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이들의 컴퓨터 게임 시간을 하루에 한두 시간으로 제한하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날 디지털 기기와 연결되어 있지 않거나 인터넷에 접속하고 있지 않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스마트폰, 태블릿, PC, 노트북, 아이팟… 개인이 소지하고 있는 장비들만 해도 최소 이 정도다. 컴퓨터 게임은 더 이상 아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30대들도 일상적으로 한다. 게임만이 아니라 채팅, 메일, 금융, 교육 등 일상적 삶의 대부분이 ICT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ies에 의존하고 있다. 인간이 직접 개입하지 않아도 자기들끼리 프로토콜을 통해 정보를 주고받으며 자동으로 작동하는 사물 인터넷, 자율주행자동차, 스마트가전의 상용화가 진행 중이다. 오프라인과 온라인 사이에, 디지털 기기들 사이에 진입과 소통의 장애는 이미 ‘비정상’이다.

문자와 인쇄술이 정보의 ‘역사시대’를 이끌었다면, 디지털 ICT는 정보의 ‘초역사시대’를 열었다. ICT에 의한 정보혁명은 단지 정보의 저장과 전달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정보 환경 전체를 재구성하면서 우리의 삶이 의존하는 환경, 인간으로서의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 세계와 타자에 대한 우리의 관계 방식 등을 총체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마치 인간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물질과 생명과 지구시스템 전체를 지배하고 있던 정보의 역량이 ICT 기술과 더불어 이제야 인간의 시야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지구상에서 생물이 살아가고 있는 영역이 바이오스피어biosphere라면, 이제 인간은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서는 ‘인포스피어Infosphere’에 거주한다.

정보철학자 플로리디L. Floridi는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모든 정보 행위자들, 그들의 상호작용과 정보처리과정 등을 포함한 정보 환경 전체를 “인포스피어”로 정의한다.[1] 그것은 실시간 대면 대화처럼 소리와 영상을 직접 포착하는 오프라인과 아날로그 정보 공간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디지털 전송 시스템인 인터넷이나 사이버공간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기존의 ‘정보사회’라는 개념은 정보를 ‘지식’의 확장된 버전으로 이해하고 인간과 정보의 관계를 인간의 편의와 실용적 목적을 돕는 기술적 도구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그러나 ‘인포스피어’는 이러한 인간중심적인 정보사회로 환원되지 않는다.

‘인포스피어’는 생명체 중심의 생태계조차 넘어서 AI를 비롯한 기술적 존재자들도 포괄하는 더 큰 존재론적 범주이다. 인간이 아닌 정보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들이 동등한 정보적 구성물이기에 자연물과 인공물, 생명체와 비생명체, 인간과 기계의 경계는 무의미하다. 비인간도 얼마든지 인간의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알파고의 등장은 인간과 비인간을 포괄하는 더 상위 버전의 존재론적 세계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준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발전하는 인포스피어 안에서, 이질적인 존재자들 사이의 소통을 가로막는 ‘존재론적 마찰’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소리나 영상 등 물질적인 것들을 디지털화하면서 정보를 만들고 저장하고 전송하는데 걸리는 장애물(거리, 소음, 데이터의 양과 복잡성 등)을 해결하는 데 힘과 노력이 줄어들고 있다. ‘스마트’하고 ‘자동화’된 인포스피어의 확장은 오프라인(아날로그, 탄소 기반)과 온라인(디지털, 실리콘 기반) 사이의 문턱을 빠르게 지우고 있다.

인포스피어는 ‘죽은’ 사물들의 공간이 아니다. 그것들은 상호작용이 없고 반응이 없으며 의사소통이나 학습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포스피어에는 상호작용하는 존재들, 무선의, 분산된, 편재하는, 모든 것에서 모든 것으로 가는 ‘a2a anything to anything’, 언제 어디서나 작동하는 ‘a4a anywhere for anytime’ 정보과정이 존재한다. 스마트폰, 스피커, 냉장고, 슈퍼마켓이 사용자의 취향과 주문을 알고 소통하며 특정 요리를 권하고 재료를 제공한다. 인포스피어는 로그인-로그아웃하는 온라인 정보공간이나 가상현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실제적 조건으로서 환경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다.

플로리디는, 인포스피어에 거주하는 우리를 ‘접속되어 있는 정보적 유기체’, 즉 “인포그Inforg[1]라고 부른다. 사이보그로 개조하거나 유전자 변형으로 ‘향상된’ 존재가 아니더라도, 우리와 같은 ‘디지털 이민자’든 우리 아이들 같은 ‘디지털 원주민’이든, 인류는 이미 포스트-휴먼으로서의 ‘인포그’로 살고 있다. 바이오스피어에서 발생한 코로나19 팬데믹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삶이 얼마나 네트워크화된 인포스피어에 뿌리박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수면 시간을 제외하면 손에서 떠나지 않는 스마트폰이 보여주듯이, 초연결 네트워크의 인포스피어는 이제 인류 전체의 사유를 담당하는 대뇌피질이자 세계와 접촉하는 피부로서 인간 실존의 근본 환경이다. 우리는 인포스피어에 거주하는 인포그들이다.

 

 

2. 인포스피어는 ‘정보’가 우리 삶의 모든 분야에서 지배적인 개념임을 보여준다. 정보는 자연, 물질, 생명, 인간, 기계, 언어, 사회 등 실재의 모든 영역을 통섭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인포스피어 세계상의 존재론적 기초이다. 정보에 대한 관심은 여기서 시작된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환경을 구축하고 있는 ‘정보’란 과연 무엇인가? 정보의 역량은 물질적 정보, 생물학적 정보, 기술공학적 정보, 기호학적 정보 그 어느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보편적인 어떤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그렇듯이 ‘정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도 확정된 해답 없이 다양한 분야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답해지고 있을 뿐이다.

모든 존재자들이 다양한 차원들-물질적, 생물학적, 기술공학적, 기호학적, 수학적, 언어적 차원 등-에서 정보를 포착하고 정보를 주고받는 체계들이라고 한다면, 이때 정보는 데이터나 기호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정보가 무차별적인 데이터나 기호들과 다른 것이라면 또 의미나 지식과는 어떤 차이가 있으며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나아가 동일한 사물의 빛과 소리로부터 물리적으로 유의미한 정보, 생물학적으로 유의미한 정보, 사회학적으로 유의미한 정보가 발생한다고 할 때 각각의 차이를 규정하는 것은 또 무엇인지 등 정보의 본성과 작동 방식을 탐구하려는 철학적 사유는 다양한 계열들로 발산될 수 있다.

 

오늘날과 같은 인포스피어의 물질적 토대인 디지털 정보 사유의 시발점을 찾자면, 튜링A. Turing, 섀넌C. Shannon, 위너N. Wiener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튜링은 정보를 0과 1의 두 신호로 변환하여 ‘계산’하는 컴퓨터Turing Machine와 인간처럼 사고할 수 있는 기계에 대한 보편적 관념을 제공했다.[2] 섀넌은 컴퓨팅 기계가 처리할 수 있는 정보 언어를 ‘비트’로 양화하여 정보의 측정 가능성을 열었다. 그는 정보에서 ‘의미’와 ‘맥락’을 제거함으로써 <송신자Source-부호화encoding-채널Channel-해석decoding-수신자Receiver>로 통신모델을 표준화할 수 있었고, 정보에 대해서는 오로지 송신자가 메시지로 선택할 수 있는 정보의 ‘양’과 송신자에서 수신자로 전달되는 신호의 ‘정확한 전송’만 고려할 수 있게 했다.[3]

위너의 사이버네틱스 연구는 외부 환경과의 관계에서 항상성을 유지하는 자기조절계의 원리를 ‘정보되먹임feedback’에서 포착하여 생명체와 기계를 동일한 정보처리계로 볼 수 있는 길을 열었다.[4] 섀넌 정보가 메시지 선택의 확률로서 비결정성과 불확실성의 정도를 의미한다면, 위너 정보는 엔트로피에 저항하는 네겐트로피의 정도에 해당한다. 메시지가 소음에 저항하고, 유기체가 죽음에 저항하듯이, 정보는 엔트로피 증가의 방향으로 변화하는 환경을 거슬러 계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패턴이자 조직화된 구조로 나타난다. 정보의 계산, 측정, 소통, 제어, 구조 등 튜링, 섀넌, 위너가 제공한 원초적인 정보적 사유들은 정보과학과 인공지능 연구에 핵심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함으로써 인포스피어 구축의 중요한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3. 정보의 관점에서 철학적 문제들을 해명하려는 시도가 등장한 것은 20세기 중반부터다. 미국 분석철학자 드레츠키F. Dretske는 “태초에 정보가 있었다. 말씀은 나중에 왔다.”고 주장하며, 섀넌의 정보 개념과 의사소통모델을 활용하여 지식론과 의미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5] 그에 따르면, 우리가 세계에 관해 알고 싶은 것은 참된 지식으로서의 정보이다. 기차역에 가서 기차가 몇 시에 출발하는지에 관해 가짜 정보를 알고 싶은 사람은 없다. 거짓 내용의 문장들을 컴퓨터 데이터베이스나 머릿속에 넣을 수는 있지만, 그것들이 참된 지식으로서의 정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거짓 정보나 잘못된 정보는 아예 정보가 아니라고 본다.

정보는 양화 가능한 것으로서 객관적이고 마음 독립적인 것이다. ‘S가 F이다’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S가 F이다’라는 믿음이 ‘S가 F이다’라는 정보에 의해 인과적으로 (정보원천과 정보수신자 사이의 소통채널에 적절한 조건이 부여되어) 발생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의미가 배제된 물리적 정보량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지식의 인식론적 원천으로 정보를 연결시키고자 정보의 의미를 참인 명제 내용으로 해석한 드레츠키는 우리의 상식을 구제할 수 있는 정보의미론의 길을 열었다. 그의 작업은 의미와 지식에 관한 분석철학적 논의에 정보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흥미를 불러일으켰으나 당시 영향력이 크지는 않았다. 정보의 관점에서 접근한 드레츠키의 의미론과 지식론은 오늘날 정보철학의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1 


드레츠키보다 더 이른 시기에 정보기술의 잠재적 역량에 주목하여 일찌감치 인포스피어의 도래를 전망한 철학적 사유는 프랑스 철학자 시몽동G. Simondon에서 나타난다.[6] 시몽동의 철학은 섀넌, 위너, 애슈비W. Ashby, 폰 노이만J. von Neumann 등으로 대표되는 40-50년대 초기 사이버네틱스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다. 시몽동은 ‘현대 과학에서의 정보 개념’이라는 주제로 1962년 로요몽Royaumont에서 개최된 사이버네틱스 학술대회를 직접 조직하기도 했는데, 당시 학회에는 위너를 비롯한 사이버네틱스 이론가들, 수학자들, 철학자들이 대거 참석하면서 미국 정보과학자들과 유럽 철학자들 사이의 유의미한 최초의 접촉이었다.

시몽동은 사이버네틱스 정보이론에서 데카르트나 뉴턴이 꿈꾸었던 보편학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사유 모델을 발견했다. 그는 통신매체로서 계산되고 제어되는 수학적 신호로서의 정보 개념이 갖는 한계를 비판하면서 정보의 역량을 존재론적 차원으로 확장시켰다. 그에게 정보는 물리-생물학적 차원에서 심리-사회적, 기술-문화적 차원에 이르는 실재의 전 영역에서 ‘개체화된 형태의 발생(개체화)’을 설명할 수 있는 탁월한 범주횡단적transcategorical 개념이었다.

그에 따르면, 개체의 발생은 질료와 형상이라는 미리 주어진 두 실체 사이의 결합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과포화용액이 결정 씨앗을 만나면 결정체를 석출하면서 상전이 하듯이, 퍼텐셜에너지로 가득 찬 준안정적인 실재가 포화 상태에 이른 내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점진적으로 변이하는 과정에서 개체는 발생한다. 서로 불일치한 왼쪽 망막 이미지와 오른쪽 망막 이미지가 어느 쪽도 아닌 새로운 차원에서 통합된 하나의 이미지를 산출하듯이, 개체화된 하나의 형태는 양립불가능하고 불일치하는 것들 사이에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관계 구조로서 발생한다. 시몽동은 이러한 개체화 작용을 ‘정보 작용’으로 본다. 정보는 미리 정해진 형태의 메시지로서 하나의 항에서 다른 항으로 전송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불일치하고 소통이 없던 두 항들을 제3의 차원에서 소통시키는 변환 작용transductive operation이다.

“정보는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계 안에서 일어나는 사물의 변화, 계에 형태변화를 산출하는 작용이다. 정보는 형태변형을 촉발하는 행위와 수용 작용을 벗어나서 정의될 수 없다.”[7] 송신자 중심의 일방적 전송이 아니라 수신자의 수용가능성에 기초한 ‘상호작용’을 강조하고, 정해진 형식적 패턴이 아닌 ‘구성되는 형태화in-formation’로 이해하면서 시몽동은 정보 개념의 의미를 공학적 차원에서 존재론적 생성의 차원으로 확장시켰다. 사이버네틱스가 계의 항상성과 안정적 형태 유지에서 정보의 가치를 보았다면, 시몽동은 준안정적인 계의 자기-차이화와 형태변화에서 정보의 존재론적 가치를 찾았다.[8]

시몽동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개체는 소통 불가능한 것들을 소통시키는 변환기 transducer로서 ‘정보매체’다. 인간 개체와 기술적 개체는 이질적인 것들을 소통시키는 관계적 존재자로서 외부 환경에 열려있는 비결정적이고 준안정적인 계라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시몽동은 인간과 기계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처럼 서로 다르면서도 앙상블을 이루며 공진화co-evolution한다고 본다. 인간은 이질적인 기계들을 서로 소통시키고 새로운 관계로 조직화하면서 기술적 존재자들의 형태 변환을 돕는다. 기계들 역시 분리되어 있는 서로 다른 인간들을 소통시키고 새로운 관계 조직을 형성할 수 있도록 변환적 매체 역할을 한다.

시몽동은 20세기 정보기술시대에 자동화된 기계들의 등장은 인간과 기계의 관계가 더 이상 사용자와 도구의 관계로 유지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고 이해했다. 그는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자동화된 기계들의 집단이 구축될 정도로 정보네트워크가 발전하면, 인간은 기계들의 관계를 돌보고 그들의 작업을 관리하면서 기계들과 상호협력적 관계를 맺는 ‘인간-기계 앙상블’의 새로운 형태로 사회가 변환할 것이라 전망했다.[9]

 

 

4. 인터넷과 AI가 등장하기도 전에 정보네트워크를 예견했던 시몽동과 달리, 디지털 ICT 혁명의 한 가운데서 인포스피어의 현실화를 목격하면서 ‘정보철학’의 영토를 만들어낸 것은 플로리디다. 플로리디는 디지털 컴퓨팅으로 정보를 사유한 튜링이야말로 코페르니쿠스(1차), 다윈(2차), 프로이트(3차) 이후 주목해야 할 ‘4차 혁명’의 뿌리라고 평가한다. 그는 디지털 정보혁명이 제기하는 여러 문제들에 답하기 위해 철학은 정보의 관점으로 ‘재부팅’되어야한다고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정보철학은 (a) 정보의 동역학, 정보의 활용, 정보의 과학들을 포함하여, 정보의 개념적 본질과 기본 원리들에 대한 비판적 탐구이고 (b) 철학적 문제들에 정보이론적 방법론과 계산적 방법론을 응용하고 정교화하는데 관심을 갖는 철학 분야이다.”[10]

플로리디는 정보철학의 방법론으로 컴퓨터과학에서 ‘추상화 수준의 방법the Method of Levels of Abstraction, 이하 LoA’을 가져와 칸트적 구성주의 전략을 취한다. LoA는 특정한 목적 아래 설정된 수준level에서 주어진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이다. 인식 대상은 ‘유한하지만 비어 있지 않은 관찰 가능한 항목들의 집합체’이기에 다양한 추상화 수준에서의 모델링을 허용하여 구성하면 ‘상대주의적이지 않고 다원주의적인’ 적절한 인식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중고 자동차는 다양한 정보들을 갖고 있지만, 우리는 상이한 추상화 수준에서 자기 목적에 부합하는 정보만을 파악하고 나머지는 추상화한다. 정비공이 기술적 수준에서 엔진과 부품들의 상태나 차체의 도색을 정보로 파악한다면, 보험업자는 경제적 수준에서 시장가치나 유지비용을 정보로 파악하는 식이다.

LoA를 정보적 수준으로 맞추어 세계를 구성하면, 모든 존재자들은 데이터의 양, 구조, 처리과정, 상호작용 등 정보적 특성으로 규정되는 ‘정보존재informational entity’로 파악된다. 인간과 비인간, 생명체와 기계, 자연물과 인공물 등 위계적 차별을 함축하던 기존의 존재론은 정보적 관점에서의 인식론적 재구성을 통해 존재론적으로 평등한 정보존재론으로 바뀐다. 플로리디는 모두가 동등한 정보존재자라는 전제로부터 ‘피동자 지향의 존재중심적 거시윤리학patient-oriented, ontocentirc macroethics’을 ‘정보윤리’로 도출한다. 인포스피어에 거주하는 모든 존재는 정보존재로서 동등한 존재론적 가치와 도덕적 가치를 갖는다.

기존의 윤리가 행위자 중심의 윤리로서 어떻게 행위해야 올바른 것인지에 주목했다면, ‘피동자 지향’ 윤리는 그 행위로 인하여 피동자가 어떤 영향을 받게 되는지를 중요하게 고려한다. 이는 어떻게 행위해야할지 규범적 사유를 자발적으로 할 수 없는 AI의 행위 결과에 대해서도 윤리적 책임을 부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다. 윤리적 고려 대상의 외연을 존재 그 자체로 최대화한 ‘존재중심’ 윤리 역시 인간이나 생명체만이 아니라 AI와 같은 기계들도 인포스피어에 거주하는 인포그들에 해당된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이러한 정보 윤리는 응용윤리의 일종이 아니다. 그것은 인터넷 공간에서 일어나는 해킹, 명예훼손, 지적재산권 침해, 표현의 자유와 같은 쟁점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하는 존재 전체를 위한 일반적 기초 윤리라는 점에서 ‘거시윤리학’이다.

피터 싱어Peter Singer가 ‘고통과 쾌락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기준으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한 것처럼, 플로리디는 인포스피어의 ‘복지well-being’를 기준으로 인포스피어에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것은 도덕적 해악이라고 본다. 이때 엔트로피는 정보 질서나 구조의 붕괴로 정보존재가 해체, 파괴, 오염, 타락하는 등 궁핍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정보존재가 도덕적 행위자와 피동자가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윤리적 역할이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이용가능한 정보의 양과 메타 정보가 넘쳐나는 인포스피어 안에서 정보 사용과 네트워크 구성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지는 여전히 인간의 책임이 크다. 플로리디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나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oeconomicus의 근대적 모델이 아니라, 세계를 창조적으로 제작하고 관리하는 ‘호모 포이에티쿠스homo poieticus’를 인포스피어 휴머니티의 모델로 제시한다. 인간은 인포스피어에 거주하는 다른 인포그들을 보호하고 번성시키면서 엔트로피의 증가를 막고 그들과 함께 인포스피어를 더욱 풍요로운 곳으로 만들어가야 할 책임과 의무를 갖는 윤리적 존재라는 것이다.[11]

그림3 플로리디 TED 강연

 

 

5. 인간중심적인 정보사회로부터 포스트휴먼적인 인포스피어로 존재론적ㆍ인식론적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AI의 등장 이후 가속화된 근대적 휴머니티의 위기를 해석하고 새로운 인포스피어 휴머니티의 모색에 기여할 수 있는 철학적 통찰이 요구된다. 시몽동의 정보존재론과 플로리디의 정보윤리는 인포스피어 안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협력적 공존을 지향하는 정보철학의 한 경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프랑스 기술철학자 스티글러B. Stiegler처럼 인포스피어에 내재하는 알고리듬 통치성의 부정적 측면과 인포그화된 인간의 지적 정신적 능력의 하락을 강조하면서 탈자동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비판적 정보철학도 있다.[12] 그에 따르면, 자동화된 디지털 정보환경은 ‘데이터’와 ‘계산’이라는 기술-논리적 도식이 정보를 이해하고 해석하며 선별하는데 요구되는 지성의 활동과 ‘시간적 지연’을 제거함으로써 기억과 지식을 기계들에게 위임한 사유 무능력자들을 양산한다.

지속적으로 기록되고 분석되고 모델링되고 예측되며 추천을 통해 특정 행위를 유도하는 ‘빅 데이터와 AI의 결합 시스템’이 우리 자신을 추천 알고리듬에 따라 자동으로 구성되는 프로필 주체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스티글러는 디지털 정보를 ‘파르마콘pharmakon(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는 독당근)’으로 규정하고, 현대 자동화 환경에서 강화된 디지털 정보의 이러한 ‘독성’을 다시 우리의 지성과 창조적 발명 능력을 회복할 수 있는 ‘치료약’으로 전환할 방법을 긴급하게 모색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정보철학은 ‘인포스피어’가 인지되면서 시작되었고 현재 다양한 논점들에서 생성 중에 있다. 정보 자체의 다차원적 복잡성 때문에, 정보에 관한 철학적 연구에는 철학만이 아니라 물리학, 생물학, 컴퓨터과학, 인공지능, 인지과학, 문학, 기호학, 인류학 등 정보와 관련된 여러 학문들과의 학제적 연구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정보공학과 정보과학이 사유하지 않는 정보 자체의 본질, 의미, 가치에 대한 메타적 고찰을 비롯하여, 정보의 관점에서 존재, 자연, 인간, 의식, 지능, 인지, 지식, 사회, 윤리 등 다양한 철학적 주제들을 재조명하려는 정보철학, 바로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철학’이다.

참고문헌

  1. Floridi, The Ethics of Information, Oxford, 2013, 6.
  2. Turing, On computable numbers, with an application to the Entscheidungsproblem, 1937.
  3. Shannon, Mathematical Theory of Communication, 1948.
  4. Wiener, Cybernetics or Control and Communication in the Animal and the Machine, 1948.
  5. F. Dretske, Knowledge and the Flow of Information, 1981.
  6. Simondon, L'Individuation à la lumière des notions de forme et d'information, 1958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 황수영 옮김, 그린비 2017),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1958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식에 대하여』, 김재희 옮김, 그린비 2011)
  7. Simondon, Communication et Information, Les Éd. de La Transparence. 2010, 159.
  8. 김재희, “시몽동의 정보철학: 사이버네틱스를 넘어서” , 『철학연구』, 제130집, 2020.
  9. 김재희, 『시몽동의 기술철학: 포스트휴먼 사회를 위한 청사진』, 아카넷, 2017.
  10. Floridi, The Philosophy of Information, Oxford, 2011, 14.
  11. 신상규, “자율기술과 플로리디의 정보윤리”, 『철학논집』, 제45집, 2016.
  12. Stiegler, Automatic Society, Volume 1: The Future of Work, Polity Press, 2016.
김재희
을지대학교 교양학부 교수