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ough the Looking-Glass and What Viruses Found There

 

후안 로드리게스Juan Rodriguez의 야구 인생은 그다지 시원치 못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체육 장학생으로 어느 주립 대학의 야구팀에 입단할 만큼은 되었지만 우수한 재능들이 즐비한 대학무대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고 결국 어떤 메이저리그 야구팀으로부터도 드래프트 지명을 받지 못했다. 마이너리그 팀인 앨버커키 동위원소들Albuquerque Isotopes에서 뛰기 시작한 그는 20대 중반이 지나도록 여전히 트리플A 야구팀에서 불펜 요원을 맡고 있는 평범한 후보 선수였고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야구선수로 크게 성공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처지였다.

후안은 자신이 만약 왼손잡이였다면 더 나은 야구 인생을 살지 않았을까…하는 상상을 종종 하곤 했다. 야구에서 왼손투수는 희소성에서 비롯된 특별한 장점을 갖는다. 실력이 약간 떨어져도 좌타자이거나 좌완左腕투수라는 이유로 주전을 꿰차기가 훨씬 유리하다. 대학 시절 투구 속도나 볼 컨트롤이 후안과 비슷한 수준이었던 그의 동료 하나는 좌완투수였던 덕분에 낮은 순위로나마 메이저리그 구단으로부터 지명을 받을 수 있었다. 만약 그 친구가 후안처럼 우완右腕투수였다면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신의 왼쪽과 오른쪽을 바꿔 드리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몇 달 전 구단 소재지 가까이에 있는 어떤 국립연구소가 느닷없이 후안에게 이런 제안을 해왔을 때 그는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마침 야구선수로서 한계에 다다른 이 시점에 뭔가 돌파구를 찾을 기회가 절실하던 참이었다.

“우리는 다른 목적의 연구를 하다가 우연히 실험 대상을 거울에 비친 것처럼 좌우 반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실험 대상이 고차원 공간으로 전이된 다음 반전된 상태로 다시 현실의 저차원으로 투영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아직 사람에게는 적용해 보지 못했지만 물건이나 동식물에는 테스트를 해서 이미 성공했습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했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살아 있는 생쥐와 2달러 지폐의 좌우가 완벽하게 뒤집히는 결과를 보고 나니 후안은 그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장치 속에 몇 초 들어갔다 나온 생쥐는 왼쪽 앞발에 있던 검은 털이 오른발로 옮겨간 채로 생생하게 살아 돌아다녔고 2달러 지폐는 거울에 비춰야 올바른 무늬가 보이도록 뒤집어진 상태로 튀어나왔다.

오래 고민하지 않고 후안은 그들의 제안에 응했다. 무슨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임상시험과 관련된 수많은 서류에 사인을 하고 나서 (잘못되어도 연구진에게 책임이 없다는 내용이 대부분인 것 같았다) 후안은 사상 최초의 거울 반전 인간이 되었다. 후안의 걱정거리는 좌우가 뒤바뀌었을 때도 지금처럼 야구 실력과 볼 컨트롤 능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여부였다. 연구진도 거기까지는 확신하지 못하는 듯했다. 잘 안 되면 반전을 한 번 더 해서 원래대로 돌아오면 된다고 후안을 안심시켰다. 동물 실험에서는 이미 재반전도 가능했다고 그들이 말했다.

기계에서 나온 후 좌우가 뒤집어진 세상에 적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쉽지도 않았다. 난생 처음 왼손으로 쓰는 글씨는 몹시 어색했고, 야구화의 끈을 묶는 일이 굉장히 어려웠으며, 악수를 건낼 때마다 자꾸 왼손을 내밀어 상대를 당황하게 만들곤 했다. 그렇지만 몇 주가 지나자 후안은 서서히 새로운 세상인 거울 나라에 적응했고 금방 감독의 눈에 들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쓸 만한 좌완 선발투수가 없어 고민하던 감독은, 우완투수로서는 중간 계투 수준이었지만 좌완투수로서는 괜찮은 실력의 후안을 쌍수로 환영했고 그를 단번에 제 1선발로 발탁했다. 시즌 개막전에서 제1선발로 나서 상대방의 선두 좌타자를 삼진 아웃으로 잡아낸 순간 후안은 희열을 느꼈고 국립연구소의 제안에 응하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재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윤하는 지도교수를 늘 ‘괴수’라고 불렀다. 학부 시절 강의를 들을 때는 아주 젠틀하고 합리적으로 보이던 사람이었는데 막상 대학원에 입학하여 지도교수로 모시고 보니 고질라 괴수에 맞먹을 만큼 포악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윤하만 몰랐을 뿐, 이 연구실에 대학원생이 없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lab의 연구주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윤하가 결정학을 세부 전공으로 선택했던 이유는 공간군과 격자 구조로 대표되는 결정 물질의 기하학적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복잡한 결정 구조가 보여주는 대칭과 정렬의 미학은 물리화학을 좋아했던 윤하의 취향에 꼭 맞았고, 편광현미경을 통해 단결정이 보여주는 빛의 향연에 어린 학부생은 황홀해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막상 결정학 연구실에 들어와 보니 당혹스럽게도 그 멋진 단결정에 대한 연구는 이미 수십 년 전에 거의 다 끝나버렸고 오늘날 결정학 연구의 대부분은 극히 복잡하고 별로 아름답지 못한 생체 물질을 대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윤하는 학부 시절 생화학을 싫어했기 때문에 더더욱 괴수와 대학원과 자신의 세부 전공을 싫어하게 됐다.

석사 2학기가 시작될 무렵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괴질怪疾이 미국 뉴멕시코 주에서 시작해 전 세계로 퍼지면서 나라마다 하룻밤 새 수천 명씩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록-다운이 시작되고 대학들이 모두 문을 닫는 상황인데도 괴수는 어디선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따와서 윤하에게 연구실 출근을 강요했다. 대학원생은 예외라면서. 빌어먹을 전염병이 대학원생이라고 피해 가는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괴수가 수주해 온 프로젝트의 주제는 괴질로 사망한 환자로부터 추출된 바이러스의 결정학적 분석이었다. 목숨 걸고 연구실에 나와 연구해야 하는 대상이 전염병 환자로부터 검출된 바이러스라는 사실은 안 그래도 별로 없는 윤하의 연구 의욕을 완전히 꺾어 버리는 또 하나의 요인이었다. 괴질로 사망한 환자의 몸에서 나온 바이러스를 결정학적으로 분석하는 이 프로젝트가 전염병과 싸우는 숭고한 전투라고 괴수는 힘주어 역설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역병이 그나마 적게 퍼진 시골 고향으로 도망가 놓고서는 윤하에게 전화나 카톡으로 지시만 내리고 있는 것을 볼 때 그 진정성이 몹시 의심스러웠다. 괴질 때문에 관련 연구 프로젝트의 발주가 급증하니까 유행에 편승해서 한 건 따온 것에 불과했을 것이다.

현대 의학은 신종 전염병의 원인이 무엇인지조차 전혀 밝혀내지 못하고 있었다. 별별 수단을 다 동원해서 감염자와 사망자들을 분석해 봐도 검출되는 것은 기존의 세균과 바이러스들뿐이었고 괴질의 원인은 도무지 찾아낼 수 없었다. 슈퍼 박테리아라는 둥, 코로나 바이러스의 변종이라는 둥, 신종 프라이온prion이라는 둥, 심지어 기후변화의 결과라는 둥 아무 말 대단치 같은 가설들만 넘쳐나는 상황이었다.

윤하는 괴수에 대한 욕을 잔뜩 퍼부으며 방역복을 갖춰 입고 의대에서 받아온 바이러스 단결정 시료를 조심스레 편광현미경에 장착했다. 감염의 원인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사망자로부터 나온 바이러스를 다루고 있으니 윤하가 감염되지 않을 거라는 확실한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50년 전 AIDS가 유행하던 초기에 대학원생 한 명이 연구 도중 감염된 사고가 있었다고 들었던 적이 있다. 윤하는 그 대학원생이 감염된 후 어찌 살았는지 정말 궁금했다. 지금 전 세계의 연구진들도 방역 기준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목숨을 걸고 사망자로부터 나온 검체檢體들을 이리저리 분석해 보고 있을 뿐이었다. 뭔가 걸려들기만 바라면서.

바이러스를 결정학적으로 분석하는데 편광현미경으로 관찰할 필요가 꼭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학부 시절부터 단결정을 관찰할 때 편광이 만들어 내는 다채로운 빛의 향연을 즐겼던 윤하에게는 그나마 편광현미경 관찰이 재미없고 위험한 이 프로젝트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기만족을 위한 시도가 굉장한 발견을 낳았다.

처음 편광현미경으로 바이러스 단결정을 관찰했을 때부터 뭔가 이상했다. 윤하는 이 종류의 바이러스 단결정을 전에도 여러 번 편광현미경으로 관찰해 본 경험이 있었고 어떤 모습이 보이는지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관찰한 단결정의 편광 무늬는 예전에 보았던 것과 달랐다. 편광현미경 마니아답게 윤하는 이 새로운 무늬가 결정광학crystal optics적으로 원편광의 방향이 반대로 뒤집어졌을 때 나타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챘다.

‘혹시 편광판을 거꾸로 끼워 넣었나?’

하지만 아무리 현미경을 점검해 보아도 편광판을 다른 것으로 교체해도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는 편광이 만들어내는 무늬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지금 자신이 관찰하고 있는 이상한 현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한 후에 윤하는 기발한 가설을 세우고 지도교수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반대 방향 편광의 원인은 바이러스의 생화학적 구조가 거울에 비친 것처럼 뒤집어져 반전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교수님, 저 윤하에요.”

“뭐?! 너 지금 나보고 괴수라고 그랬냐?(버럭)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리시나 봅니다.”

“랩에 혼자 있을 텐데 마스크는 뭐 하러 끼고 있어? 마스크 벗고 말해! 무슨 일인데?”

마스크를 벗으면 저 바이러스가 갑자기 활성화되어 괴질을 감염시킬 것 같은 느낌이 마구 들었지만 윤하는 어쩔 수 없이 지시대로 마스크를 벗고 자세한 보고를 시작했다.

 

***

 

미국에서 세 번째로 부자父子 2대에 걸쳐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 주니어Donald John Trump Jr.는 전염병과의 질긴 악연을 저주하면서 집무실에 앉아 보고를 듣고 있었다. 아버지 재임 기간 중에도 코로나19가 창궐해서 그토록 부친을 괴롭혔건만 20여 년이 지난 다음 아들의 임기 중에 또다시 이렇게 괴질이 전 세계를 휩쓸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도대체 로스 알라모스1Los Alamos는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전염병이 뉴멕시코에서 시작된 이유가 로스 알라모스 때문이라고?”

격노하는 대통령 앞에서 미국의 국립 연구소들을 총괄하는 에너지부Department of Energy: DOE 장관은 꿇리지 않고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로스 알라모스의 어느 연구진이 반전성parity 연구를 하다가 분자 구조를 포함해 생명체의 구조를 거울에 비친 것처럼 완벽하게 반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우연히 발견했던 모양입니다.”

생김새가 부친을 꼭 닮은 트럼프 주니어 대통령은 20년 전의 아버지처럼 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신기술을 테스트해 본답시고 어느 야구선수를 우완투수에서 좌완투수로 바꾸는 짓을 벌였습니다.”

“그거 재미있는 실험이었겠네. 그래서?”

“실험 자체는 성공했는데 문제는 그 과정에서 실험 대상인 야구선수의 몸에 기생하고 있던 바이러스들까지 거울 반전을 일으켜서 지금까지 존재한 적이 없던 생화학적 구조의 바이러스가 생겨버린 것입니다.”

대통령이 그게 뭐가 문제냐는 표정으로 장관을 바라보자 미국 질병관리본부CDC의 책임자가 바통을 이어받아 생화학적인 문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화학 물질들 가운데 화학식은 똑같은데 거울에 비친 것처럼 대칭적인 구조를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보통 광학 이성질체optical isomer라고 지칭합니다. 분자의 물질 구성이 똑같은데도 광학 이성질체는 생화학적 반응이 전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감미료로 흔히 사용되는 L형 아스파탐은 단맛이 설탕보다 수백 배나 더 강하지만 그와 거울 대칭 구조인 D형 아스파탐은 쓴맛이 나지요.”

아직도 의미를 잘 모르겠다는 대통령에게 본부장은 결정적인 부분을 언급했다.

“바이러스는 RNA 나선과 단백질 껍질로 이루어져 있는데, 로스 알라모스의 실험 때문에 RNA 나선의 꼬이는 방향이나 껍질 단백질의 구조가 거울에 비친 것처럼 완전히 뒤집어진 신종 바이러스들이 여러 종류 갑자기 생겨나 버린 것입니다. 이런 바이러스들이 인체에 어떤 악영향을 미칠지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바이러스는 자신의 RNA를 감염자의 세포핵 속에 주입시키기도 하는데 나선 방향이 반대인 RNA가 세포핵의 DNA 속에 침투한다면 그 결과는 엄청나게 파괴적일 것입니다. 이 바이러스들이 지금 전 세계에 퍼지고 있는 괴질의 원인입니다.”

“으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소.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알아냈소?”

“한국의 어느 연구진이 환자에게서 나온 바이러스 단결정을 편광현미경으로 관찰하다가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광학 이성질체는 편광현미경으로 관찰하면 원편광의 회전 방향이 서로 반대가 되거든요.”

“원인을 알았으니 얼른 치료제나 백신을 개발해야 하지 않겠소?”

“신종 바이러스의 치료제나 백신은 생각처럼 그리 쉽게 만들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번에는 여러 종류가 한꺼번에 튀어나왔습니다. 에이즈 바이러스의 백신을 개발하는데 50년이 넘게 걸렸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십시오.”

자신의 임기 중에 창궐하기 시작한 바이러스가 아버지 때보다 더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트럼프 주니어는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뭔가 떠오른 듯 아이디어를 하나 제안했다.

“하지만 코로나19라든가, 에이즈라든가, 이미 많은 바이러스에 대해 백신이 개발되어 있잖소. 기존에 개발된 백신과 치료제들을 로스 알라모스에서 개발한 방법으로 반전 대칭 시키면 똑같이 효능을 발휘하지 않을까? 바이러스도 거울 대칭, 치료약이나 백신도 거울 대칭. 어때요?”

장관과 본부장은 진심으로 놀랐다. 바이러스 방역에 쓰이는 소독약을 인체에 주입해서 코로나19를 물리치자는 헛소리를 마구 내뱉던 아버지에게서 저렇게 나름 이성적인 아들이 나왔다는 것이 놀라웠다. 하지만 아들 트럼프의 아이디어는 안타깝게도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고 있었다.

“각하, 아까 말씀드렸듯이 광학 이성질체들은 생화학적 성질이 크게 다릅니다. 기존의 바이러스에게 유효했던 백신일지라도 광학 이성질체로 만들어 인체에 주입하면 무슨 부작용이 일어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결핵약인 에탐부톨Ethambutol의 광학 이성질체는 인체에 투약하면 실명을 유발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아버지처럼 재선에 실패하고 싶지 않아. 바이러스 때문에 부자가 2대에 걸쳐 모두 재선에 실패할 수는 없다고!”

결국 모든 안건을 정치적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태도만큼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본부장은 심각한 어조로 답했다.

“현재로서는 아무 대책도 없습니다. 앞으로 수십 년간 록-다운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속하면서 신종 바이러스들에 대한 백신이나 치료제가 각각 개발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

 

윤하는 자신의 자율주행 자동차에 앉은 채로 테헤란로의 초대형 전광판에 비치는 입체영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교차로의 대형 전광판 같은 낡은 매체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다는 어느 작가의 수필이 생각났다. 윤하가 아직 대학원생일 때는 평범한 2D 평면영상이던 전광판이라는 매체가 여전히 건재한 이유는 초대형 3D 입체영상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광고를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울 대칭 바이러스의 단결정이 반대 방향의 원편광을 보인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고 나서부터 편광 안경을 쓰면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나 물건을 구별할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사람이나 물체의 겉표면에 붙어 있는 바이러스의 양이라고 해봤자 정말 마이크로그램 단위의 극소량이고, 설령 양이 많다고 하더라도 결정화되어 있지 않으니 편광이 보일 리가 만무했다. 실제 바이러스는 편광 안경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열심히 해명했지만 수십만 명이 떼로 죽어 나가는 공포의 와중에 과학계의 이성적인 만류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괴수는 윤하의 발견이 있었던 그다음 해에 노벨화학상을 받았지만 정작 윤하는 수상자가 되지 못했다. 아직 석사과정이라는 이유로 첫 번째 관찰자가 수상에서 제외된 사정이 일부 언론에 보도되기는 했지만 당시 여전히 진행 중이던 전염병의 공포에 묻혀버려 학계 사람들이 아니면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대신 윤하는 다른 방식으로 보상을 받았다. 어느 유명한 외국계 선글라스 회사가 편광 안경을 상품화하면서 윤하를 광고 모델로 발탁한 덕분에 노벨상 상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전자회사는 괴수보다 윤하의 출연료가 훨씬 저렴하고 다른 광고에 출연하지 않아서 신선한 이미지라는 점에 주목했다고 한다. (괴수는 노벨상 수상 이후 학습지부터 소독제까지 전방위로 광고에 출연하며 높은 모델료를 받아먹고 있었다.)

회사는 대놓고 편광 안경이 바이러스를 볼 수 있다고 거짓말하지는 않았지만, 거울 대칭 바이러스의 최초 발견자가 편광 안경을 선전하게 함으로써 교묘하게 편광 안경과 신종 바이러스를 연관시키는 프로퍼갠더를 구사했고, 아무런 대책이 없는 전염병의 공포에 질린 대중은 열광적으로 편광 안경을 구매했던 것이다. 이제 편광 안경 착용 열풍은 팬데믹 때문에 생겨난 문화 현상의 하나로 당연시되고 있었다.

편광 안경의 유행에 때맞추어, 운 좋게 상온常溫, room temperature에서 동작하는 스핀-LEDspin-light emitting diode가 개발됐다. 스핀-LED는 단순한 구조지만 인가되는 전압의 방향을 바꾸는 것만으로 LED에서 발생하는 빛의 원편광 방향을 반전시킬 수 있는 디스플레이 소자였다. 낮은 온도에서 동작하는 시제품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상온에서 사용할 수 있는 소자는 우연히 팬데믹 직후에 나온 것이었다. 가격도 저렴하고 내구성도 좋아서 옥외의 전광판에 설치해도 끄떡없었다.

스핀-LED로 전광판을 제작하고 시청자가 편광 안경을 착용하고 있으면 3D 입체 영상을 상영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고, 옥외 전광판은 순식간에 다시 널리 유행했다. 3D 안경을 착용해야 한다는 문제 때문에 개발된 지 수십 년이 지나도록 쉽게 대중화되지 못했던 입체 영상 기술이 거울 대칭 바이러스들 덕분에 단번에 문턱을 넘어 모든 곳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지금 지나고 있는 테헤란로처럼 고층빌딩들이 늘어선 곳에서는 아예 빌딩 외벽을 스핀-LED로 도배해서 빌딩의 한 면 전체로 입체영상을 보여주는 건물주들도 있었다.

윤하가 방금 전에 보았던 전광판의 입체영상은 패션 마스크의 CM이었다. 편광 안경과 더불어 오늘날에는 누구나 당연한 듯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생활한다. 모두가 편광 안경과 마스크를 쓰고 다니다 보니 이제는 맨얼굴을 남에게 보여주는 사람이 거의 없다. 편광 렌즈는 반투명해서 마치 선팅tinting된 자동차 유리와 같다. 옷으로 몸을 가리듯이 편광 안경과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다는 드레스 코드도 불과 10여 년 만에 확고하게 자리 잡았고, 강남역 일대에 번성하던 성형외과들은 대부분 파산한 지 오래다.

자율주행 자동차는 강남역에서 좌회전하여 목적지인 자동차 극장drive-in theater을 향해 남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전통적인 영화관은 감염의 공포 때문에 모두 문을 닫았지만 차 안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자동차 극장은 오히려 인기가 더 높아졌다. 자동차 극장에서도 전광판과 마찬가지로 스핀-LED 디스플레이를 이용해서 입체 영화를 상영해 준다.

양재역을 지날 무렵 귀여운 카톡! 알림 소리와 더불어 오늘 입체영화를 함께 볼 상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얼마 전에 새로 소개받은 사람이다. 편광 렌즈와 마스크에 가려진 상대의 프로필 사진을 보면서 언제쯤 저 사람의 맨얼굴을 볼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이르면 오늘 밤일지도 모른다.

‘지금 극장으로 오고 계신가요? 오늘 보러 가는 영화 말인데요, 첫눈에 끌린 어느 커플이 안경과 마스크를 벗은 상대의 얼굴을 보고 실망해서 헤어질 뻔했다가 차츰 서로의 진심을 이해하게 되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로맨틱 코미디래요. 어때요, 재미있을 것 같죠?’

이런 메시지 보내는 것을 보니 어쩌면 상대편은 자신의 맨얼굴에 별로 자신이 없는 지도 모르겠다. 윤하는 정말로 영화가 기대되었다. 그리고 오늘 밤에는 상대의 맨얼굴도 볼 수 있기를 기대했다. 부디 상대가 감염되어 있지 않기를!  

 

 거울 대칭으로 분자 구조가 반전된 생명체라는 SF 소재는 본 작가가 처음 생각해낸 것이 아니고, 아서 C 클라크Arthur C. Clarke의 단편소설 <기술적 오류Technical Error>(1946)에 최초로 등장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이후 제임스 블리쉬James Blish가 스타 트렉 소설판 <Spock Must Die!>(1970)에서 동일한 소재를 활용했던 바 있습니다.

 

김달영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경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