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2일 한국도핑방지위원회(KADAKorea Anti-Doping Agency)는 부산 벡스코에서 ‘2022 세계 도핑방지의 날’ 기념식을 개최했다. KADA는 이 같은 반도핑anti-doping 캠페인 외에도 식품의약품안전처와 함께 ‘도핑 약물들’을 유통하거나 판매하는 일들을 단속하고 약물 구매 선수들을 조사하여 출전 제한 등의 징계를 벌이는 등 말 그대로 ‘도핑과의 전쟁’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모든 전쟁들이 그렇듯이 ‘도핑과의 전쟁’ 역시 정당화가 필요하다. 왜 도핑과 전쟁을 벌여야 하는가? 도핑은 왜 나쁜 것인가? 이에 대한 가장 단순한 대답은 도핑이 스포츠 경기 규칙에 따라 불법으로 정의되었기 때문에 도핑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설명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도핑이 불법화 되었는가? 도핑이라는 행위가 옳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한다면 순환논법에 빠지게 될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왜 도핑이 합법화 될 수 없는지에 대한 정당한 답을 제안해야 한다. 한국도핑방지위원회의 상위 기구인 세계반도핑기구(WADAWorld Anti-Doping Agency)는 ‘공정한 경기fair play‘를 위해 도핑을 불법으로 정의하고 규제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1

그런데 도핑을 막는 것만으로 공정한 경기가 보장되는가? 극단적으로 말해 미국 사이클 선수 랜스 암스트롱Lance Amstrong처럼 도핑 검사를 성공적으로 회피해 온 선수들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도핑을 전면적으로 허용하는 게 보다 공정하지 않을까? 얼핏 보기에 단순해 보이는 도핑의 윤리적 문제는 지난 수십 년간 스포츠 철학자들과 윤리학자들로 하여금 수없이 입씨름을 벌이게 만든 난제이다. 특히 유전자 도핑을 비롯한 새로운 유전학과 향상 기술enhancement technologies의 등장은 도핑 규제의 필요성에 대한 논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이 글은 반도핑 규제의 중요한 기반이 되는 도핑 윤리에 관한 철학적 논쟁들을 개괄하고, 현대 생명 과학의 개념과 논의들이 논쟁에 연루되는 방식을 살핀다. 이를 통해 이 글은 도핑 규제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입장 모두 도핑 약물 사용을 스포츠의 공정성 문제와 연결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전학적 용어들과 유전자 변형 기술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전망들을 적극적으로 채용하고 있음을 보인다. 이런 분석을 바탕으로 필자는 윤리학자들이 도핑 윤리를 두고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유전학 공동체 내부에서는 오래 전에 기각된 환원론적 유전자 개념과 문제적인 기술결정론을 반복하고 있음을 지적할 것이다.

 

 

도핑에 대한 두 대립적인 입장과 공정성의 문제

스포츠 윤리의 권위자이자 반도핑 정책의 철학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인 토머스 머레이Thomas H. Murray는 스포츠 철학자들의 도핑 규제에 관한 입장들을 친도핑론pro-doping, 반도핑론anti-doping, 반-반도핑론anti-anti-doping으로 구별한다.[1] 여기서 반도핑론은 도핑이 윤리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규제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며, WADA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작금의 반도핑 정책을 지지한다. 친도핑론과 반-반도핑론은 모두 현행 반도핑 정책에는 반대하되 도핑 자체에 대해서는 다소 다른 입장을 취한다. 친도핑론자들은 도핑 자체가 비도덕적이지 않고, 이에 대한 어떠한 규제도 없이 자유롭게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달리 반-반도핑론자들은 도핑의 윤리성 문제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하거나 무지주의적인agnostic 입장을 취한다. 대신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반도핑 정책의 당위성이 부족하며, 득보다는 실이 많으므로 규제를 완화 내지는 개정하거나 극단적인 경우 전면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친도핑론과 반-반도핑론의 경계는 흐릿한 경우가 많다. 특히 친도핑론자들이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도핑의 부분적 허용론으로 입장을 선회하면서 반-반도핑론과 유사한 관점을 취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들은 어떤 형태로든 스포츠 시합의 공정성fairness의 문제를 끌고 와 각자의 주장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한다.2 반도핑론자들이 도핑 규제를 주장하는 전통적인 논변 가운데 하나는 ‘공정한 경기’ 수행을 위해서는 각각의 선수들이 자신들의 역량을 발휘할 공평한 기회fair opportunity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친도핑론자들은 선수들 사이의 사회적, 경제적 불공평이나 선수들 사이의 도핑의 접근성의 차이를 고려하면 도핑을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것이 공평한 경쟁의 장a level playing field을 만드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반-반도핑론자들은 반도핑 정책이 일부 선수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공정한 경기의 가능성을 막으므로 반도핑 정책을 수정 내지 철회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공정성 이슈를 제기하는 데에는 다양한 유전학적 개념들과 기술과학적 발전의 미래에 대한 전망이 동원된다. 우선 친도핑론과 반-반도핑론을 하나의 입장으로 묶어 이들이 ‘공정한 경기’ 논의에 기초한 도핑 규제에 어떠한 근거들을 들어 반대하고, 이 과정에서 유전학을 어떠한 방식으로 활용하는지를 살펴보자.

 

 

친도핑론 I: 유전적 불평등의 해소

전통적으로 친도핑론자들은 ‘자연적인’ 재능 및 훈련과 ‘인공적인’ 약물 사용이라는 이분법적 구획이 불분명하다고 지적하며 도핑 규제의 유효성을 문제 삼아 왔다. 일례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도핑과의 전쟁’을 본격화하던 20세기 중후반의 고전적인 문제제기는 다음과 같다. 인공적인 약물을 체내에 ‘자연적으로’ 존재하지 않거나 생산되지 않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본인의 피를 보관해 두었다가 수혈하는 혈액 도핑이나 아드레날린을 주입하는 행위, 테스토스테론이나 여타 호르몬들을 보충하는 도핑 행위들은 엄격한 의미에서 체내에 존재하는 물질들을 재주입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리고 이런 약물들과 우리가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던) 운동 수행 능력 향상에 끼치지만 일상적으로 섭취하는 다른 물질들, 예를 들어 식품이나 비타민 및 기타 건강 보조제들을 분명하게 구별할만한 준거들이 존재하는가?[2]

한편, 1990~2000년대 동안 유전자 치료 분야가 등장하고 인간의 유전체 염기서열을 해독하는 인간유전체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가 추진되면서 여러 반도핑 정책 입안자들과 스포츠 윤리학자들이 유전자 도핑을 문제 삼게 되었다. 이 같은 맥락에서 WADA는 2004년에 유전자 도핑 전문가 그룹Expert Group on gene doping을 구성해 일부 선수들이 유전자 변형을 통해 도핑을 저지를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하기도 했다. 이처럼 유전자 도핑에 관한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점차 많은 스포츠 윤리학자들이 관련 사례들뿐만 아니라 유전학적 용어들을 활용해 도핑 규제에 관한 철학적 논변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친도핑론자로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철학자는 옥스퍼드 대학의 줄리언 사불레스쿠Julian Savulescu이다. 사불레스쿠와 동료들은 유전자 변형과 전통적인 약물 도핑을 포함한 생물학적인 조작을 스포츠 경기를 ‘유전적 제비뽑기genetic lottery‘ 놀음으로 끝나지 않게 하는 인간의 창조적인 행위이자 전략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불레스쿠 팀은 유전적 제비뽑기의 사례로 특정한 안지오텐신전환효소(ACE) 유전자 다형성이 근지구력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는 과학적 발견을 인용한다. 핀란드의 스키 메달리스트 에로 맨튀란타Eero Mäntyranta는 실제로 이 유전자 덕분에 일반인보다 훨씬 많은 적혈구를 갖고 있었다. 이처럼 ‘자연스럽게’, 유전자 추첨에 따라 ‘우연히’ 얻게 된 이득만을 허용해주는 것이 과연 공정한 경기를 보장하는 것일까? 사불레스쿠와 동료들은 도핑을 전면적으로 허용하는 일이 ‘유전적 불평등genetic inequality‘을 해소하고 선수들이 평등한 출발선에 설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사불레스쿠 그룹은 현재 도핑 약물로 규정된 약물들의 섭취를 대체할 다양한 기술들이 존재하고 또 개발되고 있으며, 개별 선수의 부와 계급에 따라 달라지는 기술들의 접근 가능성을 고려하면 도핑 규제의 공정성 논변은 무력화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현재 적혈구생성인자 혹은 에리스로포이에틴(EPO)은 사용이 금지되어 있지만, 저압실hypobaric chamber과 같은 시설들은 허용되고 있다. 그러나 저압실은 일반적으로 개별 선수들, 특히 개발도상국의 선수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고가의 장비로, 오직 부유한 나라의 소수의 엘리트 선수들만 이용가능한 시설들이다. 이 저압실의 접근권이 사회경제적인 이유로 제한된다면, 이를 도핑과 같은 수준으로 규제하지 않는 현실은 불공정하지 않은가? 사회경제적 차이로 발생할 훈련에서의 불평등을 고려한다면 심지어 한 달에 미국 달러로 122불에 불과한 EPO를 전면적으로 허용하는 것이 더 공정한 정책일지도 모른다.[3]

최근에 사불레스쿠 그룹은 도핑 규제를 완전히 철폐하자는 급진적인 주장을 완화하여 선수 건강에 심각한 피해를 끼치지 않는 도핑 약물들은 허용하고 도핑 규제의 방식을 전환하자는 반-반도핑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런 완화된 입장에서도 유전자 도핑은 중요한 사례이다. 이들은 최근 인슐린 유사 성장 인자(IGF)를 실험용 생쥐의 근육에 투여해 근성장을 일으킨 실험을 인용하면서 이런 동물실험 결과를 고려하면 선수들이 경기력 향상을 위해 유사한 시도들, 즉 유전자 도핑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지적한다.

문제는 유전자 도핑은 현행 도핑 검사 방식으로는 검출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어떠한 방식으로 도핑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단순히 도핑 검사 가짓수나 방법을 늘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사불레스쿠 팀이 보기에 보다 합리적인 해결책은 안전하고 스포츠 정신을 위배하지 않는 약물들은 허용하되, 이를 관리하기 위해 대안적인 검사 방식을 도입하는 것이다. 사불레스쿠 그룹은 스포츠 정신을 위배하는 사례로 자전거 경주에 참여하는 선수가 오토바이를 타고 온다거나 수영 경기에 오리발을 끼고 나타나는 일을 든다. 사불레스쿠 팀은 만약에 EPO가 (지구력 운동 능력 향상에 기여하는) 카페인만큼이나 안전한 정도로 사용될 수 있고, 그것이 오토바이만큼 스포츠 정신을 위배하지 않는다면, 자전거 경주에서 사용가능한 물질로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신에 선수들이 스스로의 생명에 위협을 가할 정도로 EPO를 사용하거나 기타 유전자 도핑을 저지르는 일을 막기 위해 모든 자전거 경기 참여 선수들에게 적혈구용적률 검사haematocrit tests를 실시하여 적혈구증가증 발생을 우려할만큼 높은 수치를 보이는 선수들의 시합 참여를 배제시키는 등 선수의 건강 보호를 중심으로 도핑 규제 방식을 재편하자고 제안한다.[4]

 

 

친도핑론 II: 트랜스휴먼 사회의 전망

이처럼 유전적 불평등에 대한 해소 방안으로 친도핑론이 제시되는 한편, 유전자 변형 기술 때문에 도핑을 규제하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주장 또한 제기되었다. 유전자 변형이 일상화되는 트랜스휴먼transhuman 미래를 전망하며 스포츠계의 도핑에 대한 인식 변화를 촉구하는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영국 샐퍼드 대학교의 윤리학자 앤디 미야Andy Miah이다. 사불레스쿠와 같이 미야 역시 초기에는 친도핑론자였으나 최근에는 반-반도핑론자로 입장을 선회해 유전자 도핑은 허용하되 일반적인 대사 작용에 부합하지 않는 합성 약물들을 이용하는 도핑 행위는 규제하자고 말한다. 한편 이런 입장 전환에도 불구하고 그는 트랜스휴머니즘을 일관되게 지지하며 트랜스휴먼 미래를 반도핑 정책 입안자들이 이해하고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야는 오늘날 생의학 분야에서 유전자 치료와 유전체 의학의 발전으로 의료계의 전통적인 관점, 치료와 향상의 구별이 점차 무의미해지고 있다고 본다. 인간유전체 프로젝트 이후 출현한 유전체 의학은 건강에 관한 새로운 비치료적 정의를 제공한다. 이제 의학은 단순히 환자들을 치료하는 일, 즉 ‘수리’, ‘복원’, ‘유지’의 관점 대신에 유전자 변형을 포함한 다양한 향상 기술들을 활용해 더 건강한 인구 집단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된다.

미야는 건강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생물학적 한계를 초월하여 건강하게 장수하는 삶을 이루려는 인류의 오랜 욕망에 잘 부합한다고 본다. 그는 생물학적, 문화적 진화 과정에서 성취한 지적 발견들을 통해 얻어진 기술적 수단들을 통해 인간 종을 재창조하려는 트랜스휴먼주의적 노력들이 근시일 내에 일반화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경기 능력을 향상시키는 런닝화나 수영복 등은 도입 초기에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지만 점진적으로 수용되며 오늘날에는 더 이상 ‘향상 기술’로 여겨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유전자 변형 기술들이 안정화되고 일반화된 트랜스휴먼 사회에서는 이를 통한 운동 능력 향상이 일상으로 여겨질 것이라는 게 미야의 진단이다. 오히려 유전자 맞춤 아기가 허용된 미래에서는 유전자 도핑을 불법으로 간주하는 현행 도핑 규제가 이런 유전적으로 변형된 선수들을 ‘차별’한다고 비판받을지도 모른다. 이 같은 관점에서 그는 인간 향상을 위한 더 안전한 방식들을 찾기 위해 생의학 분야에 막대한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 반도핑 정책 입안자들이 유전자 도핑에 대해 허용적인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결론 내린다.[5]

 

 

반도핑론: 가치 논변과 생물학적 논변을 결합하기

반도핑론자들은 이런 공격들에 어떻게 대응할까? 앞서 소개한 토머스 머레이와 그와 마찬가지로 WADA의 윤리 패널에서 활발히 활동한 스포츠 윤리학자 지그문트 롤런드Sigmund Loland의 논변을 친도핑론자들의 주장에 대항하여 WADA의 반도핑 규약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사례로 살펴볼 수 있다. 머레이와 롤런드는 친도핑론자들이 종종 불공정함과 불평등함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옳지 않다고 본다. 이들은 정치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의 기회균등의 원칙fair equality of opportunity에 기초해 모든 선수들이 동등한 출발선에서 스포츠 시합을 준비하기 위해 노력하고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것만 보장해야지 굳이 모든 불평등을 해소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머레이는 특히 도핑이 불공정하다는 판단은 우리가 도핑을 금지하는 규칙을 제정한 뒤에야 내릴 수 있는 것이기에 공정성 논의로는 어떤 도핑 약물을 금지하거나 허용할지, 그리고 왜 도핑이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고 본다. 머레이는 이보다는 스포츠의 가치와 의미와 관련해서 도핑 규제의 필요성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머레이는 친도핑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스포츠계가 경기 능력 향상과 관련된 다양한 기술들을 수용해 왔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결코 경기를 쉽게 만드는 기술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국제수영연맹은 2008~9년에 수많은 기록 경신을 낳은 전신수영복 사용을 금지시켰다. 오늘날에는 기술 도핑technology doping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다양한 스포츠 경기에서 여러 기술들이 도핑과 유사한 것으로 여겨지며 금지되어 왔다. 이렇게 시합을 너무 쉽게 만들어버리는 기술들을 금지시키는 이유는 분명하다. 해당 기술들이 시합에 참여하는 선수들의 자연적 재능natural talents과 이를 구현하기 위해 도덕적으로 추구되는 인내와 헌신이라는 스포츠의 가치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머레이의 반도핑 논변은 스포츠의 핵심 가치가 개별 선수들의 자연적 재능과 이를 경기에서 발휘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인 노력과 준비를 존중하는 데 있다고 본다. 비록 친도핑론자들이 끊임없이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일이 어렵다고 지적해왔지만, 머레이는 구별의 어려움이 구별의 무용함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머레이의 관점에서 사불레스쿠 그룹의 친도핑 논변은 어떻게 논박될까? 머레이는 사불레스쿠 그룹이 말한 것처럼 에로 맨튀란타가 ACE 유전자 변이라는 지구력 시합에서 유리한 자연적 재능을 가진 것은 맞지만, 동시에 맨튀란타가 이를 발휘하기 위해 엄청난 시간 동안 훈련에 헌신했다는 사실 또한 지적한다. 그리고 도핑으로 유전적 제비뽑기를 만회할 수 있도록 도핑을 전면적으로 허용하자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근거가 박약하다는 점 또한 언급한다. 도핑 약물이 선수들 간의 다른 자연적 재능으로 발생한 차이를 메울 만큼의 효능만을 갖는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기에 별다른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머레이가 보기에 도핑은 그것이 인공적인 것이라거나 불공정함을 야기해서가 아니라, 스포츠의 핵심 가치인 자연적 재능을 발휘하기 위한 노력과 무관할뿐만 아니라 이런 가치를 위배하기 때문에 문제이며 금지되어야 한다.[6]

롤런드의 견해는 대체로 머레이의 주장과 궤를 같이한다. 그는 다만 머레이가 언급한 “자연적 재능”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모색하고, 이를 통해 도핑의 공정성 문제에도 답하려고 한다. 머레이와 마찬가지로 롤런드 역시 시합 참여와 경기 능력 발휘에 관한 기회균등의 원칙만 보장되면 되지 선수들 간의 다른 종류의 차이들을 완전히 없애 모두가 동일한 조건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선수들 간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특정 훈련의 접근성의 차이 등이 외적 불평등을 야기할 수는 있지만, 이들은 시합 규칙을 통해 조정되고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지 도핑의 허용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롤런드에게 스포츠의 주요 가치는 자연적 재능을 발휘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렇다면 이 자연적 재능이란 무엇인가? 바로 스포츠 경기에 필요한 수행능력과 관련된 표현형들로 발현될 수 있는 유전적 성향(유전적 소인)이다. 비록 유전적 성향들을 발달시키기 위해 선수들은 유전자-환경 상호작용을 수행해야 하고, 이 과정은 꽤나 복잡하지만, 롤런드는 이 둘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다고 말한다. 환경적 영향은 사회문화적, 경제적 조건들에 영향을 받기에 우연적이지만 동시에 선수들이 자신들의 훈련에 헌신하는 활동도 포함하기 때문에 보통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다. 반면 유전적 성향은 문자 그대로 타고난 자연적 재능이다. 이런 설명에 기초해 롤런드는 운동 수행능력을 유전적 성향이라는 자연적 재능을 스포츠의 덕virtue에 맞게 발달시킨 결과로 정의한다. 롤런드는 선수를 인간의 탁월성의 도덕적 추구를 구현하는 자유로우면서도 책임있는 도덕 주체로 정의하고, 훈련이 바로 유전적 성향을 구현할 수 있게 하는, 도덕적인 방식으로 성장을 추구하는 활동이라고 본다.

여기서 롤런드는 그의 스포츠 윤리론을 위해 더 많은 생물학적 설명들을 끌고 들어온다. 스포츠 훈련과 도핑 약물을 복용하는 일은 모두 인공적인 활동이지만, 전자는 기본적으로 인간 종의 진화의 특수한 결과로 만들어진 표현형적 가소성phenotypic plasticity, 혹은 인간의 내재적인 적응성adaptability을 자극하여 발전시키는 활동으로 앞서 언급한 운동 수행능력의 정의에 잘 부합한다. 이와 달리 도핑은 이 같은 유전적 성향을 발달시키기 위해 생물학적 적응성을 자극하는 일과는 무관하다. 사이클 선수들이 지구력 훈련을 위해 저압실에서 훈련하는 것은 비록 시설 접근권과 같은 외적 불평등의 문제가 걸려있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적응성을 자극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정당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EPO를 투여하는 혈액 도핑은 이런 정상적인 메커니즘과 무관하게 적혈구 생산을 증가시키는 이득을 얻는 것이므로 선수들이 도덕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자연적 재능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저해하는, 비난받을만한 인공적인 향상 시도일 뿐만 아니라 공정한 경기를 막는 불공정한 행위이다.[7]

 

 

도핑 윤리 논쟁의 유전자 환원주의와 기술결정론적 세계관

친도핑론자들과 반도핑론자들의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이 논쟁이 본격화된 2000년대 초반과 오늘날의 차이가 있다면 아마 논쟁의 배경을 이루는 현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WADA 중심의 반도핑 정책이 막 출현하던 당시 일부 친도핑론자들이 전망하던 것과 달리 반도핑 규제는 오늘날 더욱 확고해졌다. WADA와 산하 국가 기구인 미국 반도핑기구(USADA) 및 KADA 등이 끊임없이 반도핑 캠페인을 벌인 결과 이제 많은 선수들이 도핑이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친도핑론과 반도핑론 가운데 무엇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 등에 대한 논의는 유보하고,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살펴보는 관점에서 두 입장 모두에서 발견되는 문제적인 가정들을 지적하면서 글을 마무리 지어볼까 한다.

앞서 확인한 것처럼 도핑 규제에 관한 두 입장 모두 철학적 논변을 전개하면서 유전자를 비롯한 유전학적 용어들을 적극적으로 채용한다. 그런데 이들이 유전학을 논의하는 방식은 인간유전체프로젝트 이후 점차 틀린 것이 분명해진 환원론적인 유전자 개념에 기초한 것들이다. 예를 들어 친도핑론을 지지하는 사브레스쿠 팀은 ACE 유전자가 적혈구 대량 생성의 유일한 원인인 것처럼 서술하고, 특정한 운동 수행능력 발현과 관련된 유전자 부위들이 존재하며, 이를 조작하는 유전자 도핑이 어렵지 않다고 믿는다. 반도핑론자인 롤런드도 자연적 재능을 유전적 소인과 동일시하는 데, 이는 모든 형질이 이미 우리의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다는 환원론적인 설명을 전제한다.

오늘날 유전학자들은 특정한 유전자(보통 특정한 부호화된 DNA 서열 부위)가 특정 질환이나 형질에 일대일로 대응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자 발생 생물학molecular developmental biology은 특정 유전자가 손실될 경우에도 대안적 경로를 통해 이룰 벌충할만한 발생 과정이 진행되며, 유전자들이 발생과 관련된 여러 세포적 과정에서 다른 기능을 맡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후성유전학epigenetics은 DNA 염기서열의 변화 없이도 행동과 환경이 유전자 발현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유전자에 대한 이해를 대폭 수정하게 만들었다. 이런 새로운 유전학들에 따르면 DNA 서열 부위들은 유기체의 발생적 환경과 대사작용적 환경에 대응하여 동원되는 자원 중에 하나이지, 윤리학자들이 가정하는 것처럼 특정 표현형에 대응하는 청사진이 아니다.[8] 이미 2010년대 초에 일부 생명윤리학자들은 유전자 도핑에 관한 스포츠 윤리학자들의 논의가 유전자 환원주의적 이해에 기초해 있음을 지적했다.[9] 그러나 이런 정당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도핑의 윤리학에 관한 논의들 역시 동일한 환원론적 이해를 고수하고 있다.

환원론적인 유전자 개념만큼이나 스포츠 윤리학자들의 논변에서 발견되는 문제적인 것은 기술결정론적 사고이다. 트랜스휴머니스트 미야에게서 기술결정론적 경향이 가장 분명하게 보인다. 유전자 도핑에 대한 우려가 막 시작되던 2000년대 초반에 그는 인류가 기술적 혁신을 통해 생물학적, 문화적 진화를 거듭해 왔으며, 그렇기에 트랜스휴머니즘은 인류의 본성적 욕망이고, 이런 욕망의 구현 과정에서 유전자 변형 기술이라는 신기술이 일반화되어 트랜스휴먼 사회가 곧 도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그의 진단 이후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 트랜스휴머니즘은 여전히 주변부적인 사고에 불과하고, 유전자 변형 기술을 생의학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는 점차 더 복잡하고 강력한 규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탐구하는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STS 연구자들은 신기술의 등장이나 기술 혁신이 기존의 사회정치적 맥락과 이미 확립된 기술적 인프라들, 간단히 말해 사회기술 시스템socio-technical system을 토대 삼아 일어나는 것이며, 새롭고 혁신적인 기술들이 자리 잡기 위해서는 이런 사회기술 시스템이 대대적으로 조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였다.[10] 새로운 종류의 향상 기술이 도핑 수단으로 출현하는 일에 대해 고찰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겠지만, 이 같은 신기술이 선수들의 도핑 행위, 경기 방식, 나아가 반도핑 정책에 대한 심대한 변화를 곧장 가져올 것으로 전제한다면, 도핑 윤리에 관한 논쟁은 기술과 사회가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는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는 윤리학자들만의 고담준론으로 남을 공산이 크다. 스포츠 윤리학자들이 환원론적인 유전자 개념과 기술결정론에 의존하는 그들만의 ‘유전학’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성급히 유전학적 논변들을 고안해내는 일보다는 실제 오늘날 과학 연구의 현황을 이해하고 과학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학제간 대화를 시도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1. Thomas H. Murray, “Doping and Anti-Doping: An Inquiry into the Meaning of Sport,” In Routledge Handbook of the Philosophy of Sport, edited by Mike McNamee and William Morgan, pp. 315-318. New York: Routledge.

  2. W. M. Brown (1980), “Ethics, Drugs, and Sport”, Journal of the Philosophy of Sport 7 (1980), pp. 15-23.

  3. J. Savulescu, B. Foddy, and M. Clayton, “Why We should Allow Performance Enhancing Drugs in Sport”, British Journal of Sports Medicine 38 (2004), pp. 666-670.

  4. Julian Savulescu and Bennett Foddy, “Le Tour and Failure of Zero Tolerance: Time to Relax Doping Controls,” in Enhancing Human Capabilities, edited by Julian Savulescu, Ruud ter Meulen, and Guy Kahane, pp.304-312, (Oxford: Wiley & Blackwell, 2011).

  5. Andy Miah, “Enhancing Evolution: The Transhuman Case for Gene Doping,” in Routledge Handbook of Sport and Excercise Systems Genetics, edited by J. Timothy Lightfoot, Monica J. Hubal, and Stephen M. Roth, pp.463-474, (New York: Routledge, 2019).

  6. Thomas H. Murray, Good Sport: Why Our Games Matter and How Doping Undermines Them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8).

  7. Sigmund Loland, “Performance-Enhancing Drugs, Sport, and the Ideal of Natural Athletic Performance,” The American Journal of Bioethics, 18:6 (2018), pp.8-15; Sigmund Loland, “Fair Play,” In Routledge Handbook of the Philosophy of Sport, edited by Mike McNamee and William Morgan, pp. 333-350. New York: Routledge.

  8. 슈타판 뮐러빌레, 한스외르크 라인베르거 저, 현재환 옮김, 『유전의 문화사』 (부산: 부산대학교출판문화원, 2022).

  9. Ashkan Atry, Mats G. Hansson, and Ulrik Kihlbom. “Gene Doping and the Responsibility of Bioethicists,” Sport, Ethics and Philosophy 5 (2011), pp. 149-160.

  10. 한국과학기술학회, 『과학기술학의 세계: 과학기술과 사회를 이해하기』 (서울: 휴먼사이언스,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