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ence and Art
전형적 대비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과학과 예술만큼 서로 거리가 먼 것도 없어 보인다. 물론 최근 학제적 연구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고등과학원에서도 과학과 예술의 다양한 접점을 찾으려고 시도하고 있지만, 이런 시도가 참신하게 느껴진다는 사실 자체가 역설적으로 과학과 예술 사이에 큰 간극이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대학에서 강의하다 보면 예술 하는 사람들의 자유분방함과 과학 하는 사람들의 꼼꼼함의 전형적 이미지에 잘 들어맞는 학생들을 종종 보게 된다. 하지만 이런 전형적 이미지가 실제 과학연구와 예술창작 작업의 현실을 얼마나 반영하는지는 차분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한편 과학과 예술의 공통점으로 자주 거론되는 것이 ‘천재’의 중요성일 것이다. 과학과 예술 모두에서 평범한 과학자와 예술가가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능력과 성취를 보여주는 천재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은 뉴턴의 사과 일화가 그렇고,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의 미소가 얼마나 신비로운지에 대한 대중적 열광도 그 예이다.[6] 과학과 예술 모두 인류가 성취한 핵심적인 문화적 활동의 결과물이다. 그런데도 그 둘이 천재적인 작업에서 돋보이는 영감을 제외하고는 공통점이 전혀 없을까? 우선 그 부분부터 살펴보자.
과학과 예술을 대비하는 전형적인 첫 번째 관점은, 과학은 이성을 사용해서 대상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반면 예술은 이성적으로 따지지 않고 상상력을 발휘한다는 생각이다. 예술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재치 있게 상식을 비틀거나 의외의 것을 만드는 것에 훨씬 더 높은 평가를 주는 분야라는 것이다. 이에 더해 과학과 예술이 다루는 대상 자체가 다르다는 지적도 있다. 예술은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데 비해 과학은 정말로 있는 것에 대한 사실을 밝혀내는 학문이라는 생각이다. 또한 예술은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데 비해 과학은 분석적으로 나눠서 이해하려 한다는 대비도 자주 거론된다. 예를 들어, 예술가들은 번뜩이는 영감으로 순식간에 감동적인 작품을 완성하는 데 비해, 과학자들은 연구대상을 차근차근 분석적으로 파악해서 전체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려 노력한다는 것이다.[2]
물리학자 출신이었기에 다른 과학철학자보다 과학 연구의 실체를 보다 정확하게 설명한 토마스 쿤조차 과학과 예술의 차이를 약간 더 복잡한 방식으로 설명했다. 그 요지는 과학과 예술은 모두 표상representation을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과학에서 표상은 자연에 대한 참된 이해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인 데 반해 예술은 훌륭한 표상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에서는 항상 새로운 이론을 추구하고 과거의 ‘잘못된’ 이론은 까마득히 잊는 반면, 예술에서는 옛 작품, 즉 과거의 표상들도 여전히 훌륭한 예술로 인정받는다는 설명이다.
과학과 예술에 대한 이와 같은 전형적인 대비는 얼핏 타당해 보이지만, 과학연구와 예술창작에 대한 여러 경험연구 결과에 잘 들어맞지는 않는다.[3] 우선 과학연구에서 상상력은 이성만큼이나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다만 과학에서 상상력은 기존 연구의 틀을 벗어나는 ‘발산적 상상력’만이 아니라 (쿤의 개념을 빌어 설명하자면) 널리 수용되는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그 안에서 새로운 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수렴적 상상력’ 역시 중요하다.[1] 이 점에서 과학적 상상력은 스타일이나 주제에 있어 새로움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예술적 상상력과는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후 피카소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예술가들도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하는 능력만큼이나 축적된 예술적 기법을 익히는, 즉 수렴적 상상력을 익히는 일에 상당한 시간을 투자한다.
자연 대 인공물의 대비 역시 과학과 예술의 차이를 규정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이전 글 “과학과 자연”에서 자세하게 논의했듯이, 과학이 ‘자연’ 자체를 연구대상으로 삼는다기보다는 자연에 대한 ‘모형’을 탐구함으로써 자연의 가능성을 탐색한다고 보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한편 예술 또한 자연물 자체를 예술의 재료로 활용하는 경우도 많고, 20세기 이전까지는 외부 세계의 정확한 재현에 가치를 둔 사실주의가 중요한 예술 사조였다는 점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예술에서 ‘실재’의 문제는 과학에서만큼이나 (물론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핵심적인 주제임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마지막으로 과학연구에서 분석적 사고만큼이나 탐구대상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통찰력 역시 매우 중요하다. 사실 아인슈타인과 같은 ‘천재’ 과학자의 특별함은 잘 훈련된 과학자라면 누구나 갖추어야 할 분석 능력이라기보다는 전자기학, 역학, 시공간론 등 서로 다른 연구 분야를 통합해서 하나의 일관된 물리학 이론을 만들어 내는 통찰력으로부터 비롯된다. 한편 예술창작 과정에서도 상상력만으로 작품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예술가들은 예술적 영감을 실제 작품으로 구현하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특히 어떤 재료를 어떤 방식으로 사용해서 ‘영감’을 구현해 낼 것인지를 놓고 전형적인 ‘분석적 사고’를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과학과 예술 모두 이성과 상상력, 분석적 사고와 통찰력 중 어느 하나만을 활용하지는 않는다. 통상 두 분야가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경우가 많지만, 인류의 뛰어난 문화적 성취들이 그러하듯, 과학연구와 예술창작은 이 모든 능력과 노력을 성공적으로 결합했을 경우에만 훌륭한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다. 물론 그 능력과 노력을 어떻게 결합하는지는 개별 연구자나 예술가마다 다르고 그 결합 방식에서 과학연구와 예술창작에서 대체적인 경향성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경향성의 차이는 아마도 개별 과학자와 예술가의 차이보다 더 작을 것이다.
완성된 과학·예술과 진행 중인 과학·예술
과학과 예술을 대립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사실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19세기 낭만주의 예술 사조가 널리 퍼지기 전까지는 과학과 예술 모두 이성과 상상력을 활용해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즉흥적 영감과 전일적 이해를 강조한 낭만주의자들조차 19세기 초까지는 당시 과학이 보여주는 새로운 세계의 전망에 대해 열광하고 경이로워했다. 콜러지, 바이런, 키츠, 셸리 등 당시 낭만주의 시인들은 프리스틀리나 다비의 화학 실험에 큰 관심을 보였고 우리 은하계 밖에 또 다른 별무리가 있다는 허셀의 발견에 대한 사유를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5]
일단 과학과 예술의 극단적 대비가 19세기 중반 이후의 산물이라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21세기 현재 시점에서 앞서 지적한 자유분방한 예술가와 꼼꼼한 과학자의 문화적 대비는 부정할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대비가 과학과 예술이 결과물을 제시하는 방식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은 없을까?
우리는 과학 연구에 수많은 선택의 순간이 있으며 그 선택을 현명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상상력과 이성적 분석을 성공적으로 결합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연구 과정은 연구의 최종 결과물인 출판된 논문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토마스 쿤이 강조했듯이 현재 수용되는 과학논문의 표준 형식은 연구 과정의 여러 굴곡과 잘못된 시도 등을 모두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최종 결과만을 논리 정연한 형태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과학논문에서 연구 과정의 ‘인간적인’ 특징보다는 순수한 분석적 판단을 요구하는 무미건조한 지적 게임만을 보기 쉽다.
비슷한 생각을 예술 작품에 대해서도 해볼 수 있다. 최종적으로 완성되어 감상자에게 제시된 예술 작품에서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예술가들이 수행해야 했던 수많은 시행착오나 고민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게다가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회상할 때는, 흔히 어느 날 갑자기 영감이 떠올라 미친 듯이 작업을 해서 작품을 완성시켰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정작 예술가들이 작업 과정에서 남긴 여러 ‘흔적’을 살펴보면 즉흥성의 대가였던 피카소조차 엄청나게 꼼꼼한 계획을 세우고 그렇게 세운 계획을 수차례 수정하면서 작업을 진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술가들의 자기회고와 실제 작업 과정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유명 과학자들의 회고와 그들이 과거 연구 당시 작성했던 연구노트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과 유사하다.
최근 X-ray 분석 기법 등의 발전으로 과거 대가들이 회화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수정을 거쳤는지 그 ‘흔적’을 자세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놀랍게도 어떤 미술관의 소장품을 조사해도 전형적인 예술가의 이미지에 들어맞는 방식, 즉 화가가 영감을 받아 순식간에 수정 없이 작품을 완성한 그림은 극히 드물다. 고야의 그림처럼 자질구레한 수정 정도가 아니라 작품의 구도 전체를 여러 번 바꾼 경우도 흔하다. 다시 말하자면 대가들조차 (천재적인 과학자들과 정확히 마찬가지로) 자신의 그림을 엄청나게 많은 수정 작업을 통해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베토벤의 악보도 엄청나게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 완성된 것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예술활동도 과학 연구만큼이나 의식적인 계획과 끊임없는 수정을 거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과학과 예술에서 ‘아름다움’의 추구
과학과 예술의 유사점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아름다움의 추구’일 것이다. 물론 과학자들이 아름답다고 지칭하는 대상과 예술가들이 아름답다고 지칭하는 대상 사이에는 직관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그림1]은 유전학자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구조다. 이 그림에서 과학자들이 보는 ‘아름다움’은 우리가 미술관에 가서 압도적으로 잘 그려진 작품([그림2])을 보고 느끼는 아름다움과는 사뭇 다르다. 과학자들은 어떻게 이렇게 간단한 구조, 화학적으로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물질이 이중 나선으로 꼬여 있는 방식으로 생명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유전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가에 감탄한다.
결국 과학자들은 대상에 대한 과학적 통찰력, 즉, 복잡한 현상을 관통하는 어떤 단순한 원리를 파악하고 이를 간결한 방식으로 표상할 때 얻을 수 있는 과학적인 이해에 대해 ‘아름답다’고 평가한다.[9] 그렇기에 이런 ‘아름다움’을 느끼려면 상당한 정도의 지적 연습이 선행되어야 한다. 관련된 과학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복잡한 현상을 간단한 원리로 설명하는 것의 ‘쾌감’을 느끼지 못하면 과학적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에 비해 예술작품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특별한 훈련이 필요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 같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예술적 경험, 특히 예술적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이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기초적인 능력에 기반한 것임은 분명하다. 최근에는 예술적 경험을 신경과학으로 설명하려는 신경미학의 여러 연구 결과들이 기초적인 예술 감각 능력을 부분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하지만 똑같은 그림을 보고도 어떤 문화적 배경에 익숙한지에 따라 ‘아름답다’는 평가는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현재는 각종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최고가를 매번 경신할 정도로 수집가에게 인기가 높은 인상파 그림은 처음 등장했을 때 많은 비평가와 일반 감상자 모두에게 ‘추하다’고 외면받았다. 깔끔하게 명암 대비가 되고 강렬한 내러티브를 가진 고전주의 그림에 익숙했던 당시 미술 문화의 배경에서 인상주의 그림은 지나치게 거칠거나 파격적으로 보였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상파 그림에 그토록 감탄하게 된 이유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동안 인상파 그림을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간주하는 문화가 형성되어왔고 우리 대부분은 초중등 교육을 통해 그런 문화를 내재화시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별다른 배경지식이 없어도 ‘잘 그렸다!’는 느낌이 드는 크리벨리의 성모 마리아 그림([그림2])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 그림은 영국 런던 국립미술관의 세인스버리 별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 앞에 서면 누구나 그 색채의 화려함과 표현의 섬세함에 압도된다. 그림 관련 배경지식이 없더라도 잘 만들어진 예술품이라는 시각적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이런 의미에서 아담 스미스를 비롯한 근대 미학자들이 예술품만이 아니라 가구나 건축물처럼 사람이 만들어낸 인공적 산물의 ‘잘 만들어짐’이라는 속성이 갖는 미적 가치를 강조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왼쪽에 등장하는 사람이 라틴어로 성경을 처음으로 번역했던 제롬 성인이고 그가 손가락으로 바티칸 교회의 모형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성 제롬이 카톨릭 교회를 수호한다는 것을 상징한다는 점을 알고 나면, 그림을 보다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르네상스 그림에는 수많은 상징과 알레고리가 등장한다. 예를 들어 맥락과 무관하게 공작이 등장하면 대개 ‘불멸’을 상징한다. 공작 고기가 썩지 않는다는 대중적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을 ‘이해’하고 보았을 때 그림의 ‘아름다움’이 훨씬 더 빛을 발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결국 과학이나 예술 모두 관련된 배경 지식을 더 많이 알수록 그 아름다움을 더 ‘진하게’ 느낄 수 있다.
크리벨리의 작품처럼 시각적 이미지가 무엇을 나타내는지 비교적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작품의 경우에도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데 이처럼 ‘이해’의 차원이 중요한데, 현대 미술의 비구상 작품들은 그 ‘이해’의 중요성이 더 크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잭슨 폴락Jackson Pollock의 그림에서 이 점을 생생하게 경험했다.
20대 배낭여행을 하면서 유럽의 어느 현대 미술관에서 잭슨 폴락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이게 뭐야!’라는 느낌밖에는 없었다. 페인트를 막 던져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제대로 그림을 그렸다기보다는 장난치듯 뿌리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 예술 작품이라고 나름 엉터리 해석을 떠올리기도 했는데, ‘아름답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이런 그림을 아름답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예술의 가치를 전문적으로 탐색하는 비평가만이 아니라 필자가 평소 존경하던 여러 학문 분야의 저자 중에서 폴락의 그림이 아름답다고 극찬하는 사람을 여럿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호기심이 생겨서 폴락이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했는지, 폴락이 자신의 그림을 통해 추구했던 예술적 지향점이 무엇이었는지, 폴락의 그림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등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에서 즉흥적으로 마구 그렸다고 느낀 폴락의 그림이 실은 과학자들이 정밀하게 계획된 실험을 하듯 치밀하게 준비된 작업의 결과라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8] 그리고 나이를 좀 더 먹으면서 삶의 복잡다단한 측면에 조금 더 익숙해지면서 폴락의 그림이 정말 좋아지기 시작했다. 요즘은 기회가 되면 폴락의 그림 앞에서는 상당한 시간 한없이 바라보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필자 나름의 방식으로 폴락 그림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게 된 거라고 짐작한다.
아마도 필자가 개인적으로 폴락 그림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고 이해한 내용이 전문가들의 경험과 이해에는 당연히 미치지 못할 것이다. 중요한 점은 예술적 미의 경험 역시 과학적 미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최종 산물에 담겨 있는 메시지와 그 의미에 대한 이해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20세기 이후 현대 예술이 예술 작품 자체의 직관적이고 시각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지나치게 예술적 본원에 대한 탐구나 예술작품을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집중하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예술을 감상하는 일반인들과 직접 예술을 제작하는 예술가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큰 것 같다.
재미있는 점은 지나치게 추상화되고 수학화된 현대 과학에서도 유사한 의견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지극히 추상적이고 수학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이론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도, 이론의 핵심은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고 명료하게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과 현대 물리학이 추구하는 이론적 설명은 너무나 어려워서 오랜 기간 충분한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인이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입장이 대립한다. 이 대립은 과학적 ‘아름다움’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향유할 수 있는지, ‘엘리트 예술’에 대한 일반인의 냉담한 반응을 경험과학에서 극단적으로 멀어진 일부 현대 과학이론들이 겪게 될지 등과 관련되는 흥미로운 주제이다.
피카소 스타일의 기원
과학과 예술에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능력, 즉 과학에서 이론을 생각해내거나 힘든 실험을 완수하는 능력과 예술에서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는 능력 사이에서도 중요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차이점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예술 창작 작업에서 ‘새로움’의 가치는 분명하다. 예술 작품을 많이 감상하다 보면 유명한 몇몇 작가들의 작품은 그 독특한 스타일 덕분에 비교적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적어도 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익숙한 작가들의 그림이나 조각의 경우 그 강렬한 개성이 기억에 남아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 그 개성을 확인할 수 있는 식이다. 이런 점 때문인지 예술가들은 다른 작가의 작품가 비슷한 느낌의 작품을 만들지 않기 위해,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찾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한다.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고유의 스타일을 창안하지 못하면 예술계에서는 대가가 되기 어렵기 때문인 것 같다.
유니크한 예술 스타일의 대표적인 예가 피카소 스타일이다. 그런데 정작 피카소 스타일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면 예술창작과 과학연구의 또 다른 연결점이 드러난다.
피카소는 어렸을 때도 그림을 정말 잘 그렸다고 한다. 피카소가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한 이후에 그린 전형적인 그림을 보면 저 그림은 나도 그리겠다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왠지 어린아이가 장난 친 것 같은 그림이 어마어마한 가격에 팔리다니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런데 정작 어린 시절 피카소는 스스로 ‘벨라스케스처럼 그릴 수 있었다’고 자화자찬하듯, 정말 기막히게 그림을 잘 그렸다. 벨라스케스는 굉장히 유명한 스페인 화가인데, 피카소가 나중에 그의 그림을 모티브로 여러 작품을 제작할 정도로 피카소에게 큰 인상을 준 사람이다.
[그림4]가 피카소가 10대 초반에 그린 그림인데 문외한이 보아도 ‘잘 그린’ 그림이다. 실제로 비평가들도 이 시기의 피가소 그림이 테크닉적으로는 상당히 훌륭하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 그림을 피카소가 그렸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는 사람은 미술사가 이외에는 많지 않을 것이다. 모순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그냥 ‘평범하게 잘 그린’ 그림이기 때문이다. 이런 그림을 이미 어린 나이에 그렸던 피카소는 꼬마 신동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지만 미술계를 뒤흔들 수 있는 신선함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나 단번에 인식할 수 있고 그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특별한 자기 스타일이 있어야 하는데 마드리드에서 공부하던 피카소에게는 그 부분이 부족했다.
그래서 피카소는 당시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로 가서 다른 유명한 화가들을 ‘모방’하기 시작한다. 물론 정말로 똑같이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당시 대가들의 스타일을 한 사람씩 철저하게 학습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든 다음 ‘모방’의 단계로 넘어가는 방식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피카소는 당대의 거장들을 한 사람씩 넘어선 후에야 현재 우리가 ‘피카소 스타일’이라고 손쉽게 인지하는 자신만의 특별한 스타일을 찾게 된다. 오랜 모방과 극복의 과정을 통해 도달한 독특함이었기에 이 새로운 스타일은 순식간에 다른 화가들의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4]
피카소처럼 ‘즉흥적으로’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작가로 유명한 사람조차 그렇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작품을 창작하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선배 작가의 작품을 연구하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 과정은 코페르니쿠스가 태양과 지구의 위치를 바꾸기 전에 기존 천문학의 한계를 궁극하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철저하게 연구했던 것에 비유될 수 있다. 결국 과학과 예술 모두 새로움의 근원에는 자신보다 앞서 존재했던 전통과 당대 최고 수준 지식과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과학과 예술: 오래된 역사, 다양한 견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연구와 예술창작이 모든 면에서 유사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연구에서 새로운 이론이 학계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기존 이론과 단순히 다른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앞선 이론의 경험적, 설명적 한계를 과학자 공동체가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물론 피카소처럼 예술적 전환점을 성취한 화가 역시 자신의 스타일이 기존의 화풍과 단순히 다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 더 낫다는 점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예술에 비해 과학은 이 설득 과정에서 요구되는 조건이 보다 구체적이고 자연에 의해 제한되는 지점이 많다. 그에 비해 예술에서의 평가는 미적 가치나 사회적, 문화적 조류에 영향을 받는 부분이 더욱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 작업과 예술 작업 모두 이성과 상상력의 결합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진다. 앞서 소개한 마티스의 견해를 떠올려 보자. 마티스에 따르면 예술가의 작업은 (적어도 마티스식으로 작업하는 예술가의 작업은) 마치 수학자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처럼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방식과 유사해 보인다. 수학자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설정해야 할지, 어떤 방향에서 풀이를 시도해야 할지 감조차 없는 단계가 분명 있다. 하지만 이 단계를 지나서 어느 정도 문제 풀이의 전체 구도가 잡히고 나면 그다음부터 수학자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의 폭은 점점 더 줄어든다. 논리적 정합성과 증명의 엄밀성이라는 수학 연구의 인식론적 가치를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특징은 수학만이 아니라 과학 실험 연구와 이론 연구 모두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다.
과학이 이렇게 예술과 구체적인 활동에서 공통점을 가진다는 사실을 직시하면, 과학 연구나 공학 연구를 훨씬 더 열린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다. 요즘 인문학이 강조되고 예술과 과학의 만남이 강조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다소 피상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과학자들이 논어나 플라톤을 좀 읽으면 좀 더 ‘교양있는’ 과학자가 되지 않을까? 과학지식이나 기술적 가능성을 활용하면 좀 새롭고 특이한 예술작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소박한 기대에 근거한 ‘만남’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도 물론 의미 있겠지만, 예술과 과학 사이의 접점은 보다 근본적인 수준에서 존재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실제로 과학 연구가 이루어지는 방식을 잘 살펴보면, 과학 연구의 전문분야 내에서 익혀야 하는 분석적인 사고, 이성적인 사고도 중요하지만, 몸으로 체득해야 하는 암묵지도 결정적으로 중요하고, 매 연구 단계마다 통찰력과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도 많다. 이는 과학 연구 과정이 실제로는 예술 활동만큼이나 엄청나게 복합적이고 종합적인 활동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을 깨닫게 되면 좋은 과학 연구를 위해 좁은 의미의 과학적 전문성을 넘어서서 다른 분야의 시각이나 문제 풀이 방식을 경험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막연하게 교양을 쌓는 것이 아니라 과학 연구에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초학제적 경험이 진정으로 의미있는 과학과 예술의 교감이라는 것이다.
참고문헌
- 이상욱 2019, 『과학은 이것을 상상력이라고 한다』, 서울: 휴머니스트.
- 홍성욱 2017, 『인간의 얼굴을 한 과학』,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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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lmes, Richard 2010, The Age of Wonder: How the Romantic Generation Discovered the Beauty and Terror of Science, New York: Vintage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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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ndel, Eric R. 2016, Reductionism in Art and Brain Science: Bridging the Two Cultures,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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