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는 어디에서 왔는가, 그리고 어떻게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가?
2부에서는 빅 히스토리의 주요 사건들을 <우주>, <생명>, <인류>, 세 묶음으로 나누어 정보의 관점에서 다시 읽는다. <우주>는 정보가 생성되고 작동하기 위한 물리적 무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다룬다. 정보에는 그것을 담을 매체가 필요하고, 매체가 존재하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 법칙과 물질이 먼저 있어야 한다. <생명>은 생명 정보의 진화를 다룬다. 생명의 탄생으로 정보는 자신을 복제하는 기능에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에이전트 기능을 결합해 진화의 경로를 열었다. 이후 생명의 역사는 다양한 생명체가 등장해 더 복잡한 정보를 더 정교하게 처리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온 과정이다. <인류>는 인류의 등장으로 출현한 문화 정보를 다룬다. 문화 정보는 유전자가 아니라 언어와 문자로 전달되고, 개체가 아니라 집단에 축적된다. 생명 정보와 문화 정보, 이 두 계통의 진화는 서로 다른 논리와 속도로 진행해 왔지만,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오늘의 인간은 수십억 년의 생물학적 진화가 빚어낸 몸과 뇌를 가지고, 수만 년의 문화적 진화가 축적한 언어와 제도와 기술 위에서 살아간다. 현재의 인류는 이 두 계통의 진화가 함께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우주
: 우주의 탄생 – 정보의 물리적 기반의 출현
우주의 탄생으로 시공간과 물질이 생겨났다. 정보의 관점에서 이것은 정보를 담을 매체가 생성됨으로써 정보의 물리적 기반이 출현한 것이다. 정보의 포괄적 정의를 통해 강조했듯이, 정보는 추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반드시 물리적 상태의 차이로 존재한다. 어떤 매체든 구별할 수 있는 상태들이 있어야 정보를 담을 수 있다. 빅뱅우주의 탄생 이전은 아직 검증된 물리학 이론이 다룰 수 있는 영역 밖이므로, 빅뱅 직후의 시공간과 물질 상태를 정보의 출발점으로 삼는다.1 탄생 직후에 우주를 채운 물질은 쿼크와 렙톤으로 불리는 기본 입자들이고, 이들은 네 종류의 힘을 통해 상호작용한다. 팽창하면서 식어가는 우주는 이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하는 물질의 상태를 바꾸고, 그것이 어떤 물질 구조와 정보 매체가 출현할지를 결정한다.
: 우주 구조 형성과 별의 탄생 – 차이에서 구조로
우주의 초기 상태는 매우 평평하고 균일한 상태인데, 완벽하게 평평하고 균일한 상태는 담을 수 있는 정보가 매우 제한적이다. 우주가 물질적 패턴을 형성하고, 다양한 구조와 정보를 품게 되는 근원은 우주의 초기 상태가 완벽하게 평평하고 균일한 상태가 아니고, 작은 크기의 씨앗 (에너지밀도) 요동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표준 우주론에서는 급팽창 과정이 우주 전체를 매우 평평하고 균일한 상태로 만들지만, 장차 우주 구조로 자라날 작은 씨앗 요동도 동시에 만든다. 급팽창은 급팽창장의 퍼텐셜에너지에 의해 일어나는데, 그 에너지는 근본 입자로 구성된 고온의 플라스마 상태의 물질로 전환된다. 한편, 급격한 가속 팽창은 급팽창장의 양자 요동을 물질의 에너지밀도 요동으로 변환시키는데, 이것이 씨앗 요동이 된다. 씨앗 요동은 물질 지배 시대가 시작되면 중력의 작용으로 성장하게 되고, 이에 따라 물질들이 다양한 규모로 뭉치면서 우주 구조가 형성된다. 이 우주 구조에서 별과 은하가 탄생하며 정보 동역학의 무대가 만들어진다.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우주가 시작되면서 급팽창장의 에너지와 양자 요동이 물질을 만들고 그 속에 정보의 씨앗을 심어놓은 것이다. 그 씨앗이 자라서 만들어진 구조물 중에서, 정보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구조물이 바로 복잡계와 정보 체계의 요람이 되는 별이다. 별의 형성 과정과 에너지 관점에서 중요성은 앞선 <우주와 역사>와 <에너지로 보는 빅 히스토리>에서 다뤘으니, 여기서는 정보 관점에서 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인 화학 원소를 합성하여 새로운 정보 매체를 제공하는 점을 살펴보겠다.
: 별의 원소 합성 – 화학적 정보 매체의 출현
에너지의 관점에서 별은 빛을 통해 에너지를 공급해서 행성을 복잡계의 요람으로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보의 관점에서도 별은 삶과 죽음을 통해 장차 행성 복잡계의 정보 매체가 되는 화학 원소를 공급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별이 탄생하기 전에는 우주에 거의 수소와 헬륨만 있었다. 무거운 별은 핵융합을 통해 탄소, 질소, 산소, 철에 이르는 다양한 원소를 합성했다. 무거운 별의 최후인 초신성 폭발이나 중성자별 병합 같은 격렬한 천체 현상은 철보다 무거운 원소를 포함해서 다양한 원소를 합성하고, 그 원소를 우주 공간에 흩뿌렸다. 이 원소들이 뭉쳐 탄생하는 다음 세대의 별과 행성은 다양한 원소를 더 풍부하게 가지게 됐다. 정보의 관점에서 이것은 어떤 의미가 될까? 앞서 강조했듯이, 정보는 반드시 물리적 매체에 담긴다. 그리고 매체의 종류가 다양할수록 담을 수 있는 정보의 구조도 다양해진다. 수소와 헬륨만으로는 만들 수 있는 분자 구조가 극히 제한적이다. 그러나 탄소는 네 개의 결합 자리를 가지고 있어 복잡하고 다양한 분자 구조를 만들 수 있고, 질소와 산소는 그 구조에 반응성과 특이성을 더한다. 인은 에너지 전달과 정보 저장의 핵심 매체인 ATP와 DNA의 골격을 이루고, 황과 철은 단백질의 구조와 기능을 정밀하게 조율한다. 이 원소들은 단순한 물질 재료 이상으로, 이후 분자 구조, 촉매, 대사, 유전 정보의 매체가 된다. 별에 의한 원소 합성은 우주가 정보를 담을 수 있는 매체의 다양성을 결정적으로 넓힌 사건이다. 빅뱅이 정보의 물리적 기반을 만들었다면, 별은 그 기반에 화학적 정보 매체의 가능성을 더했다. 이후 지구에서 펼쳐질 생명의 활약은 바로 이 가능성에서 시작됐다.
생명
: 지구의 탄생 – 복잡계의 요람, 안정적 비평형 정보 동역학의 무대
지구는 암석형 행성으로, 기체형 행성과 달리 단단한 표면이 존재하고, 그 표면에는 앞선 세대의 별이 합성한 다양한 원소들이 농축되어 있다. 탄소, 질소, 산소, 인, 황, 철 같은 원소들이 한곳에 모여 상호작용할 수 있는 화학적 무대가 마련된 것이다. 이 무대에서 정보를 담는 복잡계 구조가 만들어지고 유지되려면 에너지의 흐름이 필요하다. 지구에는 두 가지 에너지 샘이 있다. 지구 내부에서 나오는 열은 긴 시간 척도로 지각을 움직이고, 다양한 지형과 화학적 환경을 만든다. 태양에서 오는 빛은 에너지의 양에서 지열을 압도하며 표면에서 대기와 물의 순환을 일으킨다. 두 에너지 흐름은 지구를 동역학적 비평형 상태로 유지한다. 평형 상태에서는 모든 차이가 사라지는 방향으로 진행해 정보가 소멸하지만, 적절한 비평형 상태에서는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복잡한 구조와 정보를 유지하고 생성할 수 있다.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물질이 액체 상태의 물이다. 물의 독특한 성질은 다양한 분자들을 용해해서 서로 반응하기에 좋은 동역학적 환경을 제공한다. 액체 상태의 물이 유지되려면 온도와 압력을 포함한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한데, 지구는 태양으로부터의 적절한 거리, 적당한 대기와 온실 효과, 내부 열과 물질 순환, 그리고 달이 만든 조석 환경 등이 맞물려 이 조건을 장기간 안정적으로 유지해 왔다. 이 안정성은 복잡계가 정보를 축적하며 다양성을 펼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제공했다. 이것이 지구라는 행성이 정보 동역학의 무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 생명의 탄생 – 자기복제와 에이전트의 결합
지구라는 무대가 마련되자, 오래지 않아 정보 동역학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인 생명의 탄생이 일어났다. 그러나 생명이 어떤 과정으로 탄생했는지는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물질에서 생명으로의 전환이 단번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화학적 진화라고 불리는 단계적 과정을 거쳤다는 점이다. 간단한 유기 분자들이 만들어지고, 그것들이 결합하여 더 복잡한 분자가 되고, 그중에서 자기촉매 기능을 가진 분자들(또는 분자 집단)이 출현한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됐을 것이다. 자기촉매란 자신의 합성을 스스로 촉진하는 반응으로, 자기촉매 분자는 환경에서 재료를 끌어당겨 자신과 같은 분자를 더 많이 만들어 낸다. 자기복제의 원시적 형태지만, 이 과정에도 복제, 변이와 선택이 작용할 수 있어서 화학적 진화 과정이 되고, 자기복제 기능이 분자 집단 수준에서 정교해질 수 있다. 이 과정에서 RNA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 RNA 세계 가설이다. RNA는 DNA처럼 염기서열로 정보를 저장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단백질처럼 촉매 기능도 수행할 수 있다. DNA는 정보를 안정적으로 저장하지만, 단백질의 도움 없이는 복제되지 못한다. 단백질은 복제와 대사를 수행하지만, 자신을 복제하지는 못한다. RNA의 이런 이중 기능은 단백질과 DNA 중 무엇이 먼저였는가라는 닭과 달걀 문제를 풀어줄 수 있다. 정보 저장과 촉매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RNA가 먼저 출현했고, 이후 DNA와 단백질이 더해지며 기능이 분화하고 안정화했다는 것이다. RNA 세계에서는 정보 저장과 기능이 하나의 분자에 통합되어 있었다. 이후 DNA-RNA-단백질 체계로 분화하면서 정보 저장은 DNA로 더 안정화되고, 기능 수행은 단백질로 더 전문화되었다고 본다. RNA 세계가 유력한 가설 중 하나이지만, 생명의 기원은 아직 열린 문제로 남아 있다.
생명의 탄생이 정보의 관점에서 혁명적인 이유는 자기복제하는 정보가 출현했고, 그 정보가 에이전트의 기능을 갖췄다는 것이다.2자기복제와 에이전트 기능을 위해서는 나와 외부를 구분하는 경계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세포막은 자신과 환경을 구분하는 물리적 경계이자 정보적 경계이기도 하다. 막은 내부의 정보 처리 과정을 외부 환경의 교란으로부터 보호하고, 동시에 외부 환경의 변화를 감지하고 그에 적응적으로 대처하는 에이전트 기능을 가능하게 한다. 대사는 이 경계 안에서 물질과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유입하고 처리하는 과정이다. 에이전트는 환경과 능동적으로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복잡계의 지속성을 높이는 존재다. 1부에서 강조했듯이, 자기복제는 복잡계의 지속성을 근본적으로 확장했다. 요동과 잡음으로 인해 자기복제가 완벽하지 않다는 점도 중요하다. 복제 과정에서 오류가 생기고, 오류는 정보의 변이를 만든다. 변이는 자기복제와 에이전트 기능에 변화를 주고, 이것이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선택 압력으로 작용해서 진화의 바퀴를 돌린다. 이제 생명 복잡계는 지속성에 더해 다양성을 펼칠 가능성을 열었다.
자기복제와 에이전트 기능이 결합하며 생명의 탄생이라는 정보적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정보가 실행 기능과 연결되는 물리화학적 기반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염기서열이라는 디지털 형식의 정보가 상징적 대응 관계를 통해 아미노산 서열과 단백질 기능으로 변환되는 부호 체계가 확립된 것이다. 코돈세 개의 염기서열이 특정 아미노산에 대응하고, 그 대응에 따라 단백질이 만들어지며, 그 단백질이 복제, 번역, 대사를 수행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는데, 코돈과 아미노산의 대응은 물리화학적 필연보다는 역사적 우연이 개입했다. 이 대응은 아미노아실-tRNA 합성효소라는 단백질이 tRNA를 인식해서 해당 아미노산을 붙여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어떤 tRNA에 어떤 아미노산이 대응하는지는 물리 법칙이 아니라 진화 초기에 우연히 확립된 관계였다. 이것이 유전 부호의 임의성이다. 특정 염기서열이 특정 아미노산을 ‘의미’하는 것은 자연법칙이 아니라 역사적 산물이다. 이 구조는 훗날 인간이 발명하는 언어의 자의성, 특정 소리가 특정 의미를 갖는 것이 필연이 아니라 약속인 점과 상당히 닮아 있다. 생명의 탄생으로 정보는 처음으로 자신을 복제하고, 환경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며, 디지털 부호 체계를 통해 기능을 실행하는 존재가 되었다. 정보 동역학의 역사에서 새로운 장이 열린 것이다.
: 진핵세포의 탄생 – 정보량의 증가와 조절 구조의 출현
진핵세포의 출현은 원핵세포들 사이의 내부 공생과 그에 따른 세포 내부의 조직화가 강화된 결과이다.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는 박테리아가 고세균 내부로 들어와 공생하며 통합된 결과로 보고 있으며, 핵의 기원은 아직 논쟁 중이지만, 유전 정보를 담은 DNA가 핵막 안에 격리됐다는 점은 분명하다. 진핵세포로 넘어가면서 유전체의 크기가 원핵세포에 비해 대체로 훨씬 커졌다. 그 원인은 아직 완전히 해명되지 않았지만, 유전체 전체가 복제되는 유전체 중복, 미토콘드리아에서 핵으로의 유전자 이동, 그리고 인트론의 확산 등이 기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인트론은 유전체를 크게 만드는 동시에, 하나의 유전자로 여러 단백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선택적 스플라이싱의 가능성을 열었다.
정보의 관점에서 진핵세포가 가져온 가장 주목할 변화는 유전 정보량의 증가와 그에 따른 조절 구조, 즉 메타 정보의 역할이다. 정보량이 증가하면서 두 과제가 중요해졌는데, 정보를 안정적으로 보호하는 일과 어떤 정보를 언제 얼마나 활용할지를 조절하는 일이다. 조절 구조는 원핵세포에서도 있었지만, 진핵세포에서는 정보량의 증가로 그 중요성이 커진 것이다. 진핵세포는 이를 핵막과 유전자 발현 조절 구조로 해결했다. 핵막은 DNA를 세포질로부터 격리하여 보호하고, 전사와 번역을 공간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정보 저장과 정보 처리 사이에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층위를 만들었다. 이 변화의 의미는 크다. 생명의 초기 정보 체계에서 중요한 것은 정보를 복제하고 보존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진핵세포에 이르러 정보는 단순히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선택적으로 읽히고 조절되는 체계가 되었다. 이 유연성이 이후 다세포 생물에서 같은 유전 정보를 가진 세포들이 서로 다른 기능으로 분화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 유성생식의 발명 – 안정성과 다양성을 확장한 정보 재조합의 출현
생명은 대사를 통해 자신을 유지하고, 번식을 통해 구조를 지속하며, 변이와 선택을 통해 진화한다. 정보의 언어로 번역하면 에너지와 물질 공급, 자기복제, 정보의 변이와 선택 과정이다. 이중 복제와 변이는 긴장 관계에 있다. 적절하지 않은 변이는 생명을 위협하고, 변이가 없으면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어렵다. 초기의 생명체는 무작위적 오류에 의한 변이와 수평적 유전자 전달을 통해 새로운 유전자 조합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우연성이 크고, 유용한 변이를 체계적으로 조합하지는 못했다. 유성생식은 체계적인 정보 재조합 기법으로 이 한계를 돌파한 사건이다.
유성생식은 서로 다른 두 개체의 유전 정보를 재조합함으로써 변이의 탐색 공간을 크게 넓혔다. 재조합이 단순 변이와 다른 점은 탐색의 효율에 있다. 단순 변이가 기존 정보에 무작위적 오류를 추가하는 것인데 비해, 재조합은 이미 환경에서 살아남은 두 정보 계열을 섞는 것이다. 그 결과 유전 정보는 개별 계통 안에만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개체군 전체에서 섞이고 재배열될 수 있는 공동의 정보 풀로 바뀌었다. 이것이 진화의 탐색 효율을 높였다. 무성생식에 비해 큰 번식 비용을 치르면서도 유성생식이 진화한 것은 재조합을 통한 정보 탐색의 효용이 그 비용을 상쇄할 만큼 컸기 때문이다.
성은 유전 정보의 다양성을 높였을 뿐 아니라 안정성도 높였다. 유성생식과 함께 발달한 이배체, 즉 두 벌의 염색체를 가지는 구조는 일종의 정보 백업 시스템처럼 작동한다. 하나의 유전자가 손상되거나 불리한 변이를 가지더라도, 다른 벌의 유전자가 그 기능을 보완할 수 있다. 정보의 관점에서, 이배체는 오류를 즉시 제거하지는 않더라도 손상과 불리한 변이를 완충하고 걸러낼 수 있는 구조를 유전체 안에 마련한 것이다. 유성생식의 발명으로 생명 정보는 다양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확대하는 새로운 진화 전략을 갖추게 되었다.
: 다세포 생물의 출현 – 기능 분화와 상위 계층의 출현
다세포 생물의 출현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세포의 수를 늘리면 포식-피식 관계에서 이점을 얻을 수 있고, 세포 간 기능 분업은 실행 효율을 높일 수 있다. 여기에 산소 농도의 증가로 큰 생물체가 높은 대사율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정보의 관점에서 다세포 생물이 이뤄낸 중요한 변화는 세포 수의 증가가 조직화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다세포 생물의 진화는 많은 세포가 단순히 모인 상태에서 출발해서, 같은 유전 정보를 가진 세포들이 위치와 신호에 따라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도록 조절되는 체계로 발전했다. 정보의 양이 단순히 늘어난 것이 아니라, 같은 정보가 맥락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체계가 등장한 것으로, 진핵세포에서 생겨난 유전자 발현 조절 능력이 다세포 생물에서 본격적인 기능 분화의 기반이 되었다. 같은 유전체를 가진 세포라도 어떤 유전자를 언제 얼마나 읽느냐에 따라 근육세포, 신경세포, 상피세포, 생식세포처럼 서로 다른 세포가 될 수 있다.
정보의 관점에서 다세포 생물의 출현이 갖는 더 중요한 의미는 조직화를 통해 새로운 생물학적 층위가 생겨났다는 점이다. 단세포 생물로서 세포는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정보 처리를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독립적 에이전트다. 다세포 생물에서는 세포라는 에이전트 위에 개체라는 새로운 에이전트 층위가 생겨난다. 세포는 여전히 자신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정보 처리를 수행하지만, 동시에 상위 층위인 개체의 기능 단위로 편입되어 개체 전체의 유지와 번식을 위해 조절된다. 세포 간 신호전달은 이 조율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정보 처리 층위다. 이제 정보 처리는 세포 내부에서만 일어나지 않고, 세포들 사이의 관계망 속에서도 일어난다. 개별 세포의 정보 처리를 넘어서, 세포들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개체 수준의 조율된 기능과 반응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전환과 함께 세포가 수행하던 에이전트 기능들이 개체 수준에서 조직화된 기능들로 확장된다. 세포의 대사는 개체의 소화와 순환, 저장과 분배의 체계로 확장되고, 세포의 환경 반응은 개체의 감각과 운동의 체계로 발전한다. 세포막이 담당하던 자기와 외부의 구분은 피부와 면역계 같은 개체 수준의 경계로 확장되었다. 세포의 자기복제는 생식세포를 통한 개체의 번식으로 재조직되었고, 세포 내부의 조절은 세포 간 신호와 호르몬, 나아가 신경계에 의한 전체 조절로 확대되었다. 다세포 생물의 출현은 생명 정보가 세포 안에 머무는 정보에서 세포 집단을 조직하는 정보로 확장된 사건이었다. 이 진화의 경로에서 동물의 신경계와 뇌가 등장하고, 생명체의 예측, 결정, 그리고 실행 기능은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게 된다.
다세포 생물의 계층적 조절 체계가 완벽하지는 않다. 이 체계의 실패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암이다. 하위 에이전트인 세포가 면역 체계 같은 개체 수준의 조절을 벗어나 독자적으로 증식하면 상위 에이전트인 개체의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다. 암은 다세포 생물에서 계층적 조절 체계의 취약점을 잘 보여준다. 다세포 생물은 더 복잡하게 조직된, 그래서 향상된 기능을 발휘하는 생명체로 진화하는 길을 열었지만, 동시에 질서 유지를 위해 상위의 개체가 하위의 세포들을 적절히 조절해야 하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됐다.
: 동물의 출현과 뇌의 발명 – 예측과 실행, 정보에서 행동으로
동물의 출현은 생명이 에너지를 획득하는 방식에 새로운 전략이 등장한 사건이었다. 광합성 생물이 태양 에너지를 직접 포획하는 것과 달리, 동물은 다른 생물에 농축되어 저장된 에너지를 포획한다. 이 전략이 성립하려면 동물을 부양할 만큼 충분한 생물량과 동물의 높은 대사율을 감당할 만한 높은 산소 농도라는 환경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신원생대에 광합성 생물량이 늘어나고 대기와 해양의 산소 농도가 높아지면서 조건이 갖춰지자, 포식에 상당한 에너지를 쓰더라도 그 이상을 획득할 수 있는 동물이 등장했다. 비평형 동역학의 관점에서 보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더 복잡한 구조를 유지하는 것은 비평형 상태에서 가능한 복잡성 증가의 방향과 일치한다. 그리고 이 복잡성의 증가는 정보 처리 능력의 도약을 요구했다. 먹이를 찾아서 추적하거나 자신을 잡아먹는 포식자를 피하려면, 외부 정보를 빠르게 감지하고 처리해서 행동으로 연결하는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보 처리를 수행하는 감각 기관과 신경계는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지만, 그 대가로 더욱더 많은 에너지를 획득하거나 위험을 회피할 수 있다. 신경계의 발달은 에너지 흐름의 확대와 정보 처리 능력의 향상 사이에 서로를 강화하는 양의 되먹임이 작동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초기의 동물은 해면동물처럼 편모로 물을 걸러 먹는 단순한 여과 섭식자였다. 이후 자포동물에서 감각세포, 신경세포, 근육세포가 분화되고 신경망으로 연결되는 기본 구조가 갖춰지면서, 촉수로 먹이를 잡는 능동적 포식이 본격화했다. 신경계의 출현은 여과 섭식에서 능동적 포식으로의 전환과 맞물려 진화했다. 세포 층위에서 DNA–RNA–단백질 체계가 유전 정보를 화학적 실행 기능으로 연결했다면, 개체 층위에서 감각계–신경계–운동계 체계는 외부와 내부 상태 정보를 행동 실행으로 연결했다. 동물에서 정보는 몸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 속에서 어떻게 움직일지를 정하는 기능까지 포함하게 됐다. 에디아카라기에서 캄브리아기로 이어지는 시기에 동물의 몸과 정보 처리 구조는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좌우 대칭 체제가 출현하면서 방향성 있는 운동이 가능해졌고, 그로 인해 앞쪽이 환경과 먼저 만나는 방향이 되면서 감각 기관과 신경계가 앞쪽에 집중되는 두부화가 일어났다. 분산된 신경망에서 중앙화된 정보 처리 구조로의 전환이 시작된 것이다. 약 5억 4천만 년 전, 캄브리아기 폭발 시기에 눈이 출현하면서 동물의 정보 획득 능력은 질적으로 달라졌다. 접촉이나 화학물질 같은 근거리 정보에 의존하던 동물이 원거리의 공간 정보를 한꺼번에 획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눈을 가진 포식자의 출현은 피식자에게 강력한 선택 압력으로 작용했고, 포식자와 피식자 사이의 감각과 신경계, 운동 능력의 군비 경쟁이 시작되었다. 정보 처리 능력이 생존과 직결되면서 신경계의 진화가 가속됐다는 점은 캄브리아기 폭발을 정보의 관점에서 읽는 한 축이다.
동물에서 중앙 신경계가 발달하면서 본격화한 기억과 학습은 정보적 혁신이었다. 기억은 경험을 저장하는 능력이고, 학습은 저장된 경험을 바탕으로 행동을 수정하는 능력이다. 같은 유전 정보를 가진 개체라도 서로 다른 경험을 통해 각기 다른 행동 양식을 갖출 수 있게 됐다. 유전 정보는 세대를 거쳐 천천히 바뀌지만, 기억과 학습을 통해 개체는 살아 있는 동안 훨씬 빠르게 정보를 축적하고 다듬어나갈 수 있다. 이 축적된 경험 덕분에 뇌는 단순한 자극 반응을 넘어서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 상태를 예측하고 그에 맞춰 행동을 미리 준비할 수 있게 됐다. 기억과 학습은 정보 처리가 ‘반응적’에서 ‘예측적’으로 전환되는 토대가 됐다.
동물의 뇌는 감각, 기억, 예측, 행동 선택을 하나로 묶는 통합적 정보 처리 기관이다. 정보의 관점에서 뇌는 외부 세계와 내부 상태에 대한 모형을 구축하고, 그 모형을 바탕으로 개체의 행동을 조절하는 장치다. 뇌를 갖춘 동물은 유전 정보 체계 위에 신경 정보 체계를 얹음으로써, 이제 즉각적인 자극-반응을 넘어서, 수집한 정보로부터 세계에 대한 모형을 세워서 미래를 예측하고, 그에 맞춰 개체 수준의 결정을 내리고 행동을 실행함으로써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나아가 고등 동물에서는 개체들이 서로의 행동을 관찰하고 모방하는 능력이 생겨났다. 행동 정보가 개체 내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개체들 사이에서 공유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능력이 이후 언어와 문화, 집단 학습으로 이어지는 인류의 문화적 진화의 생물학적 토대가 된다.
인류
: 뇌의 도약과 상징적 언어 — 새로운 정보 형식의 출현
직립 보행으로 인해 자유로워진 손과 도구의 사용, 집단 규모의 증가로 인한 복잡한 사회적 관계의 대처 필요성, 그리고 불의 사용과 화식을 통한 에너지 공급의 증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인간의 뇌에는 특별한 진화적 도약이 일어났다. 신피질이 크게 확장됐고, 전전두엽을 포함한 연합 영역이 발달했으며, 뇌 영역 간 장거리 연결망이 강화됐다. 뇌의 발달 기간도 다른 동물보다 훨씬 길어져서 경험에 의한 신경망 재구성의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런 물리적 변화가 정확히 어떤 유전적 변화에서 비롯됐는지는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이 변화들이 축적되면서 인류에게 상징적 사고와 행동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고고학 기록에서는 약 10만 년 전부터 아프리카에서 상징적 행동의 증거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약 5만 년 전부터는 여러 지역에서 예술, 복잡한 도구, 장신구 등 상징적 문화의 흔적이 뚜렷하게 늘어난다. 이것이 갑작스러운 혁명적 도약이었는지 점진적 축적의 결과였는지는 논쟁 중이지만, 이 시기를 거치면서 인류의 사고와 행동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도약의 핵심은 상징적 언어의 출현이었다. 상징화는 뇌가 세계 속에서 반복되는 패턴을 인식하고, 그 패턴들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며, 그 관계를 소리나 몸짓 같은 외부 표지와 연결하는 과정이었다. 어떤 표지가 특정 대상이나 사건, 관계를 대신하게 되고, 그 대응 관계가 집단 안에서 공유될 때 비로소 상징 정보가 탄생한다. 예를 들어 특정한 동물을 알아보는 것은 패턴 인식이다. 그 동물이 위험하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 동물이 나타나는 상황과 도망치는 행동을 연결하는 것은 관계 짓기다. 그리고 ‘사자’라는 소리가 그 동물을 대신하게 되고,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도 그 소리를 같은 대상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될 때, 정보는 상징이 된다. 상징적 언어는 개체 내부의 신경 정보를 집단 안에서 오갈 수 있는 상징 정보로 바꿈으로써 집단의 연결망을 강력하게 만든다. 동물의 뇌가 외부 세계와 내부 상태에 대한 모형을 개체 안에 구축했다면, 인간의 상징적 언어는 그 모형의 내용을 소리와 몸짓, 표식 같은 외부 매체로 꺼내어 다른 개체와 공유할 수 있게 했다. 이 변화가 인류를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인 동시에 문화 정보 진화의 주체로 만들었다.
정보의 관점에서 상징적 언어는 새로운 정보 형식의 출현이었다. 이전의 여러 정보에서는 물리적 매체와 정보의 기능이 강하게 묶여 있었다. 세포 내 연결망은 화학적 결합과 반응으로 작동하고, 세포 간 연결망은 신호 분자로 작동하며, 뉴런 간 연결망은 전기화학적 신호로 작동한다. 연결의 물리적 성질이 전달할 수 있는 정보의 종류와 범위, 그리고 연결된 기능을 결정했다. 동물 사회의 개체 간 연결망도 대체로 이 한계 안에 있다. 특정 소리와 시각 신호는 특정 행동이나 정서 상태와 연결된 기능을 가지지만, 신호의 조합과 의미의 범위는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상징적 언어에서는 물리적 신호와 의미 사이의 관계가 훨씬 더 자의적이고 유연해졌다. 같은 의미를 전혀 다른 물리적 신호로 전달할 수 있고, 매체가 바뀌어도 정보의 내용과 기능이 상당 부분 유지된다. 매체가 달라도 ‘해석 공동체’가 그 대응 관계를 공유한다면 정보는 여전히 같은 기능을 유지한다. 특정 물질 매체에 고정되지 않고, 음성·문자·그림·손짓·디지털 코드 같은 여러 매체를 옮겨 다닐 수 있다는 점이 상징 정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상징 정보는 구별이 가능한 이산적 단위로 이루어져 있어서 다른 매체로 복제될 때도 대응 관계가 적절히 유지된다. 다만 상징 정보는 해석자 의존성이 크다는 특성도 가졌다. 같은 소리나 기호라도 해석 공동체가 다르면 전혀 다른 의미를 갖거나 아무 의미도 갖지 않을 수 있다. 상징적 언어는 이산적 부호 체계에 의미 규칙과 해석 공동체가 결합한 정보 형식이다.
상징적 언어는 개체 간 소통 수단일 뿐만 아니라 뇌의 사고 수단도 됐다. 상징적 언어는 인간의 사고를 실제의 감각 상황으로부터 해방시켜, 지금 여기 없는 것,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이미 사라진 과거, 직접 보이지 않는 관계와 추상 개념까지 다룰 수 있게 했다. 또한 상징적 언어는 유한한 단어와 규칙으로부터 무한히 많은 의미 구조를 만들어내는 재귀적 성격을 가진다. 문장 안에 문장을 넣고, 생각에 관한 생각을 표현하며, 언어로 언어 자체를 다룰 수 있다. 이처럼 상징적 언어는 추상화와 탈맥락화, 그리고 재귀적 확장을 통해 인간의 사고를 현재의 경험을 넘어선 세계로 확장시켰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개체 수준에 머물지 않았다.
상징적 언어는 개인의 인지를 집단의 인지로 연결하는 새로운 정보 관계망을 형성했다. 다른 동물들도 신호를 주고받지만, 그 연결망은 단순하고 전달할 수 있는 정보의 종류와 복잡도가 제한적이다. 무엇보다 정보가 인간 문화처럼 높은 충실도와 빠른 속도로 집단 안에 축적되기는 어렵다. 상징적 언어라는 연결망은 이 한계를 돌파한다. 정보가 개체에서 분리되어 집단에 존재하고, 공간과 시간을 넘어 축적될 수 있다. 한 개체가 획득한 지식이 언어를 통해 집단 전체로 퍼지고, 다음 세대로 전달되며, 거기에 새로운 것이 더해지며 축적된다. 유전 정보가 DNA라는 매체를 통해 세대를 가로질러 전달되고 축적되듯, 문화 정보는 상징적 언어라는 형식을 통해 전달되고 축적된다. 상징적 언어 덕분에 문화 정보는 인간, 공간, 시간을 가로질러 저장되고, 복제되고, 변형되고, 축적될 수 있다. 여기에 문화적 선택 과정이 작용하게 되면 유전적 진화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를 가진 새로운 진화의 경로가 열리게 된다.
: 도시와 국가의 출현 — 사회적 정보 처리와 집단적 조절 체계의 등장
정착 생활과 농업의 확산은 인간 사회에 질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변화의 핵심은 여분 에너지가 축적되고 대규모의 인구가 밀집된 사회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정착, 농업, 그리고 인구 증가는 서로가 양의 되먹임으로 작용해 대규모 집단이 등장하는 토대가 됐다. 대규모의 밀집된 집단은 많은 자원과 노동력을 집약적으로 동원할 수 있기에 집단 간 경쟁에서 유리했고, 이 이점은 그런 집단이 형성되고 확산하는 선택 압력으로 작용했다. 반면 규모가 커질수록 자원의 분배와 노동의 분담을 둘러싼 사회관계가 복잡해지고 갈등이 고조된다는 점은 규모 증가의 한계 요인으로 작용했다. 소규모 집단에서는 개인적 관계망이 규범을 유지하고 갈등을 조정할 수 있었지만,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 서로를 모르는 사람들 사이의 협력이 필요해지는데, 이는 개인적 관계망만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3도시와 국가는 개인적 관계망의 한계를 넘어 대규모로 커진 인간 집단을 조직하고 조절하는 사회적 정보 처리 체계로 등장했다. 이러한 체계가 갖춰지면서 인간 사회는 더 큰 규모로 확장되고 지속될 수 있었다.
도시는 농업이 생산한 여분 에너지를 기반으로 사람과 물자, 생산과 교환, 의례와 권력, 갈등과 협력이 밀집한 공간이었다. 도시를 구성하는 시장, 광장, 신전, 궁전은 사회적 정보 처리의 물리적 허브였다. 시장에서는 물자의 흐름과 교환에 관한 정보가 오갔고, 광장과 신전에서는 규범과 권위 같은 집단의 질서에 관한 정보가 공유됐으며, 궁전에서는 자원 배분과 노동 동원에 관한 결정이 내려졌다. 사람과 물자와 정보가 한 공간에 집중되는 도시의 물리적 구조 자체가 정보 교환의 밀도를 높였다. 국가는 도시를 중심으로 주변의 경작지와 마을, 인구와 자원을 하나의 질서 안에 묶어낸 조직화된 사회였다. 대규모 집단을 부양하려면 넓은 경작지가 필요했기에, 국가는 도시를 넘어 주변의 경작지와 마을들을 연결하는 물리적 기반이 필요했다. 경작지와 농민은 국가를 떠받치는 에너지 기반이었고, 세금과 창고는 여분 에너지를 모으고 저장하는 장치였다. 물자와 정보가 오가는 도로와 통신망뿐만 아니라, 사람과 자원을 파악하고 동원하기 위한 관료제와 방어와 질서 유지를 위한 군대도 필요했다. 국가는 도시의 정보 처리 기능을 더 큰 영토와 인구로 확장한 체계였다.
도시와 국가에서 처리해야 할 정보량은 개인적 기억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누가 어느 땅을 경작하는지, 어느 창고에 곡식이 얼마나 있는지, 누가 세금을 냈고 누가 노동을 제공해야 하는지 안정적으로 파악하려면, 개인의 기억을 넘어 정보를 저장하고 공유하기 쉬운 매체와 형식이 필요했다. 문자와 숫자는 바로 이 필요 속에서 등장한 사회적 기억과 계산을 위한 정보 형식이었다. 개인적 기억에 의존하던 정보를 점토판과 장부, 표식 같은 외부 매체에 저장함으로써 기억의 양적·시간적 한계를 넘어섰다. 기록된 정보는 사회가 공유하는 기억이 됐고, 도시와 국가의 실행력을 높였다. 사람과 토지와 곡식과 노동의 기록은 국가가 세금을 걷고, 노동을 배분하고, 법을 집행하며, 군대를 조직하는 토대가 됐다. 기록은 사람과 자원을 국가의 결정에 연결하는 매개였다. 누가 무엇을 소유하고, 무엇을 바쳐야 하며, 어떤 의무를 져야 하는지가 기록되면서, 사회적 관계에는 개인적 기억과 관습을 넘어 제도적 질서의 비중이 점차 커졌다. 또한 문자와 숫자는 국가 운영을 위한 행정 도구에 머물지 않았다. 이렇게 고정된 정보는 개인의 기억과 수명을 넘어 보존되고 전달될 수 있었고, 그 결과 기술과 규범, 신화와 역사, 계산법과 지식 같은 문화 정보의 축적과 확산이 가속됐다.
대규모 집단의 협력이 실행으로 완성되는 데는 물리적 기반과 기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같은 규범에 따라 행동하고, 같은 권위의 결정을 받아들이려면, 모두가 공유하는 믿음과 의무의 체계가 필요했다. 종교와 법이 바로 이 역할을 했다. 종교는 초월적 권위와 질서를 설정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규범이 작동한다는 공통의 기대를 만들었다. 법은 같은 상황에서는 같은 기준이 적용된다는 예측 가능성을 높임으로써 갈등을 억제하고 조정했다. 종교와 법은 단순한 믿음이나 규칙의 집합을 넘어서, 대규모 집단의 구성원들이 같은 질서를 기대하고 같은 권위를 인정하며 같은 기준에 따라 행동하게 만드는 사회적 정보 체계로 발전했다.
대규모 집단에서 에너지와 자원의 분배는 협력이 필요한 핵심 문제였다. 국가적 동원에는 명령과 세금 같은 제도적 장치가 작동했지만, 전체적인 분배에는 시장과 화폐라는 분산된 정보 처리 방식이 작동했다. 시장에서는 잉여생산물과 수공품, 노동과 기술이 교환되면서 에너지와 자원이 분배됐다. 이 과정에서 물자와 노동의 공급과 수요, 교환 조건에 관한 정보가 형성되고 갱신되면서, 에너지와 자원의 흐름을 조정했다. 교환이 확대되면서 서로 다른 물자와 노동을 곡물이나 은 같은 공통 단위로 환산하는 방식이 발달했고, 이는 가치와 교환 가능성을 다루는 새로운 정보 형식인 화폐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명령과 세금이 에너지와 자원을 중심으로 모으는 방식이었다면, 시장과 화폐는 분산된 교환을 통해 그 흐름을 조정하는 방식이었다. 국가는 이 두 가지 정보 처리 방식을 함께 작동시킴으로써 대규모 집단의 에너지와 자원 흐름을 조율했다.
도시와 국가는 이런 장치들을 하나로 묶은 복잡적응계였다. 기록과 행정은 사람과 자원을 파악할 수 있게 했고, 종교와 법은 규범과 권위를 받아들이게 했으며, 시장과 화폐는 에너지와 자원의 흐름을 조정했다. 이 장치들이 결합하면서 인간 사회는 스스로 상황을 파악해 예측하고,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실행하는 하나의 집단적 조절 체계로 발전했다. 이 조절 체계의 구체적인 형태—정치 제도, 경제 제도, 문화적 규범—는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 집단 간 경쟁과 내부 안정성이라는 선택 압력 아래 더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체계가 살아남고 확산하면서 지속적으로 진화했다.
: 과학 혁명 – 오류의 검증과 지식의 축적
몽골 제국 이후 유라시아 교역망이 재편되고, 흑사병의 창궐로 사회질서가 변하면서, 유럽은 역설적으로 경제적 부상의 기회를 얻었다. 농업 생산성의 향상을 토대로 해상 무역과 상업 자본주의가 성장했고, 그 부의 후원으로 문예부흥이 일어났다. 상업 자본주의의 팽창과 국가 간 경쟁은 신대륙의 발견과 대항해의 시대를 열었고, 이는 다시 실용적 지식과 기술의 수요를 급증시켰다. 갈릴레오는 군사·상업적 가치가 있던 망원경을 개량해 하늘을 관찰하는 도구로 바꾸었고, 항해에 필요한 경도 측정 수요는 정밀 시계의 발전을 촉진했다. 상업 사회에서는 유용한 지식이 비교적 빠른 보상으로 연결됐고, 지식 수요와 보상이 양의 되먹임을 형성하면서 지식 생산이 가속됐다. 인쇄술은 지식의 복제·유통 속도를 높였고, 장인·기술자·학자 집단 간 교류는 지식 정보망을 확장했다. 문예부흥과 종교 개혁, 정치적 분열과 경쟁은 유럽에서 지식에 대한 전통적 권위의 독점을 흔들었고, 학문에 대한 제약이 완화되면서 학문적 다양성이 커지는 계기가 됐다.
이런 역사적·사회적 배경에서 16세기에서 17세기 사이 과학 혁명이 일어났다. 과학 혁명은 자연에 대한 정보를 생산하고 선택하는 방식이 바뀐 사건이었다. 실험과 정량화를 통한 검증, 수학을 통한 통합적 서술, 학술 공동체를 통한 오류 제거가 결합하면서, 자연에 대한 정보는 더 정확하게 생산되고, 더 넓게 유통되며, 더 엄격하게 검증될 수 있었다. 그 결과 오류 수정 능력이 높아졌고,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의 축적 속도가 빨라졌다.
과학 혁명은 정보의 관점에서 여러 의미가 있다. 첫째, 자연을 서술하는 정보의 형식이 질적·언어적 서술에서 양적·수학적 서술로 전환됐다. 수학적 형식은 서로 다른 현상을 같은 관계와 구조로 표현하게 함으로써, 지식의 모듈성과 재조합 가능성을 높였다. 비례, 기하학, 함수, 방정식은 천문학, 역학, 광학, 항해, 측량에 모두 적용될 수 있었다. 수학적 법칙은 과거 관찰의 요약이면서, 미래 사건의 예측 장치였다. 둘째, 실험을 통해 정보를 능동적으로 생산하게 됐다. 실험은 단순한 관찰을 넘어, 조건을 통제하고 자연의 반응을 읽음으로써 특정한 인과관계를 드러내는 정보 생산 장치였다. 셋째, 공개 검증, 반복 실험, 학술 공동체를 통해 오류를 걸러내는 제도적 장치가 생겼다. 지식은 공동체가 공유하고 검증하는 공공재가 됐고, 그 결과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의 비율이 높아졌고 축적 속도도 빨라졌다.
과학 혁명은 사회적 예측 기능의 혁신이었다. 이전에는 자연과 사회에 대한 예측 기능이 종교적·정치적 결정 기능과 깊이 융합되어 있었다. 과학 혁명은 자연 현상에 대한 예측의 타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을 계시, 전통, 권위에서 관찰, 실험, 수학, 재현성으로 이동시켰다. 이는 종교 개혁과 대항해 시대의 지적 발견으로 전통적인 종교적·지적 권위가 흔들리면서, 사회적 예측 기능이 종교적·정치적 결정 기능으로부터 분화되기 시작한 사건이었다. 과학은 사회의 예측 기능을 혁신했고, 기술은 그 예측을 실행력으로 바꾸었다. 이 결합은 산업혁명과 현대 문명의 토대가 되었다.
: 전기, 반도체, 디지털 컴퓨터 – 정보 전달과 처리의 혁신
과학 혁명은 인류가 자연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이를 통해 축적된 지식과 기술은 화석연료의 사용, 산업사회로의 전환과 맞물리며 19세기 이후 문명의 도약을 이끌었다. 그중에서도 19세기 전자기 현상에 대한 이해는 전기와 전자기파를 정보 전달의 매체로, 20세기 양자역학을 기반으로 한 물질에 대한 이해는 반도체를 정보 처리의 매체로 활용하는 길을 열었다. 이 둘의 결합은 사회적 정보 처리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했다.
에너지 전달 매체로서 전기는 전달 속도가 빠르고 다른 형태의 에너지와 서로 변환이 쉽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 장점은 정보 전달 매체로서도 그대로 유효했다. 음성, 문자, 이미지 같은 정보는 쉽게 전기 신호로 변환되고, 전기 신호는 다시 음성, 문자, 이미지로 복원될 수 있었다. 전기 신호로 변환된 정보는 공간적으로 분산된 수많은 사람에게 거의 동시에 전달될 수 있었다. 사회 전체가 실시간 정보망으로 연결되기 시작한 것이다. 시장, 정부, 군사 조직이 동시성을 갖춘 정보 흐름 위에서 작동할 수 있게 됐다.
반도체는 빠른 정보 전달 매체였던 전기를 빠른 정보 처리 매체로도 만들었다. 반도체는 도체와 절연체의 중간인 전기 전도도를 가진 물질인데, 소량의 불순물을 첨가하면 양전하 또는 음전하를 띤 전기 운반자가 생겨서 전기가 잘 흐르게 된다. 이 특성을 활용하면 전기의 흐름을 전기 자체로 조절할 수 있는 소자를 만들 수 있는데, 대표적인 소자가 바로 트랜지스터이다. 트랜지스터의 발명은 디지털 컴퓨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디지털 컴퓨팅은 모든 정보를 0과 1의 조합으로 된 이진수로 변환하여 처리하는 방식이다. 디지털 컴퓨팅의 핵심은 정보가 숫자의 형식으로 표현되고 정보 처리가 수학적 연산으로 이루어져, 정보 처리에 수학을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주어진 규칙과 명령에 따라 정보를 조작할 수 있어서 정보 처리를 자동화할 수 있다. 0과 1의 상태와 이진수 연산은 다양한 물리적 매체로 구현할 수 있는데, 트랜지스터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 컴퓨터는 이를 전기 신호로 구현했다. 그래서 안정적이고 빠르게, 그리고 대용량의 정보를 처리할 수 있었고, 정보 처리의 속도와 양은 물론 처리하는 정보의 범위를 크게 확장했다. 이 변화는 사회의 정보 처리 능력을 크게 확장했다. 과학은 복잡한 자연 현상을 수학적 모형과 모사로 다룰 수 있게 됐고, 국가는 인구와 자원, 교통과 행정을 더 많은 데이터에 기반해 관리할 수 있게 됐다. 기업과 시장도 생산, 수요, 물류 변화에 더 빠르고 정교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됐다.
정보의 관점에서 보면, 문자와 숫자라는 정보 형식이 전기와 반도체라는 혁신적인 정보 매체와 결합함으로써 디지털 컴퓨터의 활용이 본격화했으며, 이는 사회적 정보 처리 체계에 새로운 층위를 추가했다. 문자와 숫자가 사회적 기억과 계산의 형식이었다면, 디지털 컴퓨터는 그 기억과 계산을 자동으로 수행하는 장치였다. 정보 처리는 전통적 기록 매체의 한계와 사람의 계산과 판단 능력을 동시에 넘어서기 시작했다. 숫자로 기호화된 정보는 컴퓨터 안에서 저장되고, 복제되고, 계산되고, 변환될 수 있었다. 그 결과 인간 사회는 더 많은 정보를 더 빠르게 처리하며, 더 복잡한 예측과 결정을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됐다.
: 인터넷, 빅 데이터, 인공지능 – 정보 혁명과 정보화 사회
정보화된 사회로의 전환은 정보 전달 매체인 전기·전자기파와 정보 처리 장치인 컴퓨터가 결합하면서 본격화됐다. 컴퓨터들의 연결망 위에 의사소통, 경제 활동, 지식 생산, 사회적 관계 같은 인간 활동의 많은 영역이 올라가면서 인간 사회는 새로운 정보 환경으로 들어섰다.
인터넷은 인간과 컴퓨터, 기관과 시장을 전지구적으로 연결한 정보망이었다. 그 위에서 정보는 빠르게 복제되고 이동했으며, 검색되고 재조합됐다. 지식과 정보는 더 이상 도서관이나 학교, 신문과 방송 같은 제한된 통로에만 머물지 않고, 누구나 찾아보고, 생산하고, 공유할 수 있는 환경이 열렸다. 인터넷에서는 누구나 정보의 수용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자가 될 수 있었고, 사람들은 지리적 거리와 제도적 경계를 넘어 연결됐다. 전자우편, 웹사이트, 온라인 게시판, 검색엔진, 소셜미디어는 인간의 의사소통 방식을 바꾸었고, 전자상거래와 온라인 금융, 원격 교육과 협업 도구는 경제와 교육, 노동의 방식까지 변화시켰다. 인터넷은 사회 전체의 정보 흐름을 촘촘하게 연결한 전지구적 신경망이 됐다.
인터넷을 통해 유통되는 정보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그 영향력이 커지자, 정보 유통의 조직화가 시작됐다. 인터넷 위에는 정보를 분류하고, 노출하고, 추천하고, 거래를 연결하는 플랫폼이 등장했다. 검색엔진은 방대한 정보 속에서 무엇을 찾을지 안내했고, 소셜미디어는 사람들의 관계와 여론 형성에 깊이 개입했다. 전자상거래 플랫폼은 상품과 소비자를 연결했고, 동영상과 음악 플랫폼은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들을지 추천했다. 플랫폼은 단순한 기술적 서비스를 넘어 현대 사회의 시장이자 광장, 장부이자 관문이 됐다. 사람들의 선택과 관계, 취향과 행동은 플랫폼이 설계한 정보 흐름 속에서 조정되기 시작했다.
인간과 컴퓨터가 연결되고, 그 컴퓨터들이 인터넷으로 서로 연결되면서 형성된 디지털 연결망을 통해 인간의 많은 활동이 대규모 데이터로 축적되기 시작했다. 검색 기록, 위치 정보, 구매 이력, 사회관계망, 사진과 영상, 금융 거래, 의료 기록, 행정 자료, 과학 관측 자료가 디지털 데이터로 저장됐다. 인간과 사회는 자신의 움직임을 이전보다 훨씬 세밀하게 기록하게 됐다. 이전에는 기록이 주로 저장과 확인을 위한 것이었다면, 현재의 빅 데이터는 기록의 양과 밀도, 범위와 속도가 임계점을 넘어서면서, 단순한 저장을 넘어 사회를 분석하고 예측하고 조정하는 재료가 됐다. 디지털 연결망이 사회를 읽는 감각 기관처럼 작동하면서, 사람들의 이동과 소비, 질병의 확산, 시장의 변화, 여론의 흐름, 기후와 생태계의 변화를 데이터로 추적하고 분석할 수 있게 됐다. 이로써 사회의 예측 기능은 새로운 단계로 들어섰다. 과학 혁명이 관찰과 실험, 수학을 통해 자연에 대한 예측 능력을 높였다면, 빅 데이터는 사회와 자연의 복잡한 변화를 대규모로 포착하고 계산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디지털 연결망이 사회를 읽는 감각 기관이 되어 빅 데이터를 축적했다면, 인공지능은 그 데이터에서 패턴을 학습해 예측과 판단을 수행하는 새로운 정보 처리 장치로 등장했다. 초기의 컴퓨터는 사람이 정해준 규칙에 따라 계산을 수행하는 기계에 가까웠다. 그러나 현대의 인공지능은 언어, 이미지, 소리, 행동, 질병, 시장, 기후, 물질 구조 등 다양한 영역의 대규모 데이터에서 반복되는 관계를 찾아내고, 이를 바탕으로 분류하고 예측하며 새로운 정보를 생성한다. 동물의 뇌가 감각과 기억을 바탕으로 세계의 변화를 예측하고 행동 선택을 가능하게 했다면, 인공지능은 디지털 데이터와 반도체 기반 계산 능력을 바탕으로 인간의 뇌 바깥에 만들어진 새로운 예측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인공지능은 이미 사회의 여러 영역에 들어와 있다. 검색과 번역, 추천과 광고, 금융 거래와 물류, 의료 영상 분석과 과학 연구, 소프트웨어 작성과 콘텐츠 생산에서 인공지능은 인간의 판단과 노동 일부를 보조하거나 대체하고 있다. 앞으로 그 영향은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인공지능은 인간 사회의 예측 능력을 높이고, 복잡한 문제를 분석하며, 새로운 지식과 기술의 생산 속도를 높일 수 있다. 그러나 예측 능력의 확장이 반드시 더 나은 결정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인공지능이 내린 예측과 판단의 근거를 누가 검토하고, 그 결과의 책임을 누가 질 것인지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다.
디지털 연결망, 빅 데이터, 인공지능의 결합은 정보의 전달과 저장을 넘어 사회 전체의 정보 처리 체계를 재구성하고 있다. 디지털 연결망은 인간과 기계를 연결한 전지구적 신경망이 되었고, 빅 데이터는 그 연결망 위에서 형성된 사회적 기억이 되었으며, 인공지능은 그 기억에서 패턴을 학습하는 예측 장치가 되었다. 이 정보 혁명은 인간 사회의 감각과 기억, 예측 능력을 크게 확장했다. 그러나 결정의 목표와 실행의 책임은 아직 인간 사회에 남아 있다. 정보 처리 능력이 확장될수록,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 사용할지를 정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진다.
마무리
정보의 관점에서 읽는 빅 히스토리는 우주에서 인간 문명에 이르기까지 정보의 매체·형식·내용이 어떻게 바뀌고, 그와 더불어 복잡성이 어떻게 진화하고 축적되어 왔는지를 보여준다. 초기 우주의 미세한 요동이 성장해 별과 은하가 탄생했고, 별이 합성한 원소들은 생명의 화학적 매체가 되었으며, 생명은 자신의 정보를 복제하고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진화의 길을 열었다. 능동적으로 에너지를 획득하는 동물의 진화 과정에서 발달한 신경계와 뇌는 환경 정보를 감각하고 기억하며 미래를 예측하는 장치가 되었고, 뇌를 키운 인간은 상징적 언어와 문자를 발명해서 개체의 경험을 집단의 지식으로 바꾸었다.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서 등장한 도시와 국가는 대규모 집단을 조절하는 사회적 정보 처리 체계였고, 과학은 오류를 검증하며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을 축적하는 제도적 장치였다. 과학의 토대 위에서 등장한 전기와 컴퓨터, 인터넷과 빅 데이터, 인공지능은 집단 정보 처리 체계를 전지구적 규모로 확장했다.
수십억 년에 걸친 우주적 진화가 만든 물질적 기반 위에서, 다시 수십억 년의 생물학적 진화는 몸과 뇌를 빚어냈고, 수만 년의 문화적 진화는 그 위에 언어와 제도와 기술을 쌓아 올렸다. 생명과 문화, 두 경로의 진화가 함께 만들어낸 인간은 이제 자신이 만든 정보 처리 장치를 통해 새로운 진화 경로를 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