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문

우리나라에도 삼국시대 이전부터 측량이나 천문관측, (고차) 방정식의 해법 등 전통산학의 역사가 존재하지만, 현재 우리가 공부하는 서양수학의 방법론은 조선의 산학자들이 1730년에 중국에서 전해진 <수리정온數理精蘊>(1722년)을 공부하는 데서 시작한다. 보재 이상설1870~1917은 <수리정온>을 공부한 후 그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의 전통산학과 서양수학을 연결하는 첫 번째 수학책인 <수리數理>를 저술하였다. 이어서 19세기 말 선교사들을 통해 서양수학 교재가 도입되었고, 모든 학교에서 아라비아 숫자와 수학을 필수과목으로 배우게 된 갑오교육개혁을 전후로 서양수학의 교육이 시작되었다.

 

 

2. 호머 헐버트와 육영공원

 

서양식 신교육은 1886년 조선의 관립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園’에서 처음 시행되었다. 육영공원의 교과내용은 독서·습학習學·외국어·수학·자연·과학·지리·역사·정치학·국제법·경제학의 기초 내용 일부로 이루어졌다. 고종의 요청으로 호머 헐버트1863~1949,  Homer B. Hulbert, 길모어1857~1908, Gilmore, 번커1853-1932, Bunker 등 3명1이 1886년 7월 4일 육영공원 교사로 부임하였다. 육영공원에서는 당시 미국에서 사용하던 수학교재를 가져와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상설이 신학문 학습에 매진하기 시작한 것은 육영공원에서 미국인 교사들이 영어로 서양의 수학과 과학을 소개하기 시작한 1886년 전후이다. 이때 이상설은 수학과 과학의 중요성을 깨닫고 근대 서양수학 공부를 시작한다. 그는 헐버트와 교류하며 독학으로 서양의 수학과 과학을 학습하였고, 정릉의 신흥사에서 학우들과 합숙하면서 학업에 몰두하였다. 이상설의 문하생으로 알려진 민형식1875~1947은 1899년 학부 편집국장으로 임명된 후, 자신에게 서양수학을 가르쳐 준 이상설을 정부가 발간하는 첫 번째 중등 수학교과서 <산술신서算術新書>(1900)의 저자로 위촉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에 온 다른 선교사들과는 차별화된, 미국에서도 최고의 대학교육을 받은 교육자였던 호머 헐버트는 조선의 정규 관립학교에서 첫 근대식 수학교육을 시작한다. 이때 비로소 사칙연산을 넘어서는 서양의 고급 근대수학과 고급 자연과학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헐버트는 1891년 육영공원 교사직을 사임하고 오하이오주 퍼트냄Putnam 사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한 후, 아펜젤러 목사를 만나 다시 조선에서 봉사할 것을 권유받고 1893년 9월에 가족과 함께 감리교 선교사로 조선에 재입국한다. 헐버트는 1897년 다시 조선 정부와 계약을 맺고 ‘한성사범학교’ 책임자가 되고 대한제국의 교육 고문Advisor이 되었으며, 1900년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인 ‘관립중학교’로 옮겨 학생들을 가르쳤다.

 

고종은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이상설과 헐버트를 지명한다. 헐버트는 1907년 북간도 용정에서 출발한 이상설보다 먼저 조선을 떠나 일본,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미리 도착하여, 정사인 이상설, 부사인 이준, 통역관인 이위종을 마중하며 헤이그 활동을 도운, 또 한 명의 헤이그 특사로 평가된다. 한편 헐버트는 을사늑약 직후 우리 국민들에게 “교육만이 살길이다”라고 외치면서 교육의 강화를 통해 일본을 이겨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그는 <헐버트 교육 시리즈Hulbert’s Education Series>를 발간한 뒤 1908년까지 수학책을 포함하여 모두 15권의 한글 교과서를 펴냈다. 한성사범학교에서의 헐버트의 교육에 대한 기록으로는, 우용제와 안홍선이 공저한 논문 “근대적 교원양성제도의 변천과 사범대학의 설립”2에 교과과정 등 일부 내용이 실려 있지만, 실제로 사용한 교재와 기록물을 포함한 한성사범학교의 사료는 1906년과 1927년에 일어난 대규모 화재로 인해 모두 불타 없어졌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참고로 헐버트 박사는 한국의 독립운동사 측면에서도 중요한 인물이다. 일제의 경천사 십층 석탑 밀반출을 세계에 알리고 공개적으로 반환을 요구하여 성사시키고 조선독립에 헌신한 공로로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헐버트와 이상설에게 전달된 고종의 위임장에는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은 세계 각국이 인정한 바이고 각국과 조약을 체결했으니 열국 회의에 사절을 파견하는 것이 도리이다. 1905년 11월 18일 일본이 공법公法을 위반하여 외교대권을 강탈하여 열국과의 우의를 단절시켜 놓았다. 특사단은 헤이그 평화회의에 가서 우리의 고난을 피력하고 외교대권을 회복하기 바란다”라고 적혀 있다.

 

 

3. 이상설과 <수리> <산술신서>

1883년 식년시式年試 이후 11년 만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문과 과거의 대과(식년시, 5단계 시험)를 1894년에 치러 인재를 발굴한 고종은 1895년 2월 <교육조서>를 발표하고, 이어서 한성 사범학교관제, 외국어학교관제, 성균관관제(경학과에 산술학과 신설), 소학교령(현재의 초등학교)등을 공포하였다. 동시에 고종은 과거 대과에 합격하고 외국어와 서양수학 및 과학에 능한 이상설을 성균관장으로 임명하여 공교육의 근대화를 시도하였다. 1895년 8월 9일자 학부령 2호에 의해 성균관은 교과과정과 직제를 개편하며 관립 고등교육기관을 근대적 대학으로 개편하는 노력을 시작하였다. 성균관장으로 발령을 받은 이상설은 성균관 경학과 교과과정에 수학과 과학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하였다. 이상설은 당대를 대표하는 유학자이면서도, 우리나라가 선진국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과학 특히 근대 서양수학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수학교과서를 저술하고 관립교육기관의 교과과정에 수학과목을 필수과목으로 도입하는 등 중요한 교육적 업적을 이루었다. 그는 전통산학과 근대서양수학을 연결하는 <수리>를 저술하고, 저자가 명시된 조선 정부의 첫 번째 수학교과서인 <산술신서>를 저술하였으며, 19세기 말 성균관과 한성사범학교, 그리고 만주의 <서전서숙>에서 누구보다 먼저 서양의 근대수학을 가르친 수학교사였다.

<수리>는 이상설의 사위인 이민복李敏馥의 조카 이문원 중앙대 명예교수가 오랜 기간 귀하게 보관하다 <한국학 중앙연구소>에 기증하였다. 저자는 2015년 여름 이상설 관련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던 청주 KBS 나운한 국장의 도움으로 비로소 한국학중앙연구소에서 소장 중인 <수리> 원본을 처음 보았다. <수리>는 표지를 제외하고 모두 137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97쪽까지는 대체적으로 각 쪽이 8행으로 이루어진 책 형태이고 98쪽부터 137쪽까지는 문제 풀이 위주의 공책 형태였다. <수리>는 1886년부터 1887년 사이 또는 1898년부터 1899년 사이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리>는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중국의 <수리정온>의 내용을 인용하였는데, 독자를 상정하고 저술한 것이 아니라 이상설이 <수리정온>을 공부하면서 스스로 정리한 자료로 보인다. <수리>의 후반부는 이상설이 전반부에서 연구한 <수리정온>이 그가 접한 서양 수학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수리정온>에 들어있는 선부線部의 여러 문제를 새로운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음을 보이려고 한 것이 잘 나타나 있다.

예를 들어 제1문항(98쪽)에서는 구면삼각법의 등식을 논하였다. <수리정온>은 평면삼각법(하, 16권)만 도입하고, 구면삼각법은 전혀 도입하지 않았다. 천문학을 위한 구면삼각법은 조선에 들어와 산학자와 천문학자들이 연구했으나, 이상설이 인용한 책에 대한 정보는 없다. 그가 인용한 10개의 등식은 모두 한 꼭지각이 직각인 구면삼각형에 대하여 꼭지각과 호각들에 대한 공식들이다. 호각은 甲(=a), 乙(=b), 丙(=c), 꼭지각은 子(=A), 丑(=B), 寅(=C)이고 꼭지각 子가 90°인 경우에 다음 등식을 제시하였다. 편의상 각을 영자로 바꾸고, 정현正弦, 여현餘弦, 정절正切은 sin, cos, tan로 일부 식을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sin { (90-a)=\cos { b } \times } \cos { c } \\ \sin { c } =\cos { (90-a) } \times \cos { (90-c) } \\ \sin { (90-a)= } \tan { (90-B)\times } \tan { (90-C) }\)

 

위의 등식들은 모두 아래 구면삼각법의 cosine 법칙과 sine 법칙에서 쉽게 유도된다. 예를 들어, 첫째 등식은 \(\sin { A } =1;\cos { A } =0\)과 \(\sin { (90-a)=\cos { a } } \)임을 이용하면 우리에게 잘 알려진 cosine 법칙에서 바로 나온다.

 

위의 등식에서 이상설은 <수리정온>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던 곱셈 기호 ×를 사용하였고 분수의 나눗셈에서 기호 ÷를 사용하였다. 즉 <수리>의 후반부는 <수리정온>에 들어있는 문항들을 취급하였지만 <수리정온>의 기호 ∸, −, =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동양 수학의 관점에서는 새로운 대수 기법을 도입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설이 독창적으로 이론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지만, 근대 서양수학을 조선에 처음 도입하는 큰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산학자들은 <수리정온>에 들어 있는 서양 수학을 연구한 후 모두 서양수학을 무시하고 다시 전통적인 산학으로 돌아갔다. 이상설이 처음으로 사원술四元術3에 해당되는 개념을 아래와 같은 연산 기호를 사용하여 최초로 대수적으로 정리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업적이다.

위 식은 등차수열의 일반항과 부분합을 구하는 것으로, 두 번째 식의 분자에서 (末∸初)의 괄호가 빠진 것은 잘못되었다. 그러나 이는 문자를 이용하여 식을 나타낸 후 주어진 조건을 대입하여 문제를 해결한 사례로써 그 의미가 있다. 이상설은 연립방정식을 구성하여 전통산학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모두 서양식으로 다시 풀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문자와 대입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조선의 학부 편집국은 일본의 수학책을 급히 번역하여 저자도 없는 초등수학교과서인 <간이사칙문제집簡易四則問題集>과 <근이산술서近易算術書>를 1895년에 발간하여 새로 생긴 5개 관립소학교들의 교재로 제공하였다. <간이사칙문제집>은 가ㆍ감ㆍ승ㆍ제 등 간단한 사칙연산 문제를 주로 다룬 문제집이다. <근이산술서>는 학부에서 정한 소학교나 한성사범학교의 교과과정에 따른 것은 아니지만 신교육을 위한 최초의 교과서로, <명치산술明治算術>을 기본으로 하고 우에노 기요시上野 淸의 <근세산술近世算術>과 사쿠마 후미타로佐久間 文太郞의 <초등교육 근세산술初等敎育 近世算術>의 장점을 적절하게 취사선택하여 편찬한 것으로, 이 후에 나타나는 교과서의 모델이 되었다. 이 책들은 저자가 없이 조선 정부 학부 편집부 이름으로 발간된 것이 특징이다.

 

학부는 이상설에게 근대수학교과서를 의뢰하여 만든 후 <산술신서>4라는 이름으로 초판을 출판하여 교과서로 널리 이용하였다. 이는 저자가 명시된 우리나라의 첫 근대수학 교과서로, 현재 기준으로도 적지 않은 1천 부가 1900년에 초판으로 발간되었다. 이는 송상도가 쓴 <기려수필>에 이상설이 ‘당대 수학의 권위자’라고 언급된 이유이기도 하다. <산술신서>는 학부 편집국장 이규환의 부탁으로 이상설이 우에노 기요시의 <근세산술>을 번역하며 해설을 추가하고, 예제를 조선의 실정에 맞게 고친 중등학교 수학 교재이다. 이 책은 한성사범학교 수학 교재로 사용되었으며, 저자가 명시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수학교과서가 되었다. 이후 우리말로 쓰인 수학책들이 1910년 한일병탄까지 50종 이상이 출판되었다. <산술신서>는 소학교용이 아니라 교사를 배출하는 한성사범학교에서 예비교사 교육용 교과서로 쓰일 만큼 순열 등을 포함하는 당시 수준으로는 차별화된 조선어 수학책이었다.

홍성사 한국수학사학회 전임회장은 <산술신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전통적으로 동양수학에서는 소수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상설에게) 소수의 성질, 특히 소수가 무한이라는 증명과 소인수분해를 통한 수론은 아마도 매우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상설은 <산술신서>에서) 나머지 정리, 합동식, 일종의 상환(factor ring, /[k]), 지수법칙, 순환소수 등 간단한 수론을 포함시켰으며 그 증명을 하고, 또 이를 요구하는 문제를 포함하고 있는 것 등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이상설의 <산술신서>는 이후 출판된 수학교과서들의 표준이 되었다. <산술신서>가 발간된 이후, 곧이어 일본에서 엮은 유럽의 수학책들을 재차 편집한 남순희의 <정선산학精選算學>이 황성신문사를 통하여 1900년 9월 이후에 발간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서양수학의 기법을 한국에 도입하고, 근대 한국 수학 교육에 큰 족적을 남긴 이상설은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1905년 을사늑약을 조선에 강요하자, 당시 법부협판 겸 의정부 참찬 등 모든 관직을 파하고 고종 황제에게 사직탄원을 한 후 자결을 시도하였다. 이후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1906년 독립운동을 위하여 만주 용정에 <서전서숙>을 세우고 수학을 가르친다.

 

 

4. 이상익과 <산술전문학교>

3살에 부모를 잃고 형인 이상설의 보살핌을 받고 자란 이상익李相益도 형의 영향으로 유능한 수학교사가 된다. 안타깝게도 이상익에 관하여 남아있는 자료가 많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기가 어렵지만, 그가 한국 근대 수학 교육에 공헌한 사실은 분명한 만큼 알려진 바를 간단히 적어보고자 한다. 1906년 7월 5일 황성신문 3면에는 이상익과 3인이 익동(현재 종로구 익선동)에 도쿄 물리학교(현재 도쿄이과대학)를 모델로 하는 ‘산술전문학교’를 세워 학생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있다. 이는 이상설이 수학적으로 주위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보여준다. 이상익은 휘문관徽文館에서 1908년 <초등근세산술>, 1909년에는 <근세대수>를, 또 보성관普成館에서 <중등산술교과서中等算術敎科書>를 그리고 1908년 일한인쇄에서 <신식산술교과서新式算術敎科書>를 저술 발간하였다. 그는 보성중학교 교감, 한성사범학교 교관, 함경도 경성군 함일학교咸一學校 교사, 공수학교工數學校 학감을 역임하였다.

 

 

5. 맺음말

우리가 독립운동가라고만 알고 있었던 이상설의 진정한 ‘선구자’ 역할은 한국 근대 수학교육 및 과학교육을 시작한 개척자라는 데 있다. 그리고 호머 헐버트는 육영공원, 한성사범학교, 한성중학교에서 근무하면서 근대 서양의 고등수학을 조선에 소개하고, 친구 이상설을 ‘한국근대수학교육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계기를 제공하며 한국 근대 수학의 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역임한 이교승과 익동에 수리전문학교를 개설한 수학교사 이상익은 이어서 나타나는 많은 유능한 수학교사들의 모델이다. 이어서 한국인 최초의 수학 학사 유일선柳一宣이 1908년, 1910년, 1911년 정리사에서 수학교과서를 발간하면서 걸출한 수학교사 최규동5을 제자로 배출하고, 최규동은 1915년 사립중동학교를 인수하고 교장이 된 후 제1회 수학과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조선의 중등수학교육은 한 단계 도약하였다.

 

이상구
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대 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