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윤

지난 번 글에서 예고한 대로, 이번 글에서는 원론의 필사본manuscripts 전통으로 거슬러 올라가 텍스트의 번역이 그림의 번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관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림의 번역과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그림도 번역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고찰한 뒤, 원론의 그림이 어떤 층위들 속에서 번역되어 왔는지를 생각해 보려 합니다.

그림을 번역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생소한 개념입니다. 텍스트와 달리 그림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에게도 정보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림의 창작자가 본래 그림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정보의 상당부분이 번역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되는 까닭은, 그림이 언어의 경계에 속박되지 않는 공통의 시각 수단을 매개로 정보를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과 같은 그림들을 원래의 그림 있는 그대로 감상합니다. 물론 그림의 창작의도와 배경 등에 관해 제한된 지식을 가진 독자들에게는, 그림을 감상하는 것이 텍스트를 읽는 것보다 더 난해한 경험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림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이 기대되는데, 설명이 있으면 덕분에 감상자들은 그림에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해설은 어디까지나 그림에 대한 이해를 돕는 차원에 머무를 뿐, 이를 그림의 번역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러한 일반적인 그림들과 달리, 유클리드 원론에 제시된 그림들은 기하학적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그려진 도형이라는 점에서 구별됩니다. 무엇보다도 이 기하학적 도형들은 텍스트와 함께 읽도록 고안되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원론의 독자들은 텍스트나 도형 중 어느 하나만으로는 충분한 이해에 다다를 수 없으며, 따라서 원론에서 텍스트와 도형은 서로 필수불가결한 보완관계를 형성합니다. 이 점이 유클리드 원론의 번역에 관해 연구할 때 텍스트의 번역뿐 아니라 그림의 번역도 함께 연구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가장 기초적인 수준에서 그림의 번역은 그리스어로 된 라벨label을 번역어로 바꾸는 작업이었습니다. 원론의 기하학적 도형들은 대개 텍스트에서 논의하게 될 점point마다 알파, 베타, 감마와 같은 순서로 라벨이 붙은 도형lettered diagrams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이 라벨들은 텍스트에서 논의가 진행될 때, 도형을 그에 맞춰 읽을 수 있게 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텍스트를 그리스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 자연스럽게 이 라벨들도 번역의 과정을 거치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림의 번역은 때로 단순히 라벨을 번역하는 수준을 넘어 더 깊은 차원의 번역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일례로 문화권에 따라 독자들이 읽기 편하도록 그림을 읽는 방향을 바꾼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라벨만 번역하는 것보다 심화된 그림의 번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랍어로 번역된 원론의 그림이 그리스어 필사본의 그림과 좌우가 뒤바뀐 방향으로 제시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지난 글에서 살펴보았듯 그리스어 사본에서 명제 1.22를 위한 그림, 즉 반직선을 긋고 두 원을 작도하여 주어진 세 선분을 변으로 갖는 삼각형을 작도하는 일련의 과정은,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진행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의 그림은, 텍스트를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읽는 아랍어 독자들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과 충돌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수의 아랍어 번역본들은 그리스어 사본의 그림과 거울상을 이루는 모습으로 번역된 그림을 보여줍니다.

 

 

물론 방향을 바꾸는 번역은 그 자체로는 그림의 의미를 바꿀 만큼 대단히 심오한 변화는 아닙니다. 그러나 원래의 그림을 번역될 토양에 맞추어 변형하려 했던 첫 번째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입니다. 이 변화를 필두로 원론의 기하학적 지식을 각자의 문화권 안에서 토속화, 국지화localization하려는 여러 움직임들이 관찰됩니다. 그러므로 원론 속 그림의 번역을 단순히 텍스트의 번역에 따른 부산물이 아니라, 텍스트의 번역보다 더 다면적인 양상을 만들어 낸 독자적인 대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논의의 편의상, 그리스에서 태생한 원론의 그림이 어떻게 여러 문화권의 시각적인 지식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는지 크게 세 가지 층위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첫째는 원론의 그림이 전달하는 시각적 지식이 번역어의 문화권에서 큰 무리 없이 수용될 수 있는 경우입니다. 원론에서 소개하는 기하학적 도형의 구성요소 중 상당수는 이미 번역어의 문화권에서도 통용되고 있었던 경우가 많습니다. 원, 삼각형, 사각형 등의 기본 도형은 원론을 비롯한 외부로부터의 기하학적 지식의 유입이 없더라도, 각 문화권에서 자생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기본적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흔히 우리가 기하학을 공부할 때 자연스럽게 상정하는 도형의 보편성입니다. 이 보편성 때문에 어떤 그림들은 라벨의 번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변화 없이 원래의 그림 그대로 재사용되더라도 새로운 독자들에게 어려움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림의 번역이 텍스트의 번역에 비해 큰 변화가 없을 것이란 선입견은 여러 번역본을 거치면서도 반복적으로 재생산된 이런 도형들로부터 기인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일면 사소해 보이는 그림의 번역이 텍스트의 번역 작업을 더욱 용이하게 만들어주기도 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는 같은 대상을 지칭하는 기존 용어와 번역된 용어를 호환할 수 있는 근거가 그림에서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원론에서는 네 개의 변으로 둘러싸인 도형을 일관되게 사변형quadrilateral; tetrapleura; quadrata이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이것을 사각형으로 쉽게 호환할 수 있는 까닭은, 그림에 의해 두 용어가 같은 대상을 지칭한다는 것이 자명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원론의 그림이 번역본에서 늘 재활용된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원론의 도형에 스타일의 변화를 가미한 번역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초기 라틴어 번역본 역할을 했던 보에티우스Boethius, c.477-524의 편집본에서 도형들은 대부분 굵은 테두리를 가진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테두리를 가진 도형으로의 번역은, 막대와 나무틀을 이용해 손에 만져지는 형태로 기하학을 학습했던 전통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이는 도형을 추상화된 사유의 대상으로 다루었던 그리스 기하학이 도형을 제시할 때 너비를 무시할 수 있는 가는 선을 사용한 것과 대조됩니다. 12세기에 본격적으로 아랍세계로부터 원론이 유입되기 전까지, 중세 유럽에서는 장인과 기술자의 필요에 따라 전수되었던 실용적인 기하학이, 원론으로 대표되는 이론적 기하학의 자리를 당분간pro tempore 대체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둘째는 원론의 기하학적 지식이 번역어의 문화권에서는 기존 모습 그대로 전달될 수 없는 경우입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원론의 기하학적 지식에 상응할만한 개념이 번역어의 문화권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경우 번역자는 먼저 텍스트에서 거론되는 기하학 용어들을 어떻게 적절한 번역어로 바꿀 것인가의 문제를 풀어야 하고, 또 그에 상응하여 원래의 그림을 어떻게 변형할 것인가의 문제에도 직면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초기의 라틴어 번역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보에티우스의 단편적인 편집본들을 제외하고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라틴어 번역본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2세기 배쓰의 아델라르두스Adelard of Bath, 카린티아의 헤르만Hermann of Carinthia, 크레모나의 제라르드Gerard of Cremona와 같은 번역자들의 작업입니다. 이들을 비롯해 초기 라틴어 번역본을 만들었던 편집자들 상당수가 기하학 개념을 번역할 라틴어를 충분히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랍어 용어를 그대로 옮겨 사용한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라틴어 번역본의 도형에 여전히 아랍어 번역본의 흔적이 남기도 했습니다.

또한 라틴어 텍스트의 독자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을 읽지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되는 아랍식 도형들을 마주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림은 새로운 번역어를 만들기 위한 근간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원론 2권에 등장하는 “그노몬gnōmon”입니다. 원래 그노몬은 해시계에서 막대의 그림자의 끝, 도형수에서 같은 패턴의 그 다음 수를 만들기 위해 덧붙여지는 부분, 목수의 직각자 등 다양한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유클리드는 평행사변형에서 대각선을 기준으로 그것과 닮은 더 작은 평행사변형을 뺀 나머지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이 독특한 도형을 번역해야 했던 여러 문화권의 번역자들이 애를 먹었다는 사실은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은 별다른 대안이 없어서 그노몬이라는 말을 그냥 가져다 쓰기도 했습니다. 이외에 우리말 번역에서 그림에 근간하여 ㄱ자 혹은 ㄴ자 도형이라고 이름 붙인 사례가 있으며, 영미권에서도 간혹 그노몬 대신 L-shaped figure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경우 그림의 모양에 따라 새로운 번역어를 만든 것이기 때문에 원래의 단어 그노몬과 의미상으로 연결되는 지점은 없습니다.

아주 그리스적인 그노몬의 그림 자체를 번역하는 문제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스어 필사본에서 그노몬을 그림으로 표현할 때는 그 모양을 본떠 ㄱ자 혹은 호(arc) 모양의 표식을 삽입해 두었습니다. 번역자들에 따라 번역본의 그림에 표식이 포함된 경우도 있고 누락된 경우도 있습니다. 그노몬에 친숙하지 않을 독자들에게는 평행사변형 안의 표식이 혼란을 더욱 가중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낯선 기하학 개념을 담고 있는 도형을 어떻게 소개할 것인가’는 번역자들이 씨름해야 했던 주된 문제였습니다.

 

 

마지막은 원론의 그림에 대해 번역자의 재해석이 이루어진 경우입니다. 때로는 번역되는 문화권의 기하학적 전통이 원론의 그림의 번역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는 번역자들이 원론의 그림에서 측도measurement의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그림을 수정해 나갔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원론을 비롯한 고대 그리스 수학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변의 길이나 각의 크기를 서로 비교할 뿐 (크다, 작다, 합동이다 등) 직접적으로 절대적인 수치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히포크라테스의 초승달처럼 구하기 어려운 문제를 더 쉬운 문제로 전환하는 방식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때문에 그리스어 필사본에서는 길이나 넓이의 기본적인 상응 관계가 맞지 않는 그림들이 제시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원론의 그림을 번역해야 했던 번역자들과 독자들은 구체적인 수치를 사용해 길이, 넓이, 부피를 구하는 문제를 푸는 상황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래의 그림은 현존하는 중국 수학 전통 초기의 그림 중 하나(From 1213 Edition of The Gnomon of the Zhou by Bao Huanzhi)인데, 격자점을 이용해 도형들의 넓이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형에 관한 어떤 수치 정보 없이 도형들 간의 관계를 논의하고 있는 유클리드 원론의 그림들은, 번역 과정에서 그림의 비율을 조정하거나 수치 정보들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수정되기도 했습니다. 아랍어나 라틴어의 번역본에서 더 이상 측도가 맞지 않는 그림들이 등장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림의 번역에 대한 연구는 아직 걸음마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철학 분야에서 개념사 연구를 위해 하나의 용어가 여러 문헌들 속에서 역사적으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용례들을 수집하듯이, 기하학에서도 개별 용어들과 그것의 시각적 표현인 도형들이 언제 어디서 최초의 전거를 가지며, 어떻게 번역되었고 토착화되었는지 자료들을 수집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원론은 가장 많이 사용되고 가장 멀리 퍼져나간 고전으로서, 이러한 작업을 진행하기에 좋은 장을 마련해 줍니다. 시각적 지식을 대표하는 기하학 용어들과 그림들의 번역과 확산에 대해 우리가 어떤 밑그림이라도 갖게 된다면, 시각적 지식들이 어떻게 창조되고 전수되는지에 대해 지금까지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면서 저는 현재 도형의 역사에 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원론의 최초 증인 역할을 하는 그리스어 필사본 전통 속에서 원론의 그림들을 더 살펴보려 합니다. 그리스어 필사본 전통에서는 오늘날 우리의 관습과는 다른 여러 흥미로운 특징들이 발견됩니다. 앞서 언급한 측도적인 정확성을 무시한 사례 이외에도 지나치게 특수한 형태로 그려진 도형 등 현대 독자들에게는 다소 낯선 형태로 그려진 그리스어 사본의 독특한 그림들은, 고대 그리스와 비잔틴 세계에서 기하학을 학습하는 경험이 오늘날과는 다를 수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렇게 유클리드가 알고 있었고 말하고 있었던 그 기하학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보려고 합니다.

이은수
스탠포드대학 고전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