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G BANK, Wunderman Thompson Amsterdam

Can AI Create Art?

 

포스트휴머니즘과 인공지능

“포스트휴머니즘” 연재 기획의 앞선 글을 보면 알 수 있지만, 포스트 휴먼이 등장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 직관적으로 가장 쉽게 떠오르는 방식은 인간이 과학기술의 도움으로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향상시켜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는 트랜스휴먼이 되는 것이다. 또 다른 방식은 인간 이외의 존재가 역시 과학기술의 도움으로 인간과 동등한 혹은 그 이상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손쉽게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과 진화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동물이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 등장하는 ‘로켓’처럼 유전공학적 방식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온, 인간 이외의 포스트휴먼적 존재는 인공지능이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은 잘 만들어진 기계가 인간의 지능을 흉내 낼 수 있다는 수학자-컴퓨터과학자 앨런 튜링Alan Turing, 1912~1954의 믿음에서 출발한 개념으로 1956년 존 매카시가 처음 사용했다. 초기 인공지능 제작자들의 목표는 SF 영화에 등장하는, 감정이나 자유의지처럼 내적 심리상태에서도 인간과 구별되지 않는 지능적 기계가 아니라, 근대 프랑스의 기계제작자 자크 드 보캉송Jacques de Vaucanson, 1709~1782의 오리처럼 “오리처럼 먹고, 오리처럼 움직이고, 오리처럼 꽥꽥거리고, 오리처럼 배설하지만 진짜 오리는 아닌, 기계 오리”에 해당되는 기계지능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튜링을 비롯한 초기 인공지능 연구자들이 공유했던 지향점은 인간적이지만 인간이 아닌 대안적 존재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포스트휴먼니즘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공지능과 예술 창작

어느덧 우리는 인공지능이 번역도 하고, 신문 기사도 쓰고, 증시 분석도 하고, 바둑도 두는 시대에 살고 있다. 분명 인간이 아닌 기계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의 많은 부분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인공지능이 인간적 창의성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예술 창작도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 질문에 대해 답해 보려 한다.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답이 미리 정해져 있다기보다는 우리가 예술과 창작에 대해 현재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미래에는 어떻게 생각할지에 따라 답의 내용이 달라짐을 알게 될 것이다.

답을 찾기 위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최근 대중매체가 인공지능의 미래에 대해 쏟아내는 수많은 자극적 전망을 잠시 접어두고 인공지능이 실제 설계되고 만들어지고 사용되고 과정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이 작업을 통해 우리는 현재까지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등장할) 인공지능은 그 산출물에 있어서는 평균적인 인간을 부끄럽게 할 정도의 놀라운 성취를 보여주겠지만, 존재론적으로는 여전히 보캉송의 기계오리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결정적으로 보캉송의 오리가 그 오리를 만들고 문제가 생기면 수리하는 기계제작자 보캉송을 필요로 했듯이, 현대의 인공지능도 그 인공지능을 만들고 문제가 생기면 보완해야 할 엔지니어가 필수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이 드러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점이 인공지능의 예술 창작에 대해 갖는 의미를 소설 쓰기, 그림 그리기, 작곡하기의 세 영역에서 살펴본 후 그 내용이 함축하는 바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인공지능 특징, 세 가지

필자가 보기에 인공지능의 예술 창작과 관련되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인공지능의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그것은 ‘자각 없는 수행performance without awareness‘,’이해하기 어려운 실패unintelligible failure‘, ‘계산과 실재의 간극gap between computation and reality‘이다.

첫째 현재까지 개발된, 그리고 당분간 가까운 미래에 등장할 인공지능은 인간이 판단하기에 ‘탁월한’ 결과물을 인간에게는 매우 낯선 방식, 즉 결과물에 대한 자각적 경험이 없는 방식으로 생산한다. 이는 이세돌 9단을 가볍게 이긴 알파고가 자신이 바둑을 두었다는 사실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이를 ‘자각 없는 수행’이라고 하자. 중요한 점은 이 ‘자각 없는 수행’이 현재 인공지능 기술의 일시적 한계로 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통상적인 인공지능의 기술적 목표는 인간처럼 ‘의식적 경험’도 함께 하면서 인간이 판단하기에 ‘탁월한’ 결과물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 판단하기에 ‘탁월한’ 지적 결과에 해당하는 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산출하는 것이다.

기계지능의 가능성에 낙관적이었던 튜링조차도 인간지능과 기계지능은 그 결과물, 즉 외부적으로 확인되는 수행에 있어 동등할 수 있음을 주장했을 뿐 인간지능과 기계지능이 작동 방식의 세부 사항에 있어서까지 모두 동일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계지능이 구현되는 물질적 기반이 인간지능이 구현되는 물질적 기반과 다르기에 그로부터 나타나는 지능은 당연히 인간에게는 낯선, 다른 것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미래에 등장할, 기술적으로 훨씬 진보한 인공지능 역시 이 ‘자각 없는 수행’의 특징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일단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인공지능 연구는 인간 지능이나 수행의 특정 영역, 예를 들면 의학 영상이미지 판독이나 법률문서 요약처럼 맥락과 전문성이 제한된 영역을 대상으로 하는, ‘특수’ 인공지능 연구이다. 특수 인공지능의 경우 기술적 목적이 인간 지능의 특정 기능을 구현하는 것이기에, 의식적 경험과 같은 인간 지능의 고유한 특징에 대응되는 회로를 설계 단계에서 고려조차 하지 않는다.

물론 현재 소수의 인공지능 연구자가 인간지능처럼 다양한 지적 영역에서 결과물을 산출할 수 있는 일반 인공지능을 연구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들 연구자의 연구 내용에서도 ‘의식적 경험’이 이론적 분석이나 설계 내용에 등장하는 경우는 없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는 현재 우리 두뇌에서조차 ‘의식적 경험’이 정확히 어떤 물질적 인과 작용을 통해 등장하는지에 대해 아주 제한적인 이해만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인공지능에게 ‘의식적 경험’을 만들어 장착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출발점부터 전혀 모르는 상태이다.

결국 ‘의식적 경험’이 미래 인공지능에 등장하리라 기대하는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충분히 발전하면’ 인간지능이 진화의 역사에서 그러했듯 ‘의식적 경험’이 자연스럽게 등장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는 적어도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는 그저 막연한 기대 이상의 근거를 갖기 어렵다. 인류 진화 과정에서 ‘의식’의 등장이 필연적이었다는 생물학적, 철학적 근거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매우 소중하고, 아마도 우주적 관점에서는 매우 가치 있는 ‘의식’의 등장은 그저 여러 인과 관계가 겹쳐져서 일어난 우주적 ‘우연’일 수도 있다. 설사 지구상의 생명체의 진화 역사에서는 이런 인과 관계의 중첩이 ‘의식’의 등장을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우주적 관점에서 볼 때 전혀 다른 물질적 기반을 갖는 기계지능이 필연적으로 이런 의식적 경험을 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다소 유치한 인간중심적 사고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다음으로 소개할 ‘이해하기 어려운 실패’는 그 자체가 정말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인공지능, 특히 인간이 보기에 깜짝 놀랄만한 ‘수행’을 보여주는 인공지능도 완벽하지는 않기에 가끔은 주어진 목표 달성에 실패하곤 한다. 단지 인간보다 실패 확률이 낮을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공지능의 실패는 인간의 실패와 질적으로 다른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최근 유행하고 있는 기계학습의 여러 형태, 예를 들면 딥러닝이나 강화학습 알고리즘을 활용한 인공 신경망 인공지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인공신경망이 가장 인상적인 ‘수행’을 보이는 영역이 이미지 판독이다. 가장 최신의 인공 신경망은 (범주 설정의 문제 때문에 다소 논쟁적이기는 하지만) 일반인보다 더 높은 정확도로 사물을 구별해 낸다. 잘 훈련된 의료 인공지능은 이제 영상의학 전문가 수준에 도달한 경우도 있다.

문제는 인공지능이 이미지 판독에서 실패할 때 인간지능에 익숙한 사람이 납득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실패한다는 사실이다. 사람이라면 고양이의 여러 종류를 혼동해서 샴 고양이를 페르시아 고양이와 헷갈릴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고양이와 타조를 헷갈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전체적인 이미지 판독 정확도에서는 평균적 사람을 앞서는 인공지능은 고양이 이미지를 사람이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조금만 바꾸어도 타조로 인식하거나, 거기에서 더 나아가 옛날 송출이 끝난 방송 화면처럼 잡음 이미지를 고양이로 인식하기도 한다. 이는 딥러닝 등 인공신경망이 활용하는 기계학습 알고리즘이 인간이 학습하는 방식과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근본적인 문제이기에 현재 인공지능 기술이 근본적인 혁신을 이루지 않는 한 쉽게 고쳐질 수 있는 ‘오류’가 아니다.

 

고양이를 타조로 오인하는 것 정도야 가벼운 농담거리일 수 있지만 의학 진단에서 이런 ‘실수’를 한다면 정말 큰 문제일 것이다. 전문의 역시 실수는 하지만 적어도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실수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주의 부족으로 처벌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문의라면 현재 의료 인공지능이 보여주는 ‘이해하기 어려운 실패’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핵심은 인공지능이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실패’를 언제 할지에 대해 미리 알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인공지능의 인상적인 수행에 대해 그저 낙관적으로만 평가할 수 없는 불안감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계산과 실재의 간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의 인공지능에 대한 이해에서 인공지능과 로봇이 자주 혼용되거나 심한 경우에는 동일시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컴퓨터공학에서 로봇이, 온라인상을 돌아다니며 데이터를 수집하거나 프로그램의 오류를 잡아내는 등의 기능을 수행하는 프로그램을 지칭하기도 하기에 더욱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통상적인 의미나 로봇공학에서의 로봇은 물리적 실체를 갖고 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춘 기계를 의미한다. 당연히 지능적 행동을 할 수 있는 로봇은 인공지능을 활용해야 하기에 우리가 이 글에서 관심을 갖는 로봇은 인공지능을 탑재한 인공지능 로봇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대상에서 인공지능과 유사한 것을 찾자면 안드로이드형 로봇이 아니라 휴대폰에 내장된 계산기를 들 수 있다. 물론 사칙연산보다는 훨씬 복잡한 일을 순식간에 해치우는 인공지능이 수두룩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공지능이 하는 일은 매우 복잡한 계산을 하는 일이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인공지능은 입력 값을 받아 다양한 방식의 계산을 통해 출력 값을 산출함으로써 인공지능 제작자가 의도했던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시스템이다. 여기에 더해 최근 인공지능은 인공지능 설계자의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일일이 사람의 결정을 물어보지 않고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전기전자공학자 단체인 IEEE에서는 인공지능이라는 용어 대신에 자율지능시스템Autonomous Intelligent System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상의 논의가 함축하는 바는 인공지능 자체는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아니라) ‘몸’이 없다는 점이다. 이 점을 늘 기억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인공지능은 기본적으로 계산을 하는 장치이기에 그 계산 결과가 물리적 세계에 인과적으로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장치가 덧붙여져야 한다. 예를 들어 알파고는 자신이 계산한 수를 대신 바둑판 위에 놓아주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자율주행차에 탑재된 인공지능은 자신이 자율적으로 결정한 운행 방식을 실현해 줄 물질적 대상, 즉 자동차가 필요하다.

문제는 인공지능의 결정을 물리적으로 구현하는 과정이 인공지능을 만드는 과정보다 훨씬 더 힘들다는 사실이다. 물리적 세상에는 중력이나 마찰력, 그리고 해석되어야 할 공적 규범처럼 다양한 제약조건이 존재하는 데 이를 모두 ‘적절하게’ 준수하면서 인공지능의 계산 결과를 행동으로 구현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인공지능의 탁월한 수행이 온라인 게임처럼 물리적 제약조건이 없는 사이버 세상에서 더욱 두드러진 근본적인 이유이다.

그럼 이제부터 이런 인공지능의 세 특징이 인공지능의 ‘창작’에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소설 쓰기, 그림 그리기, 작곡하기의 구체적 사례를 들어 살펴보자.

 

 

인공지능, 작가, 화가, 작곡가가 되다?

인공지능 ‘창작’이 가장 먼저 시도된 분야는 원리적으로는 가장 어려운 글쓰기였다. 글쓰기가 그림 그리기나 작곡하기보다 원리적으로 어려운 이유는 글의 속성상 의미론적 특징이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화가나 작곡가도 물론 자신의 그림이나 음악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글만큼이나 상당히 고정된 의미가 형성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는 감상자에 의해 의미가 ‘해석’되거나 재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그에 비해 글쓰기는 시인이든 소설가든 의미론적 대상인 개념이나 표현을 일차 재료로 사용하기에, 현 단계에서 의미론적 속성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물론 이 경우도 ‘이해하다’를 철저하게 행태론적으로 정의하면 현재 인공지능도 의미를 이해한다고 볼 수 있지만) 현 단계 인공지능이 다루기 까다로운 작업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이 ‘저술’해서 출판했다고 알려진 책이 여러 권 존재하고 그중에서는 상업적으로 판매된 작품도 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인공지능은 기본적으로 학습 데이터에 존재하는 패턴을 찾아내어 그것을 다시 새로운 방식으로 구현해 낼 수 있는 시스템이다. 그러므로 인공지능에게 특정 장르의 글을 수없이 많이 기계학습 시켜서 해당 분야 글의 ‘스타일’을 학습시킨 뒤, 인간이 판단하기에 상당히 그럴듯한 글을 결과물로 내놓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 신기할 수는 있어도 원리적으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인공지능이 세 특징이 인공지능의 글쓰기에도 고스란히 나타나서 인공지능의 ‘창작’ 능력에 제한을 가한다. 우선 인공지능은 당연히 인간처럼 글을 쓰거나 키보드로 글을 쓸 수는 없다. 실은 글자를 한자씩 시간적으로 써넣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기존에 학습한 문장이나 표현을 적당히 변형해서 설계자가 미리 설정한 제한 조건을 만족하는 방식으로 ‘생산’해낸다. 인공지능이 이 과정에 대한 의미론적 이해가 없는 것은 당연하고, 거기에 더해 우리로서는 요령부득의 이상한 문장을 산출해 내는 경우도 꽤 있다. 시 창작의 경우에는 언어적 파격이 어느 정도 허용되기에 이런 문장들이 ‘기막힌’ 언어적 유희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학술서의 경우에는 용납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인공지능이 저술했다는 책들은 모두 산출 과정에서 수많은 인간과의 협력이 필수적이었다. 일단 인공지능이 생산해 낸 문장들 중에서 어색하거나 아예 뜻이 통하지 않은 문장은 인간이 일일이 제거하거나 적절한 문장으로 고쳐 써야 한다. 이에 더해서 인공지능의 기계학습 과정에서는 포함되지 않은 여러 글쓰기의 측면, 예를 들어 한 장의 내용을 잘 요약하는 제목 정하기 등은 아예 인간이 도맡아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요약하자면 인공지능의 글쓰기는 실은 인공지능+인간 연합팀의 글쓰기였던 것이다. 이 특징이 가까운 미래에 극복될 가능성은 여러 기술적 이유로 높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당연하게도 인공지능은 적당한 출판사를 고르거나 편집자와 책의 구성과 편집에 대해 교섭할 수 없다. 책의 인세도 인공지능이 갖지 못하는데 이는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림 그리기는 어떨까? 최근 네덜란드에서는 국가적 보물로 여겨지는 렘브란트의 작품을 기계학습해서 렘브란트가 그렸을 법한 그림(전문가들이 판단하기에도 그럴 정도의 수준)을 그려내는 인공지능이 등장해서 화제다. ‘넥스트 렘브란트’로 불리는 이 인공지능이 ‘창작한’ 유사-렘브란트 그림은 유튜브를 비롯한 공개 매체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데 그림의 완성도나 물감의 두께 조절까지 깜짝 놀랄 수준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상황을 꼼꼼하게 따져보자. 앞서 지적했듯이 인공지능은 몸이 없다. 당연히 팔도 없다. 그러므로 ‘넥스트 렘브란트’가 붓을 들고 이 멋진 유사-렘브란트 그림을 그렸을 리는 없다. 관련 내용을 살펴보면 ‘넥스트 렘브란트’가 그림의 3차원적 구성을 기계학습 등의 알고리즘으로 만들어내면 이 ‘정보’를 3차원 프린터로 찍어낸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넥스트 렘브란트’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인간과의 협력이 필수적인 이유는 이것만이 아니다. ‘넥스트 렘브란트’가 렘브란트 그림을 기계학습 한다고 할 때 그 일을 정확히 어떻게 수행할까?

여기서도 ‘넥스트 렘브란트’가 렘브란트 화풍에 내재된 패턴을 성공적으로 ‘학습’하기 위해서는 이 과정 전체를 기획하고 매 단계마다 실행하는 인간 엔지니어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렘브란트 그림을 방 안 가득 늘어놓고 휴머노이드 로봇에게 ‘자 이제 렘브란트 식으로 그려봐!’라는 식의 설정은 오직 SF 영화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실제로는 렘브란트 식으로 그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그 화풍을 어떻게 프로그램적으로 구현할지를 결정하고, 결정된 내용을 알고리즘으로 ‘넥스트 렘브란트’에게 집어넣고, 학습 과정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모두 인간 엔지니어의 몫이다. ‘넥스트 렘브란트’는 이런 인간의 협력을 기반으로 다양하고 복잡한 계산을 하여 결과 값을 산출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림 그리는 인공지능의 경우에도 인공지능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인간 연합팀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작곡을 살펴보자. 작곡하는 인공지능은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EMIExperiments in Musical Intelligence이다. 이 인공지능은 음악학자 데이비드 코프가 오랜 연구를 통해 완성했는데 그 과정에서 바흐, 비발디, 모차르트 등 위대한 작곡가들의 작품을 어떻게 코딩하여 인공지능에게 학습 데이터로 제공할 것이지, 기존 작품과 충분히 달라서 새로운 작품이라는 느낌을 주되 여전히 각 작곡가가 작곡했을 법한 작품의 테두리 안에 남아 있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무작위 변이를 어떤 방식으로 얼마만큼 주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연구했다고 한다.

EMI의 창시자 코프조차 EMI가 자신이 작곡을 하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지 못하는 고도의 복잡한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는 점을 거리낌 없이 인정한다. 그런데도 놀라운 점은 이 컴퓨터 프로그램이 작곡한 곡을 감상한 수많은 사람들이 어떤 경우에는 ‘영혼의 울림’을 느낄 정도로 감탄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EMI는 앞서 지적했던 ‘자각 없는 수행’을 가장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예에 해당된다. 실제로 EMI의 능력을 의심한 현대 작곡자와의 공개 경연에서 청중들은 압도적으로 EMI의 손을 들어 주기도 했다.

하지만 앞서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 사례와 마찬가지로 EMI는 몸이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작곡한’ 곡을 피아노로 연주하거나 성악으로 공연할 수 없다. 이는 모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 부분은 인간 작곡가도 부분적으로 같은 처지에 있다고 볼 수 있으므로 결정적인 문제가 되지는 않는 것 같다. 게다가 EMI가 작곡한 곡들에는 약간의 ‘진부함’은 느껴져도 ‘이해할 수 없는 실패’에 해당되는 이상한 음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EMI의 작동과 결과물 산출이 코프라는 뛰어난 음악학자-컴퓨터 프로그래머의 세밀한 조정과 감시하에 이루어진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예를 들어 EMI에게 바흐의 음악 스타일을 학습시키는 데는 부지런한 코프의 노력을 통해서도 7년이 걸렸지만 일단 기계학습이 완료된 EMI는 하루 사이에 수천 곡의 ‘바흐 스타일’ 곡을 작곡해 낸다. 이 중에는 코프가 대중에게 내놓기에는 부족한 곡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결국 EMI의 작곡 능력이 인상적이 이유는 코프라는 철저하게 헌신적인 인간 협력자가 인공지능의 작곡 능력의 한계를 탐색하기 위한 목적으로 끊임없는 실험적 시도를 통해 가장 인상적인 작품을 산출하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물을 인간 연주자들이 탁월한 기량으로 공연했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지점에도 여전히 인공지능 혼자 작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인간 연합팀이 작곡을 하는 것이다.

 

 

예술 창작이란 무엇인가?

인공지능 시대의 예술에 대해 자주 등장하는 질문이 있다. “인공지능이 ‘진정으로’ 창작한다고 할 수 있을까?”가 그것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 질문 자체가 잘못 제기된 질문이다. 인공지능은 앞서 설명한 세 특징 때문에 인간의 지적인 수행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결과물은 분명 인간이 판단하기에 지적이지만, 인간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결과물을 만들어 내지도 않고, 실수하는 방식도 낯설고, 결정적으로 몸이 없기에 물리적 세계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항상 인간이나 다른 인과적 대상과 결합해야 한다.

인공지능이 진정으로 창작할 수 있는지 여부는 우리가 창작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가 앞서 지적한 인공지능이 인간지능과 다른 특징을 강조하고 인간이 창작하는 방식으로 인공지능이 창작할 수 있기 전까지는 인공지능은 진정한 의미에서 창작을 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다면, 그 결정은 창작을 그렇게 인간중심적으로 정의한다는 전제하에서 타당한 결정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창작 행위는 반드시 그 창작 행위를 기획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면 그 과정을 몸을 통해 직접 참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이 설득력이 있다면 가까운 미래에 등장할 인공지능을 포함해서 인공지능은 결코 창작할 수 없다. 오직 인간이 워드프로세서로 글을 쓰거나, 태블릿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신서사이저를 사용해 작곡을 하는 것처럼 인간의 창작 활동에 유용한 도구로 활용될 뿐이다.

하지만 현재 수준의 인공지능에 한정하더라도 인공지능의 최종 산출물은 그것에 창의성이나 창작 개념을 부여하지 않기 어려울 정도로 감탄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물론 현재까지 인공지능이 ‘창작’한 결과물은 인간과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중요했고 이 점은 당분간 바뀌지 않겠지만, EMI가 작곡한 음악을 듣고 감동하는 상황과 인간 작곡가의 음악을 듣고 감동하는 상황에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기는, 특히 설사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음악을 이해 못하는’ 인공지능이 작곡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약간 억지스러워 보인다.

결국 보다 거시적인 수준에서 말하자면 인공지능이 진정한 의미에서 창작을 할 수 있는지 여부는 예술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새로운 기술적 장치들이 창작 행위에 도입되면서 각 시대마다 그 기술적 장치를 어떤 사회적 논의를 통해 규정해 왔는지와 마찬가지 시작에서 논의될 필요가 있다. 이런 구성적 논의의 결과 ‘창작’ 개념은 온전히 인간에게만 귀속시킬 수 있는 (의식적 경험을 하고 인간과 유사한 방식으로 욕구와 가치론적 지향점을 추구하는 인공지능의 등장 전까지는) 개념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혹은 그런 ‘고전적’ 창작 개념을 그대로 둔 채, 수용자의 측면에서 예술을 감사하는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에만 집중하여 창작물을 규정하는 새로운 개념적 재정의가 시도될 수도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두 가능성을 포함하여 ‘창작’ 개념을 포함한 수많은 인간적 개념에 대한 재검토를 진지하게 시도하는 것이다. 이 재검토가 충분히 이루어지기 전에 “인공지능은 진정으로 창작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려는 시도는 그저 자신의 직관적 선호를 내세우는 것 이상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참고문헌

  1. 신상규 외, 『포스트휴먼이 몰려온다』, 아카넷, 2020.

  2. 이상욱, 「인공지능의 한계와 일반화된 지능의 가능성: 포스트휴머니즘적 맥락」, 과학철학 11(1)(2009), 49-70쪽

  3. 이상욱, 「감정과 의식: 신경과학과 인공지능 시대의 문학」, 한국언어문화 65(2018), 5-28쪽

  4. 이중원 엮음, 『인공지능의 존재론』, 한울, 2018.

  5. 이중원 엮음, 『인공지능의 윤리학』, 한울, 2019.

  6. Agrawal, A. et al. Prediction Machines: The Simple Economics of Artificial Intelligence, Cambridge, MA: Harvard Business School Press, 2018. (번역서: 『예측 기계』, 생각의 힘, 2019)

  7. Brockman, J. (ed.) Possible Minds: 25 Wyas of Looking at AI, New York: Penguin Press, 2019.

  8. Brynjolfsson, E. and McAfee, A. Machine, Platform, Crowd: Harnessing Our Digital Future, New York: W.W. Norton, 2018. (번역서: 『머신 플랫폼 크라우드』, 청림출판, 2018)

  9. Damasio, A. The Strange Order of Things: Life, Feeling, and the Making of Cultures, New York: Vintage Books, 2019. (번역서: 『느낌의 진화』, 아르테, 2019)

  10. Credo P. C. Invisible Women: Exposing Data Bias in a World Designed For Men, London: Chatto & Windus, 2019. (번역서: 『보이지 않는 여자들』, 웅진지식하우스, 2020)

  11. Dehaene, S. Consciousness and the Brain: Deciphering How the Brain Codes Our Thoughts, New York: Penguin Books, 2014. (번역서: 『뇌의식의 탄생』, 한언출판사, 2017)

  12. Dennett, D. Kinds of Minds: Toward an Understanding of Consciousnes, New York: Basic Books, 1997. (번역서: 『마음의 진화』, 사이언스북스, 2006)

  13. Floridi, L. The Fourth Revolution: How the Infosphere is Reshaping Human Realit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6.

  14. Ford, M. Rise of the Robots: Technology and the Threat of a Jobless Future, New York: Basic Books, 2016. (번역서: 『로봇의 부상』, 세종서적, 2016)

  15. Fry, H. Hello World: How to Be Human in the Age of Machine, London: Transworld Publisher Co., 2019. (번역서: 『안녕, 인간』, 와이즈베리, 2019)

  16. Gerrish S. How Smart Machines Think, Cambridge, MA: The MIT Press, 2018. (번역서: 『기계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즈스퍼블리싱, 2019)

  17. Kaplan, J. Artificial Intelligence: What Everyone Needs to Know,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6a. (번역서: 『인공지능의 미래』, 한스미디어, 2017)

  18. Kaplan, J. Humans Need Not Apply, Ithaca, NJ: Yale University Press, 2016b. (번역서: 『인간은 필요 없다』, 한스미디어, 2016)

  19. Mitchell, M. Artificial Intelligence: A Guide for Thinking Humans, New York: Farrar, Straus and Grioux, 2019.

  20. Norvig, P. and Russell, S. Artificial Intelligence: A Modern Approach, 3rd Edition, New York: Pearson Education, 2016. (번역서: 『인공지능: 현대적 접근 방식』, 제이펍, 2016)

  21. Tegmark, M. Life 3.0: Being Human in the Age of Artificial Intelligence, New York: Penguin Books, 2016. (번역서: 『막스 테그마크의 라이프 3.0』, 동아시아, 2017)

이상욱
HORIZON 편집위원, 한양대학교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