기술한국 30년의 비화: 과학자 최형섭>(2000)에 출연해 약 한 시간에 걸쳐 황수경 아나운서와 대화를 나누었다. 최형섭은 이미 오랫동안 자신의 삶과 업적에 대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정리하고 해석하는 작업을 체계적으로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현재 기억하고 추모하는 “최형섭 장관”의 서사는 이러한 작업의 결과를 반복적으로 재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내가 최형섭이 세상을 떠난 2004년을 ‘결정적 순간’으로 선택한 이유다. 최형섭의 사후 17년 동안 그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 사회에 차고 넘치지만, 이들은 대부분 그의 업적을 선양宣揚하거나 그가 후대에 남기고 싶어했던 모습만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최형섭은 일생 동안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의 여러 결정적 순간의 중심에서 변화를 직접 목격했다. 일제 식민지 시기 후반에 일본 유학을 떠나 공학을 전공했고, 해방 이후에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도 했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과학계의 실질적 리더로서 한국 과학기술을 체계적으로 제도화하는 과정을 주도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모습이 ‘결정적’으로 결정決定, determine 혹은 결정結晶, crystallize된 것은 2004년 이후의 일이었다. 이 글에서는 우선 최형섭에 대해 알려진 사실들을 개괄한 후, 그가 스스로 구축한 매끈한 이미지를 넘어 우리가 무엇을 궁금해할 만한지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다.

 

 

최형섭은 1920년 11월 2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공직자인 아버지 최지환崔志煥, 1882~1983의 차남으로 태어나 꽤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아버지를 따라 진주에서 충주로, 다시 신의주로 갔다가 중학생 무렵에는 대전에 자리 잡는 등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과학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형섭의 어린 시절을 묘사하는 기록이 많지 않은데, 과학사학자 박성래에 따르면 그가 과학기술처 장관에 임명될 무렵인 1971년 <서울신문>에 실은 ‘과학자의 길’이라는 글에 10대 시절의 이야기가 나온다고 한다. “국민학교 3~4학년 때 일본에서 나오는 과학잡지 <어린이의 과학>을 벌써 사 보았고, 중학교 들어갈 때는 시험 공부보다 무전기 만드는 데 열중할 정도였다. 게다가 중2 때에는 집 뒤의 창고에 ‘이화학실험실’을 만들고 무엇인가 연구를 한다고 틀어박혀 있기도 했다.”[4] 이를 보면 최형섭은 동시대 일본이나 서구 사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이언스 키드’의 자질이 엿보이는 어린이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최형섭이 대전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봄에 일본 와세다 대학 이공학부로 진학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유복한 집안의 자제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고, 식민지 조선에서 고등보통학교까지 나왔다면 대개는 사립대학을 선택하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린 시절의 관심사에 맞춰 공학 분야를 지망했고, 그중에서도 채광야금과를 선택했다. 최형섭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가 이 전공을 택한 이유는 “장래 우리나라가 발전하려면 지하자원 개발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5] 와세다에서 그는 꽤 열성적인 학생이었다. 그는 채광야금학 중에서도 채굴한 광석에서 유용한 성분을 분리해내는 기법인 선광選鑛, 그중에서 고체와 액체의 계면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활용해 광석을 분리하는 부유선광浮遊選鑛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래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이는 이후 최형섭의 미국 유학 시절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어느 젊은이에게도 그랬겠지만 최형섭에게도 해방은 혼란의 시기였다. 그는 해방 직전인 1944년에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후 조선으로 돌아와 조선광업진흥주식회사에 취직해 니켈, 코발트, 텅스텐 등 특수금속 추출 임무를 맡아 근무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이후 우연히 만난 선배의 소개로 1946년 2월 경성대학 이공학부 전임강사로 임용돼 학생들을 가르치던 중 한국전쟁이 터졌고, 그대로 공군 장교로 입대해 전쟁 기간 동안 항공수리창장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는 혼란의 와중에도 대학원 진학을, 그것도 미국 유학을 계획했다. 사실 한국전쟁이 발발할 당시 그는 이미 주한 미대사관 공보원USIS 유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해 1950년 7월에 퍼듀 대학Purdue University으로 떠날 예정이었는데, 전쟁으로 인해 계획이 전면 취소된 바 있었다. 휴전 협정 이후 최형섭은 다시 본격적으로 미국 유학을 추진했고, 우여곡절 끝에 1953년 12월에 공군에서 예편한 직후 미국 인디애나 주에 위치한 노터데임 대학University of Notre Dame으로 진학하게 되었다.

이후 5년 동안의 미국 유학 생활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최형섭이 중간에 학교를 한 차례 옮겼다는 점이다. 그가 공부를 시작했던 노터데임 대학의 지도교수는 버나드 컬리티Bernard D. Cullity였다. 컬리티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맨해튼 프로젝트의 그룹 리더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뛰어난 금속공학자로, 1950년에 노터데임 대학의 교수로 부임한 이래 30년 가까이 연구 활동을 이어 나갔다. 그는 훌륭한 교육자이기도 했는데, 컬리티가 1956년에 출간한 X선 회절에 관한 교과서는 이후 수십 년 동안 판을 거듭하며 전 세계 공과대학에서 이용되었다.[6] 그는 한국에서 최형섭이라는 학생이 도착하자 미국 해군연구소Naval Research Laboratory로부터 수탁한 연구 과제를 배당했다. 그 과제는 금속의 소성가공 과정에서 ‘비틀림 변형torsional deformation’이 일어나는 과정을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군사 연구비가 대폭 증가한 미국 냉전기 대학의 환경이었다. 최형섭은 장학금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알루미늄 단결정의 비틀림 변형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 논문을 썼다.[7] 하지만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우리나라 재건再建에 필요한 분야를 택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8]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조국의 발전을 위해 값비싼 X선 회절 장치가 필요한 최첨단 소성변형 이론에 대한 연구보다는 곧바로 산업화로 이어질 수 있는 금속제련과 관련된 연구를 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최형섭은 지도교수와의 상의 끝에 미네소타 대학University of Minnesota으로 옮겨 박사과정을 밟기로 결정했다.

최형섭이 미네소타 대학으로 옮긴 1955년, 미네아폴리스에는 수십 명의 서울대학교 교수 요원이 막 도착할 무렵이었다. ‘미네소타 계획’이라고 알려진 서울대 재건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미네소타 대학은 미국 국제협력처ICA의 지원을 받아 서울대 교수들의 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했고, 이에 참여하기 위해 공대, 의대, 농대, 행정대학원 교수들이 짧게는 6개월, 길게는 3년 동안 연수 또는 학위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최형섭은 이곳에서 뉴질랜드 출신의 스트래스모어 쿡Strathmore R. B. Cooke 교수의 지도로 저품위 철광석을 처리해 유용한 성분을 뽑아내는 제련 방법을 연구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관심을 두었던 주제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부유선광법에서 지방산의 포집 기능에 대한 것이었다. 잘게 빻은 광석에 섞여 있는 성분을 분리하기 위해 참치 기름과 같은 지방산 속에서 서로 다른 성분이 다르게 움직인다는 사실을 이용하게 되는데, 최형섭의 연구는 지방산의 구조와 불포화도에 따라 포집력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체계적으로 규명했다.[9] 부유선광은 그가 목표한 대로 한국의 광업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주제였다. 실제로 그는 귀국 후 서울대 대학원생과 함께 대한중석 상동광산에서 채취한 회중석灰重石, scheelite을 부선법으로 제련하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다.[10]

1958년 최형섭이 미네소타 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했다는 소식은 한국에서 주요 일간지에 보도될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미국에서 금속공학 분야로 받은 박사학위였다.[11] 그가 귀국하자 여러 기관에서 그를 영입하기 위해 연락을 해 왔다. 이 무렵 최형섭은 자신이 실질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 국산자동차 주식회사 부사장을 거쳐 원자력연구소 연구관으로 부임하고 상공부 광무국장을 겸임하는 등 몇몇 직장을 옮겨 다니게 된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 그는 미국에서의 연구 경험을 한국에서 비슷하게라도 재현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있었다.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곧 찾아왔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대한중석의 회중석 부산물을 제련해 비스무트 금속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세우는 일을 돕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명동 대한중석 사옥 한켠에 30평 정도의 실험실을 꾸밀 수 있었다. 낮에는 원자력연구소 연구관으로 근무하고, 저녁에는 대한중석 실험실로 출근하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위에서 언급한 회중석의 부선 수율을 높이는 연구는 당시 서울대 공대 조교로 있던 김연식金淵植이 맡았고, 광산학과 석사과정 학생이었던 한국남韓國男이 그 밑에서 조수 역할을 했다.이렇게 시작된 대한중석 실험실은 1961년 9월 국영 광업 4개 회사가 공동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재단법인 금속연료종합연구소로 정식으로 발족해 이후 50여 명의 연구원을 갖춘 기관으로 발전해 나갔고, 1971년에 KIST와 합병되면서 사라졌다.

이후 최형섭의 행적은 서서히 연구자에서 행정가로 옮아가기 시작했다. 1962년에는 원자력연구소 소장을 맡았고, 1966년에는 KIST의 초대 소장으로 새로운 응용기술 연구소의 기틀을 잡았으며, 1971년에는 과학기술처 장관에 임명되어 한국 과학기술정책을 총괄하는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최형섭은 일관적으로 개발도상국인 한국의 현실에 맞는 실용적인 기술 연구를 중시했다. 그가 KIST 연구원을 선발하기 위해 외국 출장을 다닐 때 “지금 한국에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연구를 했다가는 곤란하다. 기업이 공헌이 되는 연구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학구적으로 재미없을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는 점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즉, 1960년대 후반 한국의 상황에서 “사치스러운 기초연구”를 할 여유는 없다는 것이었다.[12] 최형섭은 자신이 미국에서 공부할 때 선택했듯이 KIST 역시 한국의 “재건에 필요한 분야”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학자가 좋아하는 연구가 아니라 기업이 필요로 하는 연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계약 연구를 중시하는 KIST의 운영 방식에도 반영되었다.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일하면서도 실질적인 기여를 중심에 둔 최형섭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었다. 1973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KIST를 모델로 한 부문별 정부출연연구기관을 설립하고, 이들을 대덕연구단지에 집중적으로 배치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했다. 다른 한편, 과학자들을 새마을기술봉사단으로 조직해 농어촌 지역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면서 과학기술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하도록 했다.

과학기술 행정가로서 최형섭이 축적한 경험은 이후 한국의 과학기술 외교 활동으로 이어졌다.[13] 그는 1970년에 일본 교토에서 열린 국제미래연구학회에서 이미 KIST가 “개발도상국에서 과학과 기술이 자립과 근대화를 이룩하는 데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실질적인 모델”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기 시작했다.[14] 이른바 ‘KIST 모델’이 국제 사회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72년 미국 동서문화센터East-West Center를 통해서였다. 미국 하와이에 위치한 동서문화센터는 미국 국무부의 지원을 받아 “동서 간의 문화적, 기술적 교류”를 활성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1960년에 설립되었다. 이 기관은 1970년에 몇 개의 핵심 주제를 중심으로 구조조정이 이루어졌는데, 그중 하나가 개발도상국에서 “기술과 개발technology and development”의 문제였다. 이 의제를 담당할 부서장으로 한국의 고위 공무원을 역임한 행정학자 이한빈李漢彬이 임명됐다. 이한빈은 1960년대 한국의 발전 사례, 그중에서도 KIST의 경험이 널리 소개할만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동서문화센터가 주최한 여러 행사에 최형섭을 비롯한 KIST의 간부급 연구원들을 연사로 초대했다. 나아가 자신이 담당하는 연구소를 통해 KIST 사례를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여러 개발도상국이 따라 배울만한 “모델”로 설정했다. 최형섭은 동서문화센터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의 ‘발전 모델’을 정리해 본격적으로 과학기술을 외교의 도구로 이용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앞서 언급한 세 권짜리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개발전략>이었고, 이 책은 영어는 물론이고 일본어와 아랍어로 번역되어 출간될 정도로 폭넓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보면 연구자로서 그리고 행정가로서 최형섭의 삶과 업적은 대단히 일관적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기술자로서 과학기술이 나라의 장래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점차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서도 그 신념을 더욱 확장할 수 있는 리더십을 갖췄다. 이러한 최형섭의 면모는 당시 한국의 최고 정치 지도자가 그를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지지할 수 있었던 든든한 바탕을 이루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1971년 6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약 7년 7개월 동안 과학기술처 장관직을 맡았는데, 이는 국무위원으로서 헌정사상 최장수 기록이다. 현재의 정치 체제를 고려하면 이 기록은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최형섭은 장관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한국과학원 원장,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과학계를 대표하는 원로로 자리매김했다. 심지어 그는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연구자의 덕목” 다섯 가지를 적어 자신의 묘비에 새기도록 했다. “학문에 거짓이 없어야 한다.” “부귀영화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시간에 초연한 생활연구인이 되어야 한다.” “직위에 연연하지 말고 직책에 충실해야 한다.” “아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 최형섭은 2004년에 이 말을 남김으로써 자신의 일관된 삶에 마침표를 찍었으며, 후대에 흠잡을 데 없는 선배 과학자이자 ‘영원한 과기처 장관’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을 연구하는 역사가의 관점에서 보면 위에서 소개한 최형섭의 서사에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최형섭 자신이 1980년대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세심하게 구축한 아카이브archive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스스로 남긴 말과 글은 당연하게도 자신을 일관적인 신념을 지닌 인물로 그리고 있다. 더욱 아쉬운 점은 최형섭의 주변 인물들이 그에 대해 남긴 기록과 증언 역시 그가 그어놓은 선을 쉽사리 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아마도 최형섭이 30년이 넘도록 한국 과학계의 상당한 고위직에 있었고, 그가 일생 동안 이룩한 성취가 보통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심대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2004년이 한국 과학기술사에 결정적인 이유는 1920년에 진주에서 태어나 과학에 관심이 많은 한 소년이 ‘연구자의 5대 덕목’을 후대에 남긴 ‘최형섭 장관’으로 고착화된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제 최형섭은 우리 곁에 없고, 그의 내밀한 속내를 알아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거나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최형섭 장관’이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서 최형섭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격동의 근현대사 속에서 그는 자신의 신념에 대해 항상 확신하고 있었을까?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널리 알려진 과학자가 KIST 본관 로비에 전시된 구릿빛 흉상처럼 고정된 이미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인간 최형섭을 복원하는 작업은 이미 너무 늦어 버린 것일까?

참고문헌

  1. “고 최형섭 박사 국립묘지 안장”, <전자신문>, 2004년 6월 3일.
  2. “박사님이 더욱 그리운 5월입니다”, HelloDD, 2014년 6월 5일.
  3. 최형섭,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조선일보사, 1995; 최형섭,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 과학기술외교 30년>, 매일경제신문사, 1998; 최형섭, <기술창출의 원천을 찾아서: 연구개발과 더불어 50년>, 매일경제신문사, 1999.
  4. 박성래, “한국과학기술행정의 기틀 마련한 최형섭”, <과학과 기술>, 2004년 4월호, 97쪽.
  5. 최형섭, <기술창출의 원천을 찾아서>, 매일경제신문사, 1999, 19쪽.
  6. B. D. Cullity, Elements of X-Ray Diffraction, Addison Wesley, 1956. 필자가 한국의 공과대학 학부생이었던 1990년대 중반에도 이 책을 ‘X선 금속학’ 과목의 교과서로 채택했다.
  7. Hyung Sup Choi, “Torsional Deformation of Aluminum Single Crystals,” M.S. thesis, Notre Dame University, 1955. 이 연구 결과는 1961년 <한국기계학회지> 2권 1호에 “알미늄 단결정의 염좌변형”이라는 제목의 영문 논문으로 발표되었고, 1963년 지도교수와 함께 미국금속학지Transactions of the Metallurgical Society of AIME에 “Torsional Deformation of Aluminum and Magnesium SIngle Crystal”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8. 최형섭, <기술창출의 원천을 찾아서>, 53쪽.
  9. Hyung Sup Choi, “The Function of Aliphatic Acids in Flotation Collection,” Ph.D. dissertation, University of Minnesota, 1958.
  10. 최형섭, 한국남, “회중석의 수용액중에 있어서의 계면현상과 부선특성에 관한 연구”, <대한화학회지> 7 (1963): 17-24쪽.
  11. “미국서 이박학위 최형섭씨가 획득”, <동아일보>, 1958년 6월 25일; “최초로 이박 획득 체미중의 최형섭씨”, <조선일보>, 1958년 6월 27일.
  12. 최형섭,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59쪽.
  13. 1970년대 이후 최형섭의 과학기술 외교 활동의 배경에 대해서는 임재윤, 최형섭, “최형섭과 ‘한국형 발전 모델’의 기원”, <역사비평> 118 (2017 봄): 169-193을 참고하라.
  14. Hyung Sup Choi, “Korea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 Proceedings of the International Future Research Conference, Kyoto, Japan, April 1970.
최형섭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융합교양학부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