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호

코로나19가 전 세계에 유행하면서 면역시스템에 대한 관심이 부쩍 증가하였다. 필자의 연구분야는 전산 시뮬레이션으로 생물 분자의 물리적 성질을 알아내는 것인데, 그중 면역 시스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약 6년 전의 일이다. 그전부터 알고 지내던 미국 반더빌트대학의 매튜 랭Matthew Lang 교수가 T세포수용체T-cell receptor, TCR에 대해 함께 연구를 하자는 제안을 했다. 하버드 의대의 면역학자 엘리스 라인허츠Ellis Reinherz 교수와 TCR에 대해 같이 연구하던 중 실험적으로 발견한 TCR의 성질을 이해하기 위하여 전산 시뮬레이션이 필요하다는 것이 공동연구의 취지였다.

TCR에 대해 시뮬레이션으로 무엇을 알아낼 수 있는지 설명하기에 앞서, TCR이 면역체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바이러스나 미생물은 우선 점막 같은 세포 밖 조직에 들어오고 경우에 따라 세포 속으로 침투한다. 세포 밖 침입자를 가려내는 데에는 많은 분들이 익히 들어보았을 항체antibody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 몸은 거의 어떤 분자구조도 가려낼 수 있는 항체 생산능력을 가지고 있다. 코로나19에 걸렸던 사람들이 이에 대한 항체를 만드는 것도 바이러스의 재침입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서다.

백신의 주요 목적 역시 특정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를 몸에서 미리 만들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항체의 효과가 얼마나 오래 가는지는 별개의 이야기다. 어떤 예방주사는 평생 한 번 맞으면 되는 반면 독감 예방주사는 매년 맞아야 하고, 코로나19의 경우 처음 감염 후 몇 달 내 재확진 사례에 대한 보도도 있다. 그 이유는 독감이나 코로나 바이러스는 빠른 유전자 변이에 의해 표면 분자 구조가 금방 달라져서 기존 생성된 항체가 이를 알아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여기서 T세포가 등장한다. 바이러스가 방어망을 뚫고 세포 안으로 침입하고 나면 세포 밖을 담당하는 항체는 별 힘을 발휘할 수 없다. 하지만 바이러스가 세포 안에서 증식활동을 하면 이에 따른 부산물이 생기게 된다. 바이러스의 부산물, 즉 단백질이 부서진 조각들(peptide; 펩타이드)은 세포 안에 바이러스가 침투했는지 여부를 가리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를 가려내는 역할을 담당하는 세포가 바로 T세포다.

T세포가 다른 세포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고, 대신 바이러스의 펩타이드가 감염된 세포 표면으로 배출된다. 이를 수행하는 단백질은 주조직 적합 복합체Major Histocompatibility Complex, MHC라고 부른다. 펩타이드는 MHC에 물린 채 세포 표면에 ‘전시’되는데, 이를 pMHC라 부른다. ([그림1] 참조) 물론 우리 몸의 세포들도 자체 신진대사의 부산물로 수많은 펩타이드를 만들고 이를 같은 방법으로 배출한다. 한 세포당 표면에 십만여 개의 pMHC가 전시되어 있는데, 감염된 세포는 적게는 그중 단 몇 개만이 침투한 바이러스의 펩타이드를 물고 있다. 지나가는 T세포는 수십 초 안에 이를 가려내야 한다. 


T세포의 구별 정확도는 약 십만 분의 일. T세포 표면에서 MHC와 접촉하여 감염 여부를 판단하는 센서 수용체가 바로 TCR이다. 최근 TCR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단지 세포 내 침입자를 알아낼 수 있다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항체는 변이가 일어나기 쉬운 바이러스 단백질의 표면을 감지한다. 하지만 TCR은 잘 변하지 않는 단백질 내부에 존재하는 펩타이드를 감지하는 것도 가능하다. 바이러스 단백질 구조를 건물에 비유하자면 건물 외벽은 바꾸기 쉽지만 건물의 뼈대나 주춧돌은 바꾸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다. 쉽게 말해 TCR은 잘 변하지 않는 바이러스의 본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장래 TCR에 기반한 새로운 종류의 백신이 나온다면 감기 예방주사를 매년 맞지 않아도 될 수 있다. 또한 암세포의 경우 우리 몸에서 기인하긴 했지만 비정상 세포이기 때문에 표면의 펩타이드도 다르므로, T세포를 잘 활용한다면 환자의 세포를 무분별하게 공략하는 항암 약물치료들에 비해 암세포만 정확히 골라잡는 치료방법도 가능하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바를 실용화하기 위해, 또는 순수히 과학적 호기심 측면에서, TCR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이 많다. 먼저 문제는 TCR이 어떻게 항원 펩타이드가 장착된 pMHC와 상호작용하는가이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세포가 아니라 시험관 속에서 TCR과 pMHC를 섞어놓고 서로 얼마나 잘 붙는가를 관측해보면 항원에 해당하는 pMHC와 그렇지 않은 우리 몸 자체의 pMHC가 거의 구분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여기서 ‘구분’이라 함은 TCR이 해당 pMHC에 얼마나 오래 안정적으로 붙어있을 수 있는가이다. 시험관에서는 찾아내야 할 항원이나 그렇지 않은 것들과 TCR의 상호작용이 거의 같은데, 우리 몸 안에서 T세포는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침입자를 가려낼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는 뜻밖에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반더빌트의 랭 교수는 광학 족집게optical tweezers1를 활용해 분자 한 개에 물리적 힘을 가하여 그 반응을 보는 데 전문가이다. 랭 교수의 실험실에서 TCR과 pMHC가 서로 붙어있는 것을 잡아당겨 보았더니 맞는 항원에 해당하는 pMHC의 경우 TCR과 붙어있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잡아당기면 더 세게 붙는 찰떡궁합인 셈이다. 반면 다른 pMHC들은 잡아당길 경우 더 빨리 떨어졌다. 이 실험을 통해 항원에 대한 변별력이 역학적 힘에 의해 증대된다는 가설이 세워졌고, 랭과 라인허즈 교수의 팀 외에 다른 실험실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관측하였다.

생각해 보면 그럴 법하다. T세포가 몸 안을 정찰할 때 다른 세포와 접촉하며 움직이니 자연스럽게 붙었다 떨어지는 힘이 발생할 것이고, TCR이 높은 변별력을 갖추도록 진화할 때 화학적인 요소뿐 아니라 가해지는 힘과 같은 물리적인 요소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2

고전역학을 창시한 아이작 뉴턴은 처음에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왜 떨어질까?’라는 질문에서 연구를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TCR에 대한 연구도 비슷한 상황에 봉착했다. 역학적 힘으로 분별력을 키우는 것이 관찰되었으니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를 알아내는 것이다. 이것은 실험만으로는 대답할 수 없는, TCR의 물리적 작동원리에 대한 개념적인 문제이다. 이를 해결하는 데 전산 시뮬레이션을 사용하자는 것이 우리 공동 연구의 취지였다.

2014년 처음으로 이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필자는 TCR에 대하여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부지런히 이에 관한 연구논문들을 읽어나갔고 TCR의 단백질 구조도 공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든 막연한 질문은 ‘왜 저렇게 생긴 것일까?’였다. TCR에는 총 4개의 도메인이 마름모꼴로 붙어 있다. 마치 어린이 공상과학 영화에 나오는 미래 특공대가 외계의 침략자와 싸우기 전 양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팔꿈치는 굽히고 모아 붙인 두 주먹에서 파괴적 광선을 뿜어내는 것처럼. ([그림2] 참조)

단백질 전산 시뮬레이션의 기본 원리는 간단하다. 단백질은 아미노산으로 만들어졌고, 아미노산의 원자 구조와 성질은 널리 알려져 있으니 허공에 던진 공이 날아가는 궤적을 컴퓨터로 계산하듯, 어떤 주어진 조건 하에서 단백질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계산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공 하나의 궤적을 계산하는 것과 달리 단백질의 경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물 분자의 운동도 고려해야 해서 수십만 개에 해당하는 원자의 궤적을 계산해야 한다. 그리고 시뮬레이션을 할 때 구체적으로 어떤 조건을 주어야 할지에 대한 답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이것저것 해보는 길밖에 없다.

어려운 수학 문제나 수수께끼를 풀 때 여러 가지 접근 방법을 시도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결국 한 번 계산하는 데 몇 달씩 걸리는 시뮬레이션을 조건을 바꾸어가며 시행해야 하고, 결과가 나올 때마다 시뮬레이션 데이터를 분석하고 기존에 알려져 있는 실험 결과들과 비교하며 다음 시뮬레이션을 어떻게 돌릴지 계획한다. 이렇게 답을 찾는 방향으로 조금씩 전진하는 것이다. 물론 지속적인 전진이란 거의 없고 후퇴와 우회뿐 아니라 연구해오던 방향을 포기하고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경우도 있다. 이러한 우여곡절은 아마 많은 연구나 탐험 프로젝트가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일일 것이다.

 

오랜 시뮬레이션과 분석 끝에 마침내 TCR의 기본 작동 원리를 알아냈다. 문제의 핵심은 도메인 운동에 있었다. TCR이 pMHC와 접촉할 때 네 개의 도메인이 형성한 마름모 구조 때문에([그림2]) 결맞지 않고 약간 어설프게 붙어 쉽게 떨어지게 된다. 여기서 어설픈 붙음이란 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동적인 개념이다. pMHC와 직접 접촉하는 위 두 도메인이 상대적으로 회전운동을 하면서 접촉면이 안정적으로 있지 않는 것이다. (도메인 운동을 그림에서 만화같이 두 줄의 곡선으로 나타내었다.) 이렇게 TCR과 pMHC가 불안정하게 붙어 있는 상태에서 당기는 힘을 가하면, 항원 펩타이드를 제한 MHC 부분이 TCR을 당기면서 두 도메인의 움직임을 억제한다. 이때 맞는 항체 펩타이드가 들어 있으면 접촉면이 안정되어 TCR과 pMHC가 더 강하게 붙게 되고, 맞지 않는 펩타이드는 접촉면의 움직임을 안정시키지 못해 가해진 힘에 의해 쉽게 떨어지게 된다.

이러한 기작은 그동안 상치되던 견해를 잘 설명해준다. 이전에는 맞는 항원 펩타이드가 더 오래 붙어있기 위해 그렇지 않은 항원에 비해 TCR과 더 광범위한 접촉을 해야 할 것이라 추측했지만, 분자 구조에서 이러한 양상은 관측되지 않았다. MHC에 비해 항원 펩타이드와 TCR의 접촉은 대개 미미하다. 우리가 새로이 제시한 작동 원리에 의하면 펩타이드는 열쇠의 이빨 같은 부분이다. 이 부분은 열쇠가 자물쇠에 잘 맞는지 안 맞는지만 결정할 뿐, 열쇠를 돌릴 때 실제 힘을 받는 부분은 열쇠의 밋밋한 부분, 즉 TCR과 MHC의 접촉면에 해당한다. 거시적인 열쇠-자물쇠 시스템과의 차이는 도메인 운동이 분별력과 결부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동적인 원리를 통해 TCR의 아래 두 도메인이 어떻게 위 두 도메인의 운동에 영향을 주고 pMHC와의 상호작용을 제어할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있다.

어떤 수학 문제를 푸는 접근 방식을 알고 나면 비슷한 문제를 더 쉽게 풀 수 있듯이 TCR의 역동적인 원리는 다양한 면역 수용체의 기작을 이해하기 위한 사고의 방향을 제시한다. TCR에는 사실 여러 종류가 있고 항체도 네 도메인이 마름모꼴을 형성하는 기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들이 항원을 가려내어 궁극적으로 칩입자를 제거하는 데에는 분자 운동이 결정적인 요소인 것이다. 이러한 역학적인 측면을 알아내고 분석하는 데 전산시뮬레이션이 필수이고, 항원 수용체 외에도 면역 체계에 관련된 생체분자를 연구하는 데 전산시뮬레이션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커지리라 본다.

황원묵
텍사스 A&M대학 의생명공학과 부교수,
고등과학원 계산과학부 KIAS Schol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