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3월, 미국 뉴욕공과대학교 전기물리학과 부교수에 재직 중이던 정근모(鄭根謨, 1939~)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는 당시 한국 과학기술처의 초대 장관이었던 김기형 장관으로부터 발송된 것이었다. 김기형 장관은 정근모 교수에게 “귀하의 이공계 대학원 설립지원 구상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토의하고 싶으며, 또한 조국의 발전상을 귀하가 직접 목견도 하시고…의견도 교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실 겸 일시 귀국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로부터의 초청 메일이었다. 사실 이 초청을 받기 몇 개월 전 정근모는 미국국제개발처United State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USAID에 <한국의 새로운 응용과학기술대학원 설립안The Establishment of a New Graduate School of Applied Science and Technology in Korea>이라는 사업제안서를 제출한 바 있었다. 이 사업제안서가 미국국제개발처를 거쳐 한국 정부의 손에 들어갔고 이를 본 한국 정부가 정근모를 공식적으로 초청한 것이었다. 초청받은 정근모는 잠시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하지만, 정근모는 이 방문이 일시적일 줄 알았지, 과학자로서의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놓으리라 생각하지는 못했다.

 

 

정근모는 사실 어렸을 때부터 유망한 물리학도였다.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수석 입학한 정근모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검정고시를 수시로 합격하였다.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정근모는 1955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하였다. 물리학을 선택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앞으로는 과학기술의 시대가 될 테니, 정치인이 되든 법률가가 되든 과학을 알아야 한다”는 물리학자 권영대 교수의 조언이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1959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한 정근모는 이듬해 미국 미시간주립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응용물리학을 전공한 정근모는 분자분광법을 전공한 Paul M. Parker 교수의 지도하에 <비대칭 상단 분자의 진동-회전 해밀토니안Molecular Asymmetric-Top Vibration-Rotation Hamiltonians>이라는 논문으로 1963년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박사학위 논문은 해밀토니안 양자역학을 기반으로 분자의 구조 – 특히 비대칭적 구조를 갖는 다원자 분자의 구조 – 를 파헤치는 이론 물리 연구였다.

 

 

다원자 분자란 H2O (물), NH3 (암모니아), CH4 (메탄)과 같이 3개 이상의 원자로 구성된 분자를 일컫는다. 이런 분자는 단원자분자나 이원자분자에 비해 비대칭적 구조를 가지는 경향이 있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H2O (물) 또한 산소를 두고 수소가 대칭적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산소를 중심으로 두 개의 수소가 105도 간격으로 벌어져 3차원 공간상 비대칭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당시 이렇게 비대칭적 구조를 띠고 있는 분자의 경우 정확한 분자 구조 및 힘의 상호작용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보통의 경우 분자분광법을 이용하여, 즉 분자와 빛의 상호작용을 이용하여, 해당분자에 대한 정보, 예를 들어 결합길이, 결합각도, 결합힘함수 등을 파악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다양한 비대칭성을 가진 분자의 경우, 분자 내부의 여러 상호작용 때문에 일반적인 분자분광법, 적외선분광법으로 해당 분자의 정보를 정확히 파악해 내기가 쉽지 않았다.

이에 정근모는 해밀토니안 양자역학을 이용하여 비대칭적 분자 구조를 파헤치는 이론적 틀을 연구하고자 하였다. 3차원 결정 공간에 존재하는 점 군point group의 종류를 세 가지로 구분하고 – orthorhombic, monoclinic, triclinic point groups – 각각의 경우에 해밀토니안 방정식을 어떻게 변형 또는 조율할 수 있는지 연구했다. 그의 박사 연구는 당시 미국공군과학연구실U.S. Air Force Office of Scientific Research, AFOSR의 지원을 받았다. 사실 정근모가 박사학위를 하던 1950년대 후반은 미국이 소련의 스푸트니크 발사로 인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때였다. 이에 미국 정부는 1958년 미국항공우주국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 NASA을 창설하는 등 관련 연구에 많은 지원과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었다. 정근모의 연구는 물과 같은 비대칭 분자 구조를 파헤치는 이론적 연구로, 우주에 물이 있는지 없는지 등, 지구와 우주의 물질 구성 및 구조를 이해하는 데 직간접적인 시사점이 있었다. 1950년대 후반 스푸트니크 충격과 함께 관련 과학기술에 대한 지원이 높아진 시점에 미국에서 물리학을 연구한 것은 정근모에게 행운이자 기회였다.

양자역학을 기반으로 물리학의 최전선에서 연구하고 있던 정근모는 졸업 직후인 1963년 사우스플로리다대학교 물리학과 조교수에 임용되었다. 그 당시 그의 나이 23이었으며 지역 신문에서는 그를 “소년 교수boy professor”라고 칭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사우스플로리다대학교에서 멈추지 않았다. 정근모는 연구에 더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원했고, 1964년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플라스마물리연구소Princeton Plasma Physics Laboratory, PPPL로 향하게 되었다. 당시 플라스마물리연구소는 고온 플라스마를 자기장을 이용해 가두어두는 스텔라레이터Stellarator 장비를 개발하여 가지고 있었다. 이 장비 덕분에 플라스마물리연구소는 미국 핵융합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스텔라레이터 실험팀에 들어가게 된 정근모는 원래는 이론 물리학자였지만, 이 최첨단 장비를 가지고 실험하면서 핵융합 연구자로 거듭났다. 플라스마물리연구소에서의 경험을 인정받은 정근모는 1966년 미국 MIT 핵공학과에서 핵융합 연구프로젝트를 주도하던 David J. Rose 교수의 연구팀에 연구 교수로 합류하게 되었다.

이렇게 정근모는 과학자로서 경력을 착실히 쌓아가고 있었다. 이론 물리에서 실험 물리로, 양자역학에서 핵융합으로 연구 영역을 확장해가며, 미국의 최첨단 과학기술 지식을 흡수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연구를 위해 어려운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사실 정근모가 사우스플로리다대학에 계속 있었더라면 소년 교수로 이름을 날리며 안정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미 정근모는 당시 결혼을 하고 슬하에 자식도 세 명이나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새로운 지역에 새로운 삶을 위해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훗날 정근모는 이를 두고 자기중심적 결정이었다며 가족에게 감사 마음을 표했지만, 이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1966년 미국 MIT가 있는 케임브리지로 이사 온 정근모는 David J. Rose 교수 연구팀에서 핵융합 효율성 확보를 위해서 해결해야 하는 플라스마 난류 문제 연구를 주도했다. 그리고 약 1년 뒤 정근모는 MIT에서의 연구 경험을 인정받아 1967년 미국 뉴욕공과대학교 전기물리학과 부교수에 임용되었다.

정근모가 케임브리지에 있었던 약 1년여간 시간은 그의 인생에 결정적이었다. 그 이유는 물론 이 시기가 그를 과학자로서 한 단계 성장시켜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를 조금씩 과학정책가의 길로 인도했기 때문이다. 정근모는 MIT 핵공학과에서 핵융합 연구를 진행하면서, MIT에서 차로 약 10분 거리에 자리 잡고 있던 하버드 행정대학원에 다녔다. 연구 교수 생활과 학생 생활을 같이한 셈이었다. 당시 하버드 행정대학원에는 Don K. Price와 Harvey Brooks가 운영하는 과학기술정책 세미나Seminars on Science, Technology, and Public Policy가 열리고 있었다. 훗날 이 세미나는 1976년 하버드 케네디스쿨의 과학기술정책프로그램Program on Science, Technology, and Public Policy으로 진화하였다. 행정대학원 학생으로서 정근모는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에 이 세미나에 참석하며 본인이 수행하고 있던 핵융합 프로젝트와는 별개로 미국 과학기술정책의 면모와 실상에 대해 하나씩 배워갔다.

 

 

사실 정근모는 원래 과학기술정책에 많은 관심을 보이던 인물이었다. 유학을 오기 전 1959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할 당시 정근모는 잠시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진학하기도 했었다. 당시 물리학에서 행정학으로 진로 변화에 대해 그는 원래 “자연과학을 전공하면서도 사회과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본질적으로는 가난한 한국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이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은 1950년대부터 추진된 미네소타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미국, 한국 정부의 파격적인 지원과 함께 미국 교수진들이 포진해 있는 학과였다. 교과과정도 미국 석사과정과 유사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짧게나마 행정 및 정책의 기본 과정을 배우며 그는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흥미를 키워갔다. 그는 1959년에 막 출범한 원자력원에 수습행정원으로 파견 근무를 나가기도 했었다. 비록 유학으로 인해 졸업은 하지 못하고 행정대학원 수료에 그쳤지만, 그는 이 경험을 통해 한국의 국력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과학 못지않게 이를 견인하는 과학기술정책의 중요성 및 역할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이런 그가 과학자로서의 삶을 살면서 한 켠에 접어두었던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관심사를 하버드 행정대학원에 와서 다시 꽃피운 것이었다. 하버드 행정대학원 과학기술정책 세미나는 당시 <정부와 과학Government and Science> (1954), <과학 사유지The Scientific Estate> (1965) 등의 저술로 유명한 Don K. Price와 <과학의 정부The Government of Science> (1968)을 집필한 Harvey Brooks가 운영하고 있었다. Don K. Price는 정치학자 출신으로 미 행정부의 예산국, 국방부를 거쳐 포드재단 부회장으로 활동한 바 있었으며, Harvey Books는 물리학자 출신으로 국가과학자문위원회에서 장기간 활동하였다. 정치학과 물리학의 경계를 뛰어넘으며 두 학자가 운영한 과학기술정책 세미나는, 물리학자 출신의 과학기술정책에 관심 있었던 정근모에게 훌륭한 지적 자극제와 영감이 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정근모는 자신의 연구 및 미국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바탕으로 어떻게 한국의 과학기술을 증진할 수 있을지 구체적 대안과 수단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MIT에서 핵융합 연구를 계속 진행하면서 하버드 행정대학원 수료를 위해 작성한 논문이 <후진국에서의 두뇌유출을 막는 정책 수단>이었다. 이 논문은 기본적으로 왜 훌륭한 과학자들은 미국에 남고자 하는지, 어떻게 하면 한국과 같은 후진국에 훌륭한 두뇌를 붙잡아둘 수 있는지, 이 두뇌들이 어떻게 후진국 발전과 더 나아가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고민한 논문이었다. 이는 곧 정근모 자신에게 되묻는 질문이기도 했다. 사우스플로리다대학교, 프린스턴 플라스마물리연구소, MIT 핵공학과 등 좋은 환경에서 수학하면서 정근모는 과학자로서 성장하는 데 있어 미국이 어떤 지적, 문화적 자극을 제공하는지 경험하였다. 이런 경험을 한 미국의 유수 과학자들은 자신의 고국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꺼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우수 두뇌들 없이 한국과 같은 개발도상국이 발전할 길이 만무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떤 환경을 구축해서 해외의 우수 두뇌들을 한국으로 끌어들일 것인지가 관건이었는데, 정근모는 이 논문에서 중요한 것은 우수 두뇌들이 한데 모여있는 과학기술 연구·교육기관을 한국에 설립하는 것임을 주장했다. 결국 두뇌는 두뇌들이 있는 곳으로 가기 마련인데, 그런 연구·교육 공간을 한국에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후진국에서의 두뇌 유출을 막는 정책 수단>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 새로운 연구·교육기관인 한국과학원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 KAIS이 설립되는 데 초석이 되었다. 미국 뉴욕공과대학교 전기물리학과 부교수에 임용된 정근모는 1967년 케임브리지를 떠나 뉴욕에 정착했다. 뉴욕공과대학 교수로 일하던 중 1969년 1월 정근모는 <뉴욕타임스>에서 존 해너 미시간주립대학교 총장이 미국국제개발처United State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USAID 처장을 맡았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존 해너 총장은 정근모가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할 때부터 각별한 인연을 맺었던 인물이었다. 존 해너 총장은 정근모에게 특별장학금을 수여하기도 했었고, 정근모의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하기도 했었다. 미국국제개발처 처장이 된 존 해너 총장은 당시 취임사에서 이제부터 “후진국에 물고기를 주는 대신 낚시 방법을 가르칠 것이다Instead of giving fish, we will teach them how to fish”라는 취지의 대외원조 전략 변화를 시사하였다. 이는 <뉴욕타임스>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이를 본 정근모는 자신의 논문을 존 해너 처장에게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워싱턴 미국국제개발처를 방문하였다.


 

사실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는 대외원조 정책의 흐름이 변하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이 고조됨과 함께 미국 내에서는 물자 지원 중심의 대외원조 정책에 회의적인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었다. 이에 미국국제개발처는 직접적인 물자 지원 대신 각 국가가 자체적인 개발 역량을 갖출 수 있는, 즉 직접 낚시를 할 수 있게, 지원 정책을 변경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마땅한 구체적 사례를 찾지는 못하고 있었다. 지속되는 냉전 속에 대외원조 정책을 견지하되, 직접적인 물자 지원은 부담을 겪고 있던 상황에서, 미국국제개발처가 새로운 대외원조 정책 방향을 모색하였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인지에 관한 구체적인 사례는 발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찰나에 정근모가 <후진국에서의 두뇌 유출을 막는 정책 수단>을 들고 존 해너 처장을 방문했다. 정근모는 본인의 논문에서 제안하듯 후진국에게 훌륭한 연구·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것이 일시적으로 물자를 지원하는 것보다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 강조하였고, 존 해너 처장은 정근모에게 논문을 미국국제개발처 사업계획서로 고쳐볼 것을 제안하였다. 정근모는 존 해너 처장과의 만남이 한국에게 큰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했고, 존 해너 총장은 정근모의 사업계획서가 미국국제개발처의 새로운 대외원조 정책 방향을 제공해 주리라 생각했다.

1960년대 후반 미국 대외환경의 변화와 정근모-존 해너 처장의 개인적인 인연이 어우러지면서, 정근모는 존 해너 처장의 제안대로 1969년 10월 자신의 논문을 <한국의 새로운 응용과학기술대학원 설립안The Establishment of a New Graduate School of Applied Science and Technology in Korea>이라는 사업제안서로 만들어 미국국제개발처에 제출했다. 해너 처장은 이를 미국국제개발처의 주한 존 휴스턴 단장을 통해 김학렬 경제부총리에게 전달하였고, 만약 한국 정부가 이 사업을 추진한다면 미국국제개발처가 적극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김학렬 부총리는 이를 과학기술처에 전달하고 경제동향보고회에서 보고하도록 하였다. 사실 과학기술처에 이공계 대학원 설립 혹은 강화는 숙원사업 중 하나였다. 당시 한국의 대학원 상황이 열악했기 때문이다. 미네소타 프로젝트 이후 서울대 등 일부 대학에 학부 교육 기반은 조금이나마 갖추어졌지만, 대학원 교육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예를 들어 1947년부터 1966년까지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배출된 석사는 38명, 박사는 1명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68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를 중심으로 연구소 부설 교육기관을 세우는 <이공계 대학 및 대학원 육성방안에 관한 조사연구>가 수행되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교육기관을 신설하는 안은 기존 대학원을 위태롭게 한다는 반대에 의해 힘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이공계 대학원을 세우는 안이 미국국제개발처에 의해 전달된 것이었고, 과학기술처는 보고회 준비 과정에서, 이 안의 초고를 작성한 정근모를 공식 초청하였다. 이것이 정근모가 1970년 3월 김기형 과학기술처 장관에게 받은 초청 편지였다. 정근모는 일시 귀국하였고, 4월 8일 당정협의회에서 <한국의 새로운 응용과학기술대학원 설립안>을 번역, 수정하여 <한국과학원의 설립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하지만 역시나 새로운 교육기관을 신설하는 안은 기존 대학원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는 문교부의 반대에 맞닥뜨렸다. 새 대학원을 설립하느니 그 자원을 기존 대학원 강화에 쓰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근모가 제안한 안은 해외의 두뇌를 유치할 수 있는, 즉 그만큼의 인센티브와 지원을 약속하는, 기존 한국의 대학원과 질적으로 다른 “지식의 센터”였다. 물론 정근모는 한국의 행정 체제 안에서 이를 어떻게 구현할지 고민했지만, 당시 남덕우 재무장관이 당정협의회에서 이를 교육예산이 아닌 경제개발특별예산으로 추진하자고 제안함으로써 실마리가 풀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승인하였고, 새로운 이공계 대학원 설립은 경제개발특별예산으로, 문교부가 아닌 과학기술처 주관으로 추진하라고 지시하였다. 한국에 과학기술처 산하 교육기관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당정협의회를 마친 정근모는 뉴욕공과대학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한국과학원 설립이 본격화되면서 뉴욕으로 돌아온 지 3개월이 채 되지 않아 정근모는 조사단에 참가해 달라는 미국국제개발처의 요청을 받고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일명 “터만 조사단”이라고 불리는 이 조사단에는 정근모를 비롯해 스탠퍼드대학교 부총장이었던 Frederick Terman, 서던메소디스트대학교 부총장 Thomas L. Martin, 오리건대학교 대학원장 출신 Donald L. Benedict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조사단은 본격적으로 한국과학원의 설립 타당성, 실현 가능성, 운영 방향 등을 점검하며 약 50일간 조사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정근모는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당시 도쿄에 체류하고 있던 존 해너 처장을 만나 한국에서의 조사 현황을 보고했고, 해너 처장은 1970년 9월 한국을 방문해 김기형 과학기술처 장관과 만나 구체적인 지원 내역을 협의했다. 결과적으로 미국국제개발처는 한국과학원 설립을 위해 총 600만 불의 차관 및 자문을 제공하기로 하였다. 정근모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갔고 조사단 위원과 함께 보고서를 마무리하고 1970년 12월 <한국과학원 설립에 관한 조사보고서Survey Report on the Establishment of the 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를 미국국제개발처에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한국과학원 설립의 뼈대가 되었다. 조사보고서는 한국과학원이 획기적인 원천 연구를 수행하기보다는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당장 한국의 산업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과학기술 인력을 양성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훌륭한 교수진 및 학생을 모집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파격적인 지원 및 제도가 뒷받침 되어야함을 지적했다. 과학기술처 산하 교육기관임을 활용하여 한국과학원은 그 당시 다른 문교부 산하 대학의 교수들에 비해 파격적인 연봉과 처우를 제안했다. 한국과학원 교수 연봉은 당시 한국인들의 평균 연봉의 약 4배, 일반 대학 교수들 연봉의 약 2배였으며, 거주할 아파트 및 안식년이 보장되었다. 한국과학원 입학생들에게는 전원 기숙사 및 장학금이 제공되었고, 남학생들에게는 군 복무 대신 병역 특례를 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지금까지 한국 교육 시스템에서 볼 수 없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미국에 있던 우수한 한국 과학자들이 하나둘 한국과학원에 관심을 보이며 교수로 귀국하였다. 뉴욕공대에 있던 정근모는 재미 한인 과학자들에게 한국과학원을 알리며, 초기 한국과학원 교수 임용 과정을 지원하는 역할을 도맡아 했다.

1971년 2월 한국과학원이 공식적으로 개교했다. 그리고 정근모는 한국과학원 초대 부원장직을 제안받았다. 1970년 3월 <한국의 새로운 응용과학기술대학원 설립안>을 설명하기 위해 잠시 귀국했을 때만 해도, 정근모는 이 안이 이렇게 실제로 구현되고 한국 과학기술정책계에 깊이 관여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1960년대 변화하는 미국 대외원조 정책의 변화, 한국 과학기술 정책계 내의 이공계 대학원에 대한 고민, 정근모의 개인적인 인연 등이 결합하며 실제로 한국과학원은 개교하게 되었고, 부원장직을 제안받은 정근모는 뉴욕공과대학 전기물리학과 부교수직을 내려놓고 뉴욕을 떠나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이것이 정근모 개인적으로는 과학자로서의 삶을 포기하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정근모는 과학과 과학정책 사이에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필요한 일이라면 그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한국 과학자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과학과 과학정책의 학문 간 경계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를 위하여 프린스턴에서 케임브릿지까지, MIT에서 하버드 행정대학원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학문과 경험을 쌓아왔다. 그 결실 중 하나가 한국과학원 설립이었으며, 정근모는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어엿한 과학기술정책가가 되어 한국으로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과학기술정책가로서 한국과학재단 이사장으로도 활동하기도 하고, 두 차례 과학기술처 장관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집단연구 사업의 효시라고 일컬어지는 SRC, ERC 사업을 한국 내에 정착시키기도 했고, 한국과학기술한림원, 고등과학원 등을 설립하는 데도 앞장섰다. 이러한 제도적 마련과 함께 그는 물리학도로서 핵융합 및 원자력 기술에 관한 관심도 놓치지 않았다. 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 사장으로 재직하며 훗날 한국형 원전 표준 설계가 될 연구 사업을 주도하기도 했고, 한국핵융합연구시설(KSTAR) 확충에 앞장서기도 했다. 먼 길을 돌아 정근모는 2014년 석좌교수로 한국과학원 즉 오늘날 카이스트에 다시 부임했다. 그곳에서 카이스트 학생들을 만난 정근모는 <과학기술입국>, <과학기술정책수단> 등의 강의를 개설하며, 오늘날 최첨단 과학기술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누구를 위해 과학기술을 공부하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과학기술을 공부하고 있는지 물었다. 그리고는 과학자이자 과학기술정책가로서의 자신의 삶을 회고하였다. 자신의 삶을 통해 그는 학생들이 과학/사회, 연구/정책, 한국/외국의 경계를 넘나들며 세계에 이바지할 수 있는 꿈을 갖길 원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이 경계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잘 알고 있었다. 다양한 경계를 넘나들었던 정근모의 삶은 한국의 과학기술, 교육, 연구 정책에 두루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 한두 개의 전공에만 매몰되어 있는 학생들에게 경계 너머의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중요한 귀감이 되었다.

 

연재글    한국 과학기술의 결정적 순간들

  1. 1936년 우장춘, 감격의 도쿄제국대학 박사학위 취득
  2. 1939년 석주명, 한반도 나비 연구 총정리
  3. 1976년 이호왕, 유행성출혈열 병원체의 발견
  4. 1970년 정근모, 과학자로 살 것이냐 과학정책가로 살 것이냐
  5. 1966년 김삼순, 한국 최초의 여성 농학박사 탄생
  6. 1942년 강영선, 유전학 연구 네트워크에 첫 발을 내딛다
  7. 1977년 허문회, 통일벼로 쌀 자급 달성
  8. 2004년 최형섭, 영원한 ‘과기처 장관’으로 남다
  9. 1982년 전길남, 네트워크 세계에 한국을 연결하다

참고문헌

  1. 카이스트 아카이브, https://archives.kaist.ac.kr/
  2. 정근모, 『기적을 만든 과학자』 (Korea.Com, 2021)

  3. 정근모 개인 아카이브 (저자 소장)

  4. Kun-Mo Thomas Chung, “Molecular Asymmetric-Top Vibration- Rotation Hamiltonians,” (PhD diss., Michigan State University, 1963)

  5. Kun-Mo Chung, "The Establishment of a New Graduate School of Applied Science and Technology in Korea" (KAIST, 1969)

  6. Donald L. Benedict, Kunmo Chung, Franklin A. Long, Thomas L. Martin, Frederick E. Terman., "Survey Report on the Establishment of the 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 December 1970, http://large.stanford.edu/history/kaist/docs/terman/summary/.

  7. Dong-Won Kim and Stuart W. Leslie, "Winning Markets or Winning Nobel Prizes?: KAIST and the Challenges of Late Industrialization," Osiris 13 (1998): 154-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