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주니페로와 수오지의 희망

과학기술의 발전이 불러올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묘사하는 TV 시리즈 <블랙미러> 에피소드 중에 <샌주니페로>편이 있다. 샌주니페로는 디지털 공간에 존재하는 가상 도시이다. 두 여자 주인공 요키와 켈리는 80년대 어느 클럽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다. 우여곡절 끝에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가상이 아니라 실제 세계에서 직접 만나자고 결심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만난 그들은 샌주니페로에서 만날 때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요키는 동성애자 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족의 외면을 받고, 젊은 시절에 당한 교통사고로 전신이 마비되어 40년 이상을 식물 상태로 지내왔다. 켈리는 딸을 먼저 보내고 남편과 사별한 채 중병에 걸려 죽음을 기다리며 시한부의 삶을 사는 신세다. 두 사람은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샌주니페 체험 기회 덕분에 만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들에게는 두 개의 최종 선택지가 주어진다. 하나는 죽음을 받아들여 세상을 떠나는 것이고pass away, 다른 하나는 샌주니페로로 넘어가pass over 가상의 공간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는 것이다. 젊은 시절을 송두리째 병상에서 보낸 요키는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 속에 샌주니페로를 선택하지만, 켈리는 남편과 딸에 대한 추억 때문에 ‘넘어가기’를 망설인다. 혹시라도 이런 선택의 순간이 찾아온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텐가?

가상공간에서 영생의 삶을 누린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단지 SF 영화의 소재만은 아니다. 『특이점이 온다』의 저자로서 현재 구글의 기술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는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은 초인공지능이 출현하는 특이점을 지나고 나면 인간이 컴퓨터에 마음을 “업로딩”해서 신체의 죽음을 극복할 것으로 전망한다. 노화나 노쇠가 불가피한 신체를 버리고 샌주니페로 같은 디지털 가상 세계에 살거나, 기계 몸통과 전자두뇌를 결합해서 영생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15년 9월 13일 자 <뉴욕타임스>에는 “냉동보존술과 미래를 향한 한 젊은 여성의 희망 A Dying Young Woman’s Hope in Cryonics and a Future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2013년 1월에 킴 수오지Kim Suozzi라는 여학생이 스물세 살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본인의 희망에 따라 뇌를 꽁꽁 얼리는 냉동보존cryonics 절차를 진행했다는 기사였다. 수오지는 악성 뇌종양 진단을 받고 거의 2년간 투병 생활을 했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남자 친구와 상의한 끝에 훗날 치료법이 개발되기를 희망하며 자기 몸을 냉동 보존하기로 선택한다. 인지과학을 부전공하고 신경과학 분야의 대학원 진학을 꿈꾸던 그녀의 이런 선택에는 실제로 커즈와일의 책도 크게 한몫했다. 수오지는 사체의 냉동 보존 서비스를 제공하는 알코어Alcor가 위치한 애리조나 스코츠데일Scottsdale에서 남은 생을 보내기로 한다. 그녀는 뇌종양 덩어리가 더 자라는 것을 막기 위해 마지막 10여 일 동안 물과 음식을 거부하고 사실상 자살을 선택하였다.1

수오지는 과연 자신의 소원대로 기술이 발전한 미래에 부활할 수 있을까? 나중에 알려진 소식에 따르면, 그녀의 뇌를 냉동하는 과정이 순조롭지는 않았다고 한다. 냉동과정에서 허혈로 인한 혈관 손상이 있었고, 그 바람에 동결 보호제가 뇌의 바깥 부분까지만 작용하여 내부는 얼음 손상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냉동한 뇌의 생물학적 부활은 어려워졌다고 해도, 만약 뇌의 손상 부위를 디지털적으로 복구할 수 있다면 업로딩을 통한 부활의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수오지는 과연 과연 디지털 업로딩을 통해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계산기능주의와 업로딩

커즈와일이나 트랜스휴머니즘 이론가 닉 보스트롬은 기억, 가치관, 태도, 정서적 성향처럼 우리의 자아를 구성하는 특정 정보 패턴을 보존할 수만 있다면 신체적인 죽음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생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를 흔히 인격 동일성에 관한 심리적 연속성 이론(간단히 말하자면, 기억 이론)이라고 부른다. 내가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나의 기억, 신념, 생각, 감정, 희망, 두려움 등의 묶음이며, 나의 생존(지속) 여부는 이러한 심리적인 특성들의 집합이 유지·보존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커즈와일이나 보스트롬은 우리의 마음이나 정신 상태의 본성을 계산기능주의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계산기능주의에 따르면, 우리의 사고나 인지 과정은 뇌라는 하드웨어에서 정보가 조작·처리되는 소프트웨어 차원의 과정이다. 우리의 뇌는 문자 그대로 자연이 만든 생물학적 컴퓨터이며, 생각이나 기억은 뇌라는 하드웨어에서 구현되어 작동하는 데이터 정보 구조나 그에 관련된 계산적 조작이라는 것이다.

계산기능주의는 복수실현가능성multiple realizability 논제를 받아들인다. 이 논제는 어떤 하나의 정신 상태 유형은 수의 다른 복수의 물질적 상태를 통해서 구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2+2=4’를 계산하는 상태가 탁상용 전자계산기, 주판, 우리의 뇌 상태 등 다른 물질적 과정을 통하여 구현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들은 모두 똑같은 계산 과정을 구현하고 있지만, 그 물리적 기반 상태는 완전히 다르다.

정신은 물질적 토대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정신 혹은 정신적 상태나 과정이 존재하려면 반드시 그것을 구현하는 물질적 토대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한 종류의 같은 물질 상태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 복수실현가능성 논제의 요점이다. 인간의 뇌는 탄소 기반의 회색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만, 정신 기능을 수행하는 모든 기관organ 혹은 시스템이 반드시 인간의 뇌와 같은 물질적 기반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가령 탄소 말고 실리콘 뇌를 가진 외계인을 상상해 보라. ‘2+2=4’를 계산하는 이들의 정신 상태는 실리콘 기반의 물질적 과정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만약 복수실현가능성이 참이라면, 정보 패턴인 우리 정신을 지금의 뇌와 완전히 분리하여, 전혀 다른 물질적 기반으로 이전하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소프트웨어는 그것을 실현realize하는 하드웨어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 만일 우리의 정신이 일종의 소프트웨어적인 정보 구조이고 뇌가 그것의 물질/물리적 기반인 하드웨어에 해당한다면, 정보 구조인 정신을 하드웨어로부터 추출하여 분리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귀결처럼 보인다.2 정신과 두뇌가 분리 가능하다면, 우리 정신을 지금의 뇌와 완전히 분리하여 전혀 다른 물질적 기반으로 이전하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가령 두뇌는 디지털 컴퓨터 같은 전자뇌에 의해서 대체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는 정보 패턴을 지금의 뇌와 분리하여 디지털 기반으로 이전하는 ‘업로딩’이다.

커즈와일은 나의 본질은 뇌에 구현된 알고리듬과 계산적 배열/구성이며, 뇌의 하드웨어를 급진적으로 바꾸어도 전과 같은 계산적 배열과 구성이 유지되기만 하면 나(혹은 나의 정신)는 여전히 존재하는 셈이라고 주장한다. 즉, 하나의 인격으로서 나의 생존은 물질적 예화에 우선하는 정보 패턴으로서의 정신이 지속하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업로딩은 생물학적 신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인지나 신체 능력을 훨씬 쉽게 향상할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노화나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뇌나 신체를 폐기하고서도 생존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요에 따라 백업본의 재부팅을 통해 영원히 청춘의 삶을 누릴 수 있다면, 이 얼마나 매력적인 유혹인가?

 

 

체화된 마음

그렇다면 이런 업로딩에 문제는 없는가? 만약 업로딩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과연 생존에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통상적으로 우리가 생존을 통하여 기대하는 바는 미래에도 심리적 측면에서 지금과 같은 (혹은 더 나은) 사람으로 남아 있으면서, 자신에게 중요한 가치를 추구하거나 보람된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업로딩이 우리가 원할만한 생존 방식이려면, 나와 심리적으로 충분히 유사하면서 내가 좋아하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가 계속 존재해야 한다. 그러려면 인간 정신의 정보 패턴을 컴퓨터의 전자뇌로 복사하는 과정은 당사자에게 실질적으로 중요한 심리적 특성의 거의 모든 것을 보존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업로딩은 과연 그런 방식의 복사 과정일까?

정신이 뇌나 신체와 분리되어 전자뇌로 이전될 수 있다는 주장은 “신체의 특성이 우리가 소유한 정신의 구조나 종류에 아무런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라는 신체 중립성body neutrality을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다. 정신은 그것을 실현하는 뇌/신체의 종류와 무관하게 ‘아무런 손실 없이’ 추출(추상)하여 복제할 수 있는 정보 구조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신체 중립성 논제가 거짓이라면, 즉 우리 신체의 종류가 우리 정신의 특성에 깊이 반영되어 있고 그 구조나 작동에 중대한 차이를 만들어낸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이 경우에도 정신을 모종의 정보 패턴의 형태로 추출(추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상상해 볼 수는 있다. 문제는 그것이 과연 무손실lossless 방식의 추출인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추출된 정보 패턴이 내 마음의 중요한 특성 일부를 잃어버리는 손실 방식의 복제일 가능성은 없는가? 정신의 추출 과정이 손실 방식에 따른 것이라면, 그 패턴을 원래와는 매우 다른 신체 종류에 이식했을 때, 해당 특성의 올바른 구현이나 작동을 기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 경우, 단지 추출된 패턴을 디지털 전자뇌로 이전하는 것만으로 마음의 심리적 연속성이 보장된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

“체화된 인지”라고 불리는 일군의 견해들은 우리의 정신 상태나 과정이 뇌에만 존재한다는 뇌 중심주의를 거부한다. 이들에 따르면, 인지 과정은 단순히 뇌에 예화된 구조나 작용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지는 뇌를 넘어서는 신체 구조와 과정, 그리고 환경을 그 구성 요소로 포함한다. 그런 관점에서, “체화된 인지”를 수용하는 철학자들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몸을 갖느냐가 마음의 구조나 작동 방식에 중요한 차이를 만든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우리 몸의 종류에 따라 우리 마음이 세상의 특징을 표상하는 방식이나 사용하는 개념 구조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따른다면, 최소한 지각 경험과 관련된 우리의 정신 상태나 구조를 신체/뇌에서 아무런 손실 없이 분리하여 다른 물질적 기반으로 이전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가령 시각과 관련된 우리의 경험 상태와 구조에 해당하는 정보 패턴을 박쥐의 뇌/신체로 이전했다고 가정해 보자. 박쥐 신체에 이식된 인간의 시각적 정보 패턴이 설령 어떤 기능을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그 작용 방식이나 특성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는 매우 다를 것이다. 매우 높은 수준의 신경 가소성을 가정하여서 대상의 위치나 방향, 형태 등에 대한 정보처리는 어떤 식으로든 가능하다고 치더라도, 그것이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색깔을 경험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체화된 인지”의 함의를 다음과 같은 사례를 통해 더 생각해보자. 우리는 음악 작품을 수학적 구조로 이루어진 일종의 정보 패턴으로 간주할 수 있다. 요즘 우리가 음악 감상에 사용하는 주요 미디어는 CD나 MP3처럼 디지털화를 통해 저장된 파일이다. 그런데 이 파일들은 음악 작품의 수학적 정보 패턴은 보존하고 있지만, 음악이 주는 감동과는 분리되어 있다. 말하자면, 정보 구조로서의 노래 자체는 주관적 의미 (만족) 조건과 별개라는 것이다. 음악 파일이 우리에게 음악적 감동을 주려면, 우리 신체의 지각 구조에 적합한 방식으로 재생되고 신체적으로 경험되어야 한다. 즉 정보 패턴으로서의 노래가 그것이 갖는 의미를 온전히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 몸의 지각 체계를 통해 경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음악 파일이 청각 경험을 통한 음악 감상 행위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디지털로 추출된 정보 구조가 모종의 변환기transducer를 거쳐 아날로그 신호로 전환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이나 CD플레이어는 디지털 장치지만 그 내부에는 DACDigital-Analog Converter라고 부르는 장치가 내장되어 있다. 이 장치의 역할은 디지털 신호를 우리의 신체 기관이 경험할 수 있도록 아날로그 신호로 바꾸어주는 것이다. 변환된 아날로그 전기 신호는 다시 스피커라는 장치를 통해 아날로그 방식의 물리적 음파를 생성한다. 우리의 신체 감각기관은 디지털 정보가 아니라 물리적 음파라는 이 아날로그 신호에 반응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지금의 생물학적 신체와는 전혀 다른 기계적 몸을 가진 로봇 같은 존재로 변한다면 어떻게 될까? 필자는 그런 존재가 우리가 지금 느끼는 것과 같은 음악적 감동을 경험할 가능성에 매우 회의적이다. 먼저 기계의 전자뇌가 디지털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디지털 정보를 굳이 아날로그 신호로 변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마치 컴퓨터가 USB에 저장된 파일을 읽어 들이듯이, 음악 파일의 내용을 디지털 파일로 전송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마이크 같은 수신 장치를 통해 아날로그 소리를 수신한다고 하더라도,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소리 신호의 처리 과정은 우리 인간의 신체적 처리 과정과는 매우 다를 것이다. 그것은 녹음된 소리에서 물리적 파형 정보에 따라 디지털 패턴을 추출하고 분류하는 컴퓨터 음성 인식 장치의 조작 과정과 유사하지 않을까?

여기에는 아날로그의 매개를 거쳐 소리를 신체적으로 경험하여 이루어지는 인간의 음악적 감동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음악에 대한 컴퓨터의 음성 정보처리나 인식 과정도 어쨌든 모종의 ‘음악적 경험’이라고 부르면 그만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최소한 그것은 우리 인간이 체험하는 종류의 음악적 경험은 아니다. 나는 디지털 형태로 추출된 정보 패턴으로서의 정신 상태라는 것은 마치 CD에 수록된 음악의 정보 패턴과 같은 것이어서 온전한 ‘인간적인’ 정신 상태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의미와 관련된 주관적 경험의 요소들이 추상화 과정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체화된 개념화의 함축

“체화된 인지”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우리의 개념도 또한 신체화embodied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유기체가 소유한 신체의 종류가 그 유기체가 획득할 수 있는 개념을 제약하고 결정한다는 것이다. 주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유기체가 의존하는 개념들은 자신의 신체 종류에 의존하며, 그 결과 신체가 다른 유기체들은 세계를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방식도 다르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주장이 참이라면, 인간은 신체 종류가 다른 외계인과는 생각을 공유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아무리 유사한 개념을 사용하더라도, 신체의 종류가 다르기에 그 의미(내용)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개념의 공유 가능성이나 그 범위와 정도는 인간 신체와 외계인 신체가 얼마나 다른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만약 비교 대상을 유기적 신체를 갖는 외계인이 아니라, 실리콘 기반의 전자뇌나 기계 몸통을 갖는 로봇으로 상정하면 어떻게 될까? 로렌스 바사로우Lawrence Barsalou라는 인지과학자는 “기능주의의 주장과는 달리, 컴퓨터는 인간 개념을 표상(재현)하는 데 필요한 감각-운동 시스템을 갖지 못하므로, 인간의 개념 시스템을 구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구현할 수 없는 정도가 어디까지냐에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개념의 형성이나 적용에서 생물학적 신체 기반의 주관적 경험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개념들이라면 이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주장으로 보인다. 위의 예에서처럼, 전자뇌와 기계 몸통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어떤 음악을 듣고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감동을 느끼기는 힘들 것이고, 그런 점에서 음악의 본성이나 미적 가치와 관련된 개념적 인식이나 판단도 우리와는 매우 다를 것이라 상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업로딩을 통해 정신의 물질적 기반(뇌+신체)을 다른 것으로 완전히 바꾸었을 때,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나와 전자뇌(+기계 몸통)에 실현된 나의 업로딩은 비록 같은 정보 패턴을 공유한다 해도, 신체의 근본적인 차이 때문에 서로가 갖는 개념뿐 아니라 그에 바탕한 신념이나 욕망, 감정 같은 정신 상태들의 의미(만족) 조건 또한 다를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의 우선성이나 선호 및 욕구의 대상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다.

 

가령 로봇 몸체를 가졌다고 할 때, 지금처럼 신체적 고통을 두려워할 지는 분명하지 않다. 감정과 같은 정서적 상태는 신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현상으로 여겨진다. 우리가 감정적으로 반응할 때 신체 또한 여러 변화를 겪게 되며 감정에 따라 표정이나 몸짓도 달라진다. 기능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정보 패턴으로서의 감정 상태는 외부 세계에 대한 지각적 경험(입력)과 행동(출력)을 매개하는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그런데 분노를 느낄 때 가슴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뜨거움이 동반되지 않는 분노나, 등골이 서늘해지며 온몸이 떨리는 경험을 수반하지 않는 두려움을 상상해 보라. 결국엔 그 상태들이 수행하는 기능적 역할에도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스타트랙>에 나오는 휴머노이드 로봇인 데이터 소령은 극 중에서 감정의 변화나 표현이 거의 없는 인물로 묘사된다. 감정에 관한 한 우리의 업로딩도 데이터 소령과 같은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닐까? 타인에 대한 연민이나 공감은 타인이 처한 상황을 모의하는 신체적 체험 능력과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신체가 달라진다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타인의 감정 상태에 공감하기는 어렵게 될 것이다. 결국 신체의 변화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감정 상태나 그 종류를 제약할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생존은?

우리가 원하는 삶의 방식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중요시하고, 무슨 가치를 추구하는가에 좌우된다. “체화된 인지”에 대한 이상의 논의가 타당하다면, 뇌 혹은 신체를 구성하는 물질적 기반의 변화는 바로 이러한 가치 선호나 우선성에 변화를 불러올 것이다.

나의 업로딩은 내 정신의 정보 패턴을 복사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생물학적 신체와는 구분되는 전자뇌나 기계 몸통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나의 업로딩이 갖는 믿음, 욕구, 감정 등의 상태는 원래 내가 가진 것들과는 다른 만족 조건을 갖게 될 것이다. 그 결과, 나에게 중요하거나 가치 있는 것들이 나의 업로딩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나의 업로딩은 나와는 전혀 다른 가치를 추구하며,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희망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업로딩을 통한 정보 패턴의 복제는 손실을 수반하는 복제이다. 이런 방식의 복제는 우리가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생존의 조건인 심리적 연속성을 보존하지 않을 수 있다.

온전한 심리적 연속성을 보장하는 자기 복제이려면 무손실 복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곧 우리의 정신 상태가 갖는 의미론적/지향적 만족 조건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복제된 존재가 우리와 같거나 최소한 매우 유사한 신체적, 환경적 조건을 갖춰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생존을 보장할 ‘업로딩’이 되기 위해서는, 뇌의 정보 패턴만을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뇌와 신체를 포함하는, 혹은 더 나아가 어느 정도 환경적 조건까지도 포함하는 물질적 수준의 복제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잠정적 결론이다. 그렇다면 지금으로서는 불행히도 요키나 수오지가 본인의 희망하는 생존을 보장받을 길은 없을 것 같다.

참고문헌

  1. 마크 존슨, (노양진 역), 『마음 속의 몸』, 철학과 현실사, 2000 [The Body in the Mind,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
  2. 신상규, 「마음은 신체와 분리될 수 있는가?」, 『철학과 현실』 2020년 봄호
  3. 신상규, 「‘기능’과 기능주의」, 철학논집, 21집, 2010.
  4. Schneider, Susan. Artificial You,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9
  5. Bostrom, N., “Transhumanist FAQ v2.1.”
    Johnson, Mark. Embodied Mind, Meaning, and Reas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7.
  6. Kurzweil, R., Singularity Is Near, Penguin, 2005
  7. Parfit, D., “Why Our Identity Is Not What Matters”, “The Unimportance of Identity” in Martin, Raymond and John Barresi (eds.), Personal Identity, Blackwell Publishing, 2003.
  8. Shapiro, L., The Mind Incarnate, MIT Press, 2004.
  9. Shapiro, L., Embodied Cognition (New Problems of Philosophy), 2nd Edition, Routledge, 2019
신상규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인문과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