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춘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36년으로 그의 나이 중년일 때였다. <동아일보>(5. 7)에 따르면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 우장춘이 동경제국대학에 제출한 학위논문이 통과되어 농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민비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암살당한 우범선의 장남”으로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한 방대한 연구논문은 구미 각국어로 번역이 되었으며 세계 학계의 경이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박사학위 취득은 그가 학문적으로 이루고자 한 벅찬 성취였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인생 행로를 바꾸는 예기치 않은 시작점이 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그의 앞길에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만남과 선택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박사학위는 학문적 권위와 사회적 존경의 상징이었다. 한국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인도 박사학위 취득이 쉽지 않았던 시기였다. 당시 일본은 대학원 과정을 다니지 않더라도 연구성과를 제출하여 학위를 받는 논문 박사 제도가 운영되고 있었다. 그 덕분에 대학 출신이 아닌 사람도 박사학위를 받는 것이 원칙적으로는 가능하나 실제로는 드물고 힘든 일이었다. 연구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으려면 장기간 활동하며 발표한 여러 편의 뛰어난 성과가 필요했다. 박사학위는 우수성을 인정받은 연구자들이 받는 학계의 징표였다. 1930년대 중반까지 이공계(의학 제외) 한국인 박사학위자는 통틀어 5명뿐이었다.

우장춘은 일본 도쿄에서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연히 한국인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그는 혼혈인이었다. 더구나 다섯 살 때 아버지가 한국인 자객으로부터 죽임을 당함으로써 그는 일찍부터 일본인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자랐다. 비록 한국인 아버지 아래에서 태어나 한국 국적을 지녔을지라도 사실은 일본인으로서의 언어·문화·의식을 강하게 지니며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전문학교를 마친 우장춘은 1919년 일본 농사시험장에 입사했다. 제국대학 출신은 벼·보리·밀과 같은 곡물을 담당하는 부서를 배정 받았지만, 그는 인기 없는 원예 부서로 배치되었다. 그는 농사시험장에서 크고 작은 차별을 받았는데, 단적으로는 우수한 성과를 내도 승진이 되지 않아 만년 기수(技手) 신분을 면치 못했다. 그 이유의 하나는 이름의 성으로 불린 우(禹)에서 보듯 완전한 일본인이 아니라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학력이 낮은 전문학교 출신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우장춘은 누구나 인정해주는 박사학위를 받음으로써 이러한 차별로부터 극적으로 벗어나고자 했다.

그의 연구 대상은 시기에 따라 달라져 나갔다. 예상보다 많은 난관을 만났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연구성과가 잘 나오지 않았다. 초기에는 나팔꽃 연구에 매달려 유전자가 변형된 반수체를 찾아냈다. 그는 염색체에 기반한 유전학적 연구에 흥미를 지녔다. 이어서 새로운 관상용으로 인기가 높아지고 있던 페튜니아의 교잡 연구를 통해 놀랍게도 완전 겹꽃이 피는 절대 우성의 존재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박사논문으로까지 생각하고 있던 이 페튜니아에 대한 모든 실험자료는 안타깝게도 1930년 농사시험장 대화재로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당시의 애달픈 심정을 ‘세차게 타오르는 불 속으로 뛰어들려고까지 했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비록 박사학위의 꿈은 허망하게 날아갔지만, 그 덕분에 사카타종묘사는 페튜니아 신형 종자를 해외로 비싸게 대량 수출해 대기업으로 발돋움했다.

 

화재가 일어나기 직전에 우장춘은 또 다른 연구도 진행하고 있었다. 농사시험장 유채연구실의 책임자로 임명받고 유채 연구를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유채는 세계적으로 기름 수요가 증가하면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던 터였다. 가을에 벼를 벤 뒤에 심어 다음 해 모내기 전에 수확하므로 농가의 수익 증대를 위해서도 유용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우장춘은 일본인 연구자들과 함께 유채 육종연구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수확 시기가 빠르고 생산량이 많은 신품종 유채를 개발하기 위해서였다. 늦가을의 화재 때에 나팔꽃이나 페튜니아와는 달리 유채는 시험 재배지에 심어져 있어 다행히 그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유채 연구는 초창기로서 일본은 물론 중국, 서양 등에서 확보한 다양한 품종을 대상으로 실험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우장춘은 겉모습은 비슷해도 저마다 염색체가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상하게 유채 사이에 교잡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도 알고 보면 염색체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유채 연구를 제대로 하려면 유전에 관여하는 염색체를 체계적으로 살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전학에 기반한 유채의 육종연구가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유채 연구에 얼마나 애착을 가졌는지는 이 무렵 태어난 자신의 딸 이름을 유채 잎을 생각하여 요오코(葉子)로 지은 것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우장춘은 유채 연구 과정에서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유채를 비롯한 배춧과 작물의 게놈을 분석한 결과 한 작물의 염색체는 신기하게도 종이 다른 두 작물의 염색체 합과 같았다. 실제로 실험실에서 재연해보니 서로 다른 종의 교잡을 통해 새로운 종이 만들어졌다. 주요 배춧과 작물의 게놈 관계도가 마치 삼각형의 모양을 보여준다고 해서 우장춘의 트라이앵글[그림3]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이른바 ‘종의 합성 이론Species Hybridization’을 완벽하게 입증한 것이었다. 이는 생물체에서 다른 종 사이의 교잡은 불가능하다는 그간의 과학계의 정설을 깨트리는 결과를 낳았다. 식물의 세계에서는 돌연변이가 아니라 종간 교잡을 통해서도 새로운 종이 탄생할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연구논문은 1935년 <일본 식물학 잡지>에 게재되었다. 영어로 쓴 이 논문은 63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지닌 염색체에 기반한 고전 유전학의 빛나는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듬해에 우장춘은 이 연구성과를 주논문으로 하고 그간 발표한 여러 편의 논문을 부논문으로 하여 마침내 도쿄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때 그는 자신을 도와준 일본인 연구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토록 염원하던 오랜 개인적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 우장춘은 승진에 대한 열망을 강하게 드러냈다. 16년 동안 머무르던 기수의 자리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외지로 나가는 조건으로 승진을 하는 것인데 그는 이마저 마다하지 않았다. 마침 중국의 칭다오 면화 시험장 책임자 자리가 공석이어서 그곳 시찰에 나서며 장장이 되고 싶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어떤 승진의 기회도 얻지 못했다. 오히려 박사학위를 받음으로써 그가 느낀 좌절은 더 크게 다가왔다.


한편, 우장춘의 박사학위 취득 소식이 알려지자 한 한국인이 그를 찾아왔다. 일본의 니혼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신문사에서 기자로 활동하던 김종이었다. 그는 농사시험장을 방문하여 수시로 우장춘과 교류를 했다. 1937년에는 “한국인 학자 및 기술가 중 최고봉”이라며 우장춘의 박사논문을 한국 신문에 자세히 소개했다. 이듬해에 그의 주선으로 우장춘은 “조선의 육종계는 개발되지 않은 상태로 품종 개량이 급선무”라는 주장을 담은 육종 연구에 관한 글을 한국 신문에 실었다. 이렇게 우장춘은 김종이라는 사람을 매개로 한국과의 인연이 새롭게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우장춘은 혈족을 찾아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아버지 본부인의 묘소를 참배했고 이복 누나도 때때로 만났다.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인 이모의 아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왔을 때는 자기 집에 데리고 있기도 했다. 나아가 교토의 다키이종묘회사로 옮긴 후에는 한국인 과학자들과도 교류를 벌였다. 교토제국대학 교수로 있던 이태규와 이승기는 빈번하게 만남을 가진 주요 인물이었다. 한국의 이학·공학·농학을 대표하는 최고 과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일본에 있던 많은 한국인은 서둘러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우장춘은 한국으로 오지 않고 일본에 머물렀다. 그동안 널리 알려진 것과는 달리 그는 애국심이 투철한 것도, 아직은 한국을 확고히 조국으로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그 자신은 한국과 한층 가까워지긴 했지만, 일본인 부인을 포함하여 그의 가족은 일본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한국과 일본의 경계인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나이도 어느덧 47세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그와 인연이 깊은 김종(경남도 농림국장)의 주도로 부산지역의 유지들을 중심으로 우장춘 환국 추진 운동이 펼쳐졌다. 일본에 남아있던 세계적인 과학자 우장춘을 한국으로 데리고 와 낙후한 농업과학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자는 것이었다. 이들은 1947년부터 우장춘의 존재를 다방면으로 알리고 그의 유치에 대해 의견을 모았다. 이러한 사실은 바로 우장춘에게 전달되고 지인을 통해 그의 귀국을 적극 설득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장춘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일본에는 많은 가족이 있었고, 일본인 어머니와 부인은 그가 한국으로 가는 것을 반대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당시 한국은 정치적 혼란으로 과학연구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도 매우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오랜 고민을 거듭한 끝에 우장춘은 한국으로 가서 과학연구에 헌신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한국에서는 경남지사를 지낸 김병규를 대표로 하고 부산지역의 저명인사들이 두루 참여하는 우장춘 환국 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일본인 소유의 농지를 불하받아 연구 부지를 마련하고 1949년에는 정부 지원을 받는 한국농업과학연구소를 만들었다. 시민들로부터 모은 1백만 원은 일본에 있는 우장춘에게 보내 가족의 생활비로 보태도록 했다. 한국에서 적극적인 유치 노력이 일어남에 따라 한국에 대한 애정이 쌓여가고 있던 우장춘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호응하게 되었다.

우장춘은 가족을 일본에 남겨두고 홀로 한국으로 향하는 배를 탔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두 달 전이었다. 그는 양복을 잘 차려입고 그 위에는 멋진 코트까지 걸쳤다. 그의 짐 보따리에는 과학도서, 실험기구, 종자 등이 잔뜩 들어있었다. 환국 추진위원회가 가족 생활비로 보내준 돈으로 구입한 것이었다. 그가 탄 배가 부산항에 도착하자 부둣가에는 그를 환영하는 인파로 떠들썩했다. 배에서 내린 우장춘은 ‘환영 우장춘 박사 환국’이라 쓴 현수막 뒤를 따랐다. 이윽고 동래원예고등학교에서 귀국 환영회가 성대하게 열렸는데, 그는 주최 측이 마련해준 한복을 난생처음 입고 나타났다. 그 덕분에 참석자들은 그를 영락없는 한국인으로 알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김병규 위원장은 “우리는 일본의 대마도와도 우장춘을 바꾸지 않겠다”며 그의 귀환을 뜨겁게 반겼다. 우장춘을 환영하는 축전이 여러 곳으로부터 왔는데, 이승만 대통령도 “돌아와 주셔서 고맙소”라는 말을 전했다. 이에 대해 우장춘은 다음과 같이 귀환에 임하는 자세를 밝혔다.


“그동안 어머니의 나라 일본을 위해 일본인 못지않게 일했다.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나라 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이 나라에 뼈를 묻겠다.”

우장춘은 연구소 소장에 취임한 직후 농촌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전국 곳곳을 둘러보았다. 당시 농촌은 매우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었으며 농민들은 생계를 유지하는 것마저 힘겨운 상황이었다. 대부분의 농가는 품질이 낮고 수확량이 적은,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재래 종자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우량 품종의 개발과 그 안정적 확보는 한국 농촌이 직면하고 있는 매우 시급한 과제였다. 이에 따라 우장춘은 한국 농촌 부흥에 도움이 될 육종사업과 후진양성을 자신의 주요 목표로 삼았다. 연구소는 연구자들이 모여들고 과학 활동이 활발히 벌어지는 그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그의 연구소에는 우장춘의 명성을 듣고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비록 보수와 근무조건이 열악한 비정규직일지라도 그와 함께 일하고 싶어서였다. 그는 한국 농업 발전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응용 가능성이 높은 과학연구에 치중했다. 일본에서와는 달리 학문적 연구가 아니라 실용적 연구, 논문 발표가 아니라 우량 품종의 개발이었다. 특히 사회적으로 수요가 큰 배추, 무, 고추 등과 같은 작물의 육종연구에 관심을 크게 기울였다. 그는 농림부 장관 제의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과학연구에만 정진했다. 아침 일찍부터 늦은 저녁까지 실습장에서 후학들과 육종연구에 매달렸다. 연구소 책임자임에도 그는 항상 작업복과 검정 고무신 차림으로 생활하여 고무신 박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의 흔적은 연구소가 정기적으로 발간한 보고서의 실험 보고에 촘촘히 담겼다.

후학들 사이에는 우장춘에 관한 몇몇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중에서도 연구소 사람들에게 예리한 관찰력을 강조한 이야기는 아주 유명하다. 그는 “눈빛이 식물의 잎을 뚫어 그 뒤까지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과학 연구자는 연구 대상으로 삼은 사물의 상태를 한눈에 꿰뚫어 그 내면까지도 훤히 들여다볼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경험이 없는 연구소 사람들에게 육종에 관한 지식과 기술을 일일이 가르쳐주었다. 연구조직의 효과적 구성을 위해 경력자와 초보자로 구성된 연구팀을 여러 개 두고 팀별로 특화된 연구과제를 장기간 맡도록 했다. 팀별로 차별화된 전문성을 갖추고 세대 전승이 잘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우장춘은 채소 육종연구를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추진했다. 첫 단계는 1950-55년으로 기존 품종으로부터 좋은 채소 종자를 찾아내 그 씨앗을 우리 스스로 자급자족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재래 및 외래 품종으로부터 선별된 우수한 종자를 외지와 격리된 전남 진도에서 대량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다음 단계는 1955년부터 서로 다른 품종들 사이의 교잡 시험을 거쳐 우량 일대잡종 종자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채소의 불화합성과 웅성불임성을 활용하여 잡종강세를 지닌 신품종을 만들고자 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일대잡종 기술을 이용한 배추, 양파, 양배추 등이 여러 해의 연구를 거쳐 1960년대 들어 잇달아 나오게 되었다.

1958년에는 한국 농학회 주도로 그의 회갑 축하연이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이때 그가 발표한 논문들을 모아 펴낸 책은 과학자를 대상으로 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념논문집일 것으로 판단된다. 그만큼 학계에서나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채소육종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내자 이어서 우리나라의 주곡인 벼 연구에도 나섰다. 식량의 자급자족에 도움이 될 새로운 품종의 벼를 개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짐에 따라 더 이상의 연구는 수행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병상에서도 시험 중인 벼를 보고자 했던 것에서 보듯 아쉬움이 컸던 모양이다. 급기야 1959년 그는 숨을 거두었고 연구소가 위치한 인근 지역에 영원히 묻혔다. 한국 정부는 그의 연구업적을 높이 기려 문화포장을 수여했다.

2000년에는 미국, 영국, 일본, 한국 등 10여 개 나라가 주축이 되어 배추 게놈 국제 연구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때 배춧과 작물의 분류는 우장춘이 종의 합성 연구에서 밝힌 게놈 분석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한국 배추가 게놈 분석의 표준 품종으로 선정되었는데, 이는 우장춘 이래로 발전되어온 한국 배추의 우수성이 널리 받아들여진 덕분이었다. 이처럼 현재까지도 배추 연구는 육종연구의 권위자 우장춘으로부터 그 물줄기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과학자로서 우장춘의 드라마틱한 삶에는 몇몇 중요한 전환점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1936년 박사학위 취득은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일대사건이었다. 그가 박사학위 논문에서 밝힌 종의 합성 이론은 세계적으로도 알려져 그의 명성을 드높였다. 그는 일본 과학계의 최고 일원으로 올라섬으로써 학술대회의 주요 연사로 초대받곤 했다. 박사학위 취득은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진 그의 연구업적을 과학계에서 인정해주는 징표였다, 그것도 전문학교 출신이 일본 최고의 도쿄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박사학위 취득은 그의 인생 행로를 크게 바꾸는 중요한 전기가 되기도 했다. 차별로 어려움을 겪던 우장춘은 박사학위에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승진이 좌절됨에 따라 더 큰 실망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하며 한국인들과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했다. 해방 후에는 한국에서 일어난 우장춘 환국 추진 운동에 응해 모든 가족을 남겨두고 한국으로 건너오는 결단까지 내렸다. 일본인에서 한국인으로 그의 정체성이 바뀌게 된 것이었다.

이로써 우장춘은 일본의 권위 있는 과학자에서 한국 농학의 대부로 사회적 위상에서 대변화가 일어났다. 그 전환의 계기는 1936년 박사학위 취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에서 최고의 인정을 받는 순간 뜻하지 않게 한국과의 연결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급기야는 그의 민족적, 학문적 정체성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뒤따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한국의 농업연구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 그가 주도한 채소육종이 가장 빠르게 발전해 나가는 과학 분야로 자리 잡았다.

참고문헌

 

  1.  김근배, “우장춘의 한국 귀환과 과학연구”, 한국과학사학회지 26권 2호 (2004).
  2.  김근배, <우장춘: 종의 합성을 밝힌 과학 휴머니스트>  (다섯수레, 2009).
  3.  쓰노다 후사코 지음, 오상현 옮김, <(우장춘 박사 일대기)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 (교문사, 1996).
  4.  우장춘박사 회갑기념 논문집 편찬위원회,  우장춘박사 회갑기념 논문집 (경향신문사, 1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