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휴머니즘의 시대?

최근 포스트휴머니즘이라는 생소한 개념이 대중매체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 배경에는 인공지능과 ‘실존적 위험’이라는 더 생소한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가 대부분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어, 그전까지는 ‘오직 인간만’ 할 수 있다고 여겨졌던 분야에 속속 진출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넥스트 렘브란트’ 인공지능은 렘브란트 화풍을 학습해서 렘브란트가 ‘그렸을 법한’ 그림을 만들어내고1, 인간은 오랜 기간 교육과 훈련을 거쳐야 이해할 수 있는 법률 문서나 경제 분석 보고서를 읽고 요약본을 만들어내는 인공지능까지 등장했다. 이 정도가 되면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이 남아있기나 할까 걱정될 정도이다.2

이런 걱정에 자주 이어지는 생각은 이러다가 인공지능이 너무 발전해서 SF영화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이나 <매트릭스>의 인공지능처럼 인간을 뛰어넘는 초지능을 발휘하여 인류를 종속하는 끔찍한 디스토피아의 가능성이다. 혹은 그 정도로 극적인 상황은 아니더라도 서류 클립을 만들라는 인간의 명령을 ‘글자그대로’ 해석해서 인류의 생존도 무시하고 무작정 서류 클립만 만들어서 지구를 서류 클립으로 뒤덮는 다소 황당한 시나리오도 있다. 이것이 ‘실존적 위험’ 상황이다. 핵심은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인공지능의 등장이 인류의 생존에 위험이 될 수 있기에 이에 미리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럼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어떠해야 하나? 우리도 슈퍼휴먼이 되어서 초지능 인공지능과 맞서야 할까?3

 

한편 최근 활발하게 진행 중인 노화 연구나 유전자 편집 기술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람들은 21세기야 말로 인간이 나이 들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단계에 진입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이 주장을 진심으로 열렬하게 믿고 있는 구글의 수석 엔지니어 커즈웨일은 이런 기술이 충분히 성숙되어 자신이 그 혜택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살아남기 위해서 수많은 비타민을 챙겨 먹으면서 건강관리에 힘을 쏟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인간의 능력을 강화해서 자연적인 인간을 뛰어넘으려는 트랜스휴머니즘 역시 대중의 관심을 크게 끌고 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대중매체를 통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준에서 포스트휴머니즘은 이처럼 초인공지능의 ‘실존적 위험’이나 영생을 보장하는 트랜스휴머니즘의 형태이다. 여기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런 것이다. 내가 왜 포스트휴머니즘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가? 특히 ‘실존적 위험’이 논리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가능성이긴 하지만 인공지능 개발 양상을 고려할 때 가까운 미래에 실현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하며, 동시에 인간이 영생을 얻는 기술적 가능성에 대해서도 아직 생명의 핵심원리에 대한 우리의 과학적 이해가 초보적이기에 실현가능성이 낮다고 본다면 더더욱 이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필자의 주장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글을 통해 왜 우리가 ‘실존적 위험’이나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한 개인적 판단과 무관하게 포스트휴머니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

일단 포스트휴머니즘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포스트휴머니즘은 ‘포스트’와 ‘휴머니즘’이 결합된 단어이다. 휴머니즘이 무엇인지는 잠시 후에 살펴보고 일단 ‘포스트post’부터 살펴보자. 접두사 ‘post’는 특정 시점이나 장소보다 뒤에 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post-election analysis’라는 표현은 선거가 끝난 후에 선거 결과에 대해 내리는 분석을 의미한다. 그런데 역사의 맥락에서 생각해 보면 특정 시대를 지배했던 사상에 뒤이어 나오는 사상이라면 대부분 앞선 사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그 사상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거나 적어도 일부를 수정하는 방식이 되기 쉽다. 예를 들어 포스트모너니즘은 모더니즘 혹은 근대성이 당연시했던 여러 가정에 대해 반기를 들고 등장한 문예사조이다.4

 

그러므로 포스트휴머니즘은 일단 역사적으로 휴머니즘 ‘이후에’ 등장한 사상적 조류이고 휴머니즘의 핵심 전제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거나 수정하거나 어떤 경우에는 폐기하고 대안을 모색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이렇게 개념적으로 정확하게 포스트휴머니즘을 이해하고 나면 포스트휴머니즘과 ‘실존적 위험’ 혹은 영원히 늙지 않는 삶은 본질적 관계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보다는 뛰어난 수행능력을 뽐내는 인공지능의 등장과 인간의 능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생명 공학적 가능성은 포스트휴머니즘의 주제에 접근하는 하나의 단서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단서가 시사하는 포스트휴머니즘의 전망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이런 단서가 구체적으로 왜 20세기 말, 21세기 초에 급속하게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했을까? 이에 대해 답하기 위해서는 앞서 미뤄두었던 휴머니즘에 대해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다.

 

 

휴머니즘 가치의 재검토

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수많은 사상가들이 나름의 답을 제시해 왔고 현재도 여러 경쟁하는 답을 들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간과되고 있는 두 가지 특징에 대해 주목해 보자.

우선 현재 시점에서 휴머니즘을 논하는 학자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인문학자들은 휴머니즘Humanism을 대개 인문주의人文主義로 번역한다. 인문이란 ‘인간이 만든 무늬’라는 뜻이다. 여기서 무늬는 인류가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해 이룩한 문화文化 혹은 문명文明을 의미한다. 결국 인문학자들은 휴머니즘이 인류가 이룩한 문화 및 문명의 유산의 의미를 깊이 연구하고 이를 향유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실제로 일부 인문학자들은 과거의 문화적 유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고전’을 깊게 탐구하는 것을 인문주의의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고까지 생각한다.5

이렇게 좁게 이해된 인문주의는 고전에 담긴 ‘지혜’를 탐색하고 향유한다는 의의를 지니고 있으나, 현재 우리가 당면한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거나 바람직한 미래를 설계해 나가는 데는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수동적이다. 이렇게 평가하는 것은 결코 ‘수동적 인문주의’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가 오랜 기간 축적한 문화유산을 탐구하고 향유하는 것은 일부 인문학자들만이 아니라 전체 인류가 누려야 할 중요한 인류 공통의 자산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극적 인문주의는 분명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한다.

하지만 수동적 인문주의가 적어도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과정에서는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역사가 늘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니지만 거시적 규모에서 볼 때 현재 인류는 인문주의자들이 그토록 찬양하는 플라톤의 고대 그리스나 공자의 중국 춘추전국시대보다 삶의 질이나 사회적 정의로움에 있어 분명 진보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시기에는 당연시되었던 노예를 비롯한 각종 차별은 적어도 현재는 규범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데 모두 동의한다. 물질적 풍요로움이 사회 전체에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지, 그리고 의료, 교육 등의 복지 수준이 얼마나 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는지 비교해 보더라도 현재 시대가 갖는 비교우위는 확실해 보인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현대가 모든 면에서 과거의 어떤 시기보다 좋다는 팽글로스적 낙관주의를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6 현대는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며 그 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하지 않으면 미래에 우리는 더욱더 큰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다.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현대를 보다 나은 사회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고전 읽기’만을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소극적 인문주의는 자칫 과거를 우상화하고 현재 우리의 당면 문제를 그에 맞지 않는 낡은 개념으로 대응하려는 복고주의적 낭만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한편 사회과학자들은 휴머니즘을 인간 존엄성이나 인권 개념과 긴밀하게 연결시킨다. 그들에게 휴머니즘의 실현 여부는 모든 인간이 갖는 인권을 어떻게 제도적, 실질적으로 보장할 것인지에 의해 결정된다. 이런 의미에서 휴머니즘은 종종 인본주의人本主義로 번역된다. 인권 개념, 특히 모든 인간이 태어남과 동시에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갖는다는 생각은 서구에서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등장했다.

인권 개념이 역사적으로 특정 시점에 등장하여 점차 보편적으로 수용되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휴머니즘에 대해 갖는 보편적 직관과 달리 휴머니즘이 역사를 거치며 변화해 왔음을 잘 보여준다. 물론 고대 그리스 철학이 처음에는 자연철학에서 시작했다가 소피스트나 소크라테스 시절에 인간과 사회로 철학적 관심을 이동했던 것을 ‘인본주의’의 시초로 보는 입장도 있다. 하지만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노예였고 여성은 하급 인간 취급을 받았던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인권 개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인권 개념은 인류가 보다 보편적인 도덕적 기준을 마련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제도화 시키는 과정에서 고대 휴머니즘에 없던 생각을 만들어내고 발전시킨 결과물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본주의의 ‘싹’은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르네상스 인문주의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인간의 존엄성이 다른 모든 가치를 압도한다는 인간중심주의적 생각은 근대를 거치면서 비로소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인권 개념이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근대의 산물이라는 점에 주목하다면 휴머니즘의 다른 특징, 즉 역사적 변화가능성을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각 시대마다 휴머니즘을 말할 때 추구하는 지향점이나 자명하다고 간주된 전제가 조금씩 달랐다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기에 휴머니즘은 표준국어대사전의 인문주의 정의에서도 나와 있듯이 “서양의 문예 부흥기에 이탈리아에서 발생하여 유럽에 널리 퍼진 정신 운동.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신 중심의 세계관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그리스ㆍ로마의 고전 문화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인간의 존엄성 회복과 문화적 교양의 발전에 노력하였다.”를 의미했다. 하지만 이 시기를 지나고 근대에서 인권 개념이 강조되면서 휴머니즘은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고 인권을 보편적으로 보장하려는 다양한 노력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정판이 1948년 국제연합 총회에서 통과된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이다. 이 선언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인권이라고 할 때 떠올리는 언론의 자유, 양심의 자유 같은 정치적 권리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단결권, 교육 받을 권리,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와 같은 경제적, 문화적 권리까지 포괄하고 있다. 이런 권리 개념은 고대 그리스 사회까지 가지 않더라도 프랑스 혁명 시기에 천부인권을 주장했던 사람들도 ‘권리’라고 생각하기 어려웠을 권리이다. 다르게 말하면,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온 권리운동가들의 많은 노력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권리 개념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실질적인 권리 실현을 위해 국가에 권리 보장의 의무를 지워야한다는 생각을 보편적으로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정리하자면 휴머니즘의 여러 가치나 전제들은 인류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방식으로 조금씩 변화되어 왔으며 그 변화 과정은 지구의 자기장 축이 조금씩 바뀌듯이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적극적인 노력과 사회운동을 통해 의식적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다. 이처럼 휴머니즘의 역사는 지극히 인간적인 방식으로 변화되어 왔던 것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의 오랜 역사

앞서 포스트휴머니즘은 휴머니즘의 기본 전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미래사회에 적합한 휴머니즘을 탐색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포스트휴머니즘은 과거 고전읽기에 머무는 소극적 인문주의가 아니라 실천적, 적극적 인문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앞 절에서 논의한 것을 이에 더해 보면 흥미로운 시사점을 도출할 수 있다.

만약 휴머니즘이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고대에서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여 새롭게 규정되었다면, 포스트휴머니즘은 휴머니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일탈적 주장이 아니라 지극히 표준적인 휴머니즘의 21세기 버전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휴머니즘의 실천자들이 항상 그래왔듯이 포스트휴머니즘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21세기 맥락에서 새롭게 제기된 여러 쟁점, 특히 인간 수준의 수행능력을 보이지만 인간과 달리 의식적 자각 능력이 없는 인공지능의 등장이 제기한 여러 쟁점을 포용하는 방식으로 포스트휴머니즘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포스트휴머니즘은 휴머니즘의 부정이라기보다는 21세기에 가장 적합한 휴머니즘의 새로운 형태인 셈이다.

그런데 실은 인류의 역사에서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공지능이나 로봇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가 시작된 20세기가 아니라 인류가 문명을 이룩한 몇만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왜 그럴까? 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을 거시사의 시각에서 바라보자.

인류가 수렵채집 생활을 벗어나서 정착 생활을 하고, 농업을 시작하고 가축을 기르고, 국가를 만들기 시작한 2만년 전의 상황에 대해 현재 우리는 상당한 정확도로 추측해볼 수 있다.7 이 시기에 우리 조상들에게는 인간과 자연의 구별이 지금처럼 분명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최근 연구에 따르면 우리에게 친숙한 개, 닭, 소, 말 등이 야생동물에서 가축으로 길들여지는 과정과 밀, 옥수수, 쌀 등의 ‘풀’이 작물로 길들여지는 과정은 목적성을 갖고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상당한 기간 동안 여러 요인의 영향을 받으며 느리게 진행되었다.8

 

하나의 사례를 살펴보면, 혹독한 빙하기에 늑대들은 인간 집단을 따라다니면 인간이 남긴 음식을 얻을 수 있어서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 과정에서 인간도 늑대가 사냥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을 잡아먹을 수도 있는 위험한 늑대에서 인간의 ‘가장 좋은 친구’인 개가 되는 과정은 오랜 기간에 걸쳐 늑대와 인간 모두에게 정체성 변화를 요구했다. 이 과정은 생물학적 종 변화만이 아니라 인간과 대비되는 야생에서 인간의 문화권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의미했고, 늑대만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도 함께 변화했다. 결국 인간은 자신들이 야생 동식물을 길들이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도 함께 길들이는 방식으로 인간을 재규정했던 것이다.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끊임없이 조금씩 다시 만들어 가면서 선사시대 인류는 현대 인류로 변화해 왔던 것이다.

핵심은 이것이다. 인간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인간이 아닌 다른 것들(정령이나, 영혼이나, 야생의 동물이나 길들여진 동물)과 함께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그 경계를 새롭게 나누고 이에 적응하며 살아왔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존과 안락한 삶을 위해서는 인간과의 협력만이 아니라 ‘인간이 아닌 존재자’들과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의 경계를 끊임없이 탐색하고 둘 사이의 관계를 끊임없이 재설정해왔다는 의미에서 인간은 원래 포스트휴머니즘을 실천해 왔던 것이다. 모든 생명체에 (어떤 경우에는 돌과 같은 무생물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애니미즘이나 생명체와 무생물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고 그 차이는 ‘생기vis viva’의 유무에 의해 결정된다는 생기론, 그리고 20세기 이후 과학계의 정설로 자리 잡은 물질주의materialism는 모두 이런 포스트휴먼적 물음에 대한 답으로 제시되고 수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적극적 휴머니즘으로 이해된 포스트휴머니즘은 인류에게는 매우 친숙하고 오래된 삶의 방식이었다.

 

 

21세기 과학기술 기반사회에서의 포스트휴머니즘

그럼 구체적으로 현재 시점에서 포스트휴머니즘의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답은 의외로 일상적인 수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여러분이 넷플릭스의 콘텐츠 추천 시스템을 이용할 때 어떤 느낌이 드는가? 스스로 어떤 영화를 볼지 고르는 과정에서 참고만 하고 있다고 느끼는가, 아니면 나보다 내 마음을 더 잘 아는 인공지능에게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되는가? 가끔씩 기가 막힐 정도로 내 취향에 잘 맞는 숨은 보석을 골라주는 추천 알고리즘은 신고 다니는 신발처럼 ‘단순한’ 도구인가 아니면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처럼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존재인가? 그렇게 마음을 잘 헤아리던 추천 알고리즘이 너무도 터무니없는 작품을 추천해서 시간을 허비하고 나서는 역시 기계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어차피 내가 신뢰하던 전문 영화 평론가도 내 취향과는 다른 영화를 추천한 경우가 있으니 별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모든 문제에 대해 개인적 수준에서 어떻게 대답하고 그 대답이 여러분의 삶을 어떤 식으로 규정하는지가 모두 포스트휴머니즘적 주제이다. 더 나아가 사회적 수준에서 인공지능 기반 추천 알고리즘에 어떤 법적 규제를 적용할 것인지, 미성년자의 스마트폰 사용에 어떤 제한을 가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 역시 포스트휴머니즘적 주제이다. 왜냐하면 이들 모두는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나누고 인간이 아닌 것에 적용되는 문화적 규범과 사회적 제도를 어떻게 설계하는 것이 바람직한지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물음에 개인적, 사회적으로 답함으로써 우리는 프랑스 철학자 라투르가 ‘자연의 정치학’이라 부르는 작업을 수행하게 된다. 다소 추상적으로 보이는 이 개념이 현재 우리 맥락에서 절실한 이유는 최근 진행 중인 자율자동차의 법적 책임 분배 문제나 개인정보의 상업적 이용에 대한 법적 규제 논의 모두 정확히 ‘자연의 정치학’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인간처럼 신념이나 가치판단에 입각해 행동한다는 의미에서 자율적이지는 않지만, 자율주행차는 분명 실시간 수집되는 정보에 입각해서 일일이 탑승자에게 물어보지 않고 최적화된 결정을 수행한다는 의미에서 자율적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온라인 공간에 남기는 데이터 흔적들은 결코 인간이 아니지만 우리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기에 인권과 유사한 (하지만 결코 동등하지는 않는) 방식으로 보호될 필요가 있다.

이런 우리 시대의 포스트휴머니즘 문제에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제시하기는 매우 어렵다. 또한 어떤 해결책이 정말로 좋은 해결책인지를 두고 논쟁의 여지도 많다. 결국 이 문제들은 역사적으로 포스트휴머니즘적 문제가 해결되어 왔던 방식, 즉 휴머니즘을 수동적이 아니라 적극적인 방식으로 실천하는 방식으로 해결될 것이다. 우리에게 포스트휴머니즘적 태도가 시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참고문헌

  1. 이상욱 2020, 「인공지능과 ‘실존적 위험’ - 비판적 검토」, 『인간연구』 , 40: 77-107.
  2. Greenblatt, Stephen 2012, The Swerve: How the World Became Modern, New York: W.W. Norton.
  3. Latour, Bruno 2004, The Politics of Nature,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4. Roberts, Alice 2018, Tamed: 10 Species the Changed Our World, New York: Cornerstone
  5. Scott, James C. 2018, Against the Grain: The Deep History of the Earliest States, Ithaca, NJ: Yale University Press.
이상욱
HORIZON 편집위원, 한양대학교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