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의 기하학은 전례가 없는 독특한 방식으로 증명을 펼쳐나갈 훌륭한 경연장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이 경연장에서 그리스인들은 추상화된 도형 위에 선을 그려 넣거나 넓이와 부피를 계산하면서 도형과 도형 사이의 그럴듯하지 않았던 관계를 설득력 있는 증명으로 소개하곤 했습니다. 이전 글에서는 증명을 통해 도달하게 되는 아름다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수학에 대해 갖고 있는 심미적 기준을 고대 그리스 수학에 투사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한두 걸음 물러서서 조금 더 넓게 고대 그리스 수학에 대한 그림을 그려보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그려왔던 고대 그리스 수학의 풍경이 특정한 종류의 기하학을 가까이 들여다본 결과였다면, 이번에는 지면의 한계가 있지만 고대 그리스 수학을 그들의 문화 안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줌 아웃된 풍경에서 우리는 기하학에서 읽어냈던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가 고대 그리스 문화 전반에 걸친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와 공명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름다움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 막연하고 추상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얻을만한 몇몇 단서들이 필요합니다. 오늘 이야기를 아르키메데스의 무덤에 관한 일화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로마 최고의 연설가이자 뛰어난 정치가였던 키케로는Marcus Tullius Cicero는 시칠리아섬 시라쿠사에서 아르키메데스의 무덤을 발견했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재무관으로 있었을 때, 나는 아르키메데스의 무덤을 찾아보았다. 당시에 그의 무덤은 시라쿠사인들에게 큰 관심을 끌지 못했고, 그래서 그들은 그의 무덤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기도 했다. 내가 무덤을 찾았을 때 무덤의 온 사방이 가시덤불에 가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무덤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언제고 내가 아르키메데스를 기념하는 몇 줄의 기록에 대해 들었던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그 기록에 따르면 아르키메데스의 무덤 위에는 원기둥과 구가 함께 세워졌었다고 하였다.

덤불 위로 약간 더 솟아오른 작은 기둥 하나가 내 눈에 띄었고, 그 위에 구와 원기둥이 그림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즉시 함께 있던 시라쿠사인들의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고 있었던 무덤이라고. 일단 사람들이 낫을 들고 주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무덤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 열려서 우리가 받침돌 앞까지 나아갔을 때, 절반이 마모된 경구epigram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 그리스 세계의 가장 위대한 도시에서, 한때는 가장 학식으로 넘쳤던 도시에서, 그 도시가 배출했던 가장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가 하마터면 거의 잊혀질 뻔했었다. 아르피눔 출신의 한 사람(키케로 자신)이 그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더라면 말이다.”

키케로 투스쿨룸 대화 V.24

 

사실 키케로가 이야기를 전하는 대목은 시라쿠사에서 가장 부덕하고 잔인한 참주와 가장 현인이었던 아르키메데스를 비교하는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구와 원기둥 그리고 원뿔에 관한 아르키메데스의 발견이 그의 무덤 위에 기록되어 있었다는 점이 더 눈길을 끕니다.아르키메데스는 자신이 연구하는 도형의 그림을 밟아섰던 로마병사에게 내 원을 망치지 말라Nōlī turbāre circulōs meōs!고 말을 했다가 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로 유명합니다. 로마군이 시라쿠사를 포위 함락시켰던 기원전 212년의 일이었습니다.

 

아르키메데스의 급작스러운 죽음을 생각해보면 그가 자신의 무덤에 기록을 남겨달라고 말할 여유가 있었을지 의문이 남습니다. 아마도 그를 기념하려 했던 동료시민들이 아르키메데스를 기억할 가장 탁월한 발견으로 구와 원기둥과 원뿔을 새겨넣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르키메데스가 자신의 증명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던 만큼3 그 스스로도 자신을 기념하는 비석에 대해 만족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과연 원뿔과 구와 원기둥의 어떤 아름다움이 아르키메데스를 그토록 이 입체들에 매료되게 만들었을까요? 이전 글에서 인용했던 아르키메데스의 말을 다시 인용하자면 “자연에서는 이 성질들(구와 원기둥 사이의 부피와 겉넓이의 상호관계)이 앞서 언급한 입체들(구와 원기둥)이라면 언제나 성립하는 것이었는데, 이전에 수학에 매진하였던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이 입체들 사이에 이렇게 간단한 공통의 비가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다”고 말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아마도 그가 발견한 아름다움은 세 입체의 부피가 아주 간단한 세 정수의 비 1:2:3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점이었을 것입니다.

 

그리스 수학을 그들의 문화 안에서 더 넓게 살펴보면 아름다움을 수와 연관짓는 태도가 수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수를 통해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혹은 수를 통해서 아름다움을 더 잘 설명하려는 노력을 수학자가 아닌 사람들에서도 드물지 않게 만나게 됩니다.

 

[그림3-1]의 조각상은 그리스에서 수학이 아름다움에 닿아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4 이 조각상은 도뤼포루스Doryphorus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있는데 “창을 나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원래는 조각상의 손에 창이 들려있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폴리스를 수호하고 있는 시민의 모습에서 조각상을 민주주의에 대한 상징으로 읽어낼 수도 있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조각상을 만든 폴뤼클레이토스Polykleitos, 기원전 5세기가 미적 완벽함을 얻기 위한 수학적인 토대를 연구하면서 <카논Canon>이라는 작품도 함께 남겼다는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도뤼포루스는 폴뤼클레이토스가 인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수학적인 접근법을 구상화시킨 모범적인 사례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조각상의 청동 원본이 사라졌듯이 <카논> 역시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는데, 폴뤼클레이토스의 후대 작가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 <카논>의 내용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 의학자로 유명했던 갈레노스는 “폴뤼클레이토스의 <카논>은 (인체의) 모든 부분이 서로 다른 부분들과 함께 측정될 수 있는symmetria 완벽한 관계를 보여주었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캐논Canon이라는 뜻은 규범이나 기준이라는 의미로 친숙한데, 원래 그리스어에서 이 단어는 자ruler와 같이 무엇인가를 잴 수 있는 도구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제목이 암시하는 대로 폴뤼클레이토스는 인체의 이상적인 비례를 찾기 위해서 각 부분이 서로 어떤 비율을 갖는 것이 최고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지 재고 고치고 다시 재는 작업을 부단히 반복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폴뤼클레이토스는 “완벽한 아름다움은 수많은 계산과 많은 수를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점진적으로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5

비록 <카논>은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폴뤼클레이토스 이후로 많은 계산을 통해 아름다움을 이끌어내고자 했던 시도들이 여럿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원후 1세기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활동했던 비트루비우스를 볼까요? 그는 신전을 건축하는 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신전은 사람의 인체와 같다. 신전을 건축하는 데 있어서 통약가능성symmetria이 중요한데, 이 통약가능성이란 함게 측정될 수 있다는 것, 즉 고정된 단위를 사용하여 측정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중략) 자연이 사람의 몸을 설계할 때, 머리카락 뿌리에서부터 턱 바닥까지는 전체 키의 십분의 일, 턱 바닥에서부터 머리 꼭대기까지는 팔분의 일, 가슴 윗부분부터 머리끝까지는 전체의 육분의 일을 이룬다. (중략) 이와 마찬가지로 신전의 구성도 각 부분들이 전체적인 크기에 대해서 비례에 따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남긴 작품 <비트루비안 맨L’Uomo Vitruviano> 덕분에 더 유명해진 인체의 비례에 관한 이 이야기 속에서, 비트루비우스는 아마도 폴뤼클레이토스가 <카논>에서 했었을 법한대로 끊임없이 수와 인체의 비례를 이야기합니다. 이렇듯 고대 그리스와 그를 계승한 로마 세계의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지난한 계산의 수고로움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폴뤼클레이토스의 도뤼포루스, 비트루비우스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의 비례와 관한 연구는 우리가 예술 작품을 볼 때 두 가지를 함께 보도록 유도합니다. 겉으로는 아름다운 인체의 모상을 보게 되지만, 그 안으로는 아름다움의 토대가 되는 수의 비례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것이지요.

수를 토대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표현한다는 생각은 그리스 문화 안에서 많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중에서 단연코 가장 중요한 예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이겠지요.

 

 

통상 고대 그리스 신전에서 열주들을 세울 때 가로 방향의 열주의 수와 세로 방향의 열주의 수가 대개 n:2n+1의 비를 이루는 경향을 보입니다. 파르테논도 크게는 이 법칙을 따르는데, 신전의 정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신전의 높이와 너비의 비율이 4:9를 이루고, 다시 또 신전의 너비와 길이의 비가 4:9를 이룹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이 신전을 보면서, 익티노스와 칼리크라테스가 파르테논 신전을 건축할 때 반복해서 고안해 둔 4:9의 비를 함께 보게 되는 셈입니다.

아르키메데스가 천착했던 원뿔과 원기둥과 구의 비, 폴뤼도루스와 비트루비우스가 찾으려 했던 이상적인 인체의 비, 익티노스와 칼리크라테스가 구현하고자 했던 완벽한 신전의 비에서 공통적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름다움을 간단한 정수의 비로 나타낼 수 있고 반대로 간단한 정수의 비로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다는 신념입니다. 이 신념에 방점을 찍는 가장 중요한 예는 고대 그리스 음악입니다.

사실상 음악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수와 아름다움을 연관짓기 시작한 시초이기도 합니다. 피타고라스 이후로 필롤라오스Philolaus of Croton, c.470-385 BC나 아르퀴타스Archytas of Tarentum, c.428-347 BC 같은 많은 그리스 철학자들은 아름다운 음을 만드는 현의 길이의 비를 찾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옥타브와 5도와 4도와 같은 조화로운 음harmonia이 2:1, 3:2, 4:3처럼 현이 간단한 정수비를 이룰 때 만들어 진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더 아름다운 음을 찾기 위한 노력은 그리스의 4줄 악기에서 유래한 음계 테트라코드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되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음악이 그리스에서 비와 비례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키게 된 가장 강력한 동기를 제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비단 수와 비례만이 아닙니다. 대개 미술사를 공부할 때, 예술에 대한 수학적 접근을 진지하게 논의하게 되는 시점은 초기 르네상스 산세폴크로 출신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1415-1492나 뉘른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 같은 작가들의 등장인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이런 작가들이 기하학을 공부해 작품의 수학적 기초를 세우는데 애를 많이 썼기 때문입니다. 또 원근법을 이야기하는 것은 브루넬레스키의 피렌체에서의 원근법 실험을 기점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일찍 고대 그리스 화가들은 그리스 비극 공연의 무대 배경을 그리는 과정에서, 그리스 토기 안에 영웅들의 중요한 장면을 묘사하면서 기하적 도식에 관한 고민을 남겨놓았습니다. 기원전 5세기경 활동했던 사모스섬 출신의 아가타르쿠스Agatharchus는 비극 공연의 무대 배경을 그리면서 원근법에 대해 연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다른 대표적인 사례로는 아래 제시된 고대 그리스의 토기처럼 방패와 바퀴가 원이 아니라 타원으로 표현된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클리드의 <광학Optic>에서는 왜 때로 전차의 바퀴가 원이 아니라 찌그러진 모양으로 보이는가를 설명하고 있기도 합니다. 바퀴를 바라보는 눈과 바퀴의 중심을 이은 선이 바퀴와 수직을 이룰 때는 모든 반지름이 다 똑같은 길이로 보이므로 바퀴가 원처럼 보이지만, 수직을 이루지 않을 때는 모든 반지름이 똑같지 않고 한쪽은 길고 다른 쪽은 짧게 보이기 때문에 찌그러진 모양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유클리드의 설명입니다.

지금까지의 긴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폴뤼클레이토스는 그의 이상적인 조각상 안에 수가 있다고 말합니다. 익티노스는 그의 웅장한 신전을 보여주면서 여기에 수가 있다고 말합니다. 음악가들은 조화로운 음을 들려주면서 여기에 수가 있다고 말합니다. 화가들은 아름다운 그림을 보여주면서 여기에 기하가 있다고 말하겠지요. 네, 저는 고대 그리스의 문화 속에 수와 비례와 기하에 관한 원리가 편재해 있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고대 그리스 문화를 수학적 원리에 바탕을 둔 문화로 읽는 시도는 고대 그리스에서 수학이 차지했던 비중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 문화의 중요한 배경 중 하나로 수학적 원리를 강조하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유익합니다. 하나는 서양 문화의 근원이 되는 그리스 세계를 좀 더 온전히 복원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지금까지 고대 그리스 세계에 다가가는 중요한 통로는 그들이 남긴 문학이나 철학작품에 편중된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 문화의 한 축을 이루는 고대 그리스의 수학과 과학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리스 세계를 다 알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다른 유익은 우리가 15세기 이후 과학사에 일어났던 중대한 사건을 고대 그리스에서 발원했던 수학과 과학에 대한 관심에 빗대어 살펴볼 수 있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제가 다음 글에서 다루려는 주제인데, 이번 연재의 마지막 글인 다음 편에서는 우리가 통상 과학혁명으로 불러온 사건을 과학혁명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과학의 르네상스로 불러야 할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은수
스탠포드대학 고전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