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호

오늘날 우리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요소 중 하나는 단연코 과학기술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단지 우리 삶의 물질적 조건을 개선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경제·사회·문화·정치에 이르는 일상적 삶의 전 영역에 걸쳐서 광범위한 변화를 유발함으로써 우리 삶의 형태 및 문명의 모습을 조각한다.

문명의 출현 이래 인간은 언제나 기술적 존재였으며, 기술은 인간의 결여된 부분을 보충하는 단순한 도구나 보철이 아니라,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기술은 우리에게 특정한 유형의 사고, 행동, 가치를 유도afford할 뿐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행동이나 상상의 가능성을 봉쇄하는 제약 조건이기도 하다. 생산과 소비, 인구의 크기, 도시나 국가의 형성, 정치제도, 물질적 삶의 수준, 기대 수명, 노동, 교육, 통신, 의료, 놀이, 예술, 전쟁, 윤리와 가치와 같이 인간 삶의 조건을 구성하는 제 요소들이나 다양한 사회적 실천도 언제나 당시의 기술 혹은 기술적 조건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21세기 초반 첨단 신흥 과학기술emerging technologies의 발전은 우리 삶의 또 다른 전방위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 말은 우리 삶의 습관이나 형태 혹은 문명의 모습이 또 다른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인공지능이나 사물인터넷, 가상현실과 같은 새로운 기술의 개발은 우리의 일상적 삶이 뿌리내리고 있는 기술생태 공간을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기술생태 환경의 변화는 우리가 타인 혹은 비인간 타자와 관계 맺거나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방식, 스스로에 대한 자기 인식의 양상, 심지어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형시킬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만큼 과학기술의 변화와 발전은 단순히 산업 성장이나 경제 발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활동과 그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근본적인 조건이나 구조를 새롭게 상상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생명공학이나 인공지능과 같은 신흥 기술이 과거의 과학기술과 구분되는 지점은, 이 기술들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수준에서 인간 본성과 자연 세계에 대한 인간의 개입 능력을 급진적으로 확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우리는 물질뿐 아니라 생명이나 정신마저도 우리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시대를 살게 되었다. 인류세라는 말이 상징하듯이 지금 우리의 선택에 따라 비단 현재의 인류뿐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 그리고 인간과 더불어 지구를 공유하고 있는 수많은 다른 종의 운명에 불가역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 것이다.

오늘날은 변화의 속도라는 측면에서도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는 시대이다. 그 결과 과학기술의 발전이나 일상의 변화 속도, 그러한 변화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규범이나 가치 변화의 속도 사이에 현저한 괴리가 발생하고 있다. 과거에 일어난 변화의 속도나 양상이 현재나 미래에도 그대로 지속될 것이라고 단순히 외삽extrapolation하는 것은 결코 적절한 대응으로 보이지 않는다.

변화의 속도나 범위를 감안할 때, 신흥 과학기술이 촉발할 다양한 사회, 문화적 변동은 철학이나 인문학이 사후적인 해석이나 평가자의 역할에 머물지 않고, 미래의 조건이나 방향성에 대하여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이러한 변화와 도전을 진단하고 그에 대응하기 위한 유망한 프레임 중 하나가 바로 ‘포스트휴먼’이다. 한가지 유의할 점은 학자마다 ‘포스트휴먼’의 개념을 각기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흔히 우리가 포스트휴먼이라고 할 때 떠올리는 형상은 유전적으로 강화(향상)된 인간, 전자장치와 결합한 사이보그 인간, 인간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 유전적으로 변형된 동물-기술의 키메라 등이다. 이러한 포스트휴먼의 형상은 논의의 맥락이나 관점에 따라서 여러 가지 다의적인 방식으로 재현되고 전유된다.

가장 대표적인 입장 중 한 가지가 트랜스휴머니즘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은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건강수명을 연장하거나 노화를 제거하고, 지적, 정서적, 신체적, 심리적 능력의 개선 혹은 강화를 꾀하며 인간 본성의 향상enhancement을 긍정하고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지적·문화적 운동으로 정의된다. 우리에게 <슈퍼인텔리전스>의 저자로도 잘 알려진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은 대표적인 트랜스휴머니스트로, 누적된 향상의 결과 기본적인 능력이 근본적으로 지금의 인간을 넘어서기 때문에 현재의 기준으로는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를 ‘포스트휴먼’이라 부르고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은 기본적으로 이성에 대한 근대의 신뢰, 진보에 대한 계몽의 기획을 계승하려 한다는 점에서 휴머니즘의 연장선 상에 있다. 그런 점에서 혹자는 트랜스휴머니즘을 울트라 휴머니즘 혹은 스테로이드 휴머니즘humanism in steroid이라고 부르며, 미래의 진보에 대한 비전을 특정한 기술의 개발과 적용으로만 치환하는 기술환원주의의 위험성을 띠고 있다고 비판한다. 또한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에 대한 비판적이고 역사적인 설명이나 분석을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물론 트랜스휴머니즘 안에서도 다양한 입장이 경쟁하고 있기에 모든 트랜스휴머니스에게 이러한 평가가 정당한지는 좀 더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다.

이 글에서는 트랜스휴머니즘보다 탈휴머니즘 담론인 포스트휴머니즘 일반이나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포스트휴먼 논의의 초기 이론가인 로버트 페페럴Robert Pepperell은 <포스트휴먼의 조건>에서 ‘포스트휴먼’은 휴머니즘Humanism으로 규정되는 사회발전의 시기가 끝났으며, 우리가 ‘휴머니즘 이후’의 시대로 진입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역설한다. 그 핵심은 인간human being이란 존재를 과거(지금)와 동일한 방식으로 생각할 수 없으므로 ‘인간’의 의미를 새롭게 재정의 혹은 재발명해야 한다는 요구이다. 정보철학의 개척자로 유명한 루치아노 플로리디Luciano Floridi는 비슷한 맥락에서 정보혁명이 야기하는 도전과 변화를 코페르니쿠스, 다윈, 프로이트의 혁명을 잇는 인간학의 ‘4차 혁명’이라 명명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들의 밑바탕에는 생명기술이나 정보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인간의 기계화, 그리고 인공지능으로 상징되는 기계의 인간화라는 현상이 자리 잡고 있다. 유전자 조작, 줄기세포나 인공장기와 같은 생명기술, 로봇 팔다리나 외골격(엑스스켈레톤)과 같은 인공보철(프로스테시스), 두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Brain-Computer Interface,를 통한 인간 신경계와 기계의 연결과 같은 (미래의) 기술은 인간을 점점 더 사이보그적인 존재로 변화시킬 것이다. 기계학습으로 무장한 인공지능은 점차 인간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율적으로 추론, 판단, 선택을 수행하는 인공행위자로 등장하고 있다. 첨단 과학기술의 발전은 결과적으로 인간/생명/기계의 본성을 재존재화reontologize하고 디지털/물리/생물 사이의 경계를 해체한다. 그 결과, 생명이나 정신의 활동이 기술과 상호수렴하여 이것들을 범주적으로 서로 구분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는 생물-이후post-biological의 시대를 바로 포스트휴먼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휴머니즘 시대에 인간은 정신/물질, 생명/기계, 자연/인공과 같은 이원론적 구분을 토대로, 인간 아닌 것non-human being 혹은 비인간inhuman과의 대비를 통해 정의되었다. 인간은 이성성에 입각하여 행동하는 자율적인 행위자로서, 역사의 산출 주체이자 만물의 척도이며 세계의 중심이었다. 다른 생명체와 자연은 주체의 자리에서 배제된 체, 인간의 필요와 욕구에 의해 마음대로 처분 가능한 수동적인 대상(객체)에 불과했다. 보편적 이념으로서 상정된 이러한 인간 주체에게 가장 중요한 규범적 가치는 스스로에 대한 자기의식을 바탕으로 개인의 선택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이다. 인간의 존엄성 및 도덕성, 윤리, 책임, 권리 등의 규범적 개념에 대한 근대적 이해는 대부분 자기 결정권을 갖는 이러한 독립적이고 이성적인 보편적 인간상에 대한 견해로부터 파생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의 정신, 이성 혹은 생각하는 능력은 신체와 구분되어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서, 인간을 다른 생명체/존재와 구분 짓는 결정적인 기준으로 작동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이러한 인간 이해에 도전하면서, 근대적 이분법과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서 ‘인간’, ‘기계‘,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패러다임이나 언어 문법을 모색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의 주요한 담론적 목표 중 하나는 ‘인간’ 개념에 내재된 위계의 해체와 이에 입각한 차별과 배제의 정치학에 대한 극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포스트휴머니즘으로 이르는 이론적 원천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비롯하여, 페미니즘 이론, 탈식민주의 담론, 장애학, 동물연구, 사이보그 이론(헤러웨이)과 같은 차별에 대한 다양한 담론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이론들은 근대 휴머니즘이나 위계적 ‘인간’ 개념이 어떻게 성별이나 인종, 민족, 종교 등의 차이를 기반으로 여성, 노예, 인종, 장애인과 같은 ‘다른’ 인간들을 ‘인간’의 범주에서 배제하고, 성차별주의, 인종주의, 노예제, 우생학, 집단학살과 같은 야만적 행위를 정당화했는지에 대해서 폭로한 바 있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인간 종족주의가 갖는 문제에 주목함으로써, 식물이나 동물과 같은 생명체는 물론이고 새로운 기술의 발전으로 가능해진 변형된 인간이나 사이보그, 인공지능과 같은 기술적 존재로까지 그 논의를 확장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전통적인 휴머니즘의 인간 개념이 차이(다름)에 입각하여 인간/동물, 인간/기계, 인간/인간-아닌-존재, 인간/비인간의 위계를 정초하고 있으며, 어떻게 이를 통하여 다른 비인간 존재들에 대한 착취적 태도를 ‘정상화’ 하고 있는지를 폭로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의 경계를 재정의함으로써 인간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위계를 해체하는 동시에 인간/인간 사이뿐 아니라 인간/비인간-존재 사이의 조화로운 공생을 모색하려고 시도한다. 포스트휴먼의 관점에서, 인간은 환경과 기술에 얽혀 있으면서 다른 형태의 생명과 함께 상호 의존하면서 살아가고 공진화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다른 존재와 분리되어 자족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모든 형태의 생명 및 기술적 존재와 연결되어 상호작용과 교차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관계적 체계relational system의 노드와 같은 것이다. 인간은 인간-아닌 것과의 대비가 아니라, 오히려 비-인간 요소를 포함하기 때문에 비로소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혼종적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의 많은 능력이나 특징, 성질은 다른 형태의 생명, 기술, 생태계와 공진화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며, 심지어 인간은 다른 생명 형태와 생태계, 생명과정, 유전물질 등을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포스트휴먼적 관점은 인간을 다른 형태의 생명이나 존재와 분리하여 예외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인간이 그것들을 지배하거나 통제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부정한다. 인간은, 생물학적 유기체로서의 자연적 인간이건 혹은 기술적으로 변형된 인간이든 간에, 다양한 형태의 주체, 행위자, 생명, 기계와 더불어 살아가고 진화하며, 그것들에 의해 구성되고 또 그것들을 구성하는 상보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이제 의미나 행위의 원천은 인간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은 다양한 형태의 주체, 행위자, 생명, 기계와 더불어 살아가고 진화하며, 기술적 생태 공간 안에서 이들 다른 주체나 행위자들과 교섭하면서 세계의 의미를 만들어 간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이론적 작업인 동시에 강한 실천적 지향과 결부된 담론이다. 유명한 페미니스트 이론가이자 포스트휴먼 담론의 이론가인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는 이론적 형상으로서 ‘포스트휴먼’은 첨단기술이 산출하는 변형뿐 아니라, 기후변화나 자본주의가 촉발한 인류세적 위기와 관련된 문제를 탐사할 수 있게 만드는 네비게이션 도구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지금 ‘우리’(지구에 거주하는 인간과 비인간)는 자본주의에 의해 추동되는 4차 산업혁명과 기후변화로 인한 여섯 번째 대 멸종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가속화와 기후변화의 가속화라는 두 힘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의 문제가 포스트휴먼 담론의 핵심적인 과제라고 선언한다.

오늘날 과학이나 기술 전문가들이 미래를 전망할 때, 그들은 기술을 통하여 만들어질 기계장치나 그것들이 가능케 하는 다양한 장밋빛 결과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상상해야 하는 기술의 미래에 대한 비전은 기술의 발전으로 가능해진 기계장치만의 모습이 아니라, 그러한 장치들이 우리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사회적 실천, 가치, 제도에 뿌리내리고embedded 있는 모습, 그리고 장치들과 더불어 공진화하는 일상성의 조건 변화를 포함하는 기술사회적technosocial인 미래에 대한 비전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기술이 가능하게 만들 미래에 각 개인이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조직하고 심미적으로 향유하는 과정이 어떻게 변화될지를 물어야 하며, 거기에 내재된 심미성이나 규범적 가치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숙고하고 반성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기술사회적 미래를 규범적으로 상상하는 일은, 변화된 기술적 조건 속에서 우리 인간이 지구에 거주하는 방식, 즉 우리가 다른 인간뿐 아니라 지금까지 온전하게 인정받지 못했거나 혹은 새롭게 출현할 인간/비인간 주체들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를 상상하는 문제이며, 우리가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으며, 어디에 살며, 어떻게 이동하고 소비할지와 같은 삶의 습관을 바꾸는 문제와 연관된 일이다.

우리 삶의 태도나 습관을 관통하고 규제하는 도덕적 사고나 심미적 가치 지향의 변화는 여러 가능성의 조건에 달려 있다. 이는 단지 기술적 조건만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나 말, 사랑이나 우정, 연대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태도, 문학ㆍ음악ㆍ미술이 우리의 삶에서 차지하는 위치, 노동이나 여가, 부와 소비를 바라보는 관점을 포괄하는 삶의 양식 전체의 변화와 연관되어 있다. 기술적 미래에 대한 상상은 새로운 가치관과 실천적 지향을 통해 새로운 삶과 관계의 방식을 발명하는 문제이며, 그러한 관계의 방식에 따라 인간-생명-기술의 관계적 네트워크가 갖는 모습이 달라질 것이다. 이는 결국 좋은 삶good life이란 어떤 것이며, 인간이나 그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인문학의 오랜 물음과 맞닿아 있다.

포스트휴먼의 조건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규범적 지향은 어떤 것일까? 여러 가지 발상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공존과 열려있음(개방성)의 태도가 중요한 키워드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포스트휴먼의 사회는 인간과 동물, 기술적 존재들이 서로 얽혀 있으면서 함께 살아가고 공진화하는 기술-생태적 공간을 가리킨다. 생태적 사고가 우리에게 주는 통찰은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구성 요소들 사이에 일어나는 복잡한 상호작용의 중요성이다. 이는 윤리나 도덕을 분리된 개체의 단위가 아니라, 생태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개체 및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관계성 속에서 접근해야 함을 뜻한다. 그렇다면 포스트휴먼 시대의 윤리적 가치 지향에 대한 고민도 전체 시스템으로서의 기술-생태 공간을 중심으로 숙고 되어야 하며, 경쟁보다 공존과 협력의 가치에 대한 실천과 훈련(습관화)을 요구한다.

이와 함께 우리는 지구적 수준에서 인간이 져야 할 책무성accountability이 무엇인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플로리디의 의견을 따르자면, 우리 인간은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에코포이에틱ecopoietic한 책임을 지고 있는 호모포이에티쿠스homo poieticus여야 한다. 에코포이에시스ecopoiesis는 생태지향적인 관점에 입각하여 도덕적인 방식으로 환경을 구성하는 과정이며, 인간은 사용자나 소비자가 아니라 창조자·관리자·감독자로서, 실재reality를 보호하고 번성하도록 관리하는 데미우르고스의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공존을 위해 가장 필요한 태도 중 하나는 다름(차이)에 열려 있는 개방성이다. 포스트휴먼의 다양한 존재 양식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가정하고 있는 의미의 체계나 사고방식과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키며, 정상/비정상의 이분법을 통해 현상을 판단하도록 우리를 유혹할 것이다. 성차별, 노인차별, 동성애 혐오, 장애인 차별, 인종주의, 계급 차별과 같은 다양한 배제적 실천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넘어서야 할 현실적인 벽으로 남아 있다. 또한, ‘인간’을 정의하는 위계적 관점이라는 것이 쉽게 해소되거나 제거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름이란 이미 젠더, 인종, 민족, 사회, 개인의 차원을 관통하며 인간종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존중받아야 할 핵심 요소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앤디 미아Andy Miah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인간성humanity, 행위자성, 역사 등의 개념을 해체하고 부정하려는 허무주의적 시도라면, 포스트휴머니즘은 그것들에 대해서 그 자신의 방식으로 모종의 변형된 탈-인간중심주의적인 형태의 ‘대서사grand narratives’를 복원하려는 시도라고 규정한다. 그 서사의 중심은 인간 주체의 해체나 파괴가 아니라, 오히려 지금까지 인정받지 못했던 주체들의 풍부한 인정에 관한 것이다. 포스트휴먼의 윤리는 인간/비인간, 정신/신체, 자연/인공, 생명/기계의 이원적 구분이 산출하는 다양한 위계를 해체하고, 지금까지 배제되었던 여러 타자뿐 아니라, 앞으로 등장할 다양한 혼종적 존재들과 공존할 방식을 모색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나 용어로 낯선 존재들을 재단하고 새로운 위계를 산출하는 방식으로는 공존을 준비할 수 없다. 우리는 과거의 속박에서 자유로운, 새로운 도덕적 상상과 경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새로운 어휘나 언어를 필요로 한다. 인간-자연-기술 사이의 관계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재규정을 통하여 그러한 상상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 포스트휴머니즘의 담론의 주요한 이론적 목표이다. 브라이도티에 따르면, 포스트휴먼은 우리가 되고 있는we are becoming 종류의 주체에 관한 가설이다.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문제 삼으면서, 주체를 집합적으로 열려있고collectivity open, 복수적이며, 비위계적인 것으로 유지하려 노력하는 것이 바로 포스트휴머니즘의 실천적 지향이다.

신상규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인문과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