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철 개인전 〈Glare〉 전경, 바라캇컨템포러리, 서울, 2019. 김윤철 작가는 고등과학원 초학제 연구 프로그램의 독립연구단 "매터리얼리티Mattereality"의 연구책임자로 활동한 바 있다.

김윤철

고등과학원은 초학제 연구 프로그램을 10년째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그간 여러 중요하고도 신선한 주제들에 대해서 국내외 학자와 작가들이 밀접하게 교류할 수 있는 마당을 제공해 왔다. 그러나 시작부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초학제’라는 말은 모두에게 생소하게 들리는 용어이다. 그래서 초학제 연구가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매번 새로이 되돌아봐야만 했다. 이 글에서도 초학제 연구에 대해서 소개를 먼저 해야 하겠다. 또 고등과학원이라는 기초과학 연구기관이 초학제 연구라는 얼핏 비과학분야로 보이는 분야를 왜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할 것이다.

고등과학원의 초학제 연구 프로그램은 2011년 당시 김두철 원장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김 원장은 한 잡지에 기고한 글에 초학제를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설명하였다. ‘다학제 연구와 학제간 연구의 결과물은 음식의 샐러드와 일반 요리 또는 백반과 비빔밥에 비유한다면 초학제 연구는 음식 재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새로운 형태로 태어나는 스프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그리고 초학제 연구는 독자적인 학문분야가 태생하기 전 단계의 활동으로서 예술과 과학, 인문학 등의 융합을 통하여 새로운 지식이 창출되는 방식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초학제 연구를 그는 과정과 활동으로 설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단절되어 있는 여러 분과학문들의 융해 및 재결합으로, 목적은 새로운 지식의 창출로 규정하였다. 이 짧은 정의와 비유만으로 일반적인 초학제 연구의 정체를 모두 다 담아낼 수는 없겠지만, 고등과학원의 초학제 연구 프로그램은 바로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 운영되어 왔다.

사실 2011년 당시에는 우리에게 ‘초학제’라는 개념은 너무나 모호했기 때문에 우선 개념을 정리하고 프로그램 운영방안을 준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국내의 많은 학자와 작가분들을 모시고 초학제가 무엇이고, 지금 이것이 왜 필요하고,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연구를 했을 때 무슨 가능성이 있을지에 대해서 자문을 구했다. 이때 들은 두 철학자의 이야기를 싣겠다.

 

 

우리나라 학제 상황이 매우 분과적이고 경직되어 있고 그리고 서로 소통하기를 거의 거부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다못해 인문대 내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 되는 상황입니다. 과학 내에서도 그렇고… 우리나라의 학문 발전에 그러한 것이 많은 장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 우리가 철학이라고 알고 있는 것도 지금 우리가 실행하는 철학하고는 아주 다른 종류의 science of everything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철학은 오늘날 의미에서의 과학이기도 했고 정치학이기도 했으며 심리학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거기에서 분과 과학이 생긴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는 마치 그 분과과학들이 처음부터 주어진 것처럼, 절대적으로 주어진 것처럼 그 안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 그래서 이 초학제 연구는 앞으로 대학이 어떠한 모습이어야 되는가 하는 과제하고도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첨단의 지식을 생산하는 대학 자체가 지금과 같은 시스템 안에서 과연 새로운 지식체계를 생산해낼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화여대 김혜숙 교수)

우리의 ‘융합’ 연구에는 많은 저항들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융합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융합의 연구 차원이나 교육 차원에서만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융합을 가로막는 심리적, 사회적 장애를 연구하고 방법론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필요해 보입니다. …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2세 2막 2장에서, 눈물이 앞을 가로막으면 단 하나의 사물이 수천 개로 쪼개져서 보이고, 옆으로 삐딱하게 보아야 (사물이) 똑바로 보인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어떤 상황에서는 삐딱하게 보아야 똑바로 보입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융합이라는 것이 ‘외도’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것이 곧 ‘삐딱하게 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리학에서 욕망이 들끓고,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처럼 리비도 집중이 걸려야, 미쳐야, 혹은 어디에 사로잡혀야만, 맨정신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삐딱하게 볼 때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융합에도 조금 ‘미친’,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울대 김상환 교수)

 

이 자문회의에서는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는데 여기에는 다 적을 수가 없다. 그때 해주신 조언들에 지난 10년간 과연 우리가 얼마나 부응했는지를 생각하면 부끄러운 마음뿐이다. 자문회의 이후 정리된 초학제 연구의 목적은 ‘기존 학문방법론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좁은 분야에 갇힌 사고와 편견을 깨고 새로운 사유방법을 창안함’으로 정리되었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과학과 예술, 인문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서 과학적 사고능력, 상상력, 창의력을 바탕으로 사유의 방법과 학문의 방법에 대한 공통의 기초를 확립하고 확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특별히 고등과학원이 초학제 연구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기초학문의 한 산실로서 1) 근대 학문 체계 내에서 나누어졌던 분과 학문영역 내의 연구활동들이 지나친 세분화와 전문화 안에서 한계에 부딪히고 있는 상황, 2) 고도로 전문화된 연구활동들 사이의 공통의 지반이 상실됨으로써 상호발전 동력이 쇠약해지는 상황을 타개하고, 3) 타학문 분야에서 발전된 학문방법이나 사유방법, 연구주제들을 참고하여 주어진 분야와 접합시킴으로써 창의적 연구환경을 조성하고 학문 발전의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해야 하기 때문으로 정하였다.

고등과학원에서 진행되는 초학제 연구 프로그램이 택한 가장 중요한 운영 방법은 초학제 연구를 하나의 주제를 정하여 진행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미지’나 ‘정보’, ‘물질과 감각’과 같은 주제가 주어지면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그 주제에 대해서 할 말이 생기는 것이다. 자연스레 연구책임자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을 수 있고, 같은 주제에 대해서 다른 말을 하게 하고, 다른 분야 전문가의 말을 듣게 한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전문가 스스로의 변화들을 집어내고, 이를 엮어 기록으로 남기고 나아가 학문적 열매로까지 이끌어 축적한다면 이 프로그램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현재 초학제 연구 프로그램은 ‘올해의 주제Annual Theme’ 연구단과 ‘독립연구단Independent Research Groups‘ 두 가지 유형의 연구단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의 주제 연구 프로그램은 영국의 더햄대학의 IAS의 Annual Theme 프로그램을 모델로 하였다. 해마다 선정되는 ‘올해의 주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학제의 전문가들이 모여 다양한 연구 활동을 수행한다. 한편 단기간에 수행되는 ‘올해의 주제’ 프로그램은 다양한 방문자 위주의 협동연구이어서 집중력과 심도 부족이 있을 수 있다. 반면에 독립연구단Independent Research Groups 프로그램은 보다 장기적이고 도전적인 초학제적인 주제에 택하여 다년간 심도있는 연구에 집중한다.

초학제 연구가 시작된 2012년부터 지금까지 선정되었던 올해의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Images, Scientific and Artistic (2012), Toward the Unified Science of Mind/Brain (2013), 시공간에 대하여 (2015), 인공지능: 과학, 역사, 철학 (2017-2018), 인공지능과 포스트휴머니즘 (2019), Reality (2020). 또한 지난 10년간 활동한 독립연구단들의 연구주제는 다음과 같다: 자연, 과학, 인간 – 사유 패러다임의 교차분석과 새로운 학문방법 및 지식 개념의 모색 (2012-2014), ‘정보’는 무엇인가?: 정보에 대한 물리학적, 인식론적, 존재론적 고찰 (2013-2014), 물질과 감각 사이에서의 과학-예술적 연구: 소리-지도학과 매터링 (2015-2016), 빅 데이터의 시각화 분석에 관한 심미적, 철학적 사유 (2015-2017), Reality (2021).

 

 

지난 2020년도부터 올해까지 진행되고 있는 초학제 연구는 ‘Reality’라는 주제로 진행되고 있다. 이 주제는 초학제 프로그램 기획위원회에서 논의되어 선정되었다. 우리는 통신과 시각화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여 엄청난 양의 가공된 정보를 접하며 살고 있다. 현실보다 더 현실과 같은 증강 또는 가상현실을 구현해 주는 각종 매체를 통해 자연과 인간 세계에 대한 경험을 하고 있다. 이제 매체는 소통의 도구를 넘어 인식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보고 들은 현실과 실제 현실 – 객관적 실제가 있다면 – 과의 대치의 문제가 한편으로는 흥미롭고 풍부한 경험의 세계를 제공해 주기도 하지만, 매체에 대한 혼란스러운 선택과 윤리의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시대가 강요된 현 상황에서 더욱 가중되고 있다. 따라서 과학, 문학, 예술 등에서 오래된 주요 주제이었던 ‘현실’이라는 개념에 대해 심각한 재고가 필요하다는 공감이 있었다.

Reality 주제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초학제 연구단은 세 연구팀으로 구성되었다. 문학 분야에서는 이지연 교수(한국외국어대)가 <Spheres: 문학과 가능세계들>이라는 제목으로 문학에서의 실재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문학적 (탈)재현의 양상들을 주목하면서 문학 텍스트의 물질성과 자족성을, 혹은 텍스트 고유의 내적 논리에 의해 증식하는 실재를 주목함으로써 실재의 재현이 아닌 창조의 장으로서의 문학, 증명 가능한 실재가 아닌 ‘다른’ 실재에 대한 상상의 장으로서의 문학을 탐구하고 있다. 연구 제목에서 spheres는 다의적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초학제 연구가 포괄하는 각 학문분과의 영역들이고 문학 텍스트의 공간이자 기하학과 수학에서의 구체, 구의 표면이며, 나아가 지구이고 세계이다. 이는 연구 대상과 방법론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문학팀과 함께 활동하고 있는 두 예술팀이 있다. 김정환 작가는 <내면적 움직임의 재현과 순환 – Innerscapes> 라는 제목으로 뇌파의 과학적 분석을 통해 뇌파에 담겨 있는 인간의 내적 상태를 회화적으로 시각화하는 작업을 한다. 이를 통해 인간의 내부와 외부, 이미지와 실재의 불분명한 경계를 드러내는 실험을 한다. 박승순, 이종필 작가는 <Inter-reality 관점의 AI 사운드스케이프 기반 뉴미디어 아트웍 ‘Mixed Scape’>라는 제목으로 청각에서의 혼합현실을 다루고 있다. 혼합현실의 개념을 청각분야에 도입하고 이를 Inter-reality의 관점에서 재구성하여 Mixed-reality를 구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Real Soundscape, Foley Sound, Concrete Music, Virtual/Artificial Soundscape 등 독립된 네 개의 주제를 음악/사운드, 영상 등의 매체를 통해 아트웍으로 구현하였다. 두 예술팀은 2020년 12월에 연구결과를 전시하였고, 같은 때에 세 연구팀이 통합 학술대회를 열어 연구 성과를 공유하였다.

초학제 연구 프로그램 운영을 통해 단순히 기존 학문들의 지식을 여럿 동원하면 근원적 문제 또는 난제가 해결되리라는 기대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러 각도의 시각에서부터 얻어지는 설명이 흥미 차원을 넘어서서 통합적이고 학술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고등과학원에 초학제 연구센터, 나아가서는 초학제 학부 형태의 정식 프로그램을 두고, 전임 또는 겸임 교수, 연구교수, 연구원 등을 소속시켜 연구주제와 활동에 있어서 연속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또한 “KIAS Journal of Transdisciplinary Research(가칭)“와 같은 학술지를 발간하여 초학제연구 성과를 학계에 남기는 것이 필요하다. 초학제연구를 발표할 국내 전문학술저널이 전무한 것을 고려하여, 초학제 연구결과와 일반 학제 간 연구결과 등을 논문으로 투고할 수 있는 On-Line KIAS 저널을 발간하여 초학제연구 확산에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박창범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