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여름. 지단이 이끄는 프랑스 축구는 위대한 역사를 썼다. 호나우두가 포진한 브라질을 꺾고 프랑스는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필자는 마침 샤모니Chamonix 거리의 아름다운 불빛이 내려다보이는 어느 프랑스 산골 마을에 머무는 일생의 행운을 누리던 참이었다. 프랑스의 우승이 결정되는 순간, 아랫마을 샤모니에서는 불꽃놀이가 벌어졌다. 몽블랑의 산자락에 위치한 산골 마을 레주쉬Les Houches에서는 매년 여름 세계의 젊은 물리학도들이 모여 석학들의 강의를 듣고 서로 친분을 쌓는 여름 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필자가 참석했던 1998년의 여름 학교에서 만났던 동문 중 적잖은 인물이 이젠 세계적인 물리학자로 성장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우리는 그저 배움이 신기했던 학생, 연구원이었다. 배가 퉁퉁하게 부른 프랑스인 주방장이 만든 프랑스 요리와 에클레르Eclair, 슈 껍질 사이에 크림을 넣고 표면에 초콜렛을 바른 프랑스식 후식를 하루 세끼 부지런히 흡입했고, 주말이면 몽블랑 산자락을 삼삼오오 짝지어 돌아다녔으며, 밤에는 끼리끼리 대화를 하거나 운동을 했다.
마침 탁구대가 있었다. 오락으로 시작한 탁구는 곧 시합이 됐고, 필자는 복식 시합에서 우승했다. 때마침 필자를 사랑하던 한 사람이 가까이에서 응원해 준 덕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준우승한 복식조에는 조엘 무어Joel Moore가 있었다. 조엘은 MIT의 학생이었고 곧 박사 논문을 쓰고 졸업한다고 했다. 몇 년 후인 2001년, 그는 벨 연구소에서 연구원을 마친 뒤 버클리 대학의 교수로 부임했고, 필자는 버클리 대학 연구원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한국으로 귀국했다. 레주쉬에서의 작은 승리는 필자가 조엘을 이겨 본 유일한 사건이었다. 조엘은 나중에 위상 절연체topological insulator를 이해하는 수학 이론을 제안해서 유명해졌다. 또 한 명, 운동 경기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늘 모든 사람들과 조용히,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등산을 좋아했던 인도인 학생이 한 명 있었다. 아쉬빈Ashvin Vishwanath은 아직 자기 이름을 올린 물리학 논문이 한 편도 없는 초짜 대학원생이었지만, 누가 보기에도 천재적 인물이었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버클리 대학교수를 거쳐 지금은 하버드 대학교수로 양자 물질의 역사를 한 줄씩 써나가고 있다.
이번 연재 글은 디락 물질에 대한 이야기다. 디락Paul Dirac, 1902-1984(193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은 20세기 전반에 주로 활동한 대표적인 이론 물리학자였고, 특히 간결한 수식을 통해 물리학의 숨은 질서를 찾아내는 재주로 유명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 있다. 움직이는 물체는 운동 에너지를 갖게 되고, 그 값은 (정지한 물체보다 움직이는 물체의 에너지가 분명 더 클테니까) 양수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3차원의 각 방향으로 \({ p}_{ x}\), \({ p}_{ y}\), \({ p}_{z}\)라는 운동량을 갖고 움직이는 어떤 입자가 있다면 그 운동 에너지는 운동량의 제곱, 그러니까 \({ (px) }^{ 2 }+{ (py) }^{ 2 }+{ (pz) }^{ 2 }\)에 비례한다는 게 뉴턴 역학의 발명 이후부터 잘 알려진 상식이었다.
20세기 초반, 정확히 말하면 물리학 역사상 기적의 해라고 불리는 1905년, 아인슈타인은 몇 세기에 걸쳐 상식으로 자리잡은 이 공식을 뒤집고, 에너지와 운동량의 관계식을 좀 더 복잡한 꼴, \(E=c\sqrt { { (mc) }^{ 2 }+{ (px) }^{ 2 }+{ (py) }^{ 2 }+{ (pz) }^{ 2 } } \)로 표현해야 맞다고 가르쳤다. 이 공식에 등장하는 상수 c는 빛의 속력, m은 그 물체의 질량이다. 흔히 아인슈타인하면 떠오르는 공식, \(E={ mc }^{ 2 }\)은 정지하고 있어 운동량이 없는 특별한 경우를 가리킨다. 아인슈타인의 공식은 분명 경이롭다. 하지만 디락처럼 섬세한 물리적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공식에 등장하는 제곱근에 살짝 거북함을 느낄 수도 있다. 자연의 법칙은 단순해야 한다. 그런데 제곱근은 왠지 충분히 단순하진 않다. 제곱근이 어디서부터 나온 개념일까 생각해 보면 금방 그것이 “제곱”으로부터 파생된 개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공식을 제곱 형태로 바꾸어 보자. \(E^{ 2 }={ c }^{ 2 }\left[ { (mc) }^{ 2 }+{ (px) }^{ 2 }+{ (py) }^{ 2 }+{ (pz) }^{ 2 } \right] \)으로 바뀐다. 디락에게는 이렇게 제곱한 공식이 더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보였다. (참고: 이 대목은 필자의 소설적 상상이다.)
그런데 제곱을 함으로써 아름다움을 얻는 대신 다른 문제가 생긴다. 본래의 아인슈타인 공식으로 회귀하려면 어쩔 수 없이 제곱에 대한 제곱근을 다시 취해야 하는데, 이 때 우리는 두 가지 선택 가능성을 두고 고민해야 한다. 어떤 숫자의 제곱이 9라면, 본래의 숫자는 3이 될 수도 있지만 -3이 될 수도 있다. 그 수학적 논리를 그대로 적용해 보면 입자의 에너지가 음수의 값 \(E=-c\sqrt { { (mc) }^{ 2 }+{ (px) }^{ 2 }+{ (py) }^{ 2 }+{ (pz) }^{ 2 } } \)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수학적으로 따졌을 때 그럴 수도 있다는 뜻이지, 자연 현상에서 이런 음의 근이 꼭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당시 20대 중반의 나이였던 1928년, 디락은 대담하게도 음의 에너지를 갖는 어떤 입자를 반입자anti-particle라고 이름 짓고는 논문을 발표해 버렸다. 그의 과감한 논문이 발표된 지 4년 만인 1932년, 최초의 반입자인 반전자가 발견됐고, 차츰 전자뿐 아니라 모든 소립자에는 그와 쌍을 이루는 반입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반입자가 뭔지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전자와 반전자, 혹은 양성자와 반양성자 같은, 입자-반입자 쌍이 서로 만났을 때를 상상해 보면 좋다. 입자와 반입자가 충돌하면 거대한 양의 빛에너지를 방출하면서 함께 소멸한다. 댄 브라운의 소설 <천사와 악마>는 유럽의 거대 입자 가속기 연구소CERN 어딘가에 이런 반입자 저장 장치가 존재한다는 가설에서 출발한다. 비록 반입자 저장 장치는 아직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긴 하지만, 반입자라는 건 저절로 자연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가속기 실험실에서 입자를 어마어마한 에너지로 서로 충돌시켜야만 겨우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과학적 사실에 근거를 둔 허구다. 디락이 간파한 대로, 어떤 입자가 상대론적으로 거동한다는 사실과, 그 입자에 상응하는 반입자가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은 어떤 양수 숫자의 제곱근에 두 가지 해, 즉 양수의 해와 음수의 해가 존재한다는 수학적 사실을 통해 긴밀하게 연결된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양자 물질의 세계에는 반입자가 하나도 없다. 물질은 원자로 만들어져 있고,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와 전자라는 “입자”로 다시 쪼개진다. 물질 속에는 반입자 부류에 속하는 반양성자도, 반중성자도, 반전자도 없다. 그뿐 아니라, 양자 물질 속에 거주하는 전자들은 빛의 빠르기에 비하면 한참 느리게 움직인다. 기껏해야 백분의 일 정도 속력밖에 내지 못한다. 상대론 하면 떠오르는 기이한 현상들, 시간 늘어짐, 길이 수축 등은 어떤 물체가 빛의 빠르기에 버금가는 속도로 움직일 때 비로소 확연히 드러나는 현상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 글 “양자 물질의 역사 [5]: 그래! 핀다!”에서 그래핀 속의 전자는 상대론적 입자처럼 거동을 한다고 했다. 그 증거는 그래핀에서 움직이는 전자의 에너지는 상대론적 입자의 방정식 \(E=v\sqrt { { (px) }^{ 2 }+{ (py) }^{ 2 } } \)을 만족한다는 것이다. 앞선 문단에서 인용한 아인슈타인의 에너지식에서 빛의 속력 c를 v로 바꾸고, 한쪽 방향의 운동량을 0으로 소거하면 얻어지는 식이다. (그래핀은 2차원 물질이라 오직 x, y 방향으로만 전자가 움직일 수 있다.) 질량이 없는 이 공식에 디락이 90년 전 했던 제곱해서 다시 제곱근을 취하는 조작을 해보면, 반입자의 답 \(E=-v\sqrt { { (px) }^{ 2 }+{ (py) }^{ 2 } } \)도 가능해진다. 아니나 다를까, 그래핀의 전자 중 일부는 양의 에너지 관계식을, 또 다른 전자들은 이런 음의 에너지 관계식을 만족한다. 상대론적 규칙을 따르는 입자에는 그에 상응하는 반입자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래핀의 전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그래핀 속의 전자가 움직이는 속력 v는 빛의 속력 c의 백분의 일 정도 밖에 안 된다. 전자에 대응되는 반입자는 반전자인데, 진짜 반전자는 그래핀 속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뿐 아니라, 그래핀의 전자는 질량을 엄연히 갖고 있다. 전자의 질량은 매우 작긴 하지만 충분히 측정 가능한 어떤 값으로 주어진다. 즉 질량이 분명히 있는 전자가, 마치 질량 없는 입자처럼 거동하는 것이다!
본래 일정한 질량이 있고, 매우 느릿느릿 (비상대론적으로) 움직이며, 반입자 따위라고는 주변에 없는 전자라는 입자가 그래핀이란 양자 물질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질량이 사라지고, 운동이 상대론적으로 바뀌고, 입자와 반입자의 성격을 모두 갖게끔 변신한다. 우리 인간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다. 배우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주어진 각본의 요구에 따라 자기 모습을 바꾸어 버린다. 우리가 보는 양자 물질이란 연극에는 오직 전자라는 “입자성” 주연 배우가 있을 뿐이지만, 이 배우는 다재다능해서 때로는 영웅(입자)을, 때로는 악당(반입자)을 연기하고, 자기 몸무게보다 훨씬 가벼운 (몸무게가 아예 없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배우의 변신을 위해서는 소도구가 필요하다. 분장, 조명같은 것들 말이다. 전자를 변신하게 해 주는 소도구는 전자가 사는 공간인 고체 덩어리, 그 덩어리를 구성하는 원자의 종류, 원자들의 배열 방식, 이런 것들이다. 어떤 종류의 결정crystal속에 전자가 사느냐가 그 전자의 역할을 결정해 버린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결정’이 (전자의 배역을) ‘결정’한다. 그래핀은 탄소 원자를 육각형 모양으로 배열한 물질이다. 육각 격자라고도 부르는 이 결정 구조가 그 속에 거주하는 전자에게 요구하는 성질을 이론적으로 잘 따져 보니, 전자가 상대론적으로 거동해야만 한다는 점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래핀은 2차원 물질이다. 그래핀이 발견된 이후 상대론적으로 거동하는 전자에 대한 관심이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커졌다. 만약 그래핀 같은 2차원 물질에서 상대론적 입자가 존재할 수 있다면, 3차원 물질에서도 발견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질문이 나올 차례였다. 3차원 물질이라면 가로, 세로, 높이가 모두 충분히 크고, 그 속에서 운동하는 입자의 운동량은 \(px\), \(py\), \(pz\) 세 가지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3차원에서 상대론적으로 운동하는 입자의 에너지는 \(E=v\sqrt { { (px) }^{ 2 }+{ (py) }^{ 2 }+{ (pz) }^{ 2 } }\)이다. (아인슈타인의 에너지 공식에서 c를 v로 바꾸고, 질량을 지우면 된다.) 만약 이런 식으로 거동하는 전자가 어떤 3차원 물질에서 정말로 발견된다면, 상대론적 입자를 최초로 제안한 물리학자 이름을 따서 그 물질을 디락 금속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필자가 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물리를 가르칠 때, 종종 “과학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은 노벨상이 아니라 그의 이름이 ‘단위’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힘의 단위 뉴턴Isaac Newton, 저항의 단위 옴Georg Ohm, 주파수의 단위 헤르츠Heinrich Hertz, 온도의 단위 켈빈Lord Kelvin, 자기장의 단위 테슬라Nikola Tesla 등이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겼던 과학자의 이름을 “단위화”해서 기념하고 있다. 디락의 이름을 딴 단위는 없지만, 대신 빛의 속도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입자를 종종 “디락 입자”라고 부른다. 전자나 양성자 같은 입자가 일상 생활에서는 빛에 비해 훨씬 느릿느릿 움직이지만 거대 입자가속기의 단추를 누르면 그 속력이 점점 빨라져서 마침내 디락 입자라고 불리는 상대론적 영역으로 진입한다.
지난 십여 년 사이, ‘디락 물질’이란 이름으로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이 물리학의 역사에 새겨지고 있다. 디락 물질군에서는 몸도 무겁고 (즉 질량이 있고) 느릿느릿한, 전자라는 배우가 질량이 없는 디락 입자를 멋지게 ‘시늉내기’한다. 문제는 그 역할에 필요한 적당한 소품과 무대를 갖춘 물질을 찾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물질 중에서, 디락 물질을 어떻게 찾을까. 2007년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의 케인Charles Kane 교수와 대학원생 리앙 푸Liang Fu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비스무트 97%, 앤티모니 3%란 조합에서 찾았다. 비스무트Bismuth, Bi, 원자번호 83번는 일상생활에서 접하기 힘든 희귀한 금속이다. 원자번호가 큰 만큼, 밀도가 크다. 앤티모니Antimony, Sb, 원자번호 51번 역시 주로 합금 형태로 산업체에서 사용하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서 친숙한 물질은 아니다. 케인-푸의 제안에 따르면 이 심심해 보이는 두 물질을 97:3의 비율로 잘 섞은 뒤 뜨거운 온도에서 구워내면 마법과 같은 새로운 합금이 만들어진다. 이 합금이 바로 디락 금속이다.
대구 대학교의 김헌정 교수는 이 제안을 액면 그대로 확인해보고 싶었다. 마침 비스무트-앤티모니 합금을 잘 만들 줄 알았던 김 교수는 자신이 만든 합금에 전극을 달고 전류를 흘려 보았다. 금속이니까, 전극의 전압 차이에 비례하는 전류가 흐른다. 걸어 준 전압과 흐르는 전류 사이의 비례 상수를 저항이라고 한다. 김헌정 교수가 합성한 디락 금속 역시, 일정한 저항 값을 보이는, 얼핏 보기엔 평범한 금속이었다. 놀라운 현상은 그 디락 물질에 자기장을 걸어 주었을 때 일어났다. 디락 물질의 저항이 자기장의 세기가 바뀜에 따라 달라지기 시작했다.
왜 그럴까?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김헌정 교수는 포항공대의 이론 물리학자이자 친구였던 김기석 교수의 도움을 청했다. 초기 실험 결과를 받아 본 김기석 교수는 중요하고 재미있는 제안을 한다. “지금은 자기장을 전압 방향하고 다르게 걸어 주셨잖아요. 그것보다는 전압 방향과 나란히 자기장을 한 번 줘 보세요. 더 재미있을 거예요.” 김 교수의 제안대로 실험을 다시 해 보았더니 놀랍게도 저항값의 변화가 훨씬 커졌다. 이미 디락 물질에 자기장을 걸었을 때 벌어지는 물리 현상을 이론적으로 잘 꿰고 있었던 김기석 교수에게 그 실험 결과는 “나 ‘디락 물질’ 여기 있소”라는 자연의 외침으로 보였다. 두 사람의 주도로 작성된 논문은 물리학계에서 최고 권위를 누리는 학술지 Physical Review Letters에 게재된다. 전기 저항 측정을 통해 디락 물질의 특성을 보고한 세계 최초의 논문이었다. 2013년 출판된 이 논문의 피인용 회수는 지금까지 200회를 넘고 있다. 그만큼 이 논문을 바탕으로 한 후속 연구가 지난 6년 사이에 세계적으로 많았다는 뜻이다.
포항제철이 저편에 건너다 보이는 자리에 영일대 해수욕장이 있다. 어느 해인가, 백사장 부근의 한 조개구이집에 회동한 김헌정, 김기석, 그리고 포항공대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되는 김지훈 교수는 조개구이를 안주 삼아 디락 물질에 대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지난번 디락 물질 실험 논문으로 날린 멋진 홈런에 이어 또 다른 일을 한 번 해보자는 의기투합이기도 했다. 이번엔 김지훈 교수 실험실에서 저항 측정을 한 번 해보기로 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대상은 비스무트-앤티모니 합금이었다. 측정 방법도 지난 번과 동일했다. 다만 이번 측정에선 좀 더 강한 전압을 걸어서 좀 더 많은 전류를 흘리면서 저항을 측정한 점이 달랐다.
이전 글 “양자 물질의 역사 [4]: 차가워야 양자답다”에서 옴의 법칙을 잠깐 소개한 적 있다. 옴의 법칙이 맞다면, 걸어주는 전압이 두 배가 되면 두 배로 많은 전류가 금속에 흐른다. 이 엄밀한 비례식은 놀라울 정도로 보편적인 금속의 성질이다. 만약 디락 물질에서도 옴의 법칙이 여전히 성립한다면, 굳이 전압을 더 세게 걸어 볼 필요가 없다. 전압 크기에 정비례하는 전류가 흐를 게 뻔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막상 김지훈 교수 연구실에서 실험을 해 보니 그 결과가 흥미로웠다. 디락 금속에 전압을 두 배로 주었는데, 전류는 두 배보다 조금 더 큰 값이 측정되었다! 즉, 디락 물질에선 옴의 법칙이 (비록 약간이지만) 깨진다. 이런 특이한 일이 왜 벌어지는지 이해하려면 다시 한번 실험가는 이론가 동료의 힘을 빌려야 한다. 왜 수 세기 동안 “법칙”으로 통했던 현상이 이 물질에선 깨지는 걸까?
이번에도 이론 분석에 참여한 김기석 교수는 디락 물질에 대한 전자 수송 방정식을 잘 분석함으로써, 옴의 법칙이 깨질 가능성이 디락 물질에선 충분히 있다는 점을 밝혀 주었다. “조개구이 3인방”의 연구 결과는 과학계의 최고 학술지 중 하나라고 할 네이쳐 머티리얼Nature Materials에 실렸다. 2017년의 일이다. 그동안 금속의 보편적인 속성이라고 알고 있었던 옴의 법칙은 이렇게 디락 금속에서 깨질 수 있었다. 세상엔 백조만 있는 줄 알았는데 흑조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한 셈이다. 그래서인지, 김지훈 교수는 디락 물질을 흑조 금속black swan metal이라고 부르길 좋아한다. 포항에 다시 내려갈 일이 있으면 가까운 산과 들을 둘러봐야겠다. 백조 틈에 혹시 흑조가 노니는 모습을 보게 될런지 누가 아는가.
글을 마치고 보니 레주쉬에서 만난 영재, 지금은 세계적인 양자 물질 이론가가 된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미처 꺼내지 못했다. 이 글에서 소개한 디락 물질, 조엘 무어가 개척한 위상 절연체, 아쉬빈이 주도한 바일 금속이란 물질군은 모두 엇비슷한 이론 체계 속에서 서로 변형 가능하다. 디락 물질을 조금 변형하면 위상 절연체가 되고, 또 다른 종류의 변형을 주면 바일 물질이 된다. 이런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풀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