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와 그 흐름의 기원
: 우주와 에너지의 기원


현재의 우주론은 일반 상대성(중력, 시공간 이론)과 양자 장론(물질 이론)을 기반으로 하는데, 이에 따르면 우주를 구성하는 시공간과 물질, 그리고 그 모태인 에너지(엄밀하게는 에너지밀도)는 우주의 시작부터 (초기조건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시작 상태를 포함해서 우주의 기원 자체를 논할 수 있는 정립된 이론이 아직 없다. 물질뿐만 아니라 시공간(중력)에도 양자역학의 원리를 적용한 ‘양자 중력이론’이 완성된다면 본격적으로 우주와 에너지의 기원을 논의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적 공백 속에서도 물리학자들은 손을 놓지 않고 시공간(중력) 이론에 양자역학의 아주 기본적인 원리만을 접목하여 과감한 가설들을 제안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무’로부터의 창조가 있다. 양자 중력의 관점에서 에너지(밀도)가 0인 (물리학에서 말하는 ‘무’, 즉 시공간과 물질 모두 없는) 진공 상태에서 양자 요동으로 인해 물질이 가지는 양의 에너지를 중력에 의한 음의 에너지로 상쇄하는 우주가 생겨날 수 있다는 가설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설들은 우주의 ‘가능성’을 보여줄 뿐, 실제 우주가 왜 그렇게 특별한 상태—예를 들면 낮은 엔트로피 상태—에서 시작했는지까지 그럴듯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2 현재로서는 우주가 관찰된 모습을 설명하기에 적절한—에너지밀도는 크지만, 매우 균일해서 (중력 관점에서) 엔트로피는 낮은—상태로 시작했다고 받아들이고 우주를 이해할 수밖에 없다.


: 급팽창, 물질과 밀도 요동의 기원


현재의 우주론은 특별해 보이는 빅뱅 우주의 시작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급팽창inflation’ 가설을 유력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아주 초기 우주에서 급팽창이라 부르는 엄청난 가속 팽창이 일어나 우주의 작은 부분이 엄청나게 커짐으로써 우주가 거의 균일하고 편평한 상태로 되면서 빅뱅 우주로 넘어갔다는 가설이다.이 가설은 현재 요구되는 빅뱅 우주 시작 상태의 주요 특징을 잘 설명한다. 다만 급팽창이 왜/어떻게 시작됐는지에 대한 그럴듯한 설명은 아직 없는데, 이는 앞 문단에서 언급한 우주의 시작 상태에 대한 설명이 아직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의 문제다. 급팽창은 ‘급팽창 장inflaton field’의 (압력이 음수인) 큰 퍼텐셜에너지가 우주를 지배함으로써 큰 가속 팽창이 일어난다고 보는데, 급팽창이 끝나고 급팽창 장이 붕괴하면서 그 에너지가 물질(기본 입자)로 전환되고,4 이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열역학적 평형에 도달해 소위 ‘빅뱅 우주’의 시작 상태, 즉 상대론적 입자로 구성된 고온의 플라스마—우주론에서는 이를 ‘복사’라 부른다—가 균일하게 퍼져 있는 상태를 만든다. 이를 우주의 (재)가열 과정이라 부르는데, 이 과정에서 고온의 복사에 내재하는 막대한 우주의 열적 엔트로피가 생성되고, 팽창으로 차츰 식어가면서 우주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열 역사’가 펼쳐진다. 급팽창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급팽창은 거의 균일하게 분포하는 물질을 만들 뿐만 아니라, 아이러니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물질 분포에 10만분의 1 정도의 미세한 밀도 요동도 만든다는 것이 밝혀졌다. 가속 팽창에 따른 중력의 효과로 급팽창 장의 양자 요동이 물질의 밀도 요동으로 전환되고,5 이것이 훗날 물질-지배 시대가 도래하면 우주 구조로 성장하는 씨앗 요동이 된다. 복잡계 출현의 밑거름인 에너지의 흐름은 물질이 우주 구조를 형성해서 생겨났기에, 그 궁극적인 기원은 급팽창과 양자 요동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 원자와 암흑 물질, 그리고 우주 구조의 형성

애초에는 미세했던 물질 요동이 중력의 작용으로 증폭되는 우주 구조 형성 과정은 압력이 거의 없는 ‘물질’이 압력이 큰 ‘복사’보다 에너지밀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는 물질-지배 시대에 들어서서 본격화된다.6 현재의 우주론에 따르면, 구조 성장을 억제하는 복사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고 구조가 충분히 성장하려면 별과 은하의 재료가 되는 중입자에7 더해서 이들의 약 5배의 에너지밀도를 가진 ‘암흑 물질’이 필요하다.하지만, 현재의 물질 이론에서는 암흑 물질이 무엇이고, 어떻게 우주에 존재하게 됐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를 ‘암흑 물질 문제’라 한다. 암흑 물질뿐만 아니라 원자를 구성하는 중입자와 전자에 관련해서도 중대한 문제가 있다. 현재 관찰된 우주배경복사의 비등방성과 빅뱅 핵합성 과정으로 만들어지는 가벼운 원소의 비율을 맞추려면, 적절한 크기의 중입자-반중입자 비대칭성이 필요하다.9 특별한 초기조건을 부과하지 않았다면 우주는 모든 입자와 그 반입자가 대칭인 상태로 시작했다고 보는데, 그렇다면 이 중입자-반중입자 비대칭성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이를 ‘중입자 비대칭성 문제’라 한다. 암흑 물질과 중입자 비대칭성은 별과 은하 같은 우주 구조와 에너지 흐름의 형성, 그리고 그 토대에서 이뤄지는 복잡계의 출현 등 빅 히스토리를 펼쳐가는 데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그러나 이 둘의 기원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우주론의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그렇기에 현재 우주의 모습을 설명할 수 있는 범위의 암흑 물질과 중입자 비대칭성이 존재함을 전제하고 논의를 이어가겠다.


: 별과 은하의 탄생

빅 히스토리에서 별과 은하는 에너지의 흐름을 만드는, 우주 구조 형성의 가장 중요한 결과물이다. 빛과 강한 상호작용을 하는 중입자(원자)와 그렇지 않은 암흑 물질의 성질 차이는 구조 형성의 초기뿐만 아니라 후기에서도 둘의 운명을 갈라놓는다. 암흑 물질이 큰 규모의 헤일로를 이루면, 중입자들도 그리로 모여든다. 중력수축으로 물질이 응집하면 줄어든 중력 퍼텐셜에너지가 운동에너지(≈열에너지)로 전환되고, 증가한 압력은 수축을 저지한다. 이때 원자는 빛(복사에너지)을 방출해 전체 에너지를 줄임으로써 수축을 계속할 수 있어서 밀도와 온도가 올라간다. 반면 암흑 물질은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방출하지 못해, 별처럼 조밀한 천체로까지 수축하기 어렵고 주로 밀도가 낮은 헤일로 형태로 남는다. 수축이 계속된 중입자에서는 중심부의 밀도와 온도가 충분히 올라가면서 수소(양성자)로부터 최종적으로 헬륨이 합성되는 핵융합 반응이 시작된다. 이로써 별이 탄생한다. 핵융합 반응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열에너지로 전환되어 발생한 압력이 중력수축을 저지하고, 이후 중심부의 핵연료(양성자)가 소진될 때까지 중력과 압력이 균형을 이뤄 안정된 상태를 유지한다. 중심부의 열에너지는 표면으로 전달되고, 빛(복사)에너지로 전환되어 외부로 방출된다. 별의 형성은 중력수축이 주도하지만, 오랫동안 지속해서 방출되는 복사 에너지는 핵융합 반응이 주도한다. 별에 흡수되지 않고 주변에 흩어진 원자들은 별 주위에 원시행성계 원반을 이루었다가, 최종적으로 행성들을 형성한다.

별과 행성은 빅 히스토리의 주요 장면이 펼쳐지는 무대이다. 별의 복사 에너지는 주변으로 퍼져나가고, 주변에 형성된 행성에 에너지를 공급해서 행성이 복잡계의 요람이 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별의 중요한 역할은 또 있다. 무거운 별은 핵융합 반응을 통해 다양한 화학 원소를 생성하고, 이를 다시 우주에 방출함으로써 다양한 원소가 포함된 다음 세대의 별과 행성이 탄생할 수 있게 된다. 행성에서 복잡계가 형성되는 데는 다양한 원소들이 참여하는 다양한 화학 반응이 필요하기에, 다양한 원소의 생성은 매우 중요한 별의 역할이다. 은하는 물질을 큰 규모로 집중시켜 더 많은 별이 만들어지는 데 역할을 한다. 또한 그 중심에 있는 거대 블랙홀은 주변의 물질을 끌어들여 대규모의 에너지 흐름을 만든다. 은하가 만드는 에너지 흐름이 어떤 우주적 역할을 하는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수억에서 수백억 년까지 지속되는 별 복사 에너지의 근원은 핵연료인 양성자이다. 현재 남아 있는 양성자는 중입자 비대칭성에서 기원했다. 이런 의미에서 중입자 비대칭성 문제는 빅 히스토리 관점에서 중요한 문제이다. 또한 중입자 비대칭성이 대부분 양성자 형태로 남았다는 사실도 중요한데, 여기에는 흥미로운 우연의 역사가 숨어있다. 우주가 팽창으로 온도가 내려가면서, 어느 단계(온도가 10억도 정도)에서 중입자(양성자와 중성자)가 결합하여 다양한 핵을 만드는 빅뱅 핵합성 과정이 진행된다. 만약 이 과정이 효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면, 모든 중입자가 무거운 핵의 형태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주의 팽창과 몇몇 핵의 특이한 성질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중성자는 거의 다 헬륨 형성에 소모됐지만, 양성자의 대부분은 그대로 남은 채 끝나버렸다. 그렇게 우주적 우연과 필연으로 인해 남겨진 양성자 덕분에 별은 이를 연료로 오랫동안 빛을 낼 수 있게 됐고, 그 에너지 흐름의 지속성으로 인해 고도의 복잡계가 진화할 수 있었다.


: 골디락스 조건과 지구 복잡계의 탄생

에너지의 흐름이 있다고 해서 곧바로 고도의 복잡계가 출현하지는 않는다. 복잡계가 형성되려면 적절한 재료(다양한 화학 원소)와 함께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파괴하지 않을 알맞은 세기의 지속적인 에너지 흐름이 있어야 한다. 지구가 태양의 복사 에너지의 흐름을 타고 복잡계의 요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외부적으로는 태양으로부터 적당한 거리에 있어 적절한 온도가 유지되고, 내부적으로는 다양한 원소로 구성된 표면에 대기와 액체 상태인 물이 결합해서 다양한 에너지 흐름의 경로가 만들어짐으로써 비평형 상태가 유지될 수 있는 조건을 충족했기 때문이다.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행성이 되려면 이런 내외적 ‘적당함’이 필요한데, 이를 흔히 ‘골디락스 조건’이라 부른다. 우주에 지구와 비슷한 정도의 골디락스 조건을 만족하는 행성이 얼마나 있는가와 실제로 외계 생명체가 존재하는가는 천문학의 중요한 질문 중 하나이다. 그런 행성이 많이 있을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지만, 외계 생명체의 존재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 지구의 에너지 흐름

지구에는 에너지 흐름을 만드는 내부와 외부, 두 개의 에너지원이 있다. 내부 에너지원은 방사성 원소의 붕괴에서 오는 에너지와 생성 과정에서 남은 열에너지로 중심부에서 바깥으로 흐르며 맨틀의 순환을 동반하여 지각판의 이동을 일으킨다. 수백만 년에서 수억 년까지 이르는 지질학적 시간 척도로 매우 느리게 진행하지만, 지각판의 이동은 지구의 거대한 변화를 주도하며 생명, 인류, 그리고 문명의 역사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새롭게 형성되는 두 판의 경계에 만들어지는 해저 열수공은, 지열로 생성된 화학에너지와 특이한 지질 구조가 결합해서 생명이 탄생하는 요람이 됐다는 가설이 현재 유력하다. 판의 이동은 대륙의 형성과 지질 활동을 통해 생명체 종들의 번성과 멸종에 큰 영향을 끼쳐왔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가득하다. 인류가 인류-침팬지 공통 조상에서 분기하여 독자적인 진화의 경로로 접어든 이유도 동아프리카판이 분리되면서 생긴 기후 변화와 그로 인해 열대우림이 사바나로 바뀐 지리적 변화 때문임이 유력한 가설이다. 또한 판과 판이 충돌하고 분리되면서 생긴 산맥들은 주변에 많은 비와 눈을 몰고 와서 인류 문명의 요람이 되는 큰 강들을 형성과 유지에 기여했다.10 내부 에너지의 흐름이 만든 지질학적 변화가 외부 에너지가 구동하는 순환 구조와 결합하면서 강이라는 물질과 에너지가 집중된 구조를 만들었다. 인류는 이렇게 집중된 물질과 에너지를 농경이라는 방식을 통해 안정적으로 수확함으로써 문명을 세울 수 있었다.

외부 에너지원은 태양에서 오는 복사 에너지의 유입으로, 내부에서 오는 지열을 압도하며,11 빠르고 직접적인 에너지 순환을 주도한다. 복사 에너지는 열과 물과 대기를 비롯한 여러 순환 구조를 만들어 지표면에 다양한 복잡계가 지속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현재의 지구 생태계는 거의 전적으로 태양의 복사 에너지에 의존하고 있다. 지구의 표면 온도는 태양 복사의 유입량과 지구의 열복사 방출량의 균형에 의해 유지된다. 태양의 광도 변화, 지구의 공전 궤도와 자전축 기울기의 작은 변화 (밀란코비치 주기) 등이 유입량의 변화를 일으키고, 지각 활동과 생명 활동, 그리고 소행성 충돌 같은 돌발적인 사건이 대기 구성의 변화를 일으켜 온실 효과와 반사도가 달라져 지표면의 온도와 기후의 변화를 일으킨다. 기후 변화는 생명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치는 요인이고, 인류도 예외가 아니다. 빙하기의 도래와 빙기-간빙기의 순환은 기후와 지리의 변화를 일으켜 생명체의 이동과 멸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인류의 수렵 채집, 농경 목축 모두 기후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이는 인류 문명 중심지의 이동과 재편을 촉진했다.

지구 내부의 열에너지가 만드는 지각판의 순환과 태양 복사 에너지에 의한 대기와 해양의 순환은 지표면을 비평형의 긴장 상태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거대한 화학적 실험실로 만들었다. 물질과 에너지가 끊임없이 순환하며 온갖 가능성을 탐색하던 이 실험의 끝에서 마침내 ‘생명’이라는 자기복제 복잡계가 출현했다. 이제 지구의 에너지 흐름이 낳은 극적인 산물인 생명의 탄생으로 넘어가 보자.


생명의 탄생과 진화 – 에너지와 정보의 결합

자기복제 복잡계는 에너지 흐름을 이용해 자신의 구조와 기능을 유지하는 데서 더 나아가, 그 구조를 복제함으로써 ‘지속성’을 획득한 존재다. 이는 복잡계가 에너지를 단순히 소산하는 단계를 넘어, 자신에 대한 기록(정보)을 만들고, 복제하고, 필요할 때 읽어서 구조를 다시 구축하는 방식으로 에너지를 제어하며 내부의 질서를 이어가는 ‘능동적 소산 구조’로 전환했음을 뜻한다. 자기복제 복잡계의 출현은 우주 역사에서 정보가 물질에 ‘기록’되고 그 기록이 ‘복제’되기 시작한 대전환점이다. 이때부터 우주의 변화에는 우연한 사건들의 나열을 넘어, 복제–변이–선택이 축적되는 ‘진화’ 과정이 생겨났다. 그러면서 복잡성은 ‘잠깐 생겼다 사라지는 질서’가 아니라, 진화를 통해 지속적으로 다양해지고 정교해질 수 있는 누적되는 질서가 된 것이다. 아직 생명이 어떤 과정을 통해 기원했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자기복제는 결국 정보의 복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왜 자기복제는 에너지와 정보의 결합을 가져왔을까?

디지털 형식의 정보가 유리하다.12 디지털 정보는 복사·검사·오류 국소화·조합적 확장이 쉽기 때문이다. 반면, 아날로그 형식의 정보는 복제를 거듭할수록 잡음이 누적되어 정보의 원형이 변형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이유로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정보를 디지털 형식으로 저장·복제하는 구조를 갖추게 된 것이다.13 지구에서 발견된 모든 생명체는 DNA의 4종의 염기 서열(4진수)로 정보를 저장하고, DNA-RNA-단백질로 복제와 해석을 구현하는 동일한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그래서 생물학에서는 이를 ‘중심 원리central dogma’로 부르고 있다.


그런데 복제 과정에서 오류의 발생을 피할 수 없다는 자기복제 복잡계의 문제점은, 역설적으로 진화를 가능하게 하는 중대한 장점이기도 하다. 자기복제 구조를 무너뜨리지 않는 범위 내의 오류, 즉 ‘변이’는 새로운 구조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복제가 낳은 자기복제 복잡계의 다양성은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 복제가 거듭되며 조금씩 다른 특성을 가진 개체들이 늘어나고, 이들이 물질과 에너지를 획득하기 위해 서로 경쟁·협력·공생하는 체제가 형성된 것이다. 물질과 에너지의 양이 제한된 환경에서는 이를 더 잘 획득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해서 더 안정적으로 복제를 수행하는 구조가 지속성의 우위를 가지면서 ‘선택’이 일어나게 됐다. 이처럼 변이라는 우연과 선택이라는 필연이 결합하면서 ‘진화’의 거대한 수레바퀴가 돌기 시작됐다. 더 나아가 환경에 적응하는 진화는 단순히 개체수를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복잡계의 정보 저장소에 외부 환경에 관한 정보를 담아냈다. 선택 과정은 복잡계에 담긴 정보가 자신의 구조를 복제하기 위한 내부적 설계도에 머물지 않고, 자신을 둘러싼 외부 환경의 질서와 법칙을 반영하도록 유도했다.14 그러면서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는 상황에서는 오류율이 너무 낮아도 문제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도 연출됐다.15 


생명과 에너지

이처럼 에너지와 정보가 결합하여 탄생한 생명은 이제 진화라는 엔진을 달고 더 거대하고 정교한 에너지 혁명의 길로 들어섰다. 그 기초를 놓은 것은 생명의 보편적 에너지 화폐라 할 수 있는 ATP의 확립이었다. 이어 생명은 지구 내부의 열기를 넘어 태양 에너지를 직접 수확하는 광합성을 발명해 거주 공간을 확장했고, 산소호흡이라는 고효율 에너지 전환 방식을 개발해 복잡계의 규모를 키웠다. 나아가 타자가 비축한 에너지를 직접 탈취하는 포식의 등장으로 복합적 에너지 순환망인 생태계가 형성됐다. 이제 생명의 진화가 펼친 에너지 혁신의 장면들을 하나씩 따라가 보자.


: ATP, 생명의 에너지 화폐

생명 활동은 세포 안에서 일어나는 화학 반응으로 구현되고, 그 반응에 필요한 에너지는 생명의 보편적 에너지 공급원인 ATP를 통해 공급된다.16 ATP가 생명의 에너지 화폐가 될 수 있었던 이유에는 기능적 필연과 진화적 우연이 공존한다. 기능적으로는 ATP 가수분해의 자유에너지 변화가 생명의 화학 반응을 구동하기에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알맞은 범위에 있고, 단순히 열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인산기 전달로 반응 경로를 바꾸어 다양한 분자에 효율적으로 작용하며, 물속에서 자발적으로는 쉽게 분해되지 않으면서도 효소가 개입하면 쉽게 분해되는 특성 덕분에 저장성(안정성)과 활용성(통제 가능성)을 함께 갖추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능적 장점만으로는 비슷한 후보가 여럿 있는데 왜 하필 ATP가 선택됐는지가 질문으로 남는다. 진화적 측면에서 ATP의 보편성은 초기 생명 탄생 이전, 즉 화학 진화 단계에서 아데닌이 다른 염기들에 비해 비교적 쉽게 합성되어 풍부하게 존재했다는 가설에서 출발한다. 풍부한 재료를 바탕으로 초기 대사 네트워크가 아데닐레이트ATP·ADP·AMP 회로를 중심으로 조직되자, 이는 곧 생명 체계의 표준이 되었다. 일단 표준이 자리 잡은 뒤에는 그 표준이 만드는 강력한 호환성과 네트워크 효과로 인해 다른 매개체로 전환하는 데 드는 진화적 비용이 너무 커졌고, 결국 ATP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사용하는 대체 불가능한 공통 화폐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또 있는데, ATP는 에너지 화폐인 동시에, 생명의 설계도인 RNA를 구성하는 재료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에너지를 운반하는 분자가 곧 정보를 기록하는 부품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생명의 탄생 과정에서 에너지의 흐름과 정보의 기록이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분자적 기반 위에서 결합하며 시작됐음을 시사한다.

에너지 유통 단위가 ATP로 통일된 것은 생명의 역사에서 일종의 표준화 혁명이었다. 이는 대사의 호환성을 극대화하여 새로운 효소나 단백질이 진화할 때마다 별도의 에너지원을 개발할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 그 결과 생명은 에너지를 필요한 곳에 효과적으로 집중시킬 수 있어서, 근육이나 신경계 같은 고비용 구조가 진화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반면, 표준화는 특정 화학 경로에 생명 전체가 좌우되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미 모든 생체 기구가 ATP에 맞춰진 탓에, 더 효율적인 에너지 매체가 가능하더라도 그것으로 갈아타기는 극도로 어려워진다. 또한, 모든 생명이 ‘인P’을 기반으로 한 화학에 의존하게 되면서 인의 공급이 생태계 생산성의 병목이 되거나, ATP 생산을 막는 독성 물질에 대다수 생명체가 취약해지는 등은 표준화가 남긴 그림자라 할 수 있다.


: 광합성의 발명

생명의 탄생 과정과 맞물려 초기의 단세포 생명체는 심해 열수구 등에서 나오는 화학에너지에 의존했다. 하지만, 이 방식은 에너지 공급처가 매우 국소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그러다가 태양 복사 에너지를 화학에너지로 바꾸어 저장하는 광합성 능력을 갖춘 세포가 진화했고, 광합성 생명체는 어디서나 존재하고 훨씬 풍부한 에너지원인 빛에 의존해 해양 곳곳으로 퍼져나가며 번성하게 됐다. 광합성의 발명은 단순한 생물학적 진화를 넘어, 지구의 에너지 흐름을 뒤바꾼 행성 규모의 에너지 혁명이었다. 태양이 보내는 복사 에너지가 지구 환경을 유지하는 에너지원의 역할을 넘어 생명의 직접적인 에너지 원천이 되며, 지구의 생물량을 엄청나게 늘리는 동시에 생명 진화 경로를 바꾸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됐다.

광합성이 전 지구적으로 확산하는 데는 시아노박테리아가 출현하며 광합성에 필요한 전자 공여체를 초기의 황화수소H₂S, 수소H₂, 철Fe²⁺ 같은 공여체에서 공급이 쉬운 물H₂O로 대치하는 진화가 일어난 것도 한몫했다. 그런데 이 변화는 생물량의 급격한 증가와 더불어 광합성의 재료인 이산화탄소CO₂가 생물량에 흡수되어 감소하고, 부산물인 산소O₂가 해양과 대기에 서서히 축적되는 ‘대산소화 사건’을 가져왔다. 산소의 독성에 대한 대비가 안 돼 있던 초기 생명체들은 타격을 받아 생태계에 변화가 일어났고, 온실기체인 이산화탄소와 메탄의 감소는 지구의 온도를 떨어뜨려 ‘눈덩이 지구’를 촉발했다. 이런 전 지구적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은 생명체는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진화의 힘을 발휘하며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다. 산소에 대한 내성은 물론 역으로 산소를 이용하여 더 효율적으로 ATP를 생산하는 ‘산소호흡’을 개발하여 더 복잡한 생명체로 진화할 수 있는 에너지적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 산소호흡의 발명 

해양에서 산소 농도가 올라가자, 반응성(독성)이 강한 산소를 에너지 전환에 역이용하는 산소호흡이 진화했다. 무산소 대사보다 월등히 높은 산소호흡의 효율은 세포의 에너지율밀도를 크게 올렸고,17 이는 더 크고 복잡한 체계를 갖춘 진핵 세포와 규모가 더욱 커지고 조직화한 다세포 생명으로 진화하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산소를 끌어들여 가용 에너지를 늘린 것에는 관리 비용이 따랐다. 세포 내 산소가 풍부해질수록 산화 손상은 누적되기 쉬웠고, 이를 억제하고 수리하는 능력은 생존의 필수 조건이 됐다. 산소호흡과 산화 방어·복구 체계의 동반 진화는 통제가 가능한 경우에만 에너지 증가가 복잡성의 증가와 지속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진핵 세포의 구조는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에너지 공급이 늘면서 막으로 둘러싸인 여러 소기관이 출현하며 기능이 분업화됐는데, 그중에 핵심은 정보를 관리하는 핵과 에너지를 생산하는 미토콘드리아이다. 이는 정보 관리 기관과 에너지 생산 기관이 격리됨으로써 정보 손상이 줄어든다는 점과 더불어, 복잡성의 증가가 에너지 흐름과 정보처리의 정교한 결합을 통해서 완성됨을 시사한다.


: 포식의 진화, 생태계 형성과 정보 전쟁 

광합성으로 생물량이 크게 늘고 산소호흡으로 고비용의 활동이 가능해지자, 스스로 에너지를 생산하는 대신 다른 생명체가 축적한 에너지를 전용하는 포식이 유력한 생존 전략으로 부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포식은 다른 생명체가 긴 시간 축적한 에너지를 짧은 시간에 끌어다 쓰는 ‘에너지의 시간적 압축’을 통해 에너지율밀도를 대폭 끌어올렸고, 이는 포식자가 더 고비용의 활동을 할 수 있는 동력이 됐다. 이 치명적인 에너지 획득 방식은 포식자와 피식자의 대결 구도를 만들었고, 이는 공격과 방어가 맞서는 ‘군비 경쟁’으로 이어져 다세포 생물과 동물의 진화 과정에서 강력한 진화 압력으로 작용했다. 그렇기에 한 번 등장한 포식은 되돌릴 수 없는 진화의 관성이 되어 끊임없이 정교해졌다.

포식의 확산은 개체 간의 투쟁을 넘어 생태계라는 정교한 에너지 이동 경로를 형성했다. 다세포 동물의 다양성은 이 거대한 에너지-망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공진화의 결과이다. 포식이 밀어붙인 또 다른 진화 방향은 ‘조직화’였다. 다세포 생물 내부에서는 늘어난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기능을 분업화한 기관들이 조직됐으며, 이러한 조직화는 개체 수준을 넘어 생태계 전체로 확장되어 정교한 먹이그물을 형성했다. 무엇보다 포식은 동물에게 가장 혁신적인 도약을 가져왔다. 에너지 확보를 위한 물리적 전쟁이 피식자를 더 정확히 포착하거나 포식자를 더 빨리 감지해야 하는 치열한 정보 전쟁을 동반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보를 받아들이는 감각 기관들이 발달하고, 이를 운동 기관과 통합하여 운영하는 신경계가 급격히 고도화했다. 이는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외부(타자·환경) 정보를 해석하고 내부(행동) 정보를 실행하는 능력이 고도화되면서, 동물은 열역학적 존재를 넘어 정보적인 존재로서 나와 타자를 구분하고 인식하는 주체성의 단계로 들어서게 됐다.

타자의 에너지를 전용해야만 나의 복잡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포식의 숙명은 동물의 한 종인 인간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리고 그 기조는 인류의 진화 과정과 문명의 역사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포식은 에너지 획득이 진화의 가장 강력한 추동력임을 보여주는 동시에, 복잡성의 증가가 타자와의 관계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문명과 에너지

인류와 문명의 역사 기저에는 더 많은 에너지를 획득하고 제어하기 위한 투쟁과 적응의 기록이 깔려 있다. 인류가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로 올라서자, 포식 못지않게 에너지 획득을 놓고 벌어지는 동종 집단 간 경쟁과 협력이 중요한 진화 동력이 됐다. 그래서 에너지와 정보의 흐름을 제어하여 집단의 규모를 키우고 조직화하는 역량이 생존에 중요한 요소가 됐고, 에너지 흐름의 규모와 형태가 바뀔 때마다 인간 사회의 규모와 조직 방식도 함께 바뀌었다. 이제 이 마지막 절에서는 에너지가 인류의 진화와 문명의 발전을 어떤 방식으로 밀어붙였는지, 그리고 그 대가와 한계는 무엇인지 차례로 따라가 보자.


: 불의 이용 

불의 이용은 다른 생물에 저장된 화학에너지를 자신의 몸 바깥에서 제어하고 활용하게 됨으로써 인류가 생물학적 에너지의 한계를 넘어선 사건이다. 불로 음식을 익혀 먹게 됨으로써 소화흡수율을 높여서 더 적은 시간과 노력으로도 더 많은 에너지를 얻게 됐고, 이것이 고비용인 큰 뇌가 진화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불은 열과 빛을 제공해 인류의 삶의 영역을 넓혔고, 굽고 말리고 녹이는 과정으로 재료를 변형·활용하는 기술의 출발점이 됐다. 불의 이용은 ‘더 많은 에너지’뿐만 아니라 ‘에너지를 통제하는 능력’이 인간 진화의 경로를 바꾼 사건이었다.


: 농업의 시작, 에너지 편중과 여분 에너지

농업의 핵심은 생태계 전체에 흩어져 흐르는 광합성 에너지 중 일부를 인간이 원하는 종과 장소에 집중시키고, 그것을 인간이 끌어다 쓰는 것이다. 농업의 성공은 인간이 생태계의 에너지 흐름에서 차지하는 몫을 급격히 키우며, 생태계 구조 자체를 재편했다.18 수렵·채집에서 농업으로의 전환은, 식량이 풍부한 지역에서 인구 증가로 인해 인구밀도가 수렵·채집 수용 한계를 넘어가면서 집단 간 경쟁이 격화됐고, 그 속에서 정착과 농업을 선택한 집단이 역으로 경쟁의 우위를 차지하면서 일어난 변화로 보고 있다. 이는 인류의 에너지 획득 경쟁이 개체 수준이 아니라 집단 수준의 문제가 됐음을 시사한다. 정착과 농업은 에너지(식량) 획득을 안정화해서 인구 증가에 더 유리하게 작용했고, 그 결과 집단의 규모가 커지고 생존에 필요한 양을 넘어서 여분 에너지(식량)도 생겨났다. 이 여분 식량은 인간의 활동 폭을 넓히며 분업화를 촉진했지만, 동시에 식량의 분배·저장·보호라는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이 문제는 인간 사회를 더 큰 규모로 조직화하는 방향으로 이끌었고, 그 과정에서 분배의 불평등이 고착되며 계층화도 나타났다. 집단 간 경쟁이 지속되는 환경에서는 인구와 에너지의 규모에 더해서 그 흐름을 밀집시켜 더 빠르고 큰 규모로 노동력과 자원을 동원할 수 있도록 조직화한 집단이 유리해졌고, 이런 체계가 제도화되면서 도시국가와 문명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농업은 에너지를 인간 쪽으로 집중시키고, 그 여분을 저장하고 신속하게 동원할 수 있게 함으로써 문명의 기반을 만든 체제 전환이다.


: 문명의 탄생, 에너지와 정보의 결합

문명의 탄생은 인간 사회의 조직화가 새로운 단계로 도약한 사건이다. 도시는 인구를 밀집시켜 에너지와 물질의 흐름을 조밀하게 만들었고, 통치 제도는 세금·치안·법과 기록(문자)을 통해 그 흐름을 관리하며 필요할 때 인구와 자원을 동원해 특정한 목적에 집중 투입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 농업이 생태계의 에너지를 끌어와서 인간이 쓸 수 있는 여분의 에너지를 늘렸다면, 도시국가는 인구를 밀집시켜 조직화해 여분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춘 것이다. 여분 에너지가 커질수록 사회적 마찰과 조정 비용도 함께 커질 수 있는데, 이를 억누르려면 에너지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통제에는 정보처리 체계가 필요하다. 통치 제도는 개인을 넘어 사회 차원의 대규모 정보처리 능력을 갖추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정확한 기록을 위한 문자와 공동 규범과 정당화를 제공하는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부분의 초기 문명에 나타나는 관개 시설과 종교 시설의 건설은 문명이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여분 에너지를 집중 투입한 대표적 사례이다. 관개 시설은 물과 식량의 흐름을 안정화해 도시의 ‘대사’를 지탱했고, 지구라트나 피라미드 같은 종교 시설은 여분 에너지를 장기간 동원해 질서와 정당성을 물질로 고정함으로써 사회를 결속시켰다. 반면 정복 전쟁은 문명이 바깥의 토지·노동·자원을 흡수해 여분 에너지의 규모 자체를 키우는 팽창 메커니즘이었다. 즉 문명은 내부에서는 관개와 성소를 통해 에너지 흐름을 안정시키고, 외부로는 정복과 조공을 통해 그 흐름의 범위를 넓히며 성장해 왔다.19 


문명이 에너지와 정보의 결합으로 성립했다는 점은 문명의 성장-진화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새로운 에너지원뿐만 아니라 새로운 제도, 기술, 종교 등이 도시국가에서 제국으로, 다시 대제국으로 문명의 규모를 키우며 복잡도를 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0 문명의 확장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도약으로 농업과 운송 수단에 변혁을 가져온 동물 노동력의 이용이 있다. 특히 말의 이용은 빠른 속도 덕분에 통치 영역의 확장을 가능하게 해서 대제국이 성립하는 기반이 됐다.

문명은 여러 면에서 생명과 닮았다. 생명이 에너지 흐름과 정보처리를 결합해 자기복제의 복잡한 기능을 수행하듯, 문명 또한 여분 에너지의 흐름에 정보처리 체계가 결합해 개인은 할 수 없는 창발적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생명과 마찬가지로 이 결합이 어긋날 때 문명은 위기에 처한다. 에너지 기반의 붕괴, 무리한 확장과 과도한 동원, 혹은 분배의 실패로 사회적 마찰이 조정 능력을 넘어서는 순간 문명의 안정성은 깨진다. 통치와 제도가 에너지와 물질의 흐름을 제대로 조정하지 못하는 정보처리의 마비는 문명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 화석연료와 산업혁명

산업혁명은 화석연료와 인류의 지식이 결합하며 만들어진 문명 전환이었다. 화석연료는 지층에 저장된 태양 복사 에너지다. 대규모 석탄층은 육지 식물이 번성한 시기에 주로 형성되었고, 석유는 대체로 해양 유기물(플랑크톤·조류)의 퇴적과 변성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훗날 인류 문명의 판을 바꾸리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산업혁명 이전 인류의 에너지원은 대체로 식량, 장작과 사료 같은 생물량에 묶여 있었다. 저장을 통한 여분 에너지의 축적이 가능했지만 그 양과 기간이 제한적이었기에,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 총량은 토지 면적과 광합성 생산성이라는 ‘천장’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러나 석탄과 석유는 수억 년이라는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광합성 에너지를 한꺼번에 꺼내 쓰게 해 주는 거대한 저수지였다. 화석연료의 등장은 ‘더 많은 에너지’만이 아니라 ‘필요할 때 즉시 동원 가능한 고밀도 에너지’를 인류에게 제공했다. 이 에너지가 증기기관을 비롯한 동력 기계와 결합하면서 대규모의 기계적 일로 바뀌어 사람과 동물 노동의 한계를 밀어냈다. 그 결과 생산과 운송의 규모가 폭발적으로 커지며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여기서 산업혁명의 핵심은 화석연료 자체가 아니라, 그 에너지를 일로 변환하는 기계와 그것을 낳은 지식의 축적, 곧 에너지와 정보의 결합이었다. 이어서 20세기에는 화석연료에 의존한 에너지 소비량의 비약적 증가와 과학과 기술의 도약이 맞물리며, 대규모로 인구가 증가하고 문명이 대약진한 시기가 되었다.21 그리고 인류의 에너지 주소비처는 생존을 위한 ‘대사 에너지’에서 문명을 지탱하는 생산과 이동, 정보와 조직을 위한 ‘외적 에너지’로 옮겨갔고, 이에 따라 인간의 활동도 생존 중심에서 문화 중심으로 이동했다. 화석연료가 없었다면, 그리고 그것을 다룰 과학과 기술이 없었다면, 현재의 산업과 정보 중심의 문명이 가능했을까?


: 전기에너지의 시대

화석연료가 문명 대도약의 밑거름이었다면, 지금은 에너지와 정보 모두 전기를 타고 흐르는 ‘전기 문명’의 시대라 할 수 있다.22 생명의 에너지 유통이 ATP로 사실상 통일되었듯이, 현대 문명은 에너지 유통 매체를 전기로 통일해 가는 추세이다. 인류의 물질·에너지 공급 체계는 물과 음식에서 시작해 장작 같은 생체연료, 석탄·석유 같은 화석연료를 거쳐, 이제 전력망을 통해 에너지를 먼 거리까지 빠르고 정밀하게 보내는 단계로 넘어왔다. 근본적으로는 태양 복사 에너지가 지구 표면의 거대 흐름을 지배한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지만, 문명을 움직이는 에너지의 주요 저장·유통 형태는 화학에너지 중심에서 전기에너지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전기의 강점은 첫째, 다양한 원천의 에너지를 단일한 형태로 표준화해 운반·분배할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 시간적·공간적 제약이 상대적으로 적어 생산하는 공간과 사용하는 공간을 분리할 수 있다. 셋째, 다른 형태(열, 빛, 화학, 운동 등)의 에너지로 쉽게 변환하고 정밀하게 제어할 수 있는 고품질(낮은 엔트로피)의 에너지라는 점이다. 그러나 전기는 대량 저장이 어렵고 공급과 수요를 실시간으로 맞춰야 하기에, 전기화가 심화할수록 저장과 유통의 제어가 문명의 새로운 병목으로 떠오른다. 전기는 미래의 핵심 에너지 매체로 가장 유력하지만, 저장이 가장 큰 걸림돌로, 배터리와 다른 저장 기술의 진화가 문명의 다음 도약을 결정할 것이다.


: 에너지와 문명의 미래 

문명의 진화는 에너지 획득량이 늘어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여분 에너지를 어떻게 유통하며 정교하게 제어해 쓰는가의 역사이기도 하다. 수렵·채집 사회가 대체로 생존에 필요한 만큼의 에너지만 비교적 직접적으로 소비했다면, 농업 사회는 여분 에너지를 축적하며 집단 규모를 키우는 과정에서 분배와 동원, 조정의 문제를 떠안았고 계층화가 나타나기 쉬웠다. 산업 사회는 화석연료라는 거대한 저장 에너지를 동원해 생산과 수송의 규모를 폭발시켰고, 전기 문명은 그 에너지 흐름을 표준화해 더 빠르고 정밀하게 배분·제어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그렇다면 에너지 획득량의 증가 없이도 문명은 발전할 수 있을까?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기술과 제도의 혁신은 같은 에너지로 더 많은 기능을 수행하게 하고, 특히 정보처리의 고도화는 조정 비용을 낮춰 문명의 효율을 끌어올린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큰 도약은 대개 새로운 에너지원의 등장을 토대로 일어났고, 20세기의 ‘대가속’은 그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에너지의 증가가 불평등을 ‘필연’으로 만들지는 않지만, 여분이 커질수록 분배와 정당화의 갈등이 커지고 조정 실패의 비용이 커진다는 점에서 불평등과 불안정의 위험을 함께 키운다. 또한 현재의 지구 온난화는 특정 형태의 대규모 에너지 소비가 지구 환경의 되먹임에 의한 기후 변화를 통해 문명의 안정성을 흔들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결국 앞으로의 문명 도약은 더 많은 에너지를 확보하는 문제와 더불어, 같은 에너지를 더 효율적으로 쓰고 더 공정하게 배분하며, 외부효과를 통제해 지속 가능하게 유지하는 능력—곧 에너지와 정보의 결합을 어디까지 성숙시킬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에너지로 보는 빅 히스토리

에너지의 관점에서 보면 빅 히스토리의 큰 흐름은 우주의 탄생과 함께 존재하던 에너지가 구조 형성을 통해 흐름을 만들고, 그 흐름 덕분에 출현한 복잡계가 더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소산하는 방향으로 진화함으로써 우주의 엔트로피 증가를 촉진해 온 과정이다. 초기 우주의 미세한 밀도 요동은 중력에 의해 별과 은하를 낳았고, 별은 장기간 지속되는 복사 에너지의 원천이 되어 행성에 복잡계가 출현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지구에서는 태양 복사와 지구 내부 열이 결합해 비평형의 순환 구조를 만들었고, 그 덕분에 생명은 에너지 흐름을 활용하는 데서 더 나아가 정보를 저장·복제·해석하는 체계를 갖춤으로써 자기복제 복잡계로 진화했다. 이후 생명은 광합성, 산소호흡, 포식 같은 혁신을 통해 에너지 활용의 범위와 밀도를 높였고, 인간과 문명은 불, 농업, 화석연료, 전기라는 단계들을 거치며 에너지의 획득 규모와 제어 능력을 비약적으로 확장해 왔다. 특히 문명은 여분 에너지의 흐름 위에 문자, 제도, 기술 같은 정보처리 체계가 결합하면서 더 큰 규모의 조직화와 동원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생명과 마찬가지로 에너지와 정보의 결합이 만들어 낸 고도 복잡계라 할 수 있다. 결국 빅 히스토리는 우주 구조가 만들어 낸 에너지 흐름 위에서, 생명과 문명 같은 복잡계가 에너지 흐름과 정보 처리를 결합하며 더 높은 복잡성을 구현해 온 역사로 볼 수 있다.

김항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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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물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